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형덕, 사람에 대한 “차별적 근거”...누구에게도 없어야

가장 어려운 것은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부응” 하는 것
기사입력 2017.08.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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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연구소 김형덕 소장
[선데이뉴스신문=정성남 기자]19세의 나이에 북한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탈북을 결심했다는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김형덕 소장의 속 깊은 곳에는 자유라는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 김 소장은 북한의 사상적 제도권 교육과는 다른 교육을 가정에서 받았다고 한다.  즉, 북한체재를 찬양하는 교육을 받는 것이 북한 사회의 현 주소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북한체제는 소멸되어야 한다고 배웠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 계열의 조선민주당 출신이다. 이러한 할아버지를 북한의 노동당은 입당을 권유했지만, 기독교 신자로 이념이 맞지 않다며 여러 번이나 거절했다. 결국 평생을 탄광에서 보냈다.

이런 김형덕 소장의 집안은 항상 체제에 저항적이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교육받았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며 김일성 주석이 집 밖에서는 '태양'이지만, 집안에서는 한줌도 안 되는 'xx'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대물림 교육을 받아 온 김 소장은 자신이 북한에 산다는 것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어렸을 때의 꿈인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온 한반도평화연구소 (www.facebook.com/atbppc) 김형덕 소장을 어렵게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탈북 년도와 탈북 동기에 대해

김형덕 소장의 유년시절은 비교적 행복했고, 소년기는 가난에 신음했다며 청년기(만16세)에 준 군사 조직인 돌격대에 입대하고는 비정상적 생활의 연속이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예를 들어 국가의 부름으로 입대한 돌격대인데 건설작업에 필요한 공구나 자재를 민가에서 훔쳐서 사용하는 일이 보통이었고, 부대 내 부정비리가 만연하고, 일단 문제가 되면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그런 실태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속도전 돌격대에 복무를 하던 중 자신에 대한 미래가 불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  어려서의 꿈이나 희망은?

“어려서는 파일럿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청년기로 성장하면서부터는 당 간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말에 이어 더불어 북한은 체제의 특성상 개인 장래에 대한 선택권을 국가가 결정하는데, 그 국가라는 실체는 출신 성분을 근거로 진로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거든요. 남한처럼 선택의 자유가 있고 경쟁을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구조가 아니니까요. 물론 남한 역시 꿈을 이루어 가는데 여러 장벽과 제약이 있지만, 선택 자체를 제한받지는 않으니까요. "출신배경을 인간에 대한 차별의 근거나 기준으로 하는 사회는 아주 잘못되고 비문명 국가입니다. 북한이 스스로 주장하는 사회주의 목표인 ‘민주주의/반봉건주의’에도 배척되는 가치"이기도 하고요 

► 북한에서 주민 전체가 세뇌교육을 받는데 대체로 어떤 방식과 어떤 교육을 주로 받는지?

“유치원, 소학교,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 전문학교, 대학교 모두에서 일관된 세뇌교육"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유치원에서 최초로 배우는 말이 <김일성대원수님 고맙습니다>입니다. 심지어 외국어 첫 단어와 문장도 그런 내용부터 배웁니다. 각 학교 모든 과목 모든 단원마다 김일성/김정일의 교시가 인용됩니다. 예를 들어 지리과목에 <하천>시간에 맨 처음 시작하는 줄에 하천에 대한 김일성의 교시가 반드시 언급되고 하천 안내가 시작됩니다. 이런 것 외에도 산에 가면 주요 감상 포인트나 지점에 지도자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찬양문구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김 소장은 “각 도시와 마을의 중요 지점(남한으로 치면 마을 안내소나 주요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에는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 연구실이 있다며 여기서 주민들에게 매 주말마다 사상교양학습을 시킨다”고 밝혔다. 아울러 “주요 영화나 드라마의 결정적 중요한 부분에서도 지도자에 대한 찬양 멘트가 반드시 나온다며 북한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뇌를 피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 세뇌에 의해 만들어진 북한 주민들 사상이나 관념이 바뀌기가 힘든 것인지?

세뇌는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북의 현재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말이죠. 다만 세뇌를 시킨다고 다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특히 외국에 나와서 살다 귀국하는 북한사람들은 세뇌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다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기에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모두가 이념이나 가치가 동일하지 않듯이 말이죠. 어느 사회나 다른 경험을 가진 소수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있지요.

김 소장의 발언으로 유추해볼 때 “남한의 영화나, 잡지, 군 대북 확성기 방송 등을 몰래 숨어서 접하고 북한주민들은 보통의 북한주민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93년도에 탈북을 했는데 어언 25년이 되었다. 한국사회를 바라 본 25년의 시간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 눈앞이네요. 그 사이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김 소장은 이어 “민주주의가 상당 수준으로 진전되었고, 97년 역사적 여야 정권교체, IMF경제위기,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02년 한일월드컵,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개시, 한미 FTA, 광우병파동, 작년에 서울광장 촛불시위까지 많은 역사적 경험을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함께 하였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로 남한은 세계사적 유례가 전무한 역사를 창조해가는 그런 나라인 것 같다”며 “대단한 국민들입니다. 공공질서와 교양, 개방성(외국어 등), 환경부분만 보완하면 세계 최정상의 선진국이나 다름없습니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 탈북 당시 어려움과 정착과정은

탈북과정에 4번의 투옥과 탈옥(2회는 북한에서, 다른 2회는 중국과 베트남에서)과정을 겪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과 환희, 도전의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남한에 처음 왔을 당시 북한과의 시대적 격차(40년)로 인한 문화적 갈등과 좌절감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다”고 밝혔다. 또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권발급이 제한되어 중국으로 가서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려 했는데 출국할 수 없어 밀항하다 붙잡혀 고생도 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김 소장은 그 후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취업과 결혼, 자녀 양육, 연구소 설립과 통일관련 사회활동, 미국 연수, 중국에서의 북한 연구, 필리핀 세부에서의 생활을 거쳐 오늘에 이루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 과거 정치권에서 일하였다, 그 동기는? 그리고 어떤 일을 했는지?

2001년 탈북자 최초로 국회의원 정책비서로 국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 때 로타리클럽 장학금을 받았고, 그 계기로 분기에 한번 북한관련 발표를 하도록 권유받았습니다. 두 어 번 하니까 북한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발표를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국회도서관에 다니면서 북한에 대해 다시 공부하여 발표를 지속할 수 있었고, 장학금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로타리클럽 회장님의 배려였던 것 같고,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졸업하면서 든 생각이 적어도 북한문제(특별히 탈북자문제) 만큼은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북한출신이 좀 더 잘 안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국회에서 정책비서관으로 일을 하였구요. 국회에서 자유이주민 정착금 지급방식(당시 일시불)의 문제, 탈북자 호칭의 문제(자유이주민으로의 변경), 취업지원 제도 개선점을 보고서로 발간하여 관련 정부부처에 건의하기도 하였습니다. 3년 후 제가 건의했던 정착금, 취업 장려금 문제는 법률로 반영되었고, 호칭문제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호칭하는 것은 그분들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고 긍정적 인식을 주기 위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북에서 오신 분들도 자유사회에 자유의사를 가지고 이주해 왔기에 그분들이 남한사회에 온 취지와 목적에 걸 맞는 호칭으로 불리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 과거와 지금의 한국 정치나 정치인에 대하여 한 말씀 한다면?

정치는 사회일반의 수준을 반영하는 지표니까 우리사회 발전만큼 진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에 대한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훌륭한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만 하여도 국민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봉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보기 좋습니다. 아울러 “요소 요소에 훌륭하고 역량 있는 정치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고, 나름의 방식대로 열심히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해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만족 하시는지?

주로 북한관련 현안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정보보고서 형태로 작성하고 있고 만족스럽습니다. 그 외 통일관련 사회활동도 계속하여 전개할 생각입니다.

►  사드배치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원론적으로 사드배치는 전적으로 대한민국 주권에 관한 문제로 미국이나 중국이 관여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남한 정부와 국민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면 배치를 거부하면 될 사안입니다. 단,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국제화가 된 국가라 관련국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초기에 지나치게 무 전략,무 계획적으로 급작스럽게 결정하여 현재까지 내외의 반발을 가져온 건 아쉽습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이유는?

김 소장은 "북한은 이미 내부적으로 상당히 시장경제 형태로 사회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전환기 국가"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지금보다 발전을 이루려면 좀 더 개방적이고 외부투자도 유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개방을 하기에는 현재 지배체제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고 인식할 겁니다. 그러한 위험들을 미국과 평화협정도 맺음으로써 보장받고, 또 미국으로 받는 각종 제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것입니다. 반면 적당한 갈등 국면을 조성해 내부 결속에 활용하는 면도 강하고요. "남한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남한문화 유입이 북한체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관계를 이끌어가야 하는 복잡한 상황입니다. 그런 다목적 용도로 미사일을 활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라고 설명했다.

►  한국정부의 대응방침은?

원칙적 입장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북한체제를 흡수통합 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북이 평화적 교류의 장으로 나오면 남북 모두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교류를 증대시켜 나가야 합니다. 물론 커다란 재해나 인도적 지원요소가 발생하면 상호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지원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북한체제가 급작스럽게 붕괴되면 성공적인 통일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북한이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북한이 요구하는 협력(우리민족끼리 미국을 배척하고 협력하자는)은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국제화된 한국의 국가 구조상 가능하지도 않다"며 이같이 밝혔다.

► 탈북자 권익과 정착에 관한 조언을 한다면

일부 탈북관변단체가 불필요한 정치적 편향성을 나타내 국민들의 심기를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많은 탈북단체들이 자신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열심히 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은 평균적으로 40년 정도의 시대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착과정에 여러 난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자유이주민들이 커다란 문제없이 우리사회 일원으로 잘 살아가고 있고, 이는 통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자유국가의 가장 큰 장점은 선택의 자유가 있고, 노력의 열매 또한 개인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너무 조급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늦게 경쟁에 참여한 사람일수록 통상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삶을 경주하는게 좋다고 봅니다. 이어 그는 "남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첫 세대가 희생을 거친 후 다음세대가 그 사회의 주요세력으로 진입하는 게 보통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남한에서 아주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이같이 조언했다.

► 임지현의 재 입북에 대해 말한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신으로 남한에 온 자유이주민들의 경우 남한에 연고도 없는데다가 우리사회에 깊은 뿌리가 없기에 이곳 생활에 안착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다른 나라로 갈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독의 경우도 탈동독자 전체의 10%정도인 5만 명 내외가 다시 동독으로 돌아갔습니다. 북한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탈북한 사람이 아니라면 북으로 다시 못 돌아갈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 통일에 대해 박근혜의 통일론과 문재인의 통일론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박근혜정부의 통일론은 허황된 ”구호통일론“이었다는 게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추가 설명이 필요치 않지요. 문제인 정부의 통일론은 아직 시작단계에 있기에 평가가 이릅니다. 평화적 점진통일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원칙은 올바르게 정했으나, 중요한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권말기쯤에 노력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되겠죠.

► 통일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할 일이 있다면

통일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이왕 할 것이라면 성공적으로 해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해야 하며, 성장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남북이 가진 이점을 활용해 상호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북한은 남한이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으로 보내는 물류만 통과시켜주어도 경제발전에 상당히 보탬이 되는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제조업 환경은 동북아시아 최고수준이라고 할 만큼 매력적입니다. 자원도 상당하고요. 북한을 지나치게 우리화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현명한 방식입니다. 북한체제 안정을 해칠 수 있는 방식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북미, 남북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북한을 안정화시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정화가 된 북한과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오랜 시간을 거쳐 통합으로 가는게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남북한은 수십년 시대차가 있어 교류하는 과정에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저 개인적으로는 북한과 남한이 평화적으로 관계를 이루어가는데 긍정적 촉매제 역할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 3만 탈북(북한이탈주민)민 시대에 함께 살아가며 그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반면 정부나 국민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주민들은 남북한을 동시에 살기에 경험 면에서 남한 분들보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 남한사회에서 일정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남한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합니다. 김 소장은 "장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북이 공존번영의 길로 나아가는데 긍정적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반면 북한의 극단적 약점을 공략하는 갈등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 "현명하게 선택하여 본인과 사회에 이로운 삶을 사시길 당부"했다.

김 소장은 이어 “자유이주민들은 이미 우리에게 미리 다가온 통일의 파트너”들 이라며 그들과 지혜롭게 조화를 잘 이룬다면 북한전체 주민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김형덕 소장은 “아내, 두 딸과 함께 현재의 행복한 삶을 지속하고 싶다”며  “우린 이미 성공적인 통일을 경험한 가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소장은 서울태생인 아내와 함께 ”대한민국이 북한과 성공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 가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여 힘을 보태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이에 대비한 대책 마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또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인식도 달라져야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을 탈출한다는 것은 탈출비용도 문제지만 실패할 경우 여러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탈북자의 90%가 경제적 이유에서 탈북 했고, 정치적, 사상적 등의 이유로 탈북한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탈북과정이나 이후 남한사회 적응하는 과정에 겪는 정서적 물리적 고충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탈북행이 줄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의 식량난 외에도 그 외 문화적 요소들이 원인일 것이다.

오늘 만난 김형덕 소장은 어려서는 파일럿이 꿈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고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다시 중국과 홍콩으로 이어지는 수 개국의 국경을 목숨을 담보로 한 체, 사선을 넘나들며 4번의 옥고를 치른 끝에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가 말한 탈북의 이유는 배고픔이 아닌 자유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했던 것이다. 김 소장은 기자에게 공부는 한 만큼의 성과가 있지만 탈북보다, 배고픔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부응하여 자유를 성취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내내 김 소장의 이 한마디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번 임지현 씨의 재 입북 소식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무엇때문일까?

남한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남한사람들 조차도 변화하는 사회에 부응하여 살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물며 수 십년 시대차가 있는 사회에서 온 북한 자유이주민들이야 어떻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제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3만 북한자유이주민에게 보다 넓고 깊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공존의 사회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정성남 기자 csn8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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