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월남과 월남전(越南戰) 영웅, 오늘의 베트남 축구 영웅

기사입력 2018.12.1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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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베트남 하노이-2018.12.6.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는 베트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수도 : 하노이(Ha Noi, 인구 약 722만 명) ★면적 : 330,341㎢(한반도의 1.5배) ★인구 : 9,554만 명(2017, UN) ★민족구성 : 비엣족(86%)외 53개 소수민족. ★시차 : 우리시간 - 2시간. ★언어 : 베트남어(공용어). ★정부형태 : 사회주의 공화제(공산당이 유일정당) ★의회구성 : 임기 5년 단원제(의석수 500석) ★국가 지도자 (집단지도체제) 당서기장 겸 국가주석 : 응우옌 푸 쫑(Nguyen Phu Trong) ★우리나라와의 관계- 수교 ; 55.10. 월남공화국 승인./ 56.05. 외교관계 수립. / 75.04. 대사관 철수(월남 패망 직전) / 92.12. 외교관계 수립.

 

위의 자료를 보면 한 나라의 외교부가 다른 나라 명칭을 2개(월남/베트남)로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월남’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월남전쟁’, ‘파월장병위문단’...월남전쟁(越南戰爭)!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벌인 전쟁.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군 및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군과 싸워 이겨 1969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미군 철수 후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짐으로써 남북이 통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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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쟁-1966년 故 박정희 대통령 주월한국군 시찰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진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65년 2월 비둘기부대 2,000여 명, 이어 10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를 파병했고, 그 외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가 파병되었습니다. 1966년 미국의 추가파병 요청으로 4월 혜산진부대가, 8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습니다.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으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였습니다. 1968년 5월부터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1971년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습니다.

 

전국대학생파월장병위문단! 대한민국 정부는 전국대학생파월장병위문단을 결성! 위문단은 1966년 7월 1일 船便(선편)으로 仁川港(인천항)을 출발했습니다. 전국 33개 대학에서 선발된 95명의 이들 위문단은 1개월 동안 월남전선에서 베트콩 섬멸작전에 분투하는 비둘기·청룡·맹호부대 등을 방문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위문하는 한편 각 대학에서 마련한 위문품을 전달했습니다. 위문단은 월남 문교상(文敎相)을 예방하고 ‘사이공’대학 등을 방문하여 월남대학생과 친선도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귀국 길에 타이완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그때 필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함께 했습니다.

 

1965년 주월한국군 사령부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소장이 취임했는데, 1966년 필자는 퀴논 맹호부대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필자는 매년 현충일에 그의 묘지를 찾습니다. 그는 월남전쟁의 진정한 증인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전 파병 결정, 하지만 채 장군은 개인적으로는 월남전 참전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하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가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6.25 전쟁에서의 경험을 활용하여 정립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이용해 '두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2013년 11월 25일 사망한 월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은 생전의 유언대로 국립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아닌 파월장병 제2묘역에 일반 병사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1990년대의 베트남의 모습!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1966년의 초라한 모습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현장이었습니다. 학술회의에 참석한 베트남 교수들은 20년 뒤에는 자국(自國)이 크게 발전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세계는 베트남이 괄목한 성장을 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베트남에 때 아닌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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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6일 서울 현충원 채명신 장군 묘지에서 필자.

 

2018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생큐, 박항세오" 수백만 명이 뛰쳐나왔다]를 발췌 인용합니다. “생큐, 박항세오(감사합니다, 박항서 감독님).” 2018년 12월 6일 밤 베트남 전역은 ‘박항서 매직’으로 들썩였습니다. 이날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베트남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열린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에서 필리핀을 2-1로 꺾고 10년 만에 결승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 2차전 합계 4-2로 2008년(첫 우승) 이후 다시 결승 티켓을 차지해 말레이시아와 우승을 다투게 됐습니다.

 

12월 7일 <베트남 익스프레스>는 “총리와 시민 모두 열광했다”며 “베트남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어나와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금성홍기(베트남 국기)와 태극기가 뒤섞인 감격스러운 밤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박 감독이 제압한 필리핀은 과거 잉글랜드 대표팀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시티 등의 사령탑을 지낸 명장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이끄는 팀입니다...올해 베트남에서 박 감독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따뜻한 ‘아버지(파파) 리더십’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박 감독이 가장 잘하는 것은 ‘명확하게 역할’을 정해주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박항서 감독! 현재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대한민국의 축구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트남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왜? 열정적이기도 하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언론들은 12월 8일(한국시간) "박항서 감독이 선수에게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양보했다"고 전했습니다.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12월 11일 말레이시아에서 스즈키컵 결승 1차전 원정 경기를 치르기 위해 12월 7일 비행기로 격전지 말레이시아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박 감독은 이륙 후 비즈니스석에서 나왔습니다. 필리핀과 준결승 1차전에서 허리를 다친 선수에게 좌석을 양보하고, 이코노미석에 앉았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파월장병 제2묘역과 박항서 감독의 이코노미석은 격은 다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12월 11일 베트남은 '스즈키 컵' 결승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와 2 : 2 무승부(無勝負)! 결승 2차전은 12월 15일(토) 베트남에서 열립니다. 박항서 감독을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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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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