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우리의 땅이었던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어제와 오늘

기사입력 2018.09.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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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전도(全圖)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최근 한 역사학회는 '대마도(對馬島)에 살아있는 환단고기의 숨결'이라는 주제로 역사 강좌를 개최했는데, 주제는 '임나는 대마도·쓰시마의 유래와 자연환경·대마도를 삼한이라고 기록한 이유'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일본 대마도가 한반도의 ‘부속섬’이었다는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했다는 한국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책입니다. ‘임나(任那)’는 일본 기록에서는 낙동강 유역의 여러 가야국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나오고, 명칭은 광개토왕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한 고지도(古地圖) 박물관 관장은 “과거 우리나라는 대마도를 점령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대마도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국 대마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대마도를 포기하게 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대마도는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 빼앗겨버리면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 목소리를 높여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은 우리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 우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백과사전은 “쓰시마섬. 대한해협의 중간쯤에 위치한 일본의 섬으로 '대마도'라고도 부름. 섬의 인구는 약 34,000명 내외이며, 거리상으로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이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에 침입했다. 이에 1419년 6월 세종은 이종무에게 군사를 내어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이종무는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으로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진격했다. 이 정벌을 통해 왜구의 배 127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왜구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고 한 달여 만에 철수했다. 쓰시마섬에 대한 정벌 혹은 토벌은 고려시대 창왕 때와 조선시대 태조 때에도 행해진 바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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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TSUSHIMA DAE-A HOTEL (필자)

 

마산포(馬山浦)! 마산은 필자가 근무했던 경남대학교가 있는 고장입니다. ‘가고파’의 고향으로, 무학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합포만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필자의 보금자리는 그 해안과 접해 있었는데, 마산항을 오가다 보면 ‘대마도 행 여객선’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필자는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도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 삼청동에 있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부산 경남을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친우와 제자들이 대마도 얘기를 가끔 꺼냈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볼만한 섬’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 살인더위를 겪으면서 문득 그 섬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대마도(TSUSHIMA)의 역사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조정은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였습니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在文籍昭然可考-대마도 예어 경상도지계림 본시아국지지재재문적소연가고)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마도를 불법으로 병합한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후 1909년 청나라와 소위 간도협약을 맺었는데, 일본이 만주 땅을 중국에 할애하는 대신 만주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얻어내는 협약입니다. 그런데 대마도는 오키 섬보다 부산과 거리가 가까우며, 조선 때까지 우리의 영토였는데 언젠가부터 일본인들이 무단점거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첫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1948년 8월 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발칵 뒤집히며 반발했고, 이에 대해 일본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맥아더는 이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 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습니다. 일본이 대한민국의 독도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인데, 독도 수호(守護)는 물론, 대마도 반환요구'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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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마도-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

 

대마도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으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714㎢에 이릅니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습니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습니다. 대마도는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서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서 물물 교환하여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대마도 가는 뱃길은 멀지 않았습니다. 260년간 조선과 일본, 두 나라 교류에 가교역할을 했던 곳, 조선통신사가 떠오르는 곳, 그곳의 이즈하라항(嚴原港)에 도착하면, 조선통신사 교역 200주년 기념벽화를 보게 되고,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조선통신사의 비(碑)와 덕혜옹주 결혼 경축 기념비도 만나게 되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이어주는 만관교(萬關橋)가 있는 미쓰시마를 거쳐 가미쓰시마와 히타카츠...마우다 해수욕장,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 슈시의 단풍길, 한국전망대도 보게 됩니다.

 

기후가 부산과 유사한 대마도는 절경(絶景)도 비경(秘境)도 없는 섬이지만 우리나라 서민들의 휴양 장소로는 제격입니다. 부산과 지척(咫尺)이고, 낚시와 등산하기가 좋은 곳입니다. 여객선 운행의 수준을 높이고 사계(四季)의 아름다움을 알린다면 많이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일본인들이 발을 들여놓을 자리 하나 없게 만든다면? 필자는 오는 시월부터 새로 재촬영하는 사이버강좌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에서 일본 대마도를 강의할 것입니다. 이 과목을 수강하는 경남대, 경기대 등의 학생들에게도 적극 홍보할 것입니다. 우리의 땅이었던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실질적인 우리 땅처럼 만들 수도 있겠단 망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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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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