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기행(紀行)1- 서울 관악구 낙성대와 인헌공 강감찬

기사입력 2021.11.09 09:56
댓글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서울특별시-관악구--낙성대.jpg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필자가 사는 서울 관악구에는 낙성대(落星垈)가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도 있지만, 시민들은 ‘낙성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울의 첫 기행 마을을 ‘낙성대’로 해 보았습니다. 낙성대는 고려 전기 무신(武臣) 강감찬(姜邯贊/948-1031)의 사당(舍堂)입니다. “사당”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입니다. 사실 ‘신주’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귀주(龜州) 대첩(大捷)의 영웅 인헌공(仁憲公) 강감찬 장군! 강감찬은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을 맞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거란군은 다시 수도인 개경을 향해 곧바로 진군하였고,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강감찬은 낙성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에 낙성대(落星垈)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으며, ‘낙성대’란 ‘별이 떨어졌다’ 하여 붙여진 지명(地名)입니다. 인헌공 강감찬은 대평 7년 임오에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현종 통화 27년 기유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습니다. 이해 11월에 거란의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습니다. 임금은 금성으로 피난하고, 하공진으로 하여금 그들을 돌아가도록 강화하게 하였습니다. 성종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는데, 이 모든 책략이 강감찬으로 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서울특별시-관악구--낙성대공원-강감찬장군-동상.jpg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공원-강감찬장군 동상

  

임금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그를 위로하고 치하 했습니다. /-“경술년에 오랑캐의 소란이 있어, 병기가 깊숙이 한 강가에까지 이르렀도다. 그 때에 강감찬의 책략(策略)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라 사람이 모두 야만인의 옷을 입을 뻔 하였도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소배압은 4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 강동 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강감찬은 귀주에서 이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낙성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입니다. 강감찬의 애국 충정을 기리고자 서울시에서는 1973년에서 1974년까지 2년간에 걸쳐서 이곳을 정화하면서 사괴석(四塊石)으로 409m의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낙성대입니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맞배지붕의 안국문(安國門)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되었는데,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1974년 6월 10일 안국사가 완공되자 서울시에서는 그 날짜로 공원 명명! 이 공원의 총면적은 3만 1350㎡이나 성역화된 곳은 1만 1550㎡이며, 안국사의 면적은 237.6㎡입니다. 공원 경내에 5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입구에 큰 연못을 파서 구름다리를 놓았으며, 성역화 경내에도 낙성교가 있습니다.

 

오늘날 강감찬 출생에 대하여 세상에 전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감찬 설화(說話)“가 있습니다. 이 문헌(文獻)설화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용재총화)·(신증동국여지승람)·(海東異蹟)· (記聞叢話) 등에 전합니다. 그전(口傳)설화는 전국 각지에서 널리 전승되었습니다. 그의 출생에 관한 단편적 일화, 즉 어느 날 밤 한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므로 그 아기를 데리고 와 길렀는데 그가 곧 강감찬입니다.

 

서울특별시-관악구--낙성대-유허비.jpg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유허비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만나 보고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부적으로써 호랑이를 물리친 일화는 <용재총화>·<신증동국여지승람>·<기문총화>에 실려 있으며, <해동이적>에는 출생담과 함께 호랑이퇴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구전설화는 문헌설화에서 나타나는 강감찬의 그와 같은 이인적(異人的) 면모를 더 확대해서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출생담 .성장 시 일화 벼슬한 이후 일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출생담에 관하여 문헌설화에서는 강감찬이 문곡성의 화신이라고만 기록한 반면에, 대부분의 구전설화에서는 강감찬이 여우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강감찬의 아버지가 훌륭한 태몽(胎夢)을 꾸었고, 또는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여우 여인과 만나서 관계를 맺어 낳게 된 아이가 강감찬 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시조(始祖)나 위인 등에서 나타나는 출생설화와 일치합니다. 성장시 일화에 관하여는 대표적인 것이 강감찬이 곰보가 된 일과 귀신을 퇴치한 일입니다. 강감찬은 스스로 얼굴이 너무 잘생겼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마마신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추남(醜男)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특별시-관악구--낙성대-안내문.jpg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안내문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친구 딸의 혼례식에 가면서 강감찬은 얼굴이 못생겼다고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강감찬은 몰래 혼인식에 참석하여, 사람으로 둔갑해서 신랑 행세를 하는 짐승(귀신)을 퇴치함으로써 그의 비범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벼슬한 이후의 일화는 더욱 다양합니다. 강감찬이 소년 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 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 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한편, 호랑이를 쫓은 설화는 그가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고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民怨)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설화는 설화일 뿐이지만 강감찬 설화는 많습니다.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설화를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우리 마을의 옛 설화를 읽어보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과거의 민족적 영웅을 기억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자랑스런 우리 한민족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용웅.jpg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저작권자ⓒ선데이뉴스신문 & newssunday.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