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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내자 대한민국!" 국난극복 국민대회 결성
"힘을 내자 대한민국!" 국난극복 국민대회 결성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힘을 내자 대한민국, 코리아" 온 국민이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적, 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난극복 국민대회’가 열려 화제를 모르고 있다. (사진=국난극복 국민대회 홍보대사 가수 황충재씨와 행사 관계자들의 모습) 국난극복 국민대회(공동대표 김윤영)는 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응원하고 단합에 앞장서기 위해 국난극복 국민대회를 결성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전국시도민향우회 총연합회(대표총재 임향순)가 주최하고, 전국지역신문협회(중앙회장 김용숙)가 주관했다. 국민연대를 결성을 위한 선포식에서는 최근 대하소설 ‘백양(白暘)’을 출간한 박태옥 화백이 평생동안 그린 100억원 상당의 작품들을 기부했다. (사진=박태옥 화백이 자신이 국난극복 국민대회를 위해 기부한 작품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또한 홍보대사로 위촉된 복싱챔피온 출신 가수 황충재씨는 자신의 노래 ‘힘을내자! 대한민국’을 불러 코로나 위기극복을 위해 모든 국민의 동참을 흥겹게 호소했다. 김윤영(작가) 국난극복 국민대회 공동대표는 “몸도 마음도 움추러드는 어려운 시기에 금모으기 운동으로 IMF위기를 극복한 대한민국의 단결력을 떠올리며 코로나위기를 극복하는 한민족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국민운동에 대한 호응이 뜨거워서 그 시작을 알리고자 오늘 선포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난극복을 위한 국민의 실천사항 5가지를 제시했다”며 “이번 기회에 온 국민이 함께 힘을 모아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사진=국난극복 국민대회에 참여한 관계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윤영 공동대표가 제시한 실천사항은 ▲온 국민 스스로 방역에 앞장서며 건강지키기 ▲이웃사랑 재능기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국민단합 ▲소외계층 취약계층 보살피기 ▲착한 소비운동으로 경제살리기로 총 5가지다. 한편, 국난극복 국민대회의 본 행사는 11월 중에 개최될 예정이다.
향군정상화추진위, 김진호 회장 '연임 결사 반대' 성명 발표
향군정상화추진위, 김진호 회장 '연임 결사 반대' 성명 발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이상기 향군정상화추진위원장이 향군 김진호 회장의 연임 시도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팔순의 김진호 회장이 아직도 자신의 연임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보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이상기 향군정상화추진위원장은 28일 언론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이상기 위원장이 발표한 김진호 향군 회장의 연임시도 규탄서 전문이다. 존경하는 1천만 향군회원 및 대의원 여러분! 그동안 저희가 3차에 걸쳐 일부 시‧도 회장들이 '김진호 회장의 연임을 위한 정관개정안' 상정을 시도한다고 경고했고, 그 결과 이들이 이를 포기하였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꺼진불도 다시 보자고 하였으나, 아직도 이들이 연임의 군불을 때고 있다기에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대의원 여러분! 주지하시는 바와같이 김회장은 서울남부지검으로부터 '향군상조회 매각비리 의혹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7월에는 20명의 수사관으로부터 휴대폰을 뺏기는 등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최근에는 라임사태 주범 김○○이 법정 증언에서 "(자칭 김진호 향군회장의 오른팔이라는 장○○을 통해) 향군회장에게 8억원을 건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남부지검 검사가 "(라임사태 주범 김○○으로부터 리베이트 명목으로 42억원을 받은) 장교출신 장○○이 향군임원들과의 친분을 통해 향군상조회 매각작업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며 '장'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한바 있습니다. 그리고 검찰은 그간의 진술과 증거를 바탕으로 향군지휘부ㆍ C법무법인 등의 상조회 매각비리 의혹을 계속 파헤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의원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일 오후 개최예정인 본회 이사회 때 '김회장의 연임을 위한 정관개정안'을 상정하기에 앞서, 일부 시ㆍ도 회장들이 서울회장 초청으로 오전에 만나서 이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입니다. 또 김회장은 이번에 시ㆍ도회 사무처장과 시ㆍ군ㆍ구회 사무국장을 각급회의 대의원에서 제외시키는 정관개정안을 상정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이것도 전국의 사무처장과 사무국장의 입을 막음으로써 '김회장의 연임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보고 있으며, 김회장 연임 시도에 앞장서는 일부 시ㆍ도 회장들 역시 조용히 '김회장의 검찰수사'를 지켜볼 것을 당부드립니다. "아서요.. 말아요.. 연임일랑 꿈도 꾸지 마시고, 검찰수사나 잘 받으시라!", 이 말씀입니다. 2020년 10월 28일 향군정상화추진위원장 '향군열사' 이 상 기, 전국대의원연합회 공동대표 노 병 성 배상.
[언론개혁] “포장할 필요 없다, 돈 때문” 돈이 말아먹은 '한국 언론'
[언론개혁] “포장할 필요 없다, 돈 때문” 돈이 말아먹은 '한국 언론'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지난 22일 열린 이소룡(가명) 前(전) 기자의 ‘나도 한때 공범이었다’ 북토크쇼를 돌아본다. 돈과 권력이 잠식한 언론계. 말하고 또 말해도 끝이 없지만 이제는 진짜 변화해야 할때가 온듯하다. 평소 ‘언론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에게 이번 북토크쇼는 꾀나 귀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짦은 시간이었지만 언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어줬다. 앞서 ‘기레기와 기러기’ 시리즈를 연재하며 한국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 자주 짚었지만, 경험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다. 실제 대형 언론사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기자의 증언은 어떤 사람의 말보다 의미가 깊고 신빙성이 있었다. 당일 북토크쇼에서 저자가 했던 말들을 다시금 소개하고자 한다. 이소룡 기자는 멋쩍은 모습으로 강단에 등장했다. 그는 뉴스타파(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한상진 기자의 선배로, 한상진 기자는 과거 00일보에 근무할 당시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소룡 기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기자라는 자부심 때문”이라며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하며 언론의 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기자는 올해 있었던 조국 사태를 언급하며 언론과 검찰의 유착, 중립성을 잃은 언론의 물타기, 폭력 보도를 짚었다. 또한 권력기관으로 전락한 검찰 또한 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언론의 위기를 ‘보도의 위기’와 ‘경영의 위기’ 2가지 측면으로 보았다. 매체 환경의 변화로 대다수의 언론사가 돈벌이, 즉 매출에 치우치게 돼 ‘공공의 알권리’를 대변하기보다, 이익을 위한 사기업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이어 “10~20년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며 “과거의 언론사들은 기자와 직원들의 월급을 줄 정도가 됐다면, 언론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언론사들이 자본을 불리기 위한 이익사업에 뛰어들며 그 본질을 잃게 됐다”고 했다. 아울러 “이대로 가다간 모든 언론사가 10년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며 “기자 개인부터 크고 작은 언론사까지 모두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상진 기자는 당시 이슈가 됐던 사건을 집중취재하기 위해 해외취재를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00일보에서 어떤 이유 때문인지 출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고심하던 이 기자는 한 기자를 '휴가'로 처리했고, 덕분에 한 기자는 취재를 갈 수 있었다. 이 기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한상진 기자는 “선배님이 많은 것을 말씀하셨지만, 결론은 하나다. 돈이다. 돈 때문에 모든 언론사가 무너졌다”고 일축했다.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 그것만이 무너진 말의 세상, 언론을 회복하는 길이다.
[인터뷰] 다시 촛불 속으로... 민주화는 끝나지 않았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2
[인터뷰] 다시 촛불 속으로... 민주화는 끝나지 않았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2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슴의 외침을 따라 3번의 징역과 중정(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탄압 아래 파묻힌 청춘. 하지만 다시 촛불로 꽃피운 그 삶을 들여다 본다.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Q. 아이고... 참 파란만장했네요. 그래서 시민운동권으로 나오신 건가요? 86년 석방되었지만,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약 1년간 휴식을 취했어요. 87년 민주대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각각 잇달아 전개되었어요. 그 이후 김영삼 선생과 김대중 선생이 분열했을 때 저는 실생활에서의 진보를 목표를 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 이름으로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내자고 주장했어요. 또, 김영삼 정당이건 김대중 정당이건 민주연합정부를 만드는데 동의한다면, 공동실천최소강령을 만들어 함께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주개혁, 민생복지 등을 실현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시간이 부족하여 제가 백기완 선생을 직접 대통령 후보로 호명하여 추대했어요. 기적처럼 무소속후보로 등록이 되었어요. 유세과정에서 큰 주목도 받았어요. 특히, 후보단일화진영과도 연대했어요. 그리하여 김영삼 후보가 민주연합정부를 만드는데 동의한다면서 공동강령을 만들기 위한 협상장에 나오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백기완 후보 진영 내부의 다양한 의견차이 등으로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어요. 게다가 87년 대선시기 활동으로 88년 4월경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약 20일 정도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74년과 88년 두 차례 당했던 고문에 대한 기억이 뒤섞여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요. 약 10개월 후 석방되어 1989년에는 전국민족운동연합, 90년에는 민중당에 동참했고, 94년부터 약 2년간 경실련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96년 꼬마민주당에 동참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돈이 없어서 정치를 계속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96년부터 정계에서 손을 뗐어요. 이후 전국소기업연합에 동참하여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상담을 시작했어요.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6~7년 동안 경영 상담 회사를 운영했죠. 민족‧노동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잘 이해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Q. 그렇군요... 2016년부터 운동권에 다시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또 다시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해요.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보면,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자꾸만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니까 시민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달리 사회를 바꾸고 싶은 열망이 큰 편이에요. 96년부터는 후원회원으로 만족하면서 활동욕구를 억누르고 살았는데 열정과 의지가 남아 있으니까 또 하게 됐어요. 직접적인 계기는 2016년 박근혜 前(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지켜보면서 큰 감동을 느낀 것이었어요. 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새로운 감회로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뜨거워졌어요. 약 30년 동안 시민‧사회 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바람을 맞고 실패한 줄 알았던 장면들이 스쳐가면서 이러한 시행착오와 희생 끝에 “민주화가 조금씩 오고 있구나. 진정으로 우리 사회와 국민이 변하기 시작했구나. 대격변기가 도래했구나.”라고 느꼈어요.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들도 저를 부추겼어요. 그래서 역사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시민운동을 시작했어요. 2017년 3일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죠. “그때 박근혜 대통령을 공천한 이들에게 책임을 져라”고 촉구했어요.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개혁연대민생행동을 만들었어요. 개혁연대민생행동의 제안으로 2017년 대선시기부터 2018년 지방자치선거까지 국민개헌운동에 앞장섰어요. 이 과정에서 약 25개 단체가 국민주권개헌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어요.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도 핵심적 요구는 개헌이었어요. 그 결과, 절차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됐지만, 실질적 민주주의 또는 내용적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직접민주주의의 3대 핵심요소인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이 이뤄져야 해요. 개헌안과 법안 등을 국민 스스로 발의할 수 있고, 이들 안건은 국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숙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등도 정착시켜야만 해요, 우리 사회는 모두 함께 공존해야 하거든요. 이를 위해 지방자치선거 이후에는 약 100여개 단체가 사안별로 연대하는 단체인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이 만들어졌어요. 촛불계승연대는 국민개헌, 적폐청산, 남북평화를 위해 노력했어요. (사진=송운학 대표의 시민단체운동 활동 모습) Q. 이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 시민운동권과 정치권의 이질감이 크잖아요. 왜 만리장성처럼 서로 담을 쌓고 있으려고 할까요? 낮에는 시민운동을 하고, 밤에는 유력한 정치인을 남몰래 따로 만나 로비를 하는 등 각자도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어요. 부패한 담합과 거래 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나라 만들기, 정의 등을 위해 정치인과 시민운동가가 투명하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왕래하고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나라에 필요한 인재라면 정치로 떳떳하게 입문할 수도 있어야 하고요.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는 노동조합 가입률이 저조해요. 전체노동자 대비 노조원 수자가 작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는 원칙적으로 기업에 고용되어 있어야만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어요. 법적으로 강제된 기업주의 노조의 한계죠. 그러다보니 노조가 대기업과 정규직 위주로 조직되었어요. 대기업 이하의 중소‧하청기업 노동자와 특수고용자, 비정규직, 영세소상공인 분들의 이익은 대변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어요. Q.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앞으로 공익과 관련된 모든 일을 감시하는 단체를 만들 생각이에요. 공익감시는 민권으로 보장되어야만 하고, 민권을 행사하는 행위이자 민권을 회복하는 의무이기도 해요. 인권이 개인의 권리라면, 민권은 개개인이 일정 규모 이상 모였을 때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권리죠. 일정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죠. 공익감시권리 역시 일정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촛불정부라는 의미가 퇴색되고 있거든요. 현 정부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국회, 대법원 등 거의 모든 걸 다 장악했는데 개헌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시민과 국민이 나서서 정부와 지자체가 공익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를 해야만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서울과학기술대학원 공공정책학 박사과정까지 수료했고, 학위논문을 작성해야만 하는 시간이 1년 정도 남았어요.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받아야만 하는지 여부에 대해 현재 고민하고 있어요. Q.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민주화운동이나 시민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어 있었을까요? 그밖에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만약 제가 아버님 말씀에 따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상고라도 다니면서 독학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법조인이 돼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또, 학생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대학자는 못 되었을지 몰라도 대학교수는 돼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저 스스로를 훈련시키며, 성찰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늘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올바른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정의(正義)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사진=밝게 웃고 있는 송운학 대표) 오늘 말을 참 많이 했네요. 하지만, 워낙 파란만장했던 삶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내용이 많네요.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에 또 한 번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종료)
[인터뷰] 학자를 꿈꿨던 서울대 문리대학생, 반(反)유신 운동에 뛰어들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 학자를 꿈꿨던 서울대 문리대학생, 반(反)유신 운동에 뛰어들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슴의 외침을 따라 3번의 징역과 중정(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유신의 탄압 아래 파묻힌 청춘. 하지만 다시 촛불로 꽃피울 그 삶을 들여다 본다.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성명은 ‘송운학’입니다. 저는 충남 아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시골이었죠.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전기가 안 들어왔으니까요. 저희 집은 당시 중농에 속했습니다. 아버님이 땅을 좀 가지고 계셨어요. 제가 신화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이 되던 해 형님께서 외가댁이 있던 대전공전에 합격하여 공부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저 또한 형님과 함께 공부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전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충남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를 부수석으로 합격했고요. 고교시절에는 문과에서 선두를 다투는 등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에 진학했어요.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Q. 시민‧민족 운동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시민‧민족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안병욱 교수님(당시 숭실대 철학과)의 강연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생각이 많이 트였죠. 제 생각으로는 도산선생님께서 평생 살아오신 삶 속에서 실천하신 사상이 매우 새롭고 진취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신민회(新民會), 흥사단 등을 창립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 시민의식, 근대적 주권자의식으로 무장된 새로운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고 존경하게 되었고, 저 역시 도산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흥사단(興士團)은 1913년 5월 13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흥사단은 공립협회와 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가 흥사단의 전신이다. (위키백과) 그래서 흥사단 대전고 아카데미(결성준비모임)를 만드는데 동참했어요. 거기서는 지덕체, 정의돈수 등을 학습하고 실천했습니다. 5분 스피치(연설), 윤회악수 등과 같은 자기훈련, 집단훈련, 상호학습 등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새로운 엘리트 양성과정이었죠. *정의돈수(情誼敦修)는 정답고 의좋은 것, 친애와 동정의 결합, 사랑, 두텁게 닦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서로 사랑하기 공부’, 사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출처 : 음악이 있는 세상, 다음 블로그) 고교시절 제가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던 집안이 대단한 부잣집이었는데, 책장에 출간된 책과 월간지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민족‧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게다가, 1969년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3선 개헌, 71년 사법파동 등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죠... 격변의 시기였죠. 특히, 72년 대학 1학년 때 ‘7.4 남북공동선언’이 있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했어요. 당시 정부는 “멸공해야한다”며 국민을 가르쳐놓고 국민 몰래 자기들끼리 만나 통일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니까요. 접촉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 100일 뒤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어요.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 같이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어요. 원래 공부를 해서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안창호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자유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죠. 73년도 10월 2일 대학가에서 최초의 ‘반유신 민주화 학생운동’이 벌어졌어요. 저는 사실 처음에는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점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되었죠. 학생들이 시위를 기밀로 했기에 처음에는 정부도, 경찰도 아무도 몰랐어요. 시위가 일어난 뒤 30분쯤 후에야 경찰이 출동했죠. 경찰이 30여명 정도는 구속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은 군대로 끌고 갔어요. 강제징집을 해버렸어요. 제가 다니던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시위가 일어나자 서울대 법대와 서울대 상대 등 다른 단과 대학도 시위를 했죠. 언론통제로 한 달 정도는 시위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차차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구속사실을 알리는 단신으로 언론도 간헐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알게 됐죠. 그러자 서울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였어요. 최초로 제가 주체적으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작은 일이었어요. 즉, 구속학우와 선배들을 석방하라는 취지로 유인물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어요. 그 시기 유명한 재야인사들이 유신정권에 반하는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을 선포해 ‘중앙정보부’에 모든 권한을 주게 되죠. 또,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심판할 수 있도록 긴급조지 2호도 선포해서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도 설치했고요. *중앙정보부 :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수사기관. 약칭 중정(中情). 그때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우연히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봤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죠. 사람마다 다른 이유와 동기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인 시위를 하자는 분위기가 이심전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디어 시위예정일이 밝아왔습니다. 1974년 4월 3일이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해서 집회와 시위를 개최하기는커녕 유인물도 교정에 운반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선배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용도 읽어보지 못한 유인물을 제가 운반해서 하숙집 주인에게 폐기해달라고 부탁하고 피신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배포하려던 유인물에 약칭 민청학련이라 부르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명이 인쇄되어 있었어요. 박정희 정부는 당일 저녁 긴급지휘 4호를 발동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청학련은 반국가단체며, 주모자 등을 사형 등에 처한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당시 반국가단체란 이북이나 이북과 연결된 조직을 말하는 것으로서 국민다수가 이를 믿지 않았어요. 그러자 ‘자생적 빨갱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어요. 그래도 국민다수가 믿지 않자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단체를 날조하여 이북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이 ‘인혁당’이라는 반국가조직의 배후조정 아래 ‘민청학련’이 만들어졌다고 선전했어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인민혁명당 사건 :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두산백과) 저 역시 4월 5일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어요. 학교에서도 제적당했어요. 하지만, 학우들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학내시위를 계속했고 국내외 민심이 이를 지지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형 집행정지를 명해 약 1년 만에 풀려났죠. 석방은 되었지만 곧바로 ‘사회안전법’이 만들어졌어요. 희대의 악법인 이 법에 따라 저는 아무런 재판도 없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늘 감시를 받았어요. 또, 보안감호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저를 투옥시킬 수 있었어요. 형집행정지, 요시찰대상자, 신원조회 등 이중삼중으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했어요. 심지어는 아무런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무단으로 제 거주지에 침입하여 이 잡듯이 뒤지는 일도 발생했어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빨갱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낙인이 찍혔죠. 하지만,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과 비교하면, 그것은 약과였어요, 왜냐하면, 전두환 시절에는 이른바 ‘녹화(綠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빨갱이를 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적나라한 국가폭력이 수반된 이른바 ‘프락치양성사업’이었어요. 민주화운동에 연관된 친구와 선후배 및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빈민운동가, 종교운동가 등을 팔도록 강요했어요. 그 때 양심의 가책으로 또는 양심을 지키고자 자살한 사람도 있고 국가폭력에 시달리다가 의문사한 젊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녹화사업 : 강제 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으로, 전두환 정권 1981년~1983년 사이 시행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과 관제 프락치 활동을 통한 정보 수집을 위해 당국이 실시한 강제징집과 군복무 중 ‘특별정훈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육체ㆍ정신적 폭력이 수반된 정신교육 등을 가리킨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녹화사업은 있었으나 단순 입대에서 그쳤다. 그 이후 학력과 전과를 속이고 공장 등에 취업했으나, 한 직장에서 6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었어요. 요시찰 대상자로서 ‘형 집행정지’라는 신원조회서를 직장에 제출했다가 제가 공장에 취업했다는 것이 정보기관에 알려지면, 다시 투옥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공장을 전전하면서 돌아다녔지만 원래 목적인 노동운동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했어요. Q. 당시 연애나 결혼을 할 여력도 없으셨을 것 같은데... 그리고... 다행히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동참했던 아내와 79년 11월 결혼했죠. 그리고 신혼생활 약 6개월 후에 ‘5.18광주민주항쟁’이 발생했어요. 전두환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들을 사전에 검거할 것이라는 정보를 하루 전에 입수하고 저는 피신했어요. 5월 17일 자정 경이었어요. 임신 중이었던 아내 말로는 5월 18일 새벽 4시경 홀로 있는 신혼집에 자칭 정보과 형사라는 4∼5 명이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군요. 사복차림이라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1∼2명이 군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보안사 군인도 있었던 것 같다더군요. 공개수배자가 안 되었을 뿐 집 앞에는 경비초소가 세워졌고, 비공개수배 대상자로서 약 120일 동안 피신했어요. 숨어서 지냈던 곳이 화장실 아래 굴과 같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기억이 나요. 그때 종아리에 똥독이 퍼져 그 후 3년 동안을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죠.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심리학과 교수님이 보증을 서고, 담당형사가 저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등하교 시간과 수업시작시간부터 종료시간까지 심지어는 강의실 이동시간까지 동행하는 조건으로 그해 9월 중순 비공개 수배가 해제되었어요. 형사와의 동행 및 경비초소 감시 아래 졸업했고, 졸업 이후에도 보이지 않게 감시가 지속되었어요.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기사, 기능사 등 자격증을 5개 취득하여 기능직 노동자로서 다시 공장 등에 취업했어요. 85년 5월 말까지 이른바 현장노동자로 생활했어요. 당시 노회찬(前 정의당 의원), 심상정(전 정의당 대표) 등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기여하고자 공장생활을 했어요. 그 해 6월 22일 저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를 자비로 설립했고, 초대소장으로 약 36일간 근무했어요. ‘안양지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는 당시 전태일 기념사업회 김문수 사무국장의 제안으로 안양노동상담소가 만들어졌다는 취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에게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이를 인용한 몇몇 책들이 있어 김문수 선배가 제안한 것은 명칭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싶어요. 그 당시 위장(僞裝)취업을 선택한 지식인들은 노조결성 및 파업 등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고, 정보기관이 위장취업자들을 색출하여 심한 탄압을 개시하던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구속자와 해고자가 속출했어요. 저를 신뢰하던 후배들과 노동자들이 저에게 자문과 상담 등을 요청했어요. 상당수는 종교적인 보호막에 들어가면,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대의가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 그러한 외피 없이 진보적인 시각에서 운영되는 노동상담소를 독자적으로 개설하라고 저에게 요구했어요. 그래서 제 거주지였던 안양에서 (가칭) 송운학 안양노동상담소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소식을 들었던지 어느 날 평소 교류가 있던 김문수 선배가 연락이 와서 만났어요. 자신은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있고, 장기표 선배가 집행위원장이며, 문익환 목사가 이사장인데 돈도 없이 홀로 상담소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상담실장이건 교육실장이건 원하는 직책을 다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있는 창신동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상근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그러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라는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그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헤어졌어요. 김문수 선배가 집요할 정도로 여러 차례 요청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양이 원래 보수적인 지역이라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너무 자극적이었는지 이 이름 때문에 저는 너무 심한 탄압을 받았어요. 형사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상담소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죠. 거절하자 건물주 아들이 선배라고 부르는 깡패 2명과 함께 와서 사무실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을 때려 부수었고, 똥물도 마구 뿌려댔어요. 심지어는 깡패 2명이 각각 제 두 팔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얼굴 등에 인분을 바르고 나중에는 날카로운 과도로 제 목을 겨누면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라고 협박했어요. 함께 근무하던 상근자가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경찰은 약 1시간 뒤에야 출동하더니 민사상 문제라면서 다시 약 1시간 동안 수수방관했어요. 특수살인죄가 발생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상당히 긴 시간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자 형사들이 비로소 건물주 아들과 깡패 2명을 뜯어말려 귀가시켰어요, 냄새도 심했고,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이 파손되어 청소와 원상회복 및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면서 사무실 앞 도로에 천막을 치고 앉아 2∼3일 농성했어요. 또, 유인물도 만들어 뿌리고 집회계획도 세우는 등 항의했더니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주최한 죄 또 그러한 집회 예비음모죄 등을 뒤집어 씌어 구속시켰어요. 10개월 넘게 복역했어요. (2편에서 이어집니다)
개신교 목사 '찍어내기'… 목사고시 교단 '입맛대로'
개신교 목사 '찍어내기'… 목사고시 교단 '입맛대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개신교 내 부문별한 목사양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동시에 교단 별 목사고시도 입맛대로 제 각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광훈 ‘6개월 속성 목사안수 신학대학원’… 가짜 목사 논란 (사진=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담임목사) SBS 탐사보도 ‘끝까지판다’는 전광훈 목사가 세운 ‘6개월 목사 안수 신학대학원’에 대해 15일 보도했다. 전 목사가 자신이 세운 신학대학원에서 속성 과정으로 6개월만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짜 목사 안수’ 의혹이 불거졌다. 게다가 이런 전 목사가 보수교단의 대표격인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前 회장이었던 점은 더욱 교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SBS 보도에 따르면, 전 목사 외에도 목사 자격을 남발하는 신학대학원이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목사가 되기 위한 자격, 정말 공통된 기준은 없는 것일까? 목사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목사 안수를 받거나 해당 교단에서 주최하는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교계의 관례에 따르면, 한 교단에서 목사가 되려면 최소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한 교계 관계자는 “해당 교단의 신학교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서 3년, 전도사, 간사 등 수련 기간 3년을 거친 뒤 목사 고시를 통과해야 비로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교계의 관례 또한 이미 무너지고 있다. 한 사이버 신학대학원 관계자는 “교재만 읽고 수업은 듣지 않아도 목사가 충분이 될 수 있다”며 “시험도 자료실에 다 있으니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했다. 또한 한 신학대학원 총장은 “학비 수백만 원을 내 거나 헌금을 내면 1년 안에 목사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예수 하나 돼라 했지만, 수갈래 나뉜 ‘목사고시’ (사진=각 교단의 목사고시 공고) 목사가 되기 위한 시험인 ‘목사고시’도 각 교단마다 제각각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을 비롯한 일부 장로교단에서는 목사고시 전 ‘강도사’라는 직책을 위한 ‘강도사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에서는 교단이 주관하는 수련목회자고시와 연회가 주관하는 목사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이 외 다른 교단들도 각자 교단에서 지정한 방식으로 각자 목사를 배출한다. 예장합동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직영신학대학교 관련 다수 교육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이후 ▲설교 ▲논술 ▲성경 ▲교회사 ▲헌법 ▲면접 등 목사고시 과정을 통과하고 ▲목사고시 청원서 ▲이력서 ▲소명소견 및 신앙고백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기감의 경우, 2006년을 기준으로 교단 연 회시 목사안수 예정인 수련목회자와 과거 목사고시 탈락자들이 목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다. 과목은 ▲성서신약(구약, 신약) ▲조직신학 ▲역사신학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교육학 ▲실천신학(목회학, 상담학, 예배학, 설교학, 선교학, 전도학) ▲면접 등이다. 성결교의 경우, 교단 규정에 따라 ‘전도사의 자격을 갖추고 지방회에서 전도사 승인을 받은 자’만이 목사고시에 응시할 수 있다. 특히 성결교는 과목의 대부분이 교회와 성경보다 자기 교단과 교회에 대한 주제로 이뤄져 있다. ▲성결교회의 역사와 신학 ▲성결교회 목회1,2 ▲성결교회 교육목회 ▲구약성경 ▲신약성경 ▲설교 등이다. 각 교단마다 제각각이며 그 과정도 복잡한 목사고시. 하나 같이 예수를 믿지만, 모두 하나 같이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2015년 뉴스앤조이가 목사고시 응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대부분이 “지금의 방식으로는 목사고시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며 “목회자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고시의 목표가 돼야 하는데, 말 그대로 과정을 위한 과정이 돼 버렸다”고 했다. 이쯤에서 한국 교계를 이끄는 책임자들은 교단 목사고시를 볼게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는 어떻게 말씀을 받아 제자들을 가르쳤는지 한 번 더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향군 "북한 ICBM 위협 위험, 안보전략 바꿔야”
향군 "북한 ICBM 위협 위험, 안보전략 바꿔야”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향군은 북한이 노동당 75주년 열병식 당시 새 전략무기 IBCM(대륙간탄도미사일)을 공개한 것에 대해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며 15일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북한 노동당 75주년 열병식 관련 영상 캡처) 향군은 “북한은 한국에 위협이 되는 초대형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 및 에이태킴스 미사일, 대구경 조종방사포 등 신종 무기뿐 아니라, 퍼레이드에 참가한 군인들의 복장과 장비들이 과거에 비해 향상된 변화를 보이며 전력을 과시했다”며 “이는 우리 한국에 대한 위협이 더 켜졌다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의 대비전략은 북한의 당 창건 75주년 행사 이후를 기준하여 달라져야 한다”며 “북한이 이번에 선보인 새로운 무기체계를 갖추기 이전에 계획된 것으로 사실상 새로운 대응전략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북한의 핵과 ICBM은 미국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며 “ ICBM을 개발하는 것은 북한이 대남적화 전략을 시행함에 있어 대남군사력의 우위를 달성함은 물론 전략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또한 향군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 “시기가 아니라 조건에 맞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최우선 사안인만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만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향군 측이 발표한 성명서 전문이다. (사진=재향군인회) <성 명 서> 북한은 지난 해 연말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과 ‘충격적 실제행동’을 공언한 이후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을 통해 새로운 전략무기로 평가되는 신형 ICBM 및 SLBM을 비롯한 초대형 방사포, 장갑차 등 신형 전술무기들을 공개했다. 특히 대한민국에 직접 위협이 되는 초대형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 및 에이태킴스 미사일, 대구경 조종방사포 등 이른바 ‘신무기 4종 세트’ 뿐 아니라 퍼레이드에 참가한 군인들의 복장과 장비들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향상된 변화를 보여주며 전력을 과시했다. 이는 우리에 대한 위협이 증대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됐다. 이에 향군은 북한이 그 동안 여러 차례 남북․미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비핵화 가능성을 내비치던 외양과 상관없이 핵개발을 비롯한 전략무기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등 이번에 내보인 전력 증강이 한반도의 향후 전작권 전환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안보위협에 직면했다고 판단해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책을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향군의 입장을 밝힌다. ▲북한의 전략전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북핵 문제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은 우리의 핵심 국익이고 세계평화와도 직결되는 과제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남북간 신뢰구축 및 군비통제를 포괄적으로 추진하고 이들 세 축 사이의 상호추동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국가안보 목표 중 하나다. • 그런데 지난 10일 북한의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보면 그동안 비핵화를 위한 남북.미북정상회담 등의 대화와 약속이 있었지만 정작 북한은 핵개발에 전력하여 소형화, 경량화, 규격화, 다종화 등을 순조롭게 진행하여 더 많은 핵을 비축하고 이를 운반할 수 있는 수단도 더욱 발전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의 대남 전략전술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대비전략은 북한의 당 창건 75주년 행사 이후를 기준하여 달라져야 한다! •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유화적 대남 메시지를 밝혔으나 북한은 핵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세계를 위협하고 이미 그 수위는 위험을 넘어 우리의 대응을 어렵게 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평화를 위한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평화란 강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 실체는 상대가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수준이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 대한민국의 방어체계는 ‘당 창건 75주년 행사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대북 전략은 북한이 이번에 선보인 새로운 무기체계를 갖추기 이전에 계획된 것으로 사실상 새로운 대응전략이 요구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따라서 냉철하고 면밀한 검토를 통한 새로운 국가안보전략 구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평화도 대화도 가능하다. ▲북한의 핵과 ICBM은 미국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 최근 일부 정치인이나 전문가들은 북한의 ICBM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고 미국만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개발한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유엔 제재와 내부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핵과 ICBM을 개발하는 것은 북한이 대남적화 전략을 시행함에 있어 대남군사력의 우위를 달성함은 물론 전략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 • 대한민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이번에 선보인 ‘신무기 4종 세트로 이들 무기체계는 주한미군의 심장부인 평택·오산기지는 물론 경북 성주 사드 기지,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F-35 스텔스기가 배치된 청주기지 등을 정밀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유사시 ICBM으로 미국을 위협하고 신무기 4종 세트로 우리를 직접 공격 시 그 피해는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 따라서 북한의 대남적화전략 의도를 명확히 식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에 대한 국가안보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시기’가 아닌 ‘조건’에 맞춰 신중하게 접근하라! • 우리 정부는 그 동안 안정적인 전작권 전환을 위해 한미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전작권 전환은 6·25전쟁 이래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다져온 우리 안보의 근본 틀을 바꾸는 중대한 변화다.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최우선 사안인만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만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에스퍼 장관은 지난 14일에 열린 한미국방장관이 참석한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모두발언을 통해 “한국으로의 전작권 전환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양측은 현재와 같은 굳건한 연합방위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연례 SCM 및 MCM을 통해 전작권 전환 이행 상황을 주기적으로 평가·점검해 나가기로” 하였다. • 우리 정부의 전작권 전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함께 국가주권과 군사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은 이미 동맹국 미국은 물론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건’에 의한 상황이 미충족됨에도 불구하고 ‘시기’에 집착하는 것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향군은 전직 연합사령관 등 미 고위 장성들도 한국군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전작권 전환의 적기가 아니며 조건에 의한 추진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북한의 당 창건 행사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의 위협이 확인되었고 SCM에서 미측이 ‘시기’보다는 ‘조건충족’을 언급했음을 유념할 때 전작권 추진은 향후 미측과 충분히 협의 후에 시행해야 할 것이다. 국가안보 제2보루인 1천만 향군은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전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음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루빨리 우리의 국가안보전략을 재검토하여 군의 방위역량강화에 만전을 기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아울러 향군은 북한의 당 창건 75주년 행사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 안보상황을 고려해 전작권 전환이 ‘시기’가 아니라 ‘조건의 충족’에 기반해야 함을 유념하여 국가안보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것임을 천명한다. 2020.10.15 대한민국 재향군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