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이건 정치가 아니다.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기사입력 2014.08.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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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는 선거 때에만 자유가 있지, 선거가 끝나자마자 국민은 다시 노예가 된다.” 이것은 장 자크 루소가 지금부터 250년 전인 1762년에 출판된 ‘사회계약론’에서 한 말이다. 그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에 의해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투표에 의해 의원이 선출되는 민주정치라고 자랑했지만, 영국 민주주의 실체는 몇몇 지배세력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게임일 뿐이라고 루소가 비꼰 것이다. 7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평균 투표율은 32.9%였다. 이렇게 투표율이 낮은 것은 선거가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철저히 지역정치이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과 나머지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결 구조이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무슨 정치를 하건 무슨 정책을 내세우건 선거의 결과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나온다. 그러니 누가 선거에 관심을 갖겠는가? 출마자들은 큰 이권이 걸린 한판 승부이니 한 명이라도 지지자를 투표장으로 끌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국민들은 투표 결과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번 보궐선거나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대부분의 출마자들은 자기 선거구에는 빚만 있으니 중앙정부에 가서 돈을 구걸해서 사업을 하겠다고 공약한다.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산더미 같이 부채가 쌓여 있는데 지역 대표가 모두 중앙정부에 부채를 지우겠다고 공약하고 나섰으니, 이건 정치가 아니라 비극,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국가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라고? 그게 뭐지? 국가는 가장 차가운 악마 중에서 가장 차가운 것이야. 그건 냉혹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하지. ‘국가가 곧 국민이다, 라고 하는 거짓말 말이야. 국가가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것은 거짓말이고,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훔친 것이지.” 니체는 언론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병들어 있고, 가끔 더러운 것을 토해 낸다. 이 더러운 토사물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이야.” 니체의 말처럼, 신문이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싣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정부가 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라고 지적해야 국민들이 건전한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아닌가? 멀쩡한 거짓말도 대서특필해주니 정치실종의 책임은 언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언론에 대한 최대의 찬사인 것 같다. 하지만 정부 없는 신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신문은 숙명적으로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를 이용하고 정치에 이용 당하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5년 ‘미국 민주주의론’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신문 없이는 자유도 없다. 하지만 신문이 있으면 사회 안정은 유지될 수 없다’고 썼다. 그 당시에도 이미 신문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맹위를 떨쳤나 보다. 1830년대를 그린 소설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찾아 내고도 바로 체포하지 않고 증거 수집을 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수일 전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신문 보도가 났고 이 때문에 경찰이 신중을 기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장발장은 꼬제트와 더불어 탈출에 성공한다. 신문 없이 자유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시끄러워도 참아야 하나 보다.
미국 정치는 재미있는 양상으로 발전되고 있다. 아니 정치 그 자체가 실종되었다. 언론 때문이다. 미국 언론은 FOX로 대표 되는 수구 보수언론과 CNN과 뉴욕타임즈로 대표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어정쩡한 언론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 언론의 분열은 미국민의 분열, 미국 정치의 실종을 부르고 있다. 보수성향의 국민들은 보수언론 이외의 어떤 다른 매체도 상대를 하지 않는다. 이 매체는 엄격하게 말해서 기사를 보도하는 언론이 아니다. 기사라고 하는 이름 아래 사실상 논평을 내 보낸다. 보수성향의 국민들은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기사와 논평만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시청률도 아주 높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시청자는 중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어쩌란 말이냐’는 절대 부정과 대립의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정치가 아니다. 소통과 대화는 불가능하고 비웃음과 막말만 일방통행으로 오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부재를 넘어 정치 혐오증과 정치 기피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정치노선을 분명히 하는 공세적 언론은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직도 정치할래?’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치한다고?’ 하고 겁을 주는 것 같다.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은 인권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데모한다고 세상이 바뀔지 아나?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한지 아나?” 고 비웃던 사람이었다. 정치에 무관심 했었다. 그가 말 한대로 세상은 말랑말랑 하지 않다. 권력은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지만 계란은 결국 바위를 이긴다. 바위는 죽은 물질이고 계란은 살아 있는 생명이니까. 생명은 죽음을 이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종종 생각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장관급 기구가 두 개나 더 생기고 부총리도 한 명 더 생길 모양이다. 안전 담당 공무원을 더 많이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참사를 겪고도 공무원을 더 채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과연 우리 사회가 결여한 것이 공무원의 숫자일까?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공무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군가? 그들의 영혼은 온통 조직 도표에서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일에만 사로 잡혀 있다! 시시콜콜한 일을 하느라고 너무 바빠 중요한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런 공무원 늘여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박희성 기자 phspkc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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