창릉천 징검(돌)다리

소박한 아름다움 간직한 옛 돌다리
기사입력 2011.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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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장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고양시에는 여러 유형의 다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은 징검다리인 돌다리를 찾아 답사 해보기로 했다.

돌다리란 작은 개울을 건너기 위하여 만든 돌로 된 다리를 말한다.

고양시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다리는 창릉천 돌다리로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풍스럽고 견고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우리 정서와 어울리는 듯하다.

 

 창릉천은 “삼각산 덕수리에서 발원한 더구천과 서오릉 창릉에서 발원한 물줄기, 명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합수되고, 그 천이 흐르고 흘러 덕수천과 합치면서 강매동 강고산 마을을 거쳐 행주산성을 휘감으며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일러 창릉천으로 부른다. 창릉천의 옛 이름은 덕수천 이었으나 후에 서오릉 안에 있는 조선왕조 제8대 예종의 능이 있는 곳에서 발원 하였다고 하여 창릉천으로 불리게 됐다.


징검(돌)다리는 살며시 처진 곡선 모양의26개 디딤돌이 서로 엇갈림 방식으로

  창릉천 돌다리는 약30m정도의 강폭에 26개의 돌로 놓아진 징검다리를 부르는 말이다.

이 징검다리는 직사각형의 화강암으로 석산에서 채석한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원형대로 잘보존되어 있다.

돌 겉면에는 군데군데 길게 파인 홈 구멍이 보인다.

이 흔적은 석산에서 채석을 위한 수단으로 작은 구멍을 내고 쇄기를 박은 것으로 보인다.


(1) 징검다리의 중간부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곡선을 주어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물 흐름까지 원활히 할 수 있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2) 돌다리는 직사각형의 원석을 이용 징검다리 형식으로 놓여있으며 상하로 엇갈리게 배열해서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하였다.


(3) 강바닥 유실 및 원형유지를 위해서 박석(25m)을 깔아놓았다.

 

   강의 폭에 비례하는 넓이(25m)정도의 박석을 깔아서 물의 흐름에 강바닥 변형의 예방과  폭우나 홍수에도 잘 보존되도록 시공하였다,

 돌다리 위와 아래 폭26m가량의 강 밑바닥에는 크고 작은 수백개의 박석을 깔아 놓아서 자연적인 물의 흐름을 유도하여 폭우에 대비했으며, 박석은 큰 강돌을 이용 틈과 틈새를 맞물림 형식으로 시공 유실을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돌다리를 기준으로 5m 정도는 수평을 유지 하도록 하고 돌다리 하단은 각도를 줄여주어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였으며 낙차를 줄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박석은 흔들림이 없게 맞물림의 쐐기를 박는 형식으로 시공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여 현재까지도 폭우나 홍수에 의한 별다른 영향이 없이 원형을 유지 할 수 있게 하였다.

 

(4) 돌다리 양쪽주변(4m)에 소나무 보(기둥이)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쪽에 무려20여개에서 많게는 30여개가 보이고 있다.

 이 기둥의 용도를 추정해보면 첫 번째로는 많은 사람의 이동을 위하여 목교를 설치할 때.

두 번째로는 많은 양의 화물 운송을 필요로 할 때. 목교를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 하나는 돌다리가 원형대로 보존 될 수 있도록 하천의 범람과 홍수에 대비 보강 보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돌다리 주변의 문화유적 돌아보기


 창릉천 돌다리 주변에는 이 다리의 용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들이 있다.

약2㎞ 지점에는 서오릉이. 창릉천 돌다리를 건너 1㎞ 정도를 가면 고양행궁 터로 추정되는 궁말(궁촌), 약4㎞ 떨어진 곳에는 서삼릉이 각각 위치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오릉과 서삼릉은 조선왕조 능역 42기중 북한의 2기를 제외한 남한의 40기의 능역중 8기의 능역이 있는 곳으로 동구릉 다음가는 조선왕족 족분으로 현재까지도 왕릉제례가 이어져 내려오는 유, 무형의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1) 첫 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오릉(약2㎞) 이 있으며, 세계유산 서삼릉이(약4㎞)내 에 있다.


(2) 두 번째로 조선시대 왕이 능행을 나와서 선왕의 능묘를 살펴보고 도착했음을 고하는 알릉례(謁陵禮)와 떠날 때 사릉례(謝陵禮)를 올린 뒤 잠시 쉬어가거나 유숙했다는 고양행궁이 바로 이곳 창릉천 돌다리에서 약1㎞ 전방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영조36년 (1760년) 1월부터 1910년 8월에 이르기까지의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일기인 일성록, 그리고 정조3년(1779년)부터 고종20(1883년)까지 105년간의 일기인 내각일력 등을 참고하면 이곳 고양행궁이 바로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를 비롯하여, 헌종, 순조, 철종, 고종 등의 왕들이 무려 40회에서 50회를 이용한 기록이 보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가 된다.


                           고양행궁 터로 전해져 내려오는 궁말

 그 터에 대하여 1755년 발간된 “고양군지”에서는 원당면 목희리(木稀里)로 표기되었으며 송현촌(솔개), 극촌(가시골), 궁촌(궁말)마을이 있다고 표기기 되어 있다.

이 지역은 1992년 고양시의 승격으로 원흥동이 된 이후 고양시 덕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50,000/1지도에는 궁촌이 정확히 표기되어있다.

  궁촌 즉 궁말은 원당에서 서오릉(서오릉)로 방면으로 가다가 창릉천 건너기전 오른편 우축에 있는 마을을 가리켜 부르는 곳으로 1991년 발간된『고양군지명유래집』에 다음과 같은 지명 유례가 전한다. “옛날 이곳에 궁(宮)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라고 한다.

 즉 쉰고개 우측 배나무 밭이 예전 궁이 있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기왓장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서오릉에 인사를 드리러 온 임금이 잠시 머물던 별궁이라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능모탱이 혹은 능머리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서오릉에서 바라다볼 때 이곳의 모양이 능의 머리맡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하고, 또 다른 지명은 원당리 효릉으로 통하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덕겸 기자 zkskd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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