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1994년의 북녘 땅은 ‘슬픈 바다’! ‘악몽의 땅’!

기사입력 2018.08.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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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8일자 로동신문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993년 12월에 행해진 제3차 7개년 경제 계획의 총결산을 통해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한 북한의 김일성은 ‘경제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이팝과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은 채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직접 현장에 나가 ‘일꾼’들을 다그쳤습니다. 김일성은 기근(饑饉)에 대한 공포 때문에 1994년 상반기에만 50여 차례의 현장지도에 나섰습니다.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는 옛말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그는 ‘죽어 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습니다.

 

-“1994년 7월 7일 : 아침부터 분주히 돌아갔다. 어제 경제부문 책임일꾼협의회에서 교시하신 집행 대책안을 빨리 만들기 위하여 정무원과 위원회, 각 부들과 연계를 가지고 제기된 자료들을 종합하였다. 오후 4시 9분쯤 수령님께서 전화로 제시된 과업의 진척사항을 물으셨고, 정무원 사무국과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구체적인 분공안을 만들고 있다고 보고했다...비바람 치던 8일 새벽 2시,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심장이 더는 과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동을 멈추었다. 가슴을 치며 수령님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문득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계시는 것을 알고 몸매무시를 바로 하고 섰다.”- 윗글은 북한 로동당출판사가 펴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중에서 “아, 수령님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입니다.

 

7월 8일! “음악 명상을 즐겼고, ‘산삼꽃’에서 나는 산삼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보양하고, 각종 한약재가 들어있는 베개를 베고 자면서 장수를 꽤했다”는 김일성의 죽음! 그의 ‘영결식’은 이틀 연기되었는데, 이유는 끝없는 조문행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영결하는 의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에 가슴 치며 목메어 흐느끼는 수백만 평양시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눈물의 바래움을 받으며”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날 열린 추모대회도 ‘슬픔의 바다’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북녘 땅과 북한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바다’ 속에 ‘빠졌다’는 말이데...겉으로 보면 1994년의 북한 잔혹사는 ‘위대한 수령’의 죽음인데...그것은 아닌 것 같고...그러면 이 장막(帳幕)의 땅의 1994년 잔혹사는?

 

1994년! 1994년은 한반도 폭염의 역사의 획을 그은 해였습니다. 그해 폭염일수는 22.8일에 달해 1900년 이래 폭염일수 1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대구의 7월 월평균 기온이 30도(30.2도)를 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경기도 양평은 그해 7월 11일부터 31일까지 21일 연속 폭염경보가 발령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4년은 7월 초에 장마가 끝나면서 우리 국민들은 극심한 가뭄과 함께 더욱 힘든 무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1990년대 중반 2년 동안 계속된 대홍수와 다음 해의 극심한 가뭄으로 북한의 농업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비효율적 농업정책, 경제성장 저하 등으로 1997년에 이르러 북한의 식량부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풀이나 나무껍질을 먹고 있다고 구호단체들은 전했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1994년의 가뭄은 ‘대폭염의 악몽’이었습니다. 북한 잔혹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말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살인더위는 김일성의 ‘슬픈 바다’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김일성은 죽기 바로 직전에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폭염(暴炎)과 왕(王)가뭄, 그리고 기아(飢餓)에 죽어간 백성들을 위해 왕(王)의 도리를 다했을까요? 과거 조선시대 정조 18년(서기 1794년)에는 폭염이 극심해 공역(供役)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더위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정조는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공역을 감독하고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며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주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주는’ 약을 새롭게 처방해 무려 4000정을 조제한 뒤 화성지역 공역소에 하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약이 바로 더위를 먹었을 때 복용한다는 ‘척서단(滌暑丹)’ 입니다.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6월 28일 4번째 기사. 사진자료 중앙일보..jpg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6월 28일 4번째 기사. 사진자료 중앙일보.

 

성종 15년(서기 1484년) 성종은 혹서로 고통 받는 죄수들이 많아지자 강력범죄자를 제외한 수감자들에 대한 석방을 명했다고 합니다. 성종은 “이처럼 호된 더위에 가벼운 범죄로 갇혀 여러 날 동안 형문을 받다 억울하게 그 목숨을 잃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며 보방(保放)토록 했다고 합니다. 살인더위로 인해 경범죄를 저지른 죄인에 한해 일종의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입니다. 지금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은 1907년 10월 1일 서울에 대한제국 농상공부 산하 관측소 설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기온 측정이 시작된 지 올해로 111년째입니다. 2018년! 현재 남한의 폭염지수(暴炎指數)는 계속 갱신되고 있습니다. 8월 5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날까지 공식 관측소가 있는 전국 95곳 중에서 60%에 해당하는 57곳이 올해 역대 최고기온을 새로 썼습니다. 강원도 홍천은 8월 1일 수은주가 41.0도까지 올라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습니다. 현 정부는 이에 대해 지금 무슨 대책을 하고 있을까요? 허기야 8월 6일이 입추(立秋)입니다. 가을 오길 그냥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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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일자 로동신문

 

2018년! 북한도 폭염 대책에 비상이 걸렸고, 가뭄 걱정까지 겹쳤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은 8월 2일자 1면에 ‘온 나라가 떨쳐나 고온과 가물(남한:가뭄) 피해를 막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자’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사설은 “이번 고온 현상은 예년에 볼 수 없던 최대의 자연재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일부 지역의 기온이 40도를 넘겼다고 전했으며, <조선중앙TV>는 8월 1일 평양의 기온이 37.8도라고 전하며 “기상 관측 아래 당일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다가 북녘땅에 '고난의 행군(1996~2000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악몽(惡夢)의 땅이 아니 되기를 빌어봅니다! 끝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소설가 이무영(李無影/1908년~1960년)의 <기우제(祈雨祭)>를 소개합니다. -“불만 그어대면 땅덩이 전체가 그대로 불바다가 될 형편이다. 식물 뿐 아니라 인간이고 짐승이고 시들대로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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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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