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⑥프랑스와 조선독립운동

기사입력 2019.02.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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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산청군-파리장서 기념탑-산청군 제공.jpg
경상남도 산청군-파리장서 기념탑-산청군 제공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경상남도 산청군청(山淸郡廳)은 2019년 3월1일 오전 10시 단성면 남사예담촌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서 지역 내 독립운동 유공 후손, 지역주민 등 500여명을 초청해 “파리장서운동(Paris長書運動)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일제강점기 유림(儒林)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호소한 특별한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운동’ 100돌 기념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산청군이 이 행사를 하는 것은...면우(俛宇) 곽종석 (郭鍾錫,1841∼1919)의 주도로 전국 137인의 유림 대표가 1919년 전문 2674자(長書)에 이르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편지로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것과 유관(有關)합니다. 당시 곽종석은 영남 유림 대표로서 파리장서 전문을 완성하고 김복한, 고석진, 류필영, 이만규, 하용제, 김황 등 전국의 유림과 연합해 파리장서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곽종석은 이 운동으로 투옥돼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은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74세의 나이에 생(生)을 마감했습니다. 남사담 예담촌에는 그의 후학들이 면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20년 지은 이동서당 등 ‘면우 곽종석 유적’(경남 문화재자료 제196호)이 있습니다. 산청군은 2013년에 남사예담촌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을, 2018년에 파리장서 기념탑도 남사예담촌에 건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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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소르본느대학교 부근 엣 서영해 선생 거처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1운동 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장석영을 포함한 유림계(儒林界)가 파리 강회회의에 독립을 요구한 운동으로,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유림계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김창숙은 1919년 3월 22일 김창숙은 137인의 서명을 받아 이루어진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출국하여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김규식이 민족 대표의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국내에서는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습니다.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은 서명 작업과 활동 자금을 준비하였고, 김창숙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거사를 계획하였습니다.

 

장서에는 "사람이나 나라는 모두 스스로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남의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로 스스로 정치할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일본은 교활한 술책으로 보호를 명목으로 한국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를 참을 수 없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처지를 만국에 알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에 따라 대한민국은 국권을 상실하였고 한반도는 일제의 무단 식민지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19년 국권회복을 위한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역량을 결집하기 위하여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습니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유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치적 망명자 보호정책에 의지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벗어나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간접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드골 장군이 수반으로 있던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중경주재 우리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미미하였던 프랑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de facto) 승인을 함으로서 열강의 지원이 필요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한국 임정(臨政)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는 1944년 6월 3일 알제리에서 성립된 임시 정부로, 1944년 8월 파리 해방과 함께 파리로 이전하고 1946년 10월 27일 프랑스 제4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헌법 제정과 프랑스 통치에 임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미미하였던 프랑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de facto) 승인을 함으로서 열강의 지원이 필요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파리위원부는 유럽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파리위원부의 황기환(黃玘煥,?∼1923)이 1921년 7월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유럽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유럽의 독립운동은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였던 서영해(徐嶺海,1902~1949)가 이끌었습니다. 서희수(徐羲洙)라고도 불리는 부산 출신의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에 프랑스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929년에 유럽 여러 나라에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의 명령에 따라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의 외교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고, 1934년 4월 2일에 서영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駐佛) 외무행서 외무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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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7대학교 캠퍼스와 교환교수 때의 필자

 

6.25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1950년 8월에 지원병 1,300여 명으로 구성된 유엔군 산하 프랑스 대대를 창설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을 지휘한 사람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마그랭 베르느레로 몽클라르 장군이었는데, 장군은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까지 자처하면서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후 프랑스군은 6.25전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1950년 11월 29일에 부산항에 상륙하였고,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활약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 1886년 한불수교 체결, 2019년이 수교 13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프랑스는 아주 가까운 우방국(友邦國)이었습니다. 필자도 프랑스의 친구였습니다. 196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한 이래,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거쳤고...경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7대학 교환교수 겸 동남일보 프랑스 파리특파원, 한국불어불문학회 감사,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소르본느대학교·아비뇽대학교 연수 등...과거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국이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유럽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필자는 대한민국과 프랑스가 절친(切親) 같은 우방(友邦)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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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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