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기사입력 2019.02.2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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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 대한독립운동 선열 기념탑.jpg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 대한독립운동 선열 기념탑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울라지보스또크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 : 주체8(1919)년 2월 로씨야의 연해변강인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 3.1인민봉기의 불길은 중국 동북지방과 함께 로씨야의 연해변강에서 급속히 타번져 갔다. 로씨야연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독립만세투쟁은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시위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주체8년 3월 15일 울라지보스또크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렸다. 이틀 후인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뒤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은 여러 대의 자동차에 갈라 타고 시위대렬의 앞장에 서서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부르면서 군중의 사기를 힘 있게 고무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반일시위운동은 18일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였다. 이날 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은 조선인마을로부터 도시중심을 향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물밀듯이 쏱아 져 나갔다. 그들은 시위투쟁과 함께 각지에 반일격문들을 뿌렸으며 <조선독립선언서>룰 외국 령사들에게 배포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언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고무 추동하였다.”(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190쪽)

 

북한이 ‘울라지보스또크’라고 하는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삼위(海參崴) 또는 해삼시(...)라 불렀는데 실제로 해삼이 많이 나는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1860년에 최초로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사(韓人史)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69년에는 한반도 북녘 땅의 기근(饑饉)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며 인구가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지역 내 콜레라가 발생하자 러시아 정부에서는 조선인의 위생상태를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1910년대 초반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내로 이주, 신한촌이라는 한인 거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신한촌의 1914년 당시의 인구는 무려 63,000명이었습니다. 후일 이 곳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가장 먼저 임시정부격인 단체인 국민의회가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위 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은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한촌’에서의 ‘독립운동집회’는 블라디보스토크 3·1운동에 불을 붙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서 3·1운동사를 다시 써야 되지 않을까요?

러시아 하바로르스크-재래시장 김치가게.jpg
러시아 하바로르스크-재래시장 김치가게

 

구한말부터 고려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아무르 만 연안의 개척리(現 해양공원 일대)에 한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다 1911년 러시아측이 콜레라를 이유로 시내 북쪽 언덕에 한국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면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을 이루었습니다.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하바롭스카야 거리 일대로, 현재는 신한촌 기념비와 서울 거리란 이름의 작은 소로만이 존재합니다. 과거 필자가 고려인 3세인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現 하바로프스크 국립 인문대학교)의 박춘식교수와 함께 찾았던 신한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슬픈 노래’ 였습니다. 이런 노래도 찾아야 합니다. 3·1운동 100주년에 정부가 좀 더 세심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교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을 다시 방문해 들은 ‘슬픈 노래’는 더 슬펐습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 일제와 연해주 총독의 압박 등으로 한인 사회가 붕괴되고, 자유시 참변등을 위시로 한 각종 독립군들의 사고로 인해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는 말살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에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거주 중이던 모든 한인들을 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비사(悲史)도 정확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바로프스크의 독립운동! 또 다른 비극의 땅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중심지입니다. 아무르강(Amur River) 또는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강(江)은 상류의 실카 강과 오논 강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세계 8위), 유역면적은 205만 2000 km²(세계 10위)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 타타르 해협으로 들어갑니다. 러시아어 ‘아무르’는 에로스라는 뜻으로 같은 강을 두고 중국인들이 ‘검은 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데 반해 러시아인은 ‘사랑의 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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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하바로르스크-하바로르스크驛 야경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州)의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부대! 다반촌 일대에는 소코프가 이끌었던 러시아 빨치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다반촌 주민들은 이들을 몰래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다반촌을 점령한 일본군은 주민들이 빨치산과 연락을 한다고 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들은 다반촌의 한인학교를 점거하여 1달 가량 머무르다가 불태워 버리고는 빨치산의 공격을 염려하여 하바로프스크로 떠났는데, 가는 길에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교전 중에 전원 사망했습니다.

 

필자가 하바로프스크에 체류하면서 방문했던 곳들...아무르 강(江)!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한 흑룡강이 하바롭스크까지 이어져, 아무르강이라는 이름으로 동해와 오호츠크해로 흘러가는 장강(長江)!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하바로프스크의 역 앞에 서있는 하바로프의 동상! 레닌광장과 광장 오른쪽 하바로프스크 주(州)정부 청사! 그곳에서 담소를 나눴던 부지사에 대한 추억, 고려인들이 김치를 팔던 재래시장...최근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관광여행’을 다녀온 연구원은 3·1운동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극동 지역 행정중심지를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포항시는 2019년 광물자원이 풍부한 제조업 중심도시인 하바로프스크시를 방문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류를 추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바로프스크의 묻혀있는 3·1운동사를 밝혀줄 지방자치단체는 없을까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로마노프 총장과 박춘식 교수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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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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