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판자촌 출신 기업인의 선행

기사입력 2016.10.1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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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나경택 칼럼]미국 한 부자가 르누아르, 고흐, 마티스 등의 걸작 30점을 미술관에 기증하고 자기 집에는 똑같은 그림 복제품을 걸었다. 최근 미국 방송에 보도된 얘기다. 미국 세무법인 H&R 블록 공동 창업자인 헨리 블로흐. 그는 아내와 함께 수십년 그림을 사모아 거실, 침실, 식당에 걸어놓고 즐겼다. 그리곤 2013년 아내가 죽자 캔자스의 넬슨-앳킨스 미술관에 기증했다. 정작 기증하고 보니 허전함을 견딜 수 없었다.

블로호는 싼값으로 복제품을 만들고 이를 똑같은 액자에 넣어 걸었다. 그는 “기막히게 좋다”고 했다. 그는 전에도 미술관 확장비용 1200만 달러를 기부한 일이 있다. 기부는 아름답다. 그러나 남이 할 땐 박수 칠 수 있어도 내가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 씨는 지난 17년 동안 미술품 800여점을 미술관들에 기증했다. 그도 처음 기증할 땐 마음이 흔들리더라고 했다. 밤새 고심해 결정했지만 날이 밝자 슬그머니 생각이 달라졌다.

노후도 걱정됐다. 그림을 보내놓고 나중에 보니 아끼던 작품들은 빼놓고 있었다. 서울대 미술관은 신씨가 마지막 기증한 작품 64점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의 창고에는 아직 몇 점이 남아 있지만 이젠 별게 없다고 한다. 신씨는 “내가 갖고 싶은 걸 줘야 진짜 기증”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김밥 장사, 반찬 장사 하던 할머니들이 평생 모은 돈을 아낌없이 내놓을 때 뭉클함은 더하다.

‘조건 있는 기부’가 아름다울 때도 있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도서관은 특이하게도 지하에 있다. 아주 오래전 이 일대 땅을 옥수수 재배 시험장으로 기부한 사람이 한 가지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근처에 옥수수 재배 시험에 영향을 주는 어떤 건물도 세우지 말 것.” 건물로 인해 바람이 막히거나 그림자가 생기면 옥수수 생장 환경이 달라진다.

대학은 1950년대 도서관을 지으며 기증자의 뜻을 따랐다. 그가 내놓은 조건 덕에 일리노이 대학은 자랑스러운 도서관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옥수수 시험장을 함께 갖고 있다. 주식 219억원어치를 기부했다가 세금 225억원을 얻어맞은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의 사례는 들을 때마다 황당하고도 안타깝다. 기부 영웅을 학대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는 모은 재산을 모교에 기부해 장학 재단을 설립했으나 증여세를 추징받아 무려 8년째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만약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으면 황씨는 사는 집마저 빼앗기고 거리로 나앉을 신세가 된다. 기부자에게 훈장은 못 줄망정 이렇게 못살게 굴며 죄인 취급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황씨가 세금 폭탄을 맞은 것은 5% 이상 주식 기부 때 증여세를 매기는 낡은 상송증여세법 때문이다. 20년 전 이 조항을 만든 것은 재벌과 대기업 오너가 공익 재단을 활용해 변칙 경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기업에 대한 감사와 견제 장치가 겹겹이 만들어진 지금은 사실상 존재 이유를 상실했고, 황씨처럼 선의의 피해자만 내는 악법이 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물론 여야 정치권 모두 나 몰라라 수수방관하고 있다.

국세청은 세법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 탓을, 기재부는 법 개정에 반대하는 야당 탓을 대고 있다. 황씨 사례가 세상에 알려진 지 8년이 넘었는데도 기재부는 단 한 번도 법 개정안을 내거나 야당 설득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 입만 열면 규제 혁파를 외치는 박근혜 정부도 이런 황당한 규제엔 침묵만 지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 황씨는 알거지가 될 운명에 처했다. 대법원이 5년 가까이 판결을 미루는 동안 애초 140억원이던 세금은 가산세까지 붙어 225억원으로 불어났다. 패소 확정판결이 나면 황씨는 아파트와 얼마 안 되는 주식, 예금마저 빼앗기고 평생을 세금 체납자로 살아가야 한다. 판자촌 출신 기업인의 따뜻한 선행이 패가망신의 결말로 치닫고 있다.
[나경택 기자 cc_kyungte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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