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시월의 기도문과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記憶)

기사입력 2019.10.2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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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경남대학교 운동장)-문재인 대통령이 당시의 시위가담시민 격려. 사진-연합뉴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시월에는 무신(無神)이게 하소서/ 천고마비(天高馬肥)보다 시고시인비(詩高詩人肥)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희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有神)이게 하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無神)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높은 목소리로/ 당신의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정일근/ 시월의 기도문)

 

“시월의 기도문에서”을 쓴 정(鄭) 시인(詩人)은 이 기도문이 “대통령, 바보는 그 시절 제가 할 수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사소한 ‘욕’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월유신이 언젠가는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고, “시월이 유신독재의 계절이 아니라, 시인의 계절이길 바랬습니다”라고! 1979년 10월 18일, 그는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면서 시위를 이끌었고, 시인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경남대학교에서 최초로 개최된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의 사회를 봤습니다. 그때 “국회의원 문재인”의 기념사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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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축하식-마산 문화광장-2019.9.14.

 

시인! “시인이란 먹구름 타고/ 비바람을 쫓으며/ 사수(射手)를 비웃는 황제라 할까/ 땅 위에 귀양 오면 뭇사람의 비웃음을 온몸에 받고/ 큰 날개에 걸리어 걸음도 못 걷는데”도 시인은 여전히 시(詩)를 쓰면서 모교에서 후학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제자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필자는 오늘 그와 ‘톡’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을 기억 속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필자는 경남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필자의 집은 마산경찰서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갇힌 시민들의 절규(絶叫)를 들었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유신 정권은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날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다음 날, 마산 지역에서 경남대학교와 마산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서 민주공화당 당사·파출소·방송국 등을 타격했습니다. 20일에는 근로자·고등학생들이 시위에 합세했고,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6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10·26 사태)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현 정부는 9월 17일 국무회의에서 항쟁 시작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올해로 40주년이 된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국제학술대회가 10월 17일 발생지인 경남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1979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는 국내외 다양한 민주화 운동 사례를 고찰하고 항쟁의 역사적 위상 등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 학술대회는 경남대학교에 이어 항쟁이 시작된 부산에서도 18∼19일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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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40주년 국제학술대회(2019.18-19) 포스터

 

2019년 10월 1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처음 열리는 정부 주관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국민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100년 전,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선조들이 꿈꿨던 진정한 민주공화국,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적 성취가 국민의 생활로 완성되는 민주주의를 향해 국민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마침내 모두의 역사로 되살아나 우리 곁에 와있는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국민 모두에게 굳건한 힘과 용기가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라는 말로 기념사를 가름했습니다.

 

1979년의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記憶)! 시인은 독재자에게 “사소한 욕(辱)을 하고 정권(政權)의 붕괴(崩壞)”을 예견했지만, 이 항쟁은 악몽(惡夢), 저주(詛呪), 절규(絶叫), 비극(悲劇)’,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비명(悲鳴)은 단말마(斷末魔)의 절정(切釘)었습니다. 필자에게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잘한 일이 별로 있다는 현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대통령 님! ”국민의 입 막기는 내(川) 막기보다 힘들다.“고 했고,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J.Q.애덤즈(Adams)는 “4년 동안의 대통령 임기는 나의 평생에 가장 비참한 시절”이었다고 했으며, A.잭슨(Jackson)은 “솔직히 나의 대통령 시절은 고급 노예 생애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님! 임기 동안이 “평생에 가장 비참한 시절”이 되지 않게 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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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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