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고구려 왕성터 안학궁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기사입력 2018.12.2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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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J.W.괴테(Goethe/1749-1832)는 <동서시론>에서 “삼천년의 역사에서 / 배울 것을 모르는 자는 / 아는 것도 없이, 암흑 속에 있어라 / 그날 그날 산다 해도.”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역사의식은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사회 현상을 시간적 계기에서 포착하여, 그 추이에 주체적으로 관련 지어 나가려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바로 ‘역사의식(歷史意識)’입니다. 하지만 이 낱말을 설명하라고 하면 망설이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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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특별시 대성구역 안학동 안학궁성터(안학궁지) 전경

 

현대 사회는 “모든 역사는 거짓말”이라고 한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의 말처럼 ‘왜곡된 역사’로 가득합니다. 특히 우리의 주변 국가들은 특별히 거론치 않더라고 엄청나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자국(自國)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우겨대고, 거짓 역사를 명문화 합니다. 이런 작태를 보고도 말 한 마디 못한다면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반만년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한반도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을 가로 막고 있는 장벽(障壁)이 문제입니다. 2006년 4월, 한반도 역사 연구에서 남과 북이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안학궁터 남북 공동발굴사업’입니다. 그 당시 남한의 서울특별시는 ‘평양 안학궁터 남북 공동발굴사업’을 고구려연구재단과 공동 추진했습니다. 이 사업은 양쪽 전문가들이 안학궁터에 대해 공동발굴조사를 하는 사업으로, 남측에서는 고구려 관련 전문가 등 19명, 북측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소속 교수 등 15명이 참여했습니다.

 

남측은 4월 8일부터 19일까지 북측과 공동으로 평양 안학궁터를 조사한 결과 이곳이 고구려 시대에 초축(初築.처음 축조)된 왕성임을 확인했고, 성벽에 대한 시굴을 실시한 결과 성벽 구조가 다른 고구려시대 성곽들인 평양 대성산성이나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사각추 모양 석재를 이용한 ’들여쌓기’ 방식을 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조사는 고구려 장수왕 때인 서기 427년 평양 천도와 함께 그 궁성으로 활용된 곳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안학궁터에 대한 남북 최초의 공동조사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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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특별시 대성구역 안학동 안학궁성터(안학궁지) 실측도

 

당시 발굴사업 관계자는 “과거에 안학궁터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자료와 유물들을 직접 검토한 결과 5세기 이후 고구려 유물임이 분명한 연화문와당과 적갈색 승문(繩文.새끼줄 무늬) 암키와, 회청색 승문 암키와 등이 포함됐음을 확인했다”고 하고, 이로 볼 때 “안학궁이 고려시대에 처음 축조됐다는 논란은 잠재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6)>의 ‘안학궁’에 대한 설명입니다.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있던 고구려왕궁. 안학궁은 427년 즙안의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에 옮긴 때로부터 586년 평양성에 다시 수도를 옮길 때까지의 고구려 왕궁이였는데 그후 페허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안학궁터를 발굴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으며 복원된 안학궁 모형사판을 보아주시고 안학궁복구사업을 원상대로 진행할 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안학궁모형사판과 안학궁건설도면을 보아 주시고 안학궁복구에서 제기되는 방향과 방도에 대하여 밝혀 주시고 해당한 조치를 취해 주시였다...안학궁의 매개 궁전들은 회랑으로 서로 련결되였다. 회랑의 정면너비는 남궁, 중궁, 북궁으로 들어가면서 차츰 좁아 졌다. 안학궁에는 크고작은 다양한 정원들이 꾸려 졌으며 그 가운데서 궁성안 동쪽 낮은 지대 남쪽에 자리 잡은 정원이 제일 크고 화려하였다. 안학궁의 집자리에서 2,590개의 기둥자리를 찾아 내였다. 여기에는 많은 주추돌과 주추자리들이 남아 있다. 주추돌들은 깨바위들을 둥글거나 네모나게 다듬어 만든 것이다. 안학궁터에서는 암기와 수기와, 마루기와 등이 알려졌다.,,”(529~5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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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특별시 대성구역 안학동 안학궁성터(안학궁지) 조감도

 

중국 측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2004년 3월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2006년 4월 8일고구려 왕성터 평양 안학궁지 공동발굴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고구려연구재단은 불과 석 달 여 만인 2006년 8월 20일 교육인적자원부 지휘 아래 출범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이래서 안악궁지 같은 어제의 역사는 잊혀져 갔습니다. 오늘의 역사! 2018년의 고구려연구재단! 2018년 3월 1일, 서대문구 독립공원내 서대문형무소 출구, 3.1절 행사를 마친 시민들이 군악대 뒤로 줄지어 모여 있었습니다...문 대통령 행렬이 형무소 건물을 지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문 대통령을 향해 피맺힌 호소 외침이 터져나왔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매국지도 웬 말이냐!”, “동북아역사재단 김도형 이사장을 해임해 주십시오!”

 

우리의 ‘역사의식(歷史意識)’는? 상당수의 한국인이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주무부처인 문화관광체육부는 수장부터가 역사의식이 없다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술년(戊戌年)을 되돌아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장관이 남북정상회담에 빠져 한반도 전부를 보지 못한 것 같고, 우리나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열광(?)하는 듯 했고...안학궁터 발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國寶)’ : 제1호 평양성, 제2호 안학궁성터(안학궁지), 제3호 보통문, 제4호 대동문, 제5호 숭인전, 제6호 숭령전, 제7호 묘향산 보현사 구층탑, 제8호 대성산성, 제9호 청암리성, 제10호 대성산성 남문, 제11호 대성산 연못떼, 제12호 대성산 고구려 무덤떼, 제13호 영명사 법운암, 제14호 용곡서원, 제15호 용산리 고구려 무덤떼, 제16호 연광정, 제17호 부벽루, 제18호 칠성문, 제19호 을밀대, 제20호 청류정, 제21호 최승대, 제22호 전금문, 제23호 평양종, 제24호 홍복사 육각칠층탑, 제25호 금강사터, 제26호 호남리 사신무덤, 제27호 상원 검은모루유적.

 

북한의 국보가 북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 한반도 역사, 한민족 역사의 국보입니다. 이제 남·북이 다시 안학궁터 발굴 공동조사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기대해 봅니다. 괴테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고,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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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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