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어르신네와 젊으신네"

<법무법인 율촌 고문>
기사입력 2014.06.0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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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네와 젊으신네] 김의기/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국을 현수막으로 뒤덮던 지방 자치제 선거가 끝났다. 선거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라고 한다. 하지만 투표 결과를 보면 어르신네와 젊으신네의 대결이 점차 첨예화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세대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65세 이상의 노령인구는 600만명으로 총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베이붐 세대가 시작되는 55년생 이상은 1,320만명으로 이미 총인구의 1/4을 넘어섰다. 55년생은 만 59세지만 대부분 은퇴한 실정인데,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곧 120세가 된다고 한다. 55년생은 60년 이상을 무위도식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에 직면해 있다. 과연 젊은신네가 자기 보다 많은 어르신네를 60년이상 순순히 먹여 살려 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노령화 문제는 전혀 이슈가 아니었다. 정치권이 닥쳐올 재앙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세대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피하면 피할수록 해결책은 점차 어려워지게 된다. 이미 유럽은 늦은 것 같다. 국가의 재정이 국민 총생산의 50%를 점하고 있고 복지제도에 길들여져 있어,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 버렸다. 세계적 금융위기란 혼란 속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 남부 유럽에서는 복지제도를 전면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은 받고 있다. 유럽 중에서도 경쟁력이 강한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은 비교적 장기간 버틸 수 있겠지만 결국 복지제도의 축소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 정부의 세출예산 규모는 360조로 국민소득의 26%를 점하고 있어 유럽보다는 아직 부담이 훨씬 덜하다. 이 때 현명한 정책을 취한다면 국민이 큰 고통을 겪지 않고도 노령사회의 도전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국민은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새 정치의 깃발 아래 헌 정책만 난무하고 있다고 할까?

제헌 헌법은 헌법학자 유진오가 원안을 썼다. 하지만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헌법은 국민들이 직접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은 그 시대의 국민들의 수준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수준에 맞지 않는 헌법을 제정해본 들 헌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 제헌헌법도 초안은 의원 내각제∙국회양원제를 설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제헌국회의장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제∙국회단원제로 바뀌었다. 헌법뿐 아니라 정치도 국민의 수준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아직 정치권이 노령사회 문제의 논의를 회피하는 것도 우리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르트르는 1905년이었고, 카뮈는 사르트르 보다 8살 아래였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스키가 동시대인으로 19세기의 문학을 대표하였고, 볼테르와 루소가 18세기 최대의 지성으로서 나란히 혁명의 시대를 준비한 것처럼, 이 두 사람은 파시즘이란 야만과 싸우기 위해 실존주의 문학을 이끈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들이다.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점령한 파리에서 살았다. 그 암울한 시대에 레지스땅스 운동을 하며 카뮈는 '이방인'과 '시지프스의 신화'를 쓰고, 싸르트르는 ‘구토’와 '존재와 무'를 썼다. 이성이 상실된 시대에 그들은 자유와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 쳤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파리떼’는 인간 자유에 대한 가장 위대한 송가라고 생각된다. ‘파리떼’의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아르고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그녀의 연인은 왕위를 차지해 버렸다. 성인이 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우스 신은 그는 그가 세운 질서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 신들을 심판해서는 안돼. 신들은 그들만의 비밀과 그들만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네.
이 말과 함께 제우스 신은 번개를 쳐서 질서에 대한 도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신의 명령을 거부한다.“번개가 큰 돌을 쳤어. 그게 어떻단 말이야. 이 번개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 사람의 명령도 신의 명령도 듣지 않아.”

이것은 무신론이 아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과 인간은 별개의 존재이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신의 정의가 있다면 인간의 정의도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이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신도 어쩔 수 없다고 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불사의 신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자유 앞에 무력하게 된다고 하는 고백이다. 제우스의 말을 들어보자.

“일단 자유가 인간의 마음에 횃불을 당기는 순간, 신은 그 앞에서 무력해 지는 거야. 이제 모든 문제는 인간과 신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문제가 되고 말아.”
설사 신이 창조주라고 하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오레스테스가 제우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나는 나의 자유이죠. 당신이 나를 창조한 그 순간 나는 이미 신의 소유가 아니게 되는 거죠.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죠. 우리는 각자 혼자예요.카뮈도 행동하라, 반역하라 고 주장한다. 반역이란 주어진 삶의 조건을 부정하고 보다 좋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노예상태, 정신적 오류들, 육체적 정신적 테러와 싸우는 것이다.

복지가 커지면 복지 행정의 비용이 늘어난다. 복지 전달 과정에서 누수 현상도 만만치 않다. 또한 아무리 완벽한 복지제도를 만들어도 복지 사각지대를 피할 수 없다. 노령화 현상은 인류에 닥친 전례 없는 도전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세대간 전쟁을 피하려면 새로운 철학, 새로운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모두 사르트르, 카뮈의 자유인이 되야 한다.

[박희성 기자 phspkc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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