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⑤북한의 교향악단과 [우리식 교향곡]

기사입력 2020.03.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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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음악-삼지연 관현악단,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특별공연-2018.2.8.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교향악단(State Symphony Orchestra of DPRK) - ‘조선국립교향악단’은 북한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으로, 북한에서는 '평양 국립 교향악단' 또는 '국립교향악단' 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46년 8월 8일에 '중앙교향악단' 이라는 명칭으로 첫 공연을 가졌고, 1947년 1월에 단원을 보강해 ‘2관 편성’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국립예술극장 산하의 연주 단체로 편입되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본격 오페라인 김순남의 “인민유격대”를 비롯한 여러 무대 작품의 공연에 참가했습니다.

 

1956년에 독자적인 단체로 독립했지만, 1969년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관현악단과 통합되어 영화음악의 녹음을 위주로 활동했습니다. 1971년에는 피바다가극단 산하 연주 단체가 되었고, ‘북조선’에서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손꼽는 “아리랑”, “내 고향의 정든 집”,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그네 뛰는 처녀”,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바이올린 협주곡 “사향가”, 교향곡 “피바다” 등의 작품을 초연했습니다.

 

1980년에 다시 독립해 현재의 명칭으로 고쳤고, 1982년에는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했습니다. 1986년 폴란드 순회공연 중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에 참가했고, 윤이상의 클라리넷 협주곡과 교향곡 제 1번을 연주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00년 8월에는 북한 예술단체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각각 두 차례씩의 단독 공연과 KBS 교향악단과의 합동 공연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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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음악-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교향악단-자료 월간 조선.

 

여기서 북한과 ‘윤이상’을 살펴봅니다. 북한은 1992년 평양에 윤이상음악당(재독음악인 윤이상의 이름을 딴 음악연주와 연구시설을 갖춘 음악전용시설)을 설립했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의 북한 내 음악활동을 지원하고,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이곳은 윤이상의 북한 내 음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음악연주 전용극장으로 윤이상음악회를 비롯하여 윤이상 관련 행사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그의 음악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로 연주홀과 전속관현악단의 연습실과 연구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윤이상음악회와 음악연구토론회, 사진전시회 등을 개최해 왔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91년 3월에 착공되어 1992년 10월에 개관하였으며, 평양시 중구역 영광거리 연화2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연건평 17,000㎡의 300석 규모의 2개의 연주홀과 200여 개의 방이 있고, 200여 개의 방중에서 60여개가 윤이상음악연구소 전속 관현악단의 단원 연습실, 연구실, 국제회의실과 강의실, 음악감상실, 녹음실, 문헌자료실, 민족악기 전시장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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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음악-평양시 중구역 영광거리-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필자.

 

참고! 대한민국 통영시 도천동에 윤이상기념관(2010년 개관)이 있습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한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윤이상은 1971년 독일에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활동했고,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추후하기로 합니다.

 

겉으로 보면 남한의 국립교향악단의 역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교향곡발전의 갈피마다에는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이 뜨겁게 어려있다. 우리 식 교향곡의 발전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 밑에 수행된 교향악 혁명과 잇닿아 있다.”고 합니다. 북한 월간 <조선예술>에는 “20세기에 이르러 교향악은 온갖 잡다한 형식주의 음악조류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감정과 동떨어진 퇴폐적인 음악으로 전락되였다. 우리 나라와 세계 교향악발전의 이러한 상황은 음악예술부문 앞에 우리 인민이 사랑하며 즐겨 듣는 우리 식의 진정한 교향악을 창조할 것을 제기”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우리 나라 교향곡을 하는 경우에 다른 나라의 교향곡을 본따서 누구의 교향곡 1번이요, 2번이요 하면서 우리의 것인지 다른 나라의 것인지 알수 없게...우리 식의 교향악을 창조하기 위한 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고! 북한 교향악은 기본적으로 3관 편성의 서양 관현악단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4관 편성으로도 확대가 가능하며 저대나 단소, 장새납 등 북한에서 개량한 민족관악기 연주자들도 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북한은 ‘주체적 배합관현악’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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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음악-관현악 아리랑-아리랑 환상곡 II.

 

북한 <로동신문>은 2020년 1월 26일 “3관 편성 관현악단 조직 50돌 기념 국립교향악단 음악회가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는데, ”공연 무대에는 협주곡, 관현악, 현악합주 등이 올랐다“고 하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김정일 동지께 드리는 노래“는 ”3관 편성 관현악단을 꾸려주시고 조선의 넋과 정서가 흐르는 우리식 교향악 발전의 새로운 장을 펼쳐주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에 대한 회억으로 관람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었다"라고 했습니다.

 

<로동신문>은 ‘3관 편성 관현악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70년 1월 26일 조직’됐다고 하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교향악은 사대와 교조에 오염되어 인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극장 무대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형편에 놓여있었다”면서 김정일이 "교향악을 우리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라고 했습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 교향악단! <로동신문>은 김정은 2019년 7월 27일 “전승절에 즈음하여 국립교향악단의 7.27기념음악회를 관람했다”고 전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교향악단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 강릉·서울에서 공연한 북한예술단 삼지연 관현악단과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 안에 존재합니다. 김정은의 작품(?)입니다. 그는 물론 ‘주체적 배합관현악’을 잘 알겠죠? 북한의 진짜 ‘교향악단’은 퇴조(退潮)하고, [우리식 교향곡] 조차도!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실천하려면, 북한의 교향악단과 [우리식 교향곡]을 더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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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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