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슈바이처! 이돈영 박사

기사입력 2018.12.2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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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의료인 이돈영 박사

 

[선데이뉴스신문=이계춘 기자] 필자는 그동안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각계각층 다양한 분야의 명인들을 취재해 왔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그 가운데 가장 연세가 지극하신 대한민국의 원로 의료인 이 돈영 박사(90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식사동 위시티 자택을 찾았다. 우리나라 굴지의 아산병원의 효시인 울산 해성병원의 초대원장 이 돈영 박사님 댁을 들어서니 마침 클래식 음악을 듣고 계셨다.

 

무척 인자하시고 차분한 이미지의 박사님은 첫 마디로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취재를 왔느냐고 그냥 차나 한잔 들고 놀다 가시라고 극구 취재를 사양하신다. “어르신 아니 박사님! 취재가 아니고 오늘까지 살아오신 옛날이야기나 들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의학계의 큰 발자취를 걸어온 대단한 집안의 유일하고 역사적인 분으로 알려져 있고 해서 그 역사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저희 후배들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찾아 왔으니 부디 마음 문 여시고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간청을 하자 마침내 못 이긴 듯이 서재로 들어가시더니 색이바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오시며 바로 이 분이 제 선친인데 조선왕조 마지막 왕실 주치의 이민상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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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마지막 왕실 주치의 이민상 박사

 

제 아버님은 종로구 수성동 73번지에서 태어나 일본 총독부 산하 의사 양성소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는데 이 총독부 의사 양성소가 훗날 우리나라 최고의 의학대학 서울대학교 의학대학의 전신이라는 역사적 말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후로 이민상 박사는 서울 종로구 당주동 1번지에 광화의원을 개원 서울에 몇 없는 의료기관으로 서울 뿐 아니라 전국적인 의료기관으로 우리나라 양 의학 병원으로 국민 건강의료분야에 큰 명성을 떨치게 된다.

 

바로 이박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이 돈영은 선친 이민상박사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생활이 어려워져서 지금의 선린상고의 전신 선린 중학에 입학 가정을 도우며 학업에 열중하여 선린 상고의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고 1등을 거듭하며 본인의 취향대로 음악공부도 게으르지 않았고, 음악대학으로 진학할까? 선친의 뜻대로 의대로 갈까? 고민 하다 경성 의대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대에 당당하게 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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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선린상고에서 서울대 합격은 유일한 쾌거를 이룬다. 서울대의대 6기생 인 이 돈영의 입학 동기생은 120명이였는데 지금 생존해 있는 동기생중 동아제약 설립자이신 강 신호회장을 비롯 30여분 정도라며 동기생 명단을 안타깝게 보여주는 이돈영박사님은 인생무상을 말하며 해마다 숫자가 줄어들어 날이 갈수록 그 시절 동기들이 그립다고 말씀 하시며, 뜻밖에도 현대그룹을 창립하신 정주영회장과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정 주영회장은 살아생전 언제나 건강관리를 의논하고 아산병원의 전신인 울산 해성병원 초대원장으로 임명하고 그 후로 전국 각지의 현대아산병원과 정읍 아산병원 등 현대그룹 모든 병원들의 개원 산파역할을 하며 정 주영회장님이 울산에 오시면 매부 되시는 김 영주회장과 이 돈영박사는 바늘과 실처럼 같이 다니며 골프장으로 조선소로 자동차공장으로 화학 정유공장으로 함께 다니며 현대그룹의 미래설계로 밤 새는지 몰랐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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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성혜 병원 원장으로 23여년 근무 은퇴.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큰 공을 세우고 호국영웅 기장을 수훈했다.

 

한 평생 의사로 살아오시며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요? 나에게 환자는 어느 누구 할분 없이 다 특별했지요. 하지만 구지 말씀 드리자면 어느 날 말기 위암환자로 찾아 온 김 혜정이라는 서른 두 살의 젊은 애 엄마였지요. 갓 돌 지난 쌍둥이 엄마의 위암 진단을 하며, 도저히 위암이라는 말을 해 줄 수 없어 두 시간 여 동안을 위암입니다. 위암입니다. 차마 그 슬픈 말을 해줄 수 없어 말해주는 연습을 수없이 하여 마침내 위암이라고 말하며 의사나 환자 간호사까지 모두가 울어 버렸지만 이 돈영박사는 혜정씨 손을 붙잡고 너무 절망하지마세요 위암이라고 다 죽는 건 아니에요 우선 본인의 의지가 강해야 해요.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분명하게 살 수 있다 늘 마음속으로 외쳐요!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강하고 담대해져야 해요
나도 전 세계 신 의학 기술 다 동원해서라도 혜정 씨 살려 낼 테니까 염려마세요. 같이 기도합시다.  그 당시 광림교회 장로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던 이 박사는 날마다 밤마다 새벽기도까지 하며 오! 하나님 김 혜정을 살려주세요. 하면서 정성을 다해 집중 치료를 했는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정말 기적같이 완치가 되어  벌써 30여년이 지나 얼마 전에는 그 쌍둥이 결혼식을 다녀왔다며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며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살려낸 환자가 가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며 의사는 생명연장 그 보람 하나로 살아간다며 본인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아쉽지만 큰딸의 남편인 사위를 중앙대 의학박사로 두고 있고 둘째사위도 종합병원 박사로 재직 중이어서 큰 위안이 되고 있다 한다.

 

요즈음의 취미나 소일거리와 좋아하는 음식을 묻자, 이제 나이가 들어 심한 운동은 못하고 집안에서 골프 퍼팅정도이고,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다고 말하며 틈만 나면 하모니카 연주에 트럼펫 연주, 색소폰연주와 클래식 음악 감상을 하며 일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박사님 손수 하모니카 연주를 해 주신다. 실제로 집안 거실 가득 놀랄 정도로 음악테이프와 전통 클래식CD와 음향시스템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그러시다 3년여 전 세상을 떠나신 부인 오 혜선여사가 그리운지 눈시울을 적시며 아내의 사진을 어루만진다. 이 돈영 박사님께서 90인생을 살아오시며 생활신조로 삼아오신 내용은요? 하고 묻자 허허허 웃으시며

 

*사람을 사랑하자! 생명을 존중하자!
*언제나 나 자신 앞에 떳떳 하자!
*결코 남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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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영 박사가 한국을 빛낸 사회발전대상 시상식에서 사회공헌대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착하게 살아 오셨다는 이돈영 박사는 90의 한 평생을 우리국민들의 생명과 보건의료에 정진해 오시며, 틈만 나면 낙후된 오지의 의료봉사와 동남아 아프리카 등 후진국 의료봉사와 사회봉사를 셀 수도 없이 해 오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슈바이처요 히포크라테스로 멋진 인생 살아오신 자랑스러운 이 돈영박사님께  2018 올해의 사회공헌 대상을 드리고자 기쁨으로 선정합니다.

 

*선린상업고등학교졸업
*서울대 의대 6기 졸업
*조선대학교 의대교수
*울산해성병원개원
*정읍아산병원 개원
*광명 성혜 병원 원장으로 23여년 근무 은퇴.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큰 공을 세우고 호국영웅 기장을 수훈하셨다.

[이계춘 기자 lkc79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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