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학순례길을 걷다 '길 위의 꽃, 사람을 만나다'

기사입력 2021.03.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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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조정미 동학민회 사무국장]   


순례의 의미는 종교적 유적지나 가치 있는 곳을 찾아 여행을 하며, 선지자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데 있다. 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을 순 없다. 삶의 쉼표를 찍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홀로 또는 여럿이 길을 걸으며, 각자의 색깔을 찾아 나서는 게 순례의 참모습이라고 본다. 동학순례길을 걷으며 코로나19로 인해 위축해진 몸과 마음에 기지개를 피길 바라며 6회에 걸친 동학순례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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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동학공원 위령탑)

 

전국에 동학과 관련한 지역은 무수하지만 이번에 정리한 동학순례길 노선은 보은 장안을 중심으로 하였다. 장안을 중심으로 만든 이유는 1860년, 수운에 의해 시작된 동학이, 해월을 중심으로 1893년 보은장안 동학민회에서 신원교조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보국안민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동학 총본부에서 개최한 동학민회는 스스로 민회라 칭할 정도로 근대의식이 싹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집회로 평화적으로 진행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안에서 시작된 보은의 동학순례길은 전체 6코스로 되어있다. 온전히 실천하는 생을 살다간 해월최시형이 기거하고 늘 걸었던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동학혁명, 삼일운동, 임시정부의 초석이 된 동학의 시대정신을 드려다 볼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한생명공동체로 서로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탈코로나시대를 살아가야 할 평화의 지혜를 ‘만물은 생명이니’라는 동학세계관에서 되새김할 수 있다. 


참여자는 가족끼리 또는 소규모로 걸으며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하며, ‘길 위에서 사람꽃’을 피어내며 걷는 과정에서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하며, 잃어버린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고,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바램과 삶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동학민회(동학혁명북접사업회)에서는 동학순례길 안내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다음카페 ‘동학민회’에 상세한 지도가 안내돼 있다. 포스터 제작은 역사바로알기를 펼치고 있는 보은교육지원청에서 후원했다.


동학순례길 1코스, 동학민회지에서 문바위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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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동학민회지)

 

동학순례길 1코스는 보은 동학민회지에서 옥천청산 문바위골까지 26km이다. 1박2일로 여유있게 걷기를 추천한다. 


옥녀봉 아래 장안 동학민회지에서 출발해 장내교로 삼가천을 건너면 벙어리성터 아래 개안리와 봉비리를 지난다. 이어 밭 사이 농로를 걷다보면 불목리에서 우진플라임을 만난다. 곧 청주상주간 고속도로 밑을 가로질러 수문2구마을 회관을 만나고 감지고개, 구름고개를 넘어, 마로면 관기초등학교를 지난다.

 

여기서 점심을 먹는다. 매콤한 꼬막짬뽕에 이어 최근에는 돈가스집이 인기가 좋다. 다시 신발 끈을 다잡고 태화루 골목으로 들어서면 적암천 사여2교(관기교)를 지나 고봉정사로 가는 길이 황금들판이다. 사립교육기관이였던 고봉정사 뒤로는 적암천이 삼가천에 흡수된다. 하천변에 갈대와 억새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곧 이어 삼가천은 보청천에 흡수되어 기대교 아래로 흘러, 옥천으로 폭 100m를 빛내며 청산으로 고고히 흐른다. 기대1교를 지나 만나는 선애빌에는 캠프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하루 밤을 머무른다. 민박도 가능하다. 발 빠른 사람은 청산면까지 가서 머물러도 좋다.


이어서 원정리, 대성리로 이어진다. 예곡교 옆을 지나 교평리로 들어서면 청산면이다. 앞에 길이 마을길이라면 이 길은 물길이다. 청산면 입구 청산공원에는 동학재기포기념비와 해월의 딸 최윤을 억지로 결혼시킨 청산군수 박정빈의 공덕비가 함께 있다. 청산면에서 식사는 생선국수나 올갱이국을 추천한다.

 

식사 후, 정순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정순철은 최윤의 아들로 동요작곡가이며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함께 한 인물이다. 정순철의 생가와 생애벽화거리, 최윤이 옥살이를 했던 옛 관아터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청산교를 건너 인정리, 한곡리마을회관을 지나 문바위골이다. 해월이 피난처였던 집(당시 대접주 김성원의 집)과 강론을 펼쳤던 장소가 있으며, 문바위에는 동학지도자 7인(박희근, 김정섭, 박맹호, 김영규, 김재섭, 박창근, 신필의)의 이름이 음각화 되어 있다. 문바위 위쪽으로는 동학농민혁명탑이 있으며, 문암저수리 위쪽엔 해월의 아들 덕기의 무덤과 동학군들의 훈련장 터에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다.             


해월은 수운이 죽은 후 보따리 하나로 36년을 떠돌이로 살았다. 이런 이유로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생겼다. 보은 장안은 1885년 이후 해월이 자주 머무르며 육임소, 대도소를 설치하면서 동학조직의 중심이 되었고, 1893년 동학민회는 보국안민의 근대적 민중운동으로 전개하는데 초석이 됐다. 옥천 문바위골의 임시대도소는 강론과 훈련장으로 동학혁명의 세력을 키우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해월 가족들이 살아간 이야기가 담겨있다. 


 

1코스는 ‘시천주’란 동학사상이 신분제를 해소하고, 남성, 여성, 어린이 자체로 존중받아야 함을 몸소 실천하고 살아간 위인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동학순례길 2코스, 동학민회지에서 동학공원까지

 

동학순례길 2코스는 보은 동학민회지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까지 9km이다. 여유있는 걸음으로 걷는다면 3시간 소요된다. 


옥녀봉 아래 장안1리 마을비에서 시작되는 길을 서원계곡 방향으로 걷다보면 ‘동학교단의 중심지 장안리’라는 안내판이 도로 옆에 한옥풍으로 서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옥녀봉 동쪽 산 아래에는 ‘보은장안 동학취회지’라 간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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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문바위골)

 

옥녀봉 방향으로 틀어 농로로 들어서면 동학민회 집회장소가 먼저 보인다. 3월 11일 봄에 모인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는 집회의 장소로 18일, 사방 150m, 높이 1.5m의 돌담을 쌓았다. 이 흔적을 논둑에 재현해 놓았다. 작은 규모의 축사를 지나 옥녀봉 아래 수로와 만나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왼쪽 아래로 위치한 곳이 동학 중앙본부 역할을 했던 대도소 터이다. 수로길 중간쯤에는 우리단체와 속리초 학생들이 심은 국화 꽃길과 동학 그림안내판이 위치해 있다. 


두부체험장을 지나 밭길로 구인리에 들어서면 구인교가 보인다. 구인교는 1894년 12월 북실전투에 투입된 관군과 일본군이 저녁을 먹고 대기하던 장소였다.


이제 오창2리 방향으로 간다. 가는 길에 오두막에서 쉬며 다시 걷는 기다란 농로는 장재리를 향하고 세조의 행궁터를 바라보며 목고개를 지나면 오창1리이다. 오봉산을 우측에 두고 가지런한 마을 오창길을 걷다보면 누청리이다. 막골을 지나 사괴정에서 느티나무, 은행나무의 정취를 느끼며 쉬어간다. 


이제 누청 마을길로 들어서면 하늘색지붕의 옛 김소촌가가 있다. 이곳은 북실전투 당시 해월 및 지도부들이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집이다. 이제 성족리로 향한다. 성족리마을회관을 지나, 능이칼국수집을 지나 동학공원이다. 통곡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위령탑이다. ‘사인여천,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라 새겨진 위령탑은 그들이 숨진 북실을 내려다보며, 2600여명의 염원을 현재도 하늘로 소리 높여 외치며 하얗게 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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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장안비 돌담)

 

보은은 1863년 12월 수운이 체포돼 서울 압송 시에 보은관아를 경유할 때, 관아 이방이 아침저녁으로 공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 동학이 전파되었던 지역이라 추측된다. 1874년 해월은 인제에서 단양으로 넘어오며 충청도의 동학세력을 넓혔고 1885년 장안에 들어왔다. 손씨부인과 합가해서 살았으며, 1887년 육임소 설치로 중앙조직을 체계화했다. 1893년에 대도소를 정식으로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보은민회를 주최하고, 포접제를 정비하여 대접주를 임명하였다. 1894년 3월 8칸, 6칸 규모로 대도소가 건축되었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커다란 물살 속에서 10월 이두황에 의해 장안의 200여채의 농가, 400여채의 초막과 대도소는 불태워져 초토화된다.      


연속되는 패배 속에서 우금티에서 돌아온 장안은 쉴 곳이 못 됐으며, 12월 북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17,18일 밤새도록 싸우다 2600여명이 전사한다.


 

2코스는 동학혁명 역사의 중심이었으며 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학이 3.1운동, 어린이운동,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현대 민주역사의 출발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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