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칼럼]일왕의 깊은 반성

기사입력 2015.08.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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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시다운동중앙회
칭찬합시다운동본부
회장 나 경 택
[선데이뉴스=나경택 칼럼]일왕의 항복 선언을 몇 시간 앞둔 1945년 8월 15일 오전 조선총독부 2인자 엔도 정부총감은 조선인 지도자 여운형을 만났다. 일제 패망 후 일본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치안 유지를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여운형이 내건 조건이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 사상범을 석방하라” 다음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복 입은 민족 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마중나온 시민들과 얼싸안고 한 몸이 돼 종로를 누볐다. 해방의 기쁨은 맨 먼저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왔다. 우리에겐 그만큼 한이 깊은 곳이다. 600년 전 조선 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무학 대사가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내려다보며 했다는 말이 있다. “명당은 명당이나 홀아비 3000명이 단식할 곳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세워졌다.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으로 불붙은 의병 운동을 탄압하려고 일제가 만든 최초의 근대식 형무소였다. 이강년, 허위, 이인영 같은 의병장 57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사이토 조선 총독을 정격한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 김구, 김동삼, 안창호, 한용운, 손병희, 양기탁, 이승훈 같은 민족 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105인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았던 김구는 이때 수갑 찬 자리에 생긴 흉터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민초들과 함께 하겠다며 호를 ‘백범’이라 지은 곳도 이곳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 유관순은 3·1 만세를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는 옥중에서 아침저녁 만세를 열창하다 죽도록 매를 맞았다. 모래 섞인 밥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 심한 고문까지 받다가 끝내 눈감았다.

히토야마 전 일본 총리가 옛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순국선열 추모비에 무릎 꿇었다. “이곳에 수용돼 고문 받고 목숨 잃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했다. 땡볕 아래 정장 차림에 검은 넥타이 맨 채 신발까지 벗고 무릎 꿇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정계 주류에서 물러난 ‘전직’ 이라지만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렇게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도쿄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여기서 과거를 돌아보고 앞서 대전(태평양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왕이 추도식에서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앞서 연단에 오른 아베 신조 총리가 역대 총리들과 달리 ‘일본이 아시아 국가에 큰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라는 반성을 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헌법상 아키히토 일왕은 ‘상징적 국가 원수’이지만 일본 국민의 존경을 받고 영향력도 크다.

해마다 추도식에서 ‘깊은 슬픔’이라고 표현했던 일왕이 올해는 ‘깊은 반성’이라고 강한 어휘를 쓴 것은 전날 ‘아베 담화’에서 교묘한 간접화법으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은 아베에 대한 일침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왕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지만 일본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국민들의 노력 덕분에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헌법을 재해석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달려가는 아베를 간접 비판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책임이 있는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일본 사회에서 확산되는 과거사 정당화 움직임에 몇 차례 우려를 표명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이번 발언이 일본의 양심을 대변한다고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처럼 퇴행적 역사 인식으로 잘못된 과거사를 정당화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아베 담화’에 아쉬움을 표시하면서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부는 일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 등은 합당한 해결을 요구하되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을 비롯한 경제 안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 협력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나경택 기자 cc_kyungte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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