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

기사입력 2019.02.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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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인들의 모습-사진제공 정은상교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오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신한촌(新韓村)’의 태생적인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앞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소개한 경남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정은상교수(현재 언론출판원장)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유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이수한 학자입니다. 러시아 지역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서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를 들어보았습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혁명광장에서 서북쪽으로 ‘오케안스키 대로’를 따라 약 1km를 가다보면 우측에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약 500m를 더 직진하다보면 좌측으로 ‘콤소몰스카야’ 거리가 나오고, 그 끝에는 ‘이만거리’와 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만거리’와 ‘적기대로’가 만나는 지점에 ‘이그나트’라고 하는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백화점은 2002년 8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공식방문 중에 쇼핑을 하고 방명록에 서명을 남긴 상업센터로써 유명해진 곳입니다.


이 백화점 뒤편부터 시작되는 조그마한 언덕으로 구성된 구역에 ‘서울거리’, ‘아무르스카야’, ‘하바롭스카야’, ‘톰스카야’, ‘소유즈나야거리’가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항일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 일명 ‘신한촌’입니다. ‘서울거리’는 과거 ‘신한촌’의 흔적을 증명해 주는 행정명칭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서울거리’에는 유일한 가옥이 한 채 남아있고, 이 가옥에는 현재 두 가족이 각각 입주해 살고 있습니다. ‘신한촌’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은 ‘구한촌(舊韓村)’ 혹은 원한촌(元韓村)이 있었다는 논리의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지만,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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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블라디보스토크시 건설 초기의 모습-사진제공 정은상교수.

 

러시아 자료 중 마트베예프의 <블라디보스토크시 소사>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조선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노령 땅으로 불법적으로 두만강을 건너서 연해변강으로 흘러들어간 조선인 유민들이 북으로 삶의 터전을 이어나가다가 블라디보스토크시 건설 작업장에서 잡역부나, 부두 노동자로서 정착해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거주하는 곳마다 대부분 조선에서처럼 집안에 돼지우리를 만들어 가축과 함께 살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매우 비위생적으로 보였고, 전염병의 발병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위원회에서는 조선인들을 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시켜서 집단거주 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한촌(元韓村)’이나 ‘구한촌(舊韓村)’의 존재는 굳이 표현하자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던 한인들을 말함입니다.

 

조선인들을 어디로 격리시킬 것인가를 궁리하던 끝에 러시아인들은 공동묘지보다 더 먼 곳으로 집단이주 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1860년대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 외딴 언덕이 있었던 곳이 공동묘지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바로 과거 공동묘지 터였던 것입니다. 공원으로 조성할 당시에 이곳에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시신과 유물이 함께 발굴된 적이 있었습니다. 발굴된 유물과 유품들은 현재 ‘아르세니예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삶’보다 더 먼 ‘죽음’의 경계 밖에 ‘신한촌’을 두게 된 것이었습니다.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라는 어원은 원래 ‘카레이스카야’, 즉 ‘한국의’ 혹은 ‘한국인의’란 뜻의 형용사와 ‘슬라보다’(러시아에서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국유지에서 사유지화한 곳에 자유농민이 자리 잡고 사는 큰 촌락을 의미)가 결합한 합성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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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금각만 기슭의 블라디보스토크시 중심가 전경-사진제공 정은상교수.

 

아이러니하게도 일명 “똥돼지” 마을이 ‘신한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후일 한인들 스스로 ‘독립문’이란 것도 건설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37일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 전까지 조선인 학교와 조선인 극장을 설립하여 민족어 교육과 문화 창달에 힘썼던 것입니다. 일제하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메카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어와 노래 및 극장문화의 산물은 곧 이곳 ‘신한촌’이 원천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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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정은상교수(현재 언론출판원장)

 

단행본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저자는 “1.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한인들의 집단 거주처 신한촌...신한촌은 1911년 이후 한인들이 집단거주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신한촌은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명인 이상설, 연해주 일대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재형 그리고 이동휘 등 항일민족 애국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3·1운동 시발점이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계획들이 수립되기도 한 역사적인 곳이었지만, 4월 참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은 이어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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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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