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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생명나무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가칭), 생명의료씨스템의 작은 발걸음...
[선데이뉴스]생명나무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가칭), 생명의료씨스템의 작은 발걸음...
지난 11월 2일 생명나무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가칭) 발기인회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세우서울약령시빌딩 2층에서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식과 발기인총회를 가졌다. 이날 발기인대회에는 김용복(사단법인 아.태 생명학 연구원 이사장),임종한(인하대 의대 교수,한국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 연합회 회장),허인회(녹색드림 협동조합 이사장),강현실(동대문구 마을넷 부회장,한양대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생명나무 의료협동조합 공동추진준비위원장인 김치형 가정의학과 의사와 임진철 청미래재단 이사장 등 의료계와 지역사회인사,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NGO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날 발기인 총회에서 발기인 공동대표로 선출된 김치형 가정의학과 의사는 “협동조합 창립총회 전까지 길을 잘 닦아서 많은 분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소임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또한 “서울약령시 순회왕진활동기반의 생명나무 의원(가칭) 설립,지역건강 실천사업,교육수련병원 프로그램과 의사 연수 및 재교육사업,양방-자연의학(한방)-인문예술치유의학과의 융합과 협력에 관한 연구등을 추진해나가겠다”고 포부도 밝혔다. 김치형의사는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와 SK그룹 유비케어 본부장,부산 갑을병원 원장을 엮임한 가정의학과 의사이다. 발기인회는 이날 설립 취지문을 통해 “땅이 멍들고 사람을 죽는것을 외면하고 돈과 소비가 부추기는 욕망에 끌려다니게 하는 낡은 문명에서 탈주해야 한다”했다. “의료협동조합 설립과 생명의료체계의 구현을 통해 이웃과 함께,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할 계획”이라 밝혔다. 생명나무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가칭)은 현대의학과 전통의학 그리고 인문예술치유를 융합하는 통합의료씨스템을 모색해 나갈것이라 했다. 지역과 공동체기반의 마을공동체의학을 천착해나가려한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날 발기인 총회를 마침에 따라 법적인 지위를 갖게 된 발기인회는 본격적인 조합원 모집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조합원이 되려면 1구좌 당 5만원의 출자금을 내고,조합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것이다. 자세한 문의사항은 발기인회 사무국(http://cafe.naver.com/saengmyoungnamu)으로 문의하면 된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글을 쓰는 이유가 남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본격적인 글쓰기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우선 사해(思海) 라는호를 지었다. 생각하는 바다 - 부산에서 나고 부산에서 자라 매일 바다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다같이 넓고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노트에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경을 처음 썼을 때, ‘갑자기 사물이 0.1미리 짧아졌다. 이젠 나는 영원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는 등의 얘기였다. 내가 그 때 왜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노트는 나의 최초의 습작노트였던 것이다. 자기 글을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는 쓰는 이 자신이 아닐까? 몇 번을 고쳐 쓰다 보면 수없이 여러 번 자기가 쓴 글을 읽게 된다. 글쓰기가 고조에 오를 땐 자기 글 이외에 다른 글은 별로 읽을 시간도 없다. 자기가 쓴 글만을 읽는 게 나의 지적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의문이 될 때도 있다. 어쨌든 자꾸 고치다 보면 글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이만하면 꽤 잘 쓴 것 같은데 내 글을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궁금한 생각이 든다. 이 때 친구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우정을 앞세워 내가 쓴 글을 읽어 보라고 수줍게 내밀게 된다. 친구들이 ‘야, 정말 잘 썼다’고 경탄 해줄 것을 기대하며. 친구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이 우정의 친구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글의 열렬한 독자이며 비판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어른이 되어서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들이 읽었던 내 초고가 우리가 만날 때 좋은 화제거리가 되었음은 긍정적인 효과이기도 했다. 그들의 논평 덕분에 그 초고는 더욱 풍성해 졌다는 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생애에 가장 지독한 글쓰기는 습작기간에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작가들에겐 밤을 꼬박 세우며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불태우며 자신의 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과연 재능이 있을까를 회의하며, 꽉 막힌 글을 놓고 절망에 몸부림 치던 그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소설을 보면, 무명의 작가가 처음 만난 지하철 집표원에게 자기 소설의 구상을 설명하고 2시간 동안 소설을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과연 주인공을 죽여야 하는지, 살려야 하는지 하는 문제였다. 그는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했고 누군가와 그 문제를 토론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 역에서 표를 받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가련한 집표원은 미친 사내의 열렬한 얘기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명작가는 마침내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글은 쓰는 것은 생각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생각을 많이 한다. 잠들기 전에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때의 생각은 아주 단편적인 경우가 많고 구체적으로 잘 진전되지 않는다. 펜을 잡아 쓰기 시작해야만 생각이 구체화되고 줄거리가 만들어 진다. 산책을 하며 생각에 몰두할 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섬광 같은 아이디어 혹은 한편의 영상이다. 머리를 텅 비우고 캄캄한 밤에 성냥불을 키듯 아이디어 혹은 영상이 떠 오르기를 기다리며 여러 생각의 줄기들을 더듬고 만지는 것이다. 결국 섬광이 번쩍! 하지만 산책 중에 이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내용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내 방의 문을 잠그고 컴퓨터의 활자판을 두드려야만 비로소 아이디어가 구체화 되어 나간다. 글은 노동이다. 글은 천재의 번쩍임으로 갑자기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썼다 지우고 고치고 만들어 가는 노작의 결과이다. 노동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글은 위장으로 쓰는 것이다.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가며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자 한 자 하나도 빼지 않고, 차근차근, 비약 없이, 독자가 이건 알고 있겠지 하고 미리 가정하지 말고, 어린애에게 의미를 설명하듯, 한 문장에는 한 개의 생각만 담고, 한 문장에 절대 두 개 이상의 생각을 담지 말고, 빼곡하게 쓰는 것이다. 글은 고독하다. 말을 할 때는 듣는 이의 눈을 보며 한다. 듣는 이의 눈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이해가 될 때까지 설명할 수 있다. 듣는 이의 바디 랭기지가 아니라고, 동의하지 못한다고 하면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듣는 이들이 좋다고 하면 신바람을 내며 거품을 튀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은 독자와 상호작용이 단절되어 있다. 글은 활자화 되어 차갑게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독자들이 그 글을 오해해도 바로 잡을 길이 없다. 그 글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무력하다. 글은 폭군적이다. 쓰여져 있는 글은 수정할 수 없다. 이제 내 생각이 바꿨다고 변명할 수도 없다. 오해된 글은 오해된 채로 그기에 서 있다. 글은 밋밋하다. 말에는 억양이 있다. 속삭이기도 하고 고성을 지를 수도 있다. 글에는 소리도 강약도 없다. 글에 억양과 강약과 속삭임과 고성을 넣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다. 묘사하는 대상을 그대로 내밀면 안 된다. 대상을 끌어 올려야 한다. 하늘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대상은 더욱 고양되고, 주어진 현재를 뛰어 넘고, 이상화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 후에야 글을 써야 한다. 이렇게 쓴 글은 또 뜸을 들여야 한다. 솥에 귀를 대고 밥이 잘 익어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지를 잘 들어야 한다. 밥에 깊은 맛이 들어야 한다. 씹을 때 푸석하지 않고 쫄깃 쫄깃 감칠 맛이 나야 한다. 글이란 밥상은 이렇게 차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글을 쓰는 행위만이 내가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글을 쓰는가? 삶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삶의 진실은 문학과 철학의 오랜 노력에 의해 하나씩 밝혀져 왔다. 이제 그 진실은 거의 밝혀진 것 같다. 마지막 한번의 노력으로 삶의 진실이 밝혀 진다면, 그 때 나의 글쓰기도 끝날 것이다. 그날까지 나의 언어로 말하겠다. 나만의 언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나의 언어로 말할 것이다.
]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3
]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3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그 동안 2회에 걸쳐 동안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 “레미제라블”이 어떤 작품인지를 소개해 왔다. 이 번이 제 3회인데 이것으로 레미제라블에 대한 소개를 완결하고자 한다. 마리우스는 기에노르망 백작의 손자였다. 기에노르망 백작은 사위가 나폴레옹 군대에 들어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사위와 의절하였고 마리우스와 접촉도 못하게 했다. 역사책을 통해서 아버지가 프랑스의 영웅이라는 것을 안 마리우스는 집을 떠난다. 가난을 이기며 법대를 졸업 변호사가 된다. 마리우스가 20세가 되던 해 파리는 혁명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1830년, 1832년의 혁명이 그것이다. “혁명의 열기는 서서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파리 전체가 아니 전 프랑스가 열기에 휩싸였다. 비밀결사가 인체의 암처럼 전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사회문제보다 꼬제트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고전을 읽으면 좋은 점의 하나는 책에서 순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욕망이 무한대로 분출하고 그 욕망의 만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지만 19세기는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사람들이 순진하던 시절이었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순수한 사랑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마리우스는 파리의 룩셈부르그 공원에서 장발장과 함께 산책을 하던 꼬제트를 만난다. 룩셈부르그 공원은 파리의 리옹역 주변에 있는 거대한 공원이다. 다이어너 여신의 조각으로도 유명한 이 공원은 수많은 파리지앙의 사랑을 받은 곳이다. 파리에 간 루소도 이 공원에서 자주 산책을 하곤 했다고 그의 고백록에 기록하고 있다. 마리우스는 꼬제트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 매일 꼬제트를 보려고 산책로에 앉아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다닌다. 꼬제트도 아름다운 청년에게 마음을 설레며 말없는 눈빛으로 응답할 뿐이다. 이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믿기 힘들지만 사실 사람의 외모는 상당부분 내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사람의 표정은 그의 내면세계를 꽤 분명하게 표현한다. 첫눈에 반했다고 해서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장발장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우는 마침내 장발장의 집을 찾아내고 정원에서 꼬제트를 만나게 된다. 마리우스를 보고 꼬제트는 너무 기쁘고 놀라 그의 품안에서 기절 한다. 그리고 황홀한 첫 키스, 하지만 첫 키스는 안타까운 마지막 키스가 되고 서로 손을 잡고 손에 키스하는 것 이외에 육체적 접촉은 없게 된다. 파리는 시민 봉기로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마리우스는 친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바리케이드로 간다. 이때 마리우스가 꼬제트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장발장은 꼬제트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긴 것이다. 꼬제트는 장 발장의 행복의 모든 원천이었는데 꼬제트가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장발장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장은 그 편지를 보고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바리케이드가 가장 위험한 장소였던 것이다. 마리우스가 죽으면 그 둘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끝나고 장발장의 행복은 유지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편지를 보자마자 장발장은 바리케이드로 간다. 바리케이드에서 장발장은 놀랍게도 자베르를 만났다. 스파이로 시민군에 잠입해 있던 자베르가 신분이 탄로나 시민군들에 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민군 지도자는 자베르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장발장은 자기가 자베르를 처형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자베르는 자기의 최후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동안 얼마나 착한 장 발장을 괴롭혔던가?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데리고 조용한 데로 갔다. 그리고 그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주고 '자유다, 가라'고 말한다. 자기를 살려준다는 말에 자베르는 할 말을 잊고 멍하게 그를 쳐다 보았다. “자베르는 시장 쪽으로 걸어 갔다. 몇 발작을 걸어가다가 자베르는 몸을 돌려 말했다. '이것 정말 당황스럽군요. 당신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베르가 사라지자 장 발장은 공포를 한방 쏘았다.” 진압군이 밀어닥치자 봉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도 큰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업고 근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땅을 살폈다. 마침내 맨홀을 찾아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맨홀 뚜껑을 열고 파리의 하수도로 들어섰다. 파리의 하수구는 주요 도로를 따라 지하에 건설된 대 건축물이다. 지하세계에 이런 거대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지만 컴컴한 파리의 커다란 하수구는 위험한 곳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며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업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한다. 마침내 하수구를 벗어났을 때 경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수구를 통해 봉기꾼들이 탈출을 할 줄 알고 경찰이 요소 요소 출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경찰은 바로 자베르였다. 장발장은 자베르에게 죽어가고 있는 마리우스를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한다고 사정을 봐 달라고 부탁한다. 자베르는 이를 허락한다. 마리우스를 데리다 준 장발장이 다시 꼬제트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자베르는 이도 허락한다. 장발장이 도로 집밖에 나왔을 때 자베르는 사라지고 없었다. 자베르는 경찰로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인간이 사랑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영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경찰로서의 의무인 마지막 정보 보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장발장은 마리우스와 꼬제트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이제 장 발장이 해야 할 일은 꼬제트가 자기를 잊고 두 부부가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는 꼬제트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서서히 정을 떼려고 했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것이 꼬제트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전과자였으며 자기가 살아온 어두운 과거를 모두 밝힌다. 마리우스도 장발장이 자기를 살린 사람이란 것을 모른 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장발장을 떠나 보내려 한다. 마지막 대단원은 테나르디에르가 만든다. 그는 마리우스를 만나 마리우스가 부상당한 그 날 장발장이 파리의 하수구에서 어떤 청년의 시체를 버리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로써 바리케이트 자기를 구한 사람이 바로 장발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꼬제트와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 발장이 임종을 맞이 하는 것으로 이 대하 소설은 끝이 난다. “빛이 보인다. 가까이 와 다오. 나는 행복하게 죽는다. 내가 손을 얹을 수 있도록 너희들의 머리를 숙여다오.” 하지만 우리는 테나르디에르의 딸 에포니가 마리우스에 보낸 애틋한 애틋한 사랑의 얘기를 잊으면 안된다. 그녀는 거리의 부랑아 출신이었지만 마리우스를 위해 꼬제트의 소재를 알려주고 자기 아버지로부터 장 발장을 보호한다. 그녀의 사랑은 지순하다. 그녀는 짝사랑이었지만 사랑하는 마리우스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마친다. 누구의 사랑이건 지순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위고의 섬세한 마음은 부랑아 에포니가 마리우스를 사랑하도록, 그 사랑이 아름답게 끝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영문으로1,232쪽의 대작이며, 철학, 사상, 정치, 전쟁, 사회 문제, 전쟁, 혁명, 사랑과 배반, 인간의 모든 삶이 간직된 위대한 작품이다. 이 책은 재미있게 평이하게 쓰여져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 독자들의 지식이 1000배쯤 증가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위고는 1802년 프랑스 동부 돕지방의 수도인 베장송에서 태어났다. 위고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었다. 위고는 7세에 로마의 고대 역사가였던 타시투스를 읽었다고 알려져 있는 신동이었다. 그는 시인으로 비평가로 일찍부터 유명해졌다.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중심에 있는 그의 문장은 격렬하고 주인공들의 감정은 여과없이 표출된다. 그는 1837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45년에는 상원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루이 나폴레옹의 제 2공화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프랑스를 떠난다. ‘레 미제라블’은 그가 60세가 된 1862년 출간되었다. 원숙미가 돋보이는 걸작중의 걸작이다. 이 책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벨기에의 수도 브라셀에 가면 구도시의 중심 광장을 그랑플라스라고 부른다. 그랑플라스는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시청건물과 고색창연한 중세 시대의 길드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길드 건물 중 한 건물은 지금 카페가 되었다. 그 집에 현판이 붙어 있는데 ‘빅토르 위고’가 1851년 이집에서 살았다’ 고 쓰여져 있다. 위고는 브랏셀에 살며 워털루 전투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실제 전투가 진행된 지형을 관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랑플라스는 자동차가 진입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완전히 사람들을 위한 광장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30분 경마다 물결이 밀려오듯 이 광장에 와서 경탄에 찬 표정으로 정신을 잃은 듯 시청 건물의 첨탑을 바라보는 광경은 흥미롭기도 하다. 이 위고의 카페에서 벨기에 맥주를 마시며 ‘제 미제라블’을 읽어 보라. 책의 상당한 지면은 이 전투와 이 전투가 갖는 의미에 대해 할당되고 있다. 10만명의 영국, 네델란드, 독일의 연합군들은 브라셀의 파괴를 막기 위해 브라셀 남쪽인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5만의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서 올라와 워털루 평원에서 일전을 겨룬 것이다. 이것은 처참한 전투였다. 지금도 워털루는 기념비를 세워 다시는 이런 처참한 전쟁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망각의 존재, 처참한 전쟁은 이 이후에도 이어졌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다. 워털루 전투를 가장 잘 묘사한 책이 ‘레미제블’이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은 ‘전쟁과 평화’다. 대 사건은 대 문학을낳는다. 일조량이 부족한 벨기에는 포도주는 생산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을 마다, 수도원마다 고유한 맥주를 빚었다. 물로 맥주를 만들어 물 대신 마시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벨기에 맥주는 7-9도 정도로 알코올 도수가 다소 높다. 폭탄주 도수가 이정도가 아닐까? 벨기에 맥주는 종류가 300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 카페에서는 한 20가지 정도의 맥주를 판다. 맥주를 시키면 맥주마다 고유한 잔이 있어 그 잔에는 해당 맥주의 이름이 씌여 있다. 코카콜라 잔에 맥주를 마시거나 다른 잔으로 맥주를 마시는 일은 없다. 위고의 카페에서 잔이 플라스코 같이 생긴 맥주 ‘콱’을 마셔보라. 그대는 쉽게 낭만파가 될 것이다. 그대 앞에는 꼬제뜨의 아름다운 얼굴과 마리우스의 늠름한 모습, 도도한 역사 앞에 우뚝 선 나폴레옹,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미소를 지으며, ‘저기에 빛이 보인다’고 말하는 장발장의 모습이 떠 오를 것이다. 위고는 1885년 파리에서 죽었다. 거인 위고는 괴테이래 유럽의 최대 지성이었다. 위고 이후 유럽문화의 주도권은 러시아로 넘어가게 된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2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2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1815년경 어떤 사람이 ‘몽트르회이 슈 메르’라는 도시에 왔다 이 도시는 구슬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는 도시였다. 이 사람은 뛰어난 기업가였다. 제조방법을 간편하게 바꾸어 원가를 낮추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은 폭으로 인상시켰다. 그의 성공적인 경영 덕분에 시 전체가 부유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병원등 어려운 곳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50세 정도였는데 이름은 마들렌이었다. 마침내 그는 시장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렀고 시장 직도 훌륭하게 수행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 마들렌 시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베르 경감이었다. ‘언제가 내가 이사람을 본 것 같아. 이자가 누구일까?’ 그는 마들렌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 가난한 마부가 실수로 자기가 부리는 마차에 깔려버렸다. 마차가 너무 무거워 장비가 필요했다. 마들렌 시장은 장비가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15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15분 동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가 와서 땅이 물러져 마차가 계속 땅으로 파고 들어가 그 마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자베르 경감이 시장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하였다. “문제는 힘입니다, 시장님. 저는 이세상에 이 마차를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뚜르의 감옥에 있었던 죄수였지요.” 마들렌은 자베르 경감을 말없이 쳐다 보았다. 그리고 마차 밑으로 들어가 어깨로 온 힘을 다해 마차를 들어 올렸다. 마들렌의 얼굴은 땀으로 법벅이 되어 있었지만 또한 창백하게 보였다. 이것으로 마들렌이 가석방 중 도망간 장 발장이란 것을 확신하고 체포하려고 했다. 장은 다시 도피를 시작한다. 파리에 멀지 않은 곳에 몽페르메이라고 하는 술집이 있었다. 주인 이름은 테나르디에르였다. 장이 어느 날 이 집에 나타난다. 그는 그 집에 맡겨둔 꼬제트라는 소녀를 데리러 왔다. 꼬제트는 팡틴의 딸이었다. 팡틴은 미혼모였다. 그 시대는 미혼모를 도덕적으로용납하지 않던 시대였다. 직장도 구할 수 없었다. 팡틴은 꼬제트를 테나르디에르의 집에 맡겨 놓고 마들렌의 공장에서 번 돈을 꼬제트에게 보냈다. 하짐만 미혼모라는 것이 발각이 나서 직장을 잃게 되었다. 가련한 여인 팡틴은 테나르디에르가 악마의 화신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는 꼬제트가 병에 걸렸다, 새 옷을 사야 한다고 걸핏하면 돈을 보내라고 했다. 팡틴은 딸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았다. 생니도 뽑아 팔았고 몸도 팔았다. 팡틴의 모성애는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꼬제트는 온갖 굳은 일을 다하고 굶주리고 구박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장은 자기가 이 여자를 해고한 것이 이 비극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 팡틴에게 꼬제트를 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쫓기는 몸으로 이곳에 와 마침내 꼬제트를 이 악마로부터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장은 꼬제뜨와 같이 파리의 한적한 곳에서 세를 얻어 숨어서 살아간다. 55세의 장과 8세의 꼬제트가 다정한 부녀가 된 것이다. “장 발장은 지금까지 무엇을 사랑해 본 일이 없다. 25년 동안 그는 혼자 살았다. 그런데 꼬제트와 같이 살면서 무엇인가 그의 내부에서 싺트기 시작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차올라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랑은 아이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떨리는 환희를 경험하기도 했다. 미리엘 주교는 그에게 덕성의 의미를 가르쳤고, 꼬제트는 사랑의 의미를 가르쳤다.” 장은 매일 성당의 주변의 거지에게 동전을 주었다. 어느 날 그가 돈을 주려고 손을 내밀자 거지가 얼굴을 들어 누구를 찾는 것처럼 그를 쳐다 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일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장 발장은 쇼크를 받았다. 가로등 불빛아래, 그가 본 것은 거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밤에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 자베르 경감은 장 발장이 자선을 잘 한다는 것을 알고 거지로 변장, 성당 주변에서 정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베르 경감은 이자가 장 발장이라고 순간적으로 알았지만 확증을 잡을 때까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장은 즉각 코제트를 데리고 도망쳤다. 장과 자베르는 파리 시내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장은 꼬제트와 같이 가기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자베르와 3명의 형사는 여유있는 걸음으로 장을 따라간다. 그날 밤 달이 휘영청 밝았다. 장은 어둠 속을 걸어 갔지만 4명의 형사들은 환한 달빛아래 당당하게 걸어 왔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형사들은 이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점점 거리는 좁아졌다. 그가 어떻게 형사들의 추격을 따 돌렸을까? 궁금한 사람들은 ‘레 미제라블’을 직접 읽어 보기 바란다. 장은 수도원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수도원의 정원사가 바로 장이 시장이었을 때 목숨을 구해준 그 마부였을 줄이야. 그 정원사의 도움으로 장도 정원사가 되어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다. 꼬제트도 수도원 기숙사에 들어갔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꼬제트는 웃음을 배웠다. 웃음과 함께 그녀의 외모도 변하였다. 그녀에게 깃들어 있던 어둠이 가시었다. 웃음은 인간의 얼굴에 겨울을 쫓아내는 태양이었다.” 장 발장이 수도원에서 꼬제트와 보낸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혼자서 고독하게 살아온 그가 아닌가? 꼬제트는 그에게 모든 것이었다. 꼬제트가 수녀가 된다면 장의 행복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행복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난 후 수도원을 떠난다. 꼬제트에게 바깥세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거리의 부랑아가 많았다. 이들은 거리에서 살았다. 그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아이들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파리에 매년 평균260명의 부랑아가 있었다고 한다. 대도시에 있는 부랑아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 불량배가 된다. 그런데 위고는 파리는 그 예외라고 한다. “파리의 부랑아들은 썩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었다. 우리가 일으킨 민중 혁명이 순수했던 것처럼, 파리의 공기 속에는 분명히, 바닷물에 소금이 녹아 있듯이, 썩지 않는 물질이 본능처럼 녹아 있었다. 파리에서 숨을 쉬면 우리의 영혼을 순수하게 보존하게 된다.” 그렇다, 파리의 공기에는 혁명이, 자유가 녹아 있다. 파리의 공기를 마시면 우리의 영혼은 그 순수성을 보존하게 된다. 억압과 불평등,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얻게 된다. 배낭을 메고 파리로 가자. 상젤리제로, 바스티유로 젊음의 추억을 찾아 파리로 가자.
선데이뉴스]영화 외계인들
선데이뉴스]영화 외계인들
영화 “외계인들” 2014 미국 인디페스트 영화제 극영화부문 수상 제작년도 –2013 ~2014 상영시간 87분 장르 - 미스테리, 스릴러, SF ,코메디 제작 국가 - 대한민국 감독 - 김한규, 손병희 시놉시스 백수 달호는 술만 먹으면 필름이 끊겨 무덤가에서 깨어난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외계인 사냥꾼에 UFO에 납치되서 기억을 잃어버렸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고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여자친구의 오빠인 최면술사를 만나러 가게 되고 결국은 그곳에서 그 동안 숨겨져 왔던 엄청난 비밀이 드러나게 되는데…. 제작의도 상업영화에 오디션을 볼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단역이어도 인지도 있는 배우를 써야 관객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업영화는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기에 거의 모든 상업영화 주, 조연 캐스팅은 오디션으로 뽑지 않는다. 비중 있는 단역마저도 기획사를 업고 있는, 혹은 투자자를 업고 있는 배우에게 돌아간다. 캐스팅 디렉터들은 그저 대사 없는 이미지 단역들만 캐스팅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영화 캐스팅의 현실이다. 드라마 쪽은 더 심하다. 이에 우리는 먹고 살아보기 위해, 인생에 빛을 한번 보기 위해 배우들끼리 뭉쳐야 했다. “우리끼리 영화를 만들어보자!” 아마 이런 생각 한번도 안 해본 배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레 겁부터 먹기 때문이다. “ 영화 만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 “ 충무로 스텝 데려오려면 돈을 많이 줘야 할 텐데..” , “ 우리가 배우만 했지, 스텝 일은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 무작정 뛰어들어 시작을 했다. 되든 안되든…힘들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든 과정이었다. 돈, 인력, 장비, 기술, 지식, 시간…. 우리에겐 모든 게 부족했다. 열정 하나만 빼고… 뜻이 맞는 배우님들이 재능기부로 이 작업에 동참해주었다. 생계를 위해 물류 센터, 공장 등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하며 틈틈이 짬을 내서 참여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중을 피해 주말에 촬영을 했고 주중에는 낮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밤에 편집을 했다. 영화를 만들고, 연기를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배우들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완성이 됐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도, 아쉬운 점도 많은 영화다. 그래도 이 영화가 2014 미국 인디페스트 영화제에서 극영화 부문 수상을 했기에 지난 1 년여 간 우리의 고생도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배우는 기다리는 직업이라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촬영장에 단역으로 가서 자기 촬영 순서가 오기를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릴 때 주로 쓰는 말이긴 하지만…사실 무명배우들은 누군가 자신을 불러서 써주기만을 기다리는 ‘을 중의 을’ 포지션에 놓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배우들도 더 이상 기다리지만 말고 ‘갑’이 되어 뛰어보는 건 어떨까! 뭐…이런 말이 하고 싶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레미제라블'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레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서 딱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읽으라고 추천한다. 이소설은 프랑스의 남부 산악지대인 디뉴로부터 시작한다. 디뉴는 프랑스의 중동부 도시인 그레노블 근방에서 시작되는 나폴레옹 루트의 끝 무렵에 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한 후 정부군이 진을 치고 있는 평지가 아니라 산악 길을 택해 파리로 진군해 갔는데 이 산악 길을 나폴레옹 루트라고 부른다. 파리를 거쳐 프랑스의 중심부를 질러 남쪽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는 남불이나 스페인으로 휴가를 가는 유럽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통행료도 비싸지만 걸핏하면 막히기 일쑤다. 뜨거운 여름 태양아래 주차장으로 변한 고속도로에 서 있느니 나폴레옹 루트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막히지 않고 달리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 이렇게 산길을 한참 달려 칸 가까이 가면 산을 벗어나 평지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산을 더 보고 싶은 사람은 좌회전을 하면 된다. 그기에 디뉴가 있다. 장발장이 등장하기 전에는 디뉴의 주교 미리엘이 마치 소설의 주인공 같다. 황제 나폴레옹은 최근 미리엘을 디뉴의 새주교로 임명했다. 디뉴에 도착한 3일 째 되는 날 그는 근처 병원을 방문한 후 병원장과 함께 주교좌로 돌아왔다. 주교좌는 웅장한 큰 건물이었다. 주교가 병원장에게 물어보았다. ‘환자가 지금 몇명이나 있습니까? ‘26명입니다, 주교님.’ ‘숫자가 많군요.’ ‘병실이 좁아 병상을 바짝 붙여 놓았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정원도 너무 좁아 회복기 환자들이 햇볕을 쬐기가 힘듭니다.’ ‘정말 그렇군요.’ ‘역병이라도 돌면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주교좌의 대연회장에는 병상을 몇 개나 놓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60개는 놓을 수 있겠습니다.’ ‘병원장님 무엇인가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병원장님은 환자가 26명인데 좁은 데서 버티고 있고, 저는 세 식구 밖에 없는데 60명이 살 수 있는 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바꾸죠.’ 주교의 연봉은 15,000프랑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 생활비로 1000프랑을 썼다. 같이 살고 있는 여동생의 연봉 500프랑을 합하여 1500프랑이 주교의 총 생활비였다. 나머지 14,000프랑은 신학교, 감옥, 교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석 달이 지난 후에 집사에게 미리엘 주교가 말하였다. ‘우리가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주교님. 과거에는 주교님에게 마차 비용으로 연간 3,000프랑이 지급되었답니다.’ 미리엘 주교는 이 말을 듣고 하고 마차비용을 신청하였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 주교가 처음에는 훌륭한 일을 하는 것 같더니 역시 별 수 없군 하고 수근 댔다. 산악지대에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 말이야 하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 3,000프랑이 수중에 들어 오자 마자 미리엘 주교는 3,000프랑 지출계획을 발표하였다. 전액 환자와, 미혼모, 고아들에게 기부되었다. 미리엘 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부자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주교가 어느 백작을 찾아가 기부를 해 달라고 하자 백작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교님, 저도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제게로 보내주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돌봐 줄 테니 걱정 말고 돈을 내라는 것이다. 어느날 디뉴에 어느 남루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감옥에서 가석방된 죄수였다. 장소를 옮길 때 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고 경찰은 이 사람을 조심하라고 주민들에게 주의보를 내린다. 여관에서는 이자가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잠자리를 주지 않았고 식당에서는 밥도 팔지 않았다. 그는 배고프고 피곤하여 길거리의 돌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부인이 그에게 주교좌로 가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장 발장이다. 굶주리는 조카들을 보다 못해 빵 한 개를 훔쳤다가 5년형을 받았고, 4차례에 걸쳐 탈옥하려다 실패하여 19년 동안 감옥에 있던 사람이었다. 주교는 이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이 집은 나의 집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집입니다. 우리는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묻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니까 여기를 찾아 온 것입니다. 당신을 환영합니다.’ 주교는 장 발장을 대접하기 위해 은 쟁반과 은 촛대를 가져 오라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피곤하였던 장 발장은 깊은 잠에 들었다가 새벽 두시 종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그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그는 집안에 어떤 소리가 들리나, 누가 있나 조심스럽게 살펴 보았다. 그는 전날 저녁에 은쟁반을 어디다 보관하고 있는지 유심히 보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은쟁반을 훔쳐 창문으로 도망쳤다. 아침에 집사가 주교에게 은쟁반을 도둑 맞았다고 말한다. 주교의 답변이 걸작이다. ‘우선 그게 우리 것이 맞는가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너무 오래 그것을 쓴 것 같아요. 그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때 문이 열리고 경찰이 장 발장을 붙잡아 왔다. 주교는 장 발장을 반갑게 맞이 하면 말했다. ‘오, 다시 돌아 왔군요. 내가 준 촛대를 잊어 버리고 그냥 가서 다시 온 것이죠? 촛대도 쟁반과 마찬가지로 은제품이죠. 200프랑은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장 발장은 눈을 크게 뜨고 노주교를 쳐다 보았다. 그 눈빛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찰들은 떠났다. ‘다음에 갈 때는 창문으로 나가지 말고 이 문으로 가세요. 이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장 발장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는 말없이 서 있었다. 주교가 가까이 다가와 조용하게 말하였다. ‘잊어버리지 마라, 절대 잊어버리지 마라. 이 돈을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을. 장 발장, 내 형제여, 나는 네 영혼을 샀다. 그 영혼을 어두운 생각과 멸망의 정신으로 부터 구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께 받쳤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글쓰기는 이렇게 한다”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 ”글쓰기는 이렇게 한다”
김의기의 인문학 칼럼 [선데이뉴스]유럽에는 노천카페가 많다. 유럽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같다. 실내 카페도 아예 테이블과 의자를 바깥을 보도록 배치하는 경우도 많다. 파리의 상젤리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오! 상젤리제! 상젤리제 소리만 들어도 내입에서는 상젤리제 노래가 자동적으로 나온다. 더구나 여름, 자신을 시원하게 노출한 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은 유럽여행의 백미가 아닐까? 유럽의 여인들은 자신에게 주는 시선에 불편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응답해 온다. 오히려 쳐다보지 않으면 서운해 하는 것 같다. 이 자신감이 더욱 여인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어느 날 친구인 유럽 여인과 같이 노천카페에서 지나가는 여인들을 감상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난 길가는 여자들을 보는데 자기는 남자들을 보겠지?”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아니, 나도 여자들을 봐요.” 난 깜짝 놀라 “왜 그래요?” 하고 물어 보았다. “여자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무슨 구두를 신는지, 장신구는 무엇을 하는지 관찰해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는 관점이 다르다. 문제는 유럽여인들은 다른 여자들이 입는 옷을 보고 따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그 옷을 입으면 같은 옷이 있어도 절대 그 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성을 강조하는 유럽인들의 고집을 알 수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이미 쓴 것은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누군가 그 글을 썼다는 것은 이미 그 아이디어가 진부해진 것이다. 글 쓰기는 진부함을 거부하는 힘이다. 언론에 실리는 칼럼이 읽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칼럼을 읽어 보면 이미 다 아는 얘기, 누군가 이미 말한 것을 재탕, 삼탕 쓰고 있어 답답하다. 물론 재탕, 삼탕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글은 이미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특히 유행처럼 일제히 같은 내용을 쓰는 칼럼은 파리지엔느 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된다. 평가가 너무 박한가? 여름 백사장에 가면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와 바닥에 예쁜 그림을 그린다. 물이 빠져 나가면 모래사장의 조그만 구멍에 보글보글 물방울이 올라오기도 하고, 앙증맞은 작은 조개나 주먹을 치켜든 게도 보인다. ‘해변의 커프카’에서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작은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해변에 부서진다. 물이 빠지면 칼로 판 것 같은 부드러운 모양의 무늬를 모래 표면에 남긴다. 작은 물방울도 보글거린다.”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무라까미가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등을 간지럽게 문지르는 파도를 관찰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한편 같은 장면을 다르게 묘사하는 작가도 있다. “밋밋한 모래더미가 빠르게 달려오는 파도를 탐욕스럽게 큰 숨으로 빨아 들인다. 파도가 부서지면 혀로 핥는 것 같은 허무한 한숨소리.” 존 반빌(John Banville)의 ‘바다(The sea)’에 나오는 문장이다. 반빌의 해변은 무라카미의 해변처럼 아름답지 않다. 반빌의 해변은 불타는 욕망의 현장이다. ‘바다’를 읽다가 처음에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몸에 꽉끼는 검정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수영복이 ‘탐욕스러운 물개 가죽’ 같다고 표현하는 문장을 접했을 때 나는 여기 새로운 문학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았다. 파도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몰려 오는 게 아니라, 햇볕에 지져 불타는 뜨거운 모래더미가 시원한 물을 갈망하여 파도를 부르기 때문에 파도가 달려온다는 것이다. 달려온 파도는 모래와 얽혀 뒹군다. 물이 빠져 나가면 허무한 한숨소리. 욕망이 충족된 것일까? 모래의 열기는 시원하게 식었다. 무라까미의 해변은 달달하다. 무라까미는 세상을 속인다. 하지만 반빌은 이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안다. 무라까미의 문장으로는 세상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세상을 속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장이 필요하다. 새로운 접근방법,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 한번쯤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다 속 같이 깊은 어둠 속에서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의식을 뚫고 들리는 소리,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고 있다. 알은 세상이다. 누구든지 새 생명을 얻고 싶은 사람은 세상을 부숴야 한다,”는 데미안의 메시지는 청소년들에게 많은 공명을 일으킨다. 꿈 많은 청소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알에 갇힌 듯 갑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세상을 부숴 버리고 싶어 한다. 알을 부숴야만 새 세상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나가려면 진부한 문장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접근방법, 새로운 문장이 필요하다. 누구에게 배운 이론, 빌려온 아이디어는 감동을 줄수없다. 자기가 겪은 자기의 얘기를 써야 한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글을 쓰는 행위만이 내가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나의 글쓰기도 끝날 것이다. 그날까지 나의 언어로 말하겠다. 나만의 언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나의 언어로 말할 것이다.
선데이뉴스]이건 정치가 아니다.
선데이뉴스]이건 정치가 아니다.
“영국에는 선거 때에만 자유가 있지, 선거가 끝나자마자 국민은 다시 노예가 된다.” 이것은 장 자크 루소가 지금부터 250년 전인 1762년에 출판된 ‘사회계약론’에서 한 말이다. 그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에 의해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투표에 의해 의원이 선출되는 민주정치라고 자랑했지만, 영국 민주주의 실체는 몇몇 지배세력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게임일 뿐이라고 루소가 비꼰 것이다. 7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평균 투표율은 32.9%였다. 이렇게 투표율이 낮은 것은 선거가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는 철저히 지역정치이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과 나머지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결 구조이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무슨 정치를 하건 무슨 정책을 내세우건 선거의 결과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나온다. 그러니 누가 선거에 관심을 갖겠는가? 출마자들은 큰 이권이 걸린 한판 승부이니 한 명이라도 지지자를 투표장으로 끌어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국민들은 투표 결과 무엇이 달라지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번 보궐선거나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대부분의 출마자들은 자기 선거구에는 빚만 있으니 중앙정부에 가서 돈을 구걸해서 사업을 하겠다고 공약한다.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산더미 같이 부채가 쌓여 있는데 지역 대표가 모두 중앙정부에 부채를 지우겠다고 공약하고 나섰으니, 이건 정치가 아니라 비극,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국가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라고? 그게 뭐지? 국가는 가장 차가운 악마 중에서 가장 차가운 것이야. 그건 냉혹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하지. ‘국가가 곧 국민이다, 라고 하는 거짓말 말이야. 국가가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것은 거짓말이고,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훔친 것이지.” 니체는 언론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병들어 있고, 가끔 더러운 것을 토해 낸다. 이 더러운 토사물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이야.” 니체의 말처럼, 신문이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그대로 싣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정부가 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라고 지적해야 국민들이 건전한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아닌가? 멀쩡한 거짓말도 대서특필해주니 정치실종의 책임은 언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언론에 대한 최대의 찬사인 것 같다. 하지만 정부 없는 신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신문은 숙명적으로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를 이용하고 정치에 이용 당하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5년 ‘미국 민주주의론’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신문 없이는 자유도 없다. 하지만 신문이 있으면 사회 안정은 유지될 수 없다’고 썼다. 그 당시에도 이미 신문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맹위를 떨쳤나 보다. 1830년대를 그린 소설 ‘레미제라블’을 보면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찾아 내고도 바로 체포하지 않고 증거 수집을 하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수일 전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신문 보도가 났고 이 때문에 경찰이 신중을 기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장발장은 꼬제트와 더불어 탈출에 성공한다. 신문 없이 자유는 존재할 수 없는 것 같다. 시끄러워도 참아야 하나 보다. 미국 정치는 재미있는 양상으로 발전되고 있다. 아니 정치 그 자체가 실종되었다. 언론 때문이다. 미국 언론은 FOX로 대표 되는 수구 보수언론과 CNN과 뉴욕타임즈로 대표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어정쩡한 언론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 언론의 분열은 미국민의 분열, 미국 정치의 실종을 부르고 있다. 보수성향의 국민들은 보수언론 이외의 어떤 다른 매체도 상대를 하지 않는다. 이 매체는 엄격하게 말해서 기사를 보도하는 언론이 아니다. 기사라고 하는 이름 아래 사실상 논평을 내 보낸다. 보수성향의 국민들은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기사와 논평만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시청률도 아주 높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시청자는 중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어쩌란 말이냐’는 절대 부정과 대립의 정치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정치가 아니다. 소통과 대화는 불가능하고 비웃음과 막말만 일방통행으로 오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부재를 넘어 정치 혐오증과 정치 기피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정치노선을 분명히 하는 공세적 언론은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직도 정치할래?’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치한다고?’ 하고 겁을 주는 것 같다.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은 인권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데모한다고 세상이 바뀔지 아나?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한지 아나?” 고 비웃던 사람이었다. 정치에 무관심 했었다. 그가 말 한대로 세상은 말랑말랑 하지 않다. 권력은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지만 계란은 결국 바위를 이긴다. 바위는 죽은 물질이고 계란은 살아 있는 생명이니까. 생명은 죽음을 이긴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종종 생각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정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장관급 기구가 두 개나 더 생기고 부총리도 한 명 더 생길 모양이다. 안전 담당 공무원을 더 많이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참사를 겪고도 공무원을 더 채용해야 한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과연 우리 사회가 결여한 것이 공무원의 숫자일까?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공무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군가? 그들의 영혼은 온통 조직 도표에서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일에만 사로 잡혀 있다! 시시콜콜한 일을 하느라고 너무 바빠 중요한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런 공무원 늘여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선데이뉴스]당신이 사랑에 빠진다면
[선데이뉴스]당신이 사랑에 빠진다면
[선데이뉴스=김의기 칼럼]김의기/인문학 연구자 문학이 가장 즐겨 다루는 주제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사랑 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스쳐 닿는 그 손 끝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하는 김세환의 노래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표현하고 있어 40여년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물론 사랑은 그냥 이렇게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흐뭇한 사랑의 얘기 뒤에는 이루어 지지 못한 애달픈 사랑의 아픔이 있다. 문학사상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사랑 얘기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생각된다. 주인공은 귀족이자 부자이고 미남이며 장교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인 브론스키, 그는 모스크바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였지만 기혼녀인 안나를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브론스키가 안나를 거리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브론스키는 마차를 타려다가 어느 부인을 지나가게 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길을 막아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청하고 막 마차를 타려다가 그 부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를 강제로 그를 쳐다보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온 몸이 우아하고 품위가 넘쳐 흘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달콤한 얼굴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은 검은 속 눈섭 때문에 다소 어둡게 보였다. 그 눈이 잠시 브론스키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녀는 지나가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생명의 생동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미소가 그녀의 핑크 빛 입술에 맴돌았다. 그것은 그녀의 온몸을 채우고 있는 활력이 그녀의 의지를 넘어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외면을 묘사하며 안나의 내면까지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온 몸을 채우고 있는 활력, 그것이 그녀의 매력 포인터였다. 안나를 파티에서 만난 브론스키는 안나의 매력앞에 무너져갔다. 무너져 가는 브론스키의 모습은 키티의 눈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키티는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순진한 처녀였다. 안나를 만나기 전에는 브론스키도 키티를 사랑했다. 그런데 이 남자를 이름도 모르는 유부녀에게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누구도 아닌 키티가 화자 (話者)가 되어 이 장면을 진술하게 한다. 잔인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키티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키티는 안나가 브론스키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키티는 안나가 승리의 환희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남자들에게 존경심을 일으킨다는 것에 그녀는 사뭇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가늘게 떨며 섬광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행복한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무의식적으로 장난을 치는 듯 감돌았다….키티는 브론스키를 보았다. 공포가 몰려왔다. 안나의 얼굴에 나타난 그 표정이 브론스키에게도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안나에게 모든 것을 바친 노예 같았다. 키티의 영혼은 안개에 덥힌 것 같았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안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생 페테스버그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안나는 몇 일전의 파티와 그 때 만난 브론스키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기차가 어느 역에 도착했을 때 안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기차 밖으로 나왔다. 안나의 마음처럼 역 플랫폼은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느 남자가 흔들리는 램프 불빛을 뒤로 받으며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그녀는 뒤를 돌아 보았다. 브론스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전날 파티에서 존경심과 황홀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안나는 그 이후에 몇 번이나 그 남자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를 다시 보자마자 기쁨과 자부심에 휩싸였다. "당신이 가는 곳으로 저도 가고 있습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그 순간 바람이 기차 지붕의 눈을 흩날렸다. 판때기 같은 얇은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슬픔에 잠긴 듯 절망한 듯 기차 엔진이 깊은 기적소리를 냈다. 그가 한 말은 그녀의 마음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고 그녀의 이성이 두려워하는 말이었다.” 왜 무라까미 하루키가 초코렛을 먹으며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것은 캄캄한 우주를 들여다 보는 것과 같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왜 하필 그때 바람이 기차 지붕의 눈을 흩날렸는지, 왜 판때기 같은 얇은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는지, 왜 슬픔에 잠긴 듯 절망한 듯 앞에서 기차 엔진이 깊은 기적소리를 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한 말은 그녀의 마음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고 그녀의 이성이 두려워하는 말이었다’는 톨스토이의 문장 앞에서 모든 문학하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톨스토이를 경배해야 할 뿐이라는 것만 말하고 싶다. 그 후 키티는 오랜 방황의 시간을 갖는다. 브론스키를 잃은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자기를 변치 않고 사랑하는 시골의 젊은 귀족인 레빈의 청혼을 받아 들인다. 그날 레빈은 너무 기뻐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날이 밝으면 키티의 집으로 가 키티 부모에게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려고 할 작정이었다. 톨스토이는 젊은이의 사랑의 기쁨을 어느 작품보다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다. “레빈은 그날 밤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보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옷도 입지 않고 찬바람을 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하인들에게도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행복감이 그를 감쌌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세상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사랑은 영원성과 신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하늘의 별도 따다 바칠 수 있고, 생명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다. 사랑에 빠지면 신이 된다. 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신과 같이 고귀하다.
[선데이뉴스 칼럼]고전 문학을 읽는 재미
[선데이뉴스 칼럼]고전 문학을 읽는 재미
[선데이뉴스 = 김의기칼럼]국민을 우울하게 하는 뉴스가 계속 신문 지면과 TV 화면을 많이 차지하다 보니 신바람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이 일련의 사건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것은 우리사회에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더욱 분발하고 한발 한발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우리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을 보며 요행으로 승리를 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란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각 분야에서 실력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국민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한다. 고전문학은 대부분 대하 소설이다. 우선 분량이 많고 내용이 장황하여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고전문학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먼저 작품의 문장을 즐겨야 한다. 영화감독은 배우와 배경, 음향효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기의 생각을 관객들에게 입체적으로 전달하는데, 작가에게 허용된 매체는 단 하나, 글뿐이다. 무척 단순한 매체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문장이란 단 한나의 매체를 통해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문장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평면적인 매체를 제외하고는 어떤 수단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문장을 다듬는 탁월한 기술자다. 작가들의 문장은 생각이나 장면, 상황을 단순히 직설적으로 전개하여 표현하지 않고, 이를 승화시켜 위로 끌어 올린다. 그리고 다시 끌어내려 깊숙하고 묵직하게 뜸을 들인다. 이렇게 뜸이 든 문장이라야 날카로운 칼날처럼 독자의 가슴에 불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보리스 파스테르타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를 보면 러시아 혁명 후 혼란과 굶주림이 뒤덮고 있는 모스크바의 참혹한 모습을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한다. “창밖에 어둡고 허기진 모스크바가 놓여 있었다.“ 긴말이 필요 없이 이 한 문장으로 그 참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는 모든 에너지가 죽은 시대야. 쥘리앵의 에너지가 그들을 공포로 몰아 넣고 있어.” 이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 나오는 독백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쥘리앵은 가난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라틴어를 배웠고, 파리로 가 권력의 심장부에 뛰어들어 성공의 길을 달리는 야심 찬 젊은이다. 스탕달의 열정에 찬 문장은 쥘리앵의 야심과 폭발적인 에네지를 단 두줄의 문장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문장으로 승부하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문장을 음미하고 즐기면 고전문학이 좋아진다. 고전문학은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웅대한 문학을 한다. 문학의 과제가 웅대한 만큼 그 문장도 담대하고 절박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체를 간결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좋은 문장을 항상 접하기 때문에 문장력이 좋아진다. 저도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WTO에서 근무할 때 좋은 보고서를 쓸 수 있었다. WTO 사무국 직원이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보고서는 모든 직원들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때 문장력이 좋은 보고서가 단연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사정이 다를 수 없다. 문학은 또한 단순히 스토리-텔링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등장인물과 이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감각적 영상으로 선명하게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 의미에 못지않게 작가가 발견해낸 선명한 영상을 영화를 보듯 그려내고 음미 하고 즐기는 것이 좋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톨스토이가 얼마나 영상 만들기에 탁월한 작가였는지 알게 된다. 다음 문장은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이 로스토프가에 인사를 갔을 때 그 집에서 하루밤 머물게 되는데 그기서 나타샤를 만나게 되는 밤의 묘사이다. “그날 밤 그는 잠이 잘 들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달빛이 창문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방안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요한 밤은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창문 밖에는 포플라 나무가 일렬로 서 있었는데, 한쪽은 검은 색을 띠었고 다른 쪽은 은빛으로 밝게 보였다. 나무 밑에는 조그만 나무와 풀들이 은빛 물결 속에 젖은 잎사귀와 가지를 여기 저기 뻗고 있었다. 멀리 검은 나무 숲 너머로 이슬에 젖은 지붕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쏘냐! 쏘냐! 어떻게 잠들 수 있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잠깐 보기나 해. 영광스러운 밤이야! 쏘냐, 잠을 깨!’ 그 목소리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이렇게 특별한 밤은 다시는 없을거야. 보았어? 나는 다리를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을 이렇게 팔로 단단하게 싸안고 하늘을 나는거야, 이렇게…오, 하느님 이게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달밤의 영광이여! 창문을 열자 달빛이 창문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방안으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장면을 톨스토이가 썼다는 것은 믿고 싶지 않다. 이건 이태백이 해야 하는 건데 이태백이 놓친 것을 톨스토이가 재빨리 해낸 것이다. 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해낸 영화감독 톨스토이, 나타샤가 다리를 감싸고 하늘을 나는 것은 어떻게 찍을까?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열정의 소녀 나타샤는 순진하고 영리하고 쾌할한 소녀였다. 톨스토이는 문학이 창조해낸 어떤 여인상 보다도 산뜻하게 나타샤를 창조했다. 꼬제트도 마담 드 레날도 마틸드도 나타샤의 이미지를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고전문학의 세계는 이렇게 멋진 문장과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사람들이 지금처럼 황폐화되지 않은 시절, 사람들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시절의 세계이다. 이제 다시 소녀, 소년으로 돌아가 고전의 세계에 깊이 침잠해 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