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성완종 리스트’ 무죄 판결

기사입력 2016.11.2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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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나경택 칼럼]흔히 죽음 앞에서 사람은 정직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든 세상을 등지며 남긴 말이나 글에는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무게가 실린다. 모든 걸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쓴 유서나 유언엔 차가운 진실이 담겨 있다고 여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그렇다.

목숨까지 던질 땐 적어도 일말의 진실은 남겼을 거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런데 그게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재판부가 증거로 인정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2011년 미국의 흑인 사형수 트로이 데이비스는 사형 집행용 약물이 몸속에 주입되지 직전까지 “나는 결백하다”고 외쳤다. 그는 경찰관을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경찰은 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증인을 내세웠다.

그런데 일부 증인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다”며 증언을 뒤집었다. 주정부는 사형 집행을 연기했고 연방대법원은 무죄를 증명할 재판 기회를 따로 줬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판결을 뒤집을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다. 사형은 결국 집행됐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2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핵심 쟁점은 이 전 총리에게 불법 정치 자금 3000만원을 줬다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생전 인터뷰와 메모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해외 자원 개발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던 성 전 회장이 작년 4월 자살 직전 남긴 것들이다. 그의 유언이자 유서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증거를 놓고도 두 재판부 판단은 완전히 달랐다. 1심은 인터뷰와 메모가 진실하다고 믿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심은 “성 전 회장이 수사의 배후에 이 전 총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강한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가졌을 수 있다”며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허위로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성 전 회장은 인터뷰에서 이 전 총리를 “사장 대상 1호”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어느 재판부 판단이 맞는 것일까.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형사재판의 한계를 떠올린다. 실체적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유서만 남은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다. 몇 년 전 어느 고위 법관은 유죄를 선고하면서 피고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항소해보기 바랍니다.” 재판의 한계를 절감한 말이었다. 성 전 회장이 지난해 4월 자살하기 직전 기자와 나눈 통화 녹취록에서 3000만원을 전달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자살 당시 자원외교 비리 수사를 받던 성 전 회장은 자신을 이런 처지로 몰아간 배후가 이 전 총리라고 판단해 이 전 총리에 대해 배신과 분노의 감정을 갖고 허위진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의 뇌물죄나 불법 정치자금 수수죄의 경우 돈을 주고 받은 사람의 감정이 틀어진 상태에서 비리 제보나 증언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판부는 금품 증여시점을 ‘지난번 재·보궐선거 때’로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한 점도 지적했으나 2년 정도 지난 시점에 정확하게 날짜를 특정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엄격한 증거채택 기준이 필요하다 해도 당사자 간에 은밀히 금품이 오고가는 범죄의 특성을 재판부가 무시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성완종 리스트’가 처음 공개됐을 때 이 전 총리가 다그치듯 ‘성 회장이 죽기 전에 어떤 말을 했느냐’는 전화를 수차례 걸어왔다는 복수의 증언 역시 유죄의 증거가 되지는 못했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금품전달 장면이 담긴 동영상 등 직접 증거가 없는 경우 유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죄 선고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지 결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는 2심이 남긴 의문점들이 해소되길 기대한다.
[나경택 기자 cc_kyungte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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