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문화재사랑-2021년 10월호-남·북 서원의 정몽주

기사입력 2021.10.14 10:13
댓글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문화재사랑-2021년-10월호-표지-문화재청-발간..jpg
문화재사랑-2021년 10월호 표지-문화재청 발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문화재(文化財)란 각 나라나 유네스코에서 보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특수 재산들을 말합니다. 유네스코에서는 1970년 46개국이 가입한 '문화재의 불법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에서 문화재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 협약에서 정의한 문화재란 고고학·선사학·역사학·문학·예술 또는 과학적으로 중요하면서 국가가 종교적·세속적인 근거에 따라 특별히 지정한 재산을 말한다. 이 협약은 자연유산도 문화재에 포함시켰습니다. 한국에서는 1962년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 제2조에서 문화재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도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시·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 여러 지정문화재로 분류됩니다. 그밖에 토지·해저·건조물 등에 포장된 문화재인 매장문화재가 있습니다.]

 

‘문화재’하면 대부분 잘 압니다. 그런데 ‘문화재 사랑’하면 대부분 ‘사랑’이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월간 [문화재사랑]을 발간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1년에는 격월간(隔月刊)으로 변경,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다시 월간이 되는 것은 독자가 증가해야 가능하지 았을까요? 올 시월에 [문화재사랑 10월호(통권 제203호)]가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세월을 기억하는 덕수궁 돌담길/ 한을 신명으로 승화한 살풀이춤/ 수원 화성의 상징경관 화성전도/ 아주 오래된 인류의 습속, 인신공희-신라 왕성 ‘월성’에서 다시 발견되다/ 망월(望月), 물의 나라를 비추다 제천 여행/ 전남 장성 백양사/ 온 국민이 지켜낸 보물 김시민 선무공신교서/ 정몽주를 기리는 남과 북의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 vs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천-임고서원-경상북도-유형문화재-제272호.jpg
영천 임고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

 

다음은 ‘정몽주를 기리는 남과 북의 서원 임고서원(臨皐書院) vs 숭양서원(崧陽書院)’“(全文)입니다. [고려 말 거유(巨儒)였던 이색은 정몽주를 ‘동방리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평했다. 동방성리학의 도통(道統)은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이후 절의와 도학(道學)에서 포은에 대한 인식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에 포은을 배향한 서원은 13곳. 그 중 포은이 태어난 영일 오천서원, 고향인 영천 임고서원, 관료로서 활동했던 개성 숭양서원, 죽어서 묻힌 용인 충렬서원은 4대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경상도의 언양 반구서원·용궁 삼강서원·상주 도남서원·울산 구강서원, 전라도의 운봉 용암서원, 평안도의 순안 성산서원, 함경도의 정평망덕서원·함흥 운전서원·영흥 흥현서원이 있었다.→

 

서북한 지역에서 그 수가 적은 것은 많지 않았던 사족(士族)의 수 등 사회적인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현재적인 관점에서 임고서원은 남한에서 포은을 모신 대표 서원으로, 숭양서원은 북측에서의 대표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원이 정치·사회적인 기능을 했던 조선시대에 숭양서원은 경기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포은을 모신 서북한 지역의 서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은 포은정신을 떨치려 했던 사림의 교학기구였다. 그 창건 배경에는 퇴계 이황과 화담 서경덕이 있었다. 두 곳 모두 포은의 시호인 ‘문충(文忠)’에서, 즉 임고서원은 묘우인 문충사, 숭양서원은 문충당에서 출발하였다. ‘임고’는 신라 경덕왕 때 영천의 옛 이름으로, 그 지역을 대표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숭양’에는 포은의 충효 유지가 후세에 숭산(崧山, 송악산)의 남쪽에서 떨쳐질 것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

 

개성-숭양서원(崧陽書院)-개성시-선죽동.jpg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개성시 선죽동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8)에,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에 건립되었다. 두 곳 모두 국왕으로부터 서원 이름의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아 조선왕조가 사회적인 권위를 공인한 사액서원이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할 때 포은을 모신 서원 중에는 숭양서원만 남았다. 이후 임고서원은 복원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숭양서원은 북측의 국보 문화유물이면서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 숭양서원은 광복 후 북측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는데, 일일찍부터 해주 소현서원, 평양의 용곡서원과 함께 북측의 3대 서원유산으로 선정·보호되었다→

 

<포은집>은 1439년(세종 21) 아들 정종성이 시집을 초간한 이래 여러 판본이 간행되었다. 임고서원에서는 1584년(선조 17) 왕명으로 류성룡이 교정하고 발문을 쓴 「영천구각본」과 1607년(선조 40) 임진왜란에 소실된 「영천구각본」을 중간한 「영천중간본」이 간행되었다. 1866년(고종 3)에는 17대손 영천군수 정원필과 임고서원 유생들이 문집을 간행했고, 1900년에는 정환익 등이 속집을 중간하였다.→

 

숭양서원에서는 1719년(숙종 45) 11대손 정찬휘가 정리한 원고를 바탕으로 1769년(영조 45) 재종손 정관제가 개성유수 원인손과 수교(讎校)하여 원집과 속집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연활자로 『신편포은선생집』 2권 1책을 중간했다. 또 여기에서는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어정규장전운』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이 반사(頒賜)되었다.→  

 

개성-선죽교(善竹橋)-개성시-선죽동-필자.jpg
개성 선죽교(善竹橋)-개성시 선죽동-필자

 

1740년(영조 16) 국왕은 개성에 행차하여 포은의 ‘도덕정충(道德精忠)’을 어제어필하여 포정(褒旌)하였고, 선죽교 근처에 표충비를 건립한 뒤 치제했다. 다음해에는 표충비에 있는 어시어필(御詩御筆)을 판각해 숭양서원에 현판을 걸고 다시 치제했다. 숭양서원에서는 역대 9차례에 걸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모두 국왕의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1811년(순조 11)에는 서원의 역사를 정리한 묘정비가 세워졌고, 1823년에 중건되었다. 이 같은 위상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포은을 모신 서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듬해에 왕명으로 그 내력을 정리한 기실비(紀實碑)를 세웠다.→

 

임고서원은 영남학을, 숭양서원은 기호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학풍을 달리하던 서경덕의 문인과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이이·성혼의 문인은 임고서원을 방문한 바 있다. 임고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옛터 한 칸짜리 초가집에 포은 영정을 모실 수밖에 없었는데, 1600년 이곳을 방문한 이원익이 중창했다. 숭양서원은 17세기 말 이래 김석주, 김원행 등 노론계 서인과 채제공 등 남인계 인사들이 방문했고 그들이 서원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로 75년 이상을 갈라져 있는 임고서원과 숭양서원은 포은을 모신 남북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그동안 두 서원의 왕래도 끊겼다. 임고서원에 복원되어 있는 선죽교는 왕래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용웅.jpg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신민정 기자 sundaynews@hanmail.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저작권자ⓒ선데이뉴스신문 & newssunday.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