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문학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이 한다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기사입력 2014.06.2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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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이 한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온 국민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온 국민이 극심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 것일까? 세월호 때문일까? 필자가 24년간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작년에 귀국했을 때 눈앞에 전개된 거대한 서울의 위용을 보며 느낀 것은 엄청난 자부심이었다. “내가 없는 새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 위대한 나라를 만들었구나!” 필자가 떠날 때만 해도 서울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았다. 서울은 63빌딩을 제외하곤 별로 볼 것 없는 도시였다. 그 새 서울은 세계 최대의 도시와 어깨를 겨루는 메트로폴리탄이 된 것이다. 단 20년만에 이런 도시를 건설한 민족이 우리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럼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폭삭 내려 앉은 것일까?

우울증의 배경에 있는 것은 분노라고 생각된다. 그 깊은 분노는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우리경제가 4%대의 성장으로 주저 앉았던 참여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계경제는 2008년이면 무너져 내릴 버블에 취해 5% 대의 성장으로 흥청망청 성장하고 있는데 우리 경제는 4%대로 기력을 잃은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 모든 원인은 좌파정부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해외에서 언론을 통해 감지한 국민의 절망감은 마치 온 국민이 집단적 정신분열증에 빠진 것 같았다. 드디어 국민들은 선거에서 좌파정부를 몰아 냈다. 좌파정부만 몰아내면 다시 747 화려한 고도성장은 회복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4%대의 성장이 지속되기만 해도 국민들이 만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빠진 것이 있다면 왜 4%대의 성장에 만족해야 하는가에 관한 설명이다. 국민들은 좌파정부를 몰아내면 고속 성장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고, 아직도 그 선택이 잘못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왜 우파정부가 고도 성장을 달성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의 부재가 온 국민이 빠져 있는 심한 우울증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우파정부건 좌파정부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4%뿐인가? 대안은 없는가? 우파도 좌파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새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중대한 역사적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또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국민들이 이 질문을 애써 회피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거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허탈감, 그 증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무력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고, 필자의 저서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직접적인 대안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 우리의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어떻게 사고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국민들의 인문학 수준을 시급히 향상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서양 문학/철학의 흐름을 보면 역사상 3 번의 번성기가 있었다. 한 시대에 갑자기 위대한 작가들이 대거 출현하여 문학/철학의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킨 3번의 분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분출은 기원전 4-8세기 호머, 에스차이루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 플라톤 등이 나타나, 서양 문학의 토대를 마련했던 기간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그 구성과 문장과 주제가 거의 완벽한 수준이어서 지금 평가하더라도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괴테는 ‘후대의 작가들은 그들의 신발도 들 자격이 없다’고 높이 평가한다. 이 때 아테네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페르시아를 물리쳐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했다. 경제적 번영은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워 오르게 했다. 동양과 구분되는 유럽 문명의 독자성은 이 때 마련된 것이었다.

그 후 권력의 중심은 아테네에서 로마로 넘어 갔지만 문학/철학이란 점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17세기 초반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그 시대까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17세기 초반 당시 합스부르그 왕가는 스페인, 네델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유고, 헝가리를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는 합스부르그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이태리, 프랑스 등 유럽 대륙에서 필사의 항전을 벌인다. 해적(해군의 전신은 해적임) 출신 드레이크 부제독이 이끄는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해군은 1588년 마침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침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1648년 네델란드와 벨기에, 1668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스페인은 대제국의 깃발을 내리게 된다. 이 때부터 유럽의 역사는 대륙의 패권을 노리는 프랑스와 대륙에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영국이 격돌하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된다. 이 시대의 작가들은 이 웅대한 역사적 드라마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이 시대에 영국은 세익스피어를 낳았고, 스페인은 세르반테스를, 프랑스는 몽테뉴를 낳았다.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 제1권은 1606년에,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1601년, 몽테뉴의 수필 제1권은 1580년에 출간되었다.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가 같은 날 에 죽은 것도 재미있는 우연인 것 같다.  둘은 1616년 ‘생 조오지의 날’에 숨을 거두었다. 볼테르와 루소를 이어, 위고, 스땅달, 발작 등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단연 18세기와 19세기 문명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불어는 세계의 가장 문명한 언어로 인정받게 되었고, 파리는 세계문화의 수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 문학이 갑자기 꽃피기 시작했다.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푸시킨, 고골, 트루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에프스키를 비롯한 천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러시아 문학이 유럽에서 단연 앞서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일이 과학과 음악, 철학에서 앞서 나가고 문학에서 러시아가 앞서 나가게 되자 문명의 중심은 북상하기 시작했다.        

문학/철학은 그 민족이 짊어지고 나가는 역사의 무게와 비례하여 발전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고민할 것이 많은 민족이 문학/철학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자유 평등 박애의 민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피의 혁명을 수행하였고,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통일이란 꿈의 나래를 폈다. 이 꿈과 꿈의 좌절은 많은 훌륭한 문학을 낳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였지만 이 민족의 운명은 남다른 것이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유럽 지배의 야욕을 꺾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까.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대군도 러시아에서 막혔고 결국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레닌은 또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계급 없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자기들이 이 엄청난 역사적 과제의 맨 선두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이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서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왜 우리가? 그것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문화의 중심지 프랑스, 혹은 유럽의 강자로 갑자기 부상한 독일이 짊어져야 할 운명이지, 미개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운명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민족은 이것이 자기들이 헤쳐나가야 할 과제임을 알았다. 러시아 문학은 이래서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이란 거대한 용광로 속을 통과하며 러시아 민족은 자기들이 겪어야 할 역사의 시련을 견뎌낼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스페인의 세계 패권을 막아야 하는 운명을 맞아, 거대한 세익스피어의 문학을 낳았다. 하지만 이후 명예혁명을 거치며 안정된 보수정치를 성립, 문학적 과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대한 역사적인 과제와 전혀 상관없는 극히 개인적인 문학을 낳게 된다. 대서양을 사이로 고요한 섬처럼 격랑의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도 개인적인 문학을 발전시켰다. 역사와 운명과 싸우는 거대한 문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민족은 자본주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위대한 문학/철학을 발전시킬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우리의 문학/철학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들이 창조한 위대한 언어에 접해보라. 스파크가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면. 

[박희성 기자 phspkc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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