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1950·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 수필 [사진 한 장]

기사입력 2020.06.2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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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유년시절에 겪은 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은 예나 지금이나 생생합니다. 한국군의 “창군요원 29%를 포함한 257,000여명의 희생”(국방군사연구소,<전사(戰史)> 제1호, 1999, p.142.)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주인공, 그 ‘전쟁광’의 손자가 악몽의 1950년을 또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대한 회상, 그것은 한민족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그 회상 속에는 크고 작은 악몽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이 잡듯 뒤지는 조간신문을 숙취 때문에 건성으로 넘기는데 천연색 사진 한 장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뚫어진 철모에 담긴 이름 모를 꽃 세 송이가 전쟁의 잔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 이 사진이 준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오늘 25일은 물론 해마다 유월이 되면 온 겨레의 가슴 속에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상흔이 되살아나 아픔을 주는데 이 정경이 한없는 비애를 더해 주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은 육이오를 마감하는 자정이다. 방금 전에 시청한 <백마고지>라는 특집극의 영상 위에 노랑 꽃송이가 겹쳐 떠올라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하고 펜을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이어지지를 않는다.

 

어제 새벽에는 산사(山寺)의 오솔길을 걸었다. 장마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려왔지만 거룩한 희생의 음덕에 감사하며 걸었다. 외국차를 즐겨 마시는 명찰(名刹)의 노승도 혼백들을 위해 기원할 거라고 생각하니 밉지가 않았고, 기왓장에 이름 새겨주고 돈을 받아 챙기는 스님들의 모습도 얄밉지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가며 유년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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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0일 북한군 3사단이 탱크가 대전으로 진입.-자료.중앙포토.

 

충청도 두메에서 농군으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개 콧구멍만한 전답을 팔아 서울 근교로 이사를 하고 돈만을 위해 사셨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방고래에 불을 넣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갖가지의 과실수가 울창하였고,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이 온 집안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당황해하시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 산등성이에서 본 서울 쪽 하늘이 붉은 노을보다 더욱 붉었다. 놈들이 꽃밭에 불을 지른 것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늘에서 새우 젖 독 같은 것이 떨어지는가 하면 큰아버지 공장의 고무신이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은 생각이 난다. 안양 근처에서 배가 고파 토마토 밭에 들어가 허겁지겁 훔쳐 먹다가 가족들을 잃고 헤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기적적으로 어머니 품에 다시 돌아와 실컷 울었지만 개미떼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은 기차를 탔을 때는 재미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철도노조 간부로 재직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탈 수 있었던 것이다. 힘이 우리를 살린 모양이다. 헌데 두메의 고향, 충남 청양군 비봉면 청수리에는 불행히도 기찻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찾아간 곳이 외갓집이 있는 대천이었다. 거기서 외할아버지 따라 꼴 베러 다니며 쇠파리를 알았고 논 고동을 잡는 재미에 거머리를 우습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천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 메고 신나게 논길을 달렸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주었던 외삼촌이 부상을 당하고 돌아오셨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장소는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덕분에 누룽지를 훔쳐 먹을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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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원적지-충남 청양군 비봉면 청수리에서 필자.

 

뒤 이어 일가들만이 모여 사는 이 마을에 군복을 입은 사람이 왔다만 가면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모든 일이 재미가 없었다.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는 일도, 감이나 밤을 따는 일도 모두가 따분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덕분인지 전세(戰勢)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값진 물건들은 고사하고, 숟가락 한 개, 사진 한 장,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년시절의 사진이 없다. 초상의 일부를 이미 그 때 상실하고 말았다.

 

살았던 세월의 한 조각으로 되돌아 본 산사의 새벽길은 유난히도 조용했지만 빗속의 산딸기는 선혈처럼 붉었고 계곡물 속에는 속세의 때가 가득했다. 나는 그 흙탕물 속에 빠져버렸다. 아니 내 모습을 담은 사진기가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 유월의 사진은 나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신문사진이 뇌리 속을 스쳐 다시 자세히 보았다. <평화를 부르는 “자연대합창” 155마일>이라는 제목 아래 괴뢰군파리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어린 멧돼지 형제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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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 龍늪의 끈끈이주걱.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식물.

 

‘용(龍)늪’의 끈끈이주걱이 ‘우아’하고,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튼 백로들의 찬란한 삶이 인상적이다. 비무장지대의 유월의 모습은 너무도 서정적이다. 정처 없는 피난의 여정이 시작되면서 남으로 향한 무수한 발길이 스쳐간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우리의 자연에도 신록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북녘 땅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황야에서 한 많은 종명을 고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자연 사진에 심취할 수가 없다.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이슬처럼 사라진 그분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이용웅,”사진 한 장“,<한국수필> 1987년 봄호, 101~103쪽)

 

2020년 6월 25일 字 <중앙일보>는 [6·25 전쟁 일어난 해는 1950년" 10대 7명중 1명만 맞췄다]라는 題下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는 “6ㆍ25 전쟁에 대한 이해와 인식 수준은 세대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나이가 어릴수록 상대적으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표적집단심층면접(FGI)에만 참가한 10대(7명)중 1명만이 6ㆍ25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하게 답했고, 나머지 6명은 틀리거나 아예 몰랐다.”고 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진실이 忘却되어서는 안 되는 幼年期’를 記憶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의 세계는 그의 직접적 환경에 제한되는 조그만 세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라고 하는 壁 속에 갇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점 지식이 성장함네 따라서 이 벽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어린이 모두에게 ‘진실이 존재하는 유년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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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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