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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②하얼빈과 뤼순의 안중근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②하얼빈과 뤼순의 안중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조선대백과사전26>]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중근! “안중근(1879.9.21.-1910.3.36).. 1907년 겨울 고향을 떠나 로씨야 원동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반일의병 투쟁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는 반일의병대의 참모총장으로서 부대와 함께 1909년 6월 은덕에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의병대는 그 후 회령에서의 일제침략군과의 격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타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는 조선침략에 앞장 선 일본의 고위급 반동정치가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첫 번째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 테로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이 무렵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대중공보사>에서 독립운동자 리강, 우덕순 등과 손을 잡았으며 그 후 류동하, 조도선과도 알게 되어 뜻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해 10월 이또가 로씨야 재무대신 꼬꼬브쪼브와 만주침략문제를 둘러싸고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이또를 처단할 결심 밑에 면밀한 계획을 짰다. 조도선, 우덕순이 책임진 조가 채가구역에서 이또를 처단할 계획을 실패하자 혼자서 할빈을 담당한 안중근”(518쪽)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 일제와 로씨아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 군중 속에 끼여 홈으로 들어갔다.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그리고 쓰러진 원쑤들 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위 사전, 518쪽)/ 안중근의 활동무대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북한:울라지보스또크)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것입니다. 과거 필자가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국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에 학술교류 협의차 방문했을 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들었는데, 전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하얼빈은 한순간의 역사 현장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그 증거입니다. 2014년 대한민국 외교부는 하얼빈역에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 철도국이 건립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고 밝혔었습니다. 기념관은 의거 현장 바로 앞에 있던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200㎡ 규모로 건립됐으며, 중국 정부 관리 하에 무료로 개방되었습니다. 참관자들은 유리창 너머로 의거 현장인 플랫폼을 살펴보는 한편, 안중근 의사의 생애 및 의거사진과 설명자료 등을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 천장에 '안 의사, 이등박문 격살 사건 발생지'라는 문구도 붙였는데, 기념관 입구 외부 벽면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에 맞춰 오전 9시 30분에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려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을 비밀리에 진행해온 끝에 2014년 1월 19일 첫 공개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에는 쑨야오 흑룡강성 부성장과 송시빈 하얼빈시 시장 등 중국 측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신화통신은 사설을 통해 '안중근 기념관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후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뮤지컬 영웅 보면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본이 역사를 반성하는 날은 언제일까".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국 가면 꼭 가봐야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최근 하얼빈을 방문했던 한 중국통은 하얼빈 신역 신축 현장을 소개하면서, “지금 현재 하얼빈역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역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 측에선 서둘러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재개관을 위한 협의를 중국정부와 하여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앞서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에서 소개한 감옥 이야기에 ‘사형장’을 덧붙입니다. 사형장 한복판에 안 의사 영정이 놓인 의자가 있습니다. 처형 직전 어머니 조마리아(?~1927) 여사가 보낸 흰 한복 차림입니다. 교수대에는 올가미가 매달려 있습니다. 처형장은 예전에 박물관 창고·직원식당으로 사용됐습니다. 1997년 다롄 상수도 공사도면이 발견되면서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됐고, 2006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습니다. 교수대 맞은편에 안 의사가 어머니·아내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걸려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 없기로 하자.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처형실 곁에는 큼직한 전시관이 있습니다. 안 의사 흉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면 가득히 안 의사의 유묵(복사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에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에서 한국 침략을 획책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탄환 세 발로 쓰러뜨린 안 의사는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이감됐습니다. 이듬해 3월 26일까지 144일간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자서전 <안응칠(安應七) 역사>(가슴과 배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어릴 적 이름이 응칠이었다)를 완성했고,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동양평화론>(미완성) 앞부분을 썼습니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힘을 합쳐 근대문명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의군-푸른 영웅의 시대'가 2019년 하반기 KBS에서 방송된다고 합니다. 하얼빈시를 비롯 상해, 북경의 메이저급 미디어회사들과 한중 공동투자 및 중국 내 촬영에 참여...북미지역의 글로벌플랫폼회사까지! 이를 계기로 안 의사의 공적이 널리 알려지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은 유해 발굴입니다. 안 의사가 "내가 죽은 뒤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고 했는데...하얼빈과 뤼순 곳곳을 샅샅이! 2019년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2018년 7월 3일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이낙연 국무총리, 한완상 전 통일교육부총리)가 문화역 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출범식을 갖고,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 주년 기념사업의 추진방향과 종합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2018년 1월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에 대해 언급하며 “기념관에는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의 삶과 정신을 하나하나 충실히 담아낼 것”이라며 “중국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내년 4월을 목표로 중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는 2019년! “지금 3·1운동과 임시정부(임정) 100년을 기념하려는 건, 지난 100년간 우리가 겪은 강대국 ‘갑질’의 고통, 일제 강점 36년에 대한 분노, 분단 73년을 통탄하는 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 분단 극복, 평화 통일의 문을 여는 일과 직결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국내 언론매체들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필자는 많은 주제 중에서 떠오르는 사건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이 난 사건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義擧)입니다. 우선 뤼순(여순) 감옥이 있는 중국의 다렌을 찾아봅니다. 위진 시대에는 삼산이라 불렀고, 후일 고구려에 속하였습니다. 당나라 때는 삼산포, 명청 시대에는 삼산해구, 청니와구라고 칭했습니다. 1880년대에 청조가 다롄만 북쪽 해안에 포대를 쌓아 올려,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삼국 간섭의 대상으로서 청으로부터 관동주(다롄, 뤼순 등)를 조차한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따르니」(Дальний; 「멀다」)라고 명명했습니다. 뤼순에 있는 함대와 요새의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또 무역의 거점 항구로 정비하여 파리를 모델로 한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습니다. 일본은 고지도의 중국어의 지명 「다롄만」에서 나온 「다롄」을 도시명으로 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명의 다리니와 발음이 비슷하게 연관됩니다. 다렌의 뤼순(여순) 감옥에 도착! 입구는 러일전쟁과 안중근, 신채호 선생님 등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선조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으러 온 사람들로 있었습니다. 뤼순(여순) 감옥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 야전병원을 증·개축하여 조선 청나라 러시아의 독립투사와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입니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먼저 저장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다 보니 감옥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감옥의 축소모형, 머리말과 죄수복이 있었고, 더 안쪽에는 죄수들의 수용소와 안중근 의사의 감방이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을 했던 독방은 감옥을 경비하는 간수부장 사무실 옆에 있으며 감방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붓과 벼루 먹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있었습니다. 감옥의 내부를 보고 나서, 강제노역 공장 15곳을 보았습니다. 더 들어가자 교형장이 나왔고, 그 옆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죽은 시체들만 드나든다고 해서 ‘시구문’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 추모관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났습니다. 추모관에는 안 의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어머니가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매년 추모제가 열립니다. 필자가 갔을 때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제’! [북한 <조선대백과사전 26>] “안중근(1879.9.21.-1910.3.36) : 일제의 조선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렬사.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하는 한편 말타기와 총쏘기를 련습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였다. 일제의 조선침략책동이 날로 더욱 로골화되고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타락이 극도에 이르러 망국의 위협이 짙어 가고 있던 정세에서 안중근은 나라의 독립을 지켜 싸울 방책을 모색하고 해외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1903년에 중국 상해와 치프 등지를 돌아보았다. 일제침략자들이 1904년 로일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고 1905년에는 침략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해 내자 애국적 의분을 참지 못한 안중근은 반일구국투쟁에 용감히 나섰다...1909년 10월 26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 일제와 로씨아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 군중 속에 끼여 홈으로 들어갔다.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 그자를 구원하려고 모여 온 일제의 가와시마 령사, 모리 서기관, 다나까 만철리 사장을 차례로 쏘았다. 그리고 쓰러진 원쑤들 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518쪽)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남한의 기록! 그는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습니다. 필자는 본(本)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에 이어 ②하얼빈 역과 안중근”을 추후 집필할 예정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殉國)를 비롯한 그의 삶을 재조명할 것입니다. ※사족(蛇足) : 지금 한 여당 국회의원 부친이 독립유공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정가(政街)를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총 6차례에 걸쳐 보훈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2018년 광복절에 훈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공자가 틀림없으니까 수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데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문득 ‘한출첨배(汗出沾背)’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등에 진땀이 흐른다’ 함이니 지극히 부끄럽다는 뜻입니다. “수치심(羞恥心)은 모든 도덕(道德)의 원천(源泉)”이라고 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금수산태양궁전의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금수산태양궁전의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2018년 12월 17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부친 김정일 국방위원장 7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민족최대의 추모의 날에 즈음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으셨다"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입상을 우러러 숭고한 경의를 표시하셨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또 ‘통신’은 김 위원장이 '앞으로도 전당이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전사로서의 의리와 본분을 지켜 한 치의 드팀도 없이, 한걸음의 양보도 없이 장군님의 구상과 염원을 끝까지 실현하기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자'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이번 참배를 포함, 부친의 1주기 때부터 7주기까지 모두 이곳을 찾아 조의를 표했습니다. 2019년 1월 1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새해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이곳을 찾아 두 사람의 “숭고한 경의를 표시”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전체 참가자들이 "온 겨레와 전 세계를 격동시키는 역사의 순간순간들로 날과 달이 흐른 2018년을 크나큰 긍지 속에 돌이켜보면서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와 당중앙위원회 4월 전원회의 결정을 받들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 정신으로 뜻 깊은 새해에 보다 큰 기적과 혁신을 창조해나갈 불타는 맹세를 다졌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의 수장(首長)이 이처럼 ‘죽고 못사는’ 궁전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원래 이곳은 금수산의사당(錦繡山議事堂)이었습니다. 1973년 3월에 금수산 의사당으로 착공되어 1977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에 준공된 주석궁이었습니다. 북한은 주석이었던 김일성이 생전에 생활하던 금수산의사당을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목적으로 개조했습니다. 1995년부터 2012년까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불렸으며, 2012년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1996년 백과사전출판사가 펴낸 <조선대백과사전(3)>에 ’금수산기념궁전‘을 소개했습니다. 이 자료가 북한의 공식 설명입니다.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내용입니다. 다음은 그 자료(발췌)입니다. “금수산기념궁전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시려는 우리 당과 인민의 가장 숭고한 충효심에 의하여 꾸려진 주체의 최고성지. 평양시에 있다. 우리 당과 국가의 창건자이시고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며 위대한 사상리론가, 걸출한 정치가,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서거 1돐이 되는 1995년 7월 8일에 개관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경애하는 수령님의 서거 이후 인민들의 가슴속에 넘쳐나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수령님의 영생을 기원하는 뜨거운 마음을 귀중히 여기시고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으로 영존하시게 하기 위한 사업을 현명하게 이끄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비범한 위인적 풍모와 불멸의 업적에 상응하게 수령님께서 오랜 기간 계시면서 당과 국가사업, 조선혁명과 인류의 자주위업을 현명하게 령도하신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하여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가장 훌륭히 꾸릴 것을 몸소 구상하시고 발기하시였으며 그 실현 방향과 방도를 환히 밝혀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의도와 구상을 반영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은 1995년 6월 12일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하고 궁전 안에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안치하며 주체사상로작관을 새로 꾸려 이곳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되게 할데 대한 결정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실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금수산기념궁전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어버이수령님께 바치는 충성과 효성의 최고정화이고 우리 인민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정 깊은 배려의 고귀한 결정체이며 김일성민족의 최대의 국보이다...우리 인민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금수산기념궁전을 끊임없이 찾고 있으며 수령님의 숭엄한 영상을 우러러 수령님의 전사, 수령님의 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주체혁명위업을 완성할 굳은 결의를 다지고있다. 우리 인민 뿐 아니라 외국의 수많은 벗들도 궁전을 찾아 위대한 수령님께 다함없는 경모의 정을 표시하며 수령님의 영생을 기원하고 있다.”(550쪽) 금수산태양궁전(錦繡山太陽宮殿)! 금수산기념궁전은 김정일 사후(死後)인 2012년 2월 16일에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궁전은 총 부지면적 350만㎡, 지상 건축면적은 34,910㎡의 석조 건물입니다. 궁전 앞 광장은 넓이 10만㎡로 화강석 70만개를 20여 가지 모양의 규격으로 다듬어 깔아 놓았습니다. 궁전의 정면에는 김일성 초상화가 있습니다. 궁전 안에는 김일성·김정일 입상이 있는 홀,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홀, 주체사상 로작관이 있습니다. 궁전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김일성 입상이 있는 홀이 나옵니다. 이 홀을 지나 폭 18m의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홀이 있습니다. 금수산(錦繡山)은 평양직할시의 중심지 북쪽 모란봉 구역에 있는 작은 언덕(해발 95m)인 모란봉을 중심한 주변지역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동쪽으로 대동강과 접하고, 남,북,서쪽에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평양에서도 경관이 훌륭하고, 조선팔경이나 평양팔경의 하나로 불리웁니다. 두 시신(屍身)이 안치되어 있지 않으면 훌륭한 관관명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관광이 아니라 참배(參拜)입니다. 물론 북한 당국은 ‘참배+관광’였으면 하겠지만요! 그런데 지구촌에 묘소를 ‘궁전(宮殿)’이라고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우리가 ‘금수산태양궁전’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캐는 일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곧 남북정상회담이 또 열린다고 하는데 더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남한 사람은 평화통일이 된 후 이 건물을 리모델링하게 된다면 역사박물관 또는 국립대학교 도서관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말도 해서는 안 되는 때입니다. 지금 문득 생각나는 말은 인과응보(因果應報)과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란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후에 받게 된다는 말로 흔히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한자성어! 사필귀정은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는 뜻의 고사성어! 진실은 진실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故김정일의 신년공동사설과 김정은의 신년사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故김정일의 신년공동사설과 김정은의 신년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은 2011년 1월 1일 발표한 ‘신년공동사설’에서 남북간 대결상태 해소를 강조하면서 대화와 협력을 추진해 남북관계를 복원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올해에 다시 한번 경공업에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향상과 강성대국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자”는 제목의 2011년 공동사설에서 “북남 사이의 대결 상태를 하루 빨리 해소해야 하기 위해 남조선 당국은 반통일적인 동족대결 정책을 철회해야 하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이행하는 길로 나와야 한다”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고 북남 사이의 대화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고 타전했습니다. 다음은 주체100(2011)년 1월 1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로동신문》,《조선인민군》,《청년전위》공동사설-올해에 다시 한번 경공업에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향상과 강성대국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자”(拔萃)입니다. “오늘 우리는 격동하는 21세기의 첫 10년을 위대한 승리의 년대로 빛 내이고 희망의 해, 새로운 번영의 해인 2011년을 맞이한다. 지난 10년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굳건히 고수하여온 계승의 년대였으며 강성대국에로의 위력한 도약대를 마련한 창조와 기적의 년대였다. 복잡다단한 21세기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 조국은 언제나 세계의 초점에, 반제자주의 최전선에 있었다.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정력적인 령도따라 련전련승의 영웅서사시를 창조하여온 우리 군대와 인민은 더욱 휘황한 앞날에 대한 포부와 필승의 신심에 넘쳐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김일성조선의 100년사를 총화하는 오늘처럼 민족의 존엄이 높이 떨쳐지고 우리 인민의 가슴마다에 미래에 대한 신심이 뜨겁게 용솟음친 때는 없었다. 승리의 대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혁명의 총진군에 련속적인 박차를 가할데 대한 우리 당의 전투적 호소는 남들이 걸어온 단계를 단숨에 뛰여넘어 세계에 솟구쳐 오르려는 대혁신의 기치이며 우리 대에 위대한 수령님의 강성대국 건설 념원을 기어이 실현하려는 애국충정의 기치이다. 우리는 최후승리의 그날까지 선군천리마에 비약의 박차, 총공세의 박차를 끊임없이 가하며 억세게 전진해나갈 것이다. 모두 다 위대한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의 두리에 굳게 뭉쳐 신심드높이 강성대국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켜나가자.“라고 했습니다. 1942년 2월 16일 태어나 북한 국방위원장(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김정일 선집>,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의 저자, 2011년 12월 17일 사망한 그의 삶에서 마지막 남긴 ‘신년공동사설’ 속에서는 ‘김정일’이라는 고유명사는 말미(末尾)에 한번 거론되었을 뿐입니다. 매년 1월1일 북한 신문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를 통해 발표되었던 신년 ‘공동사설’ 은 그 해의 정책 방향과 주요 사업 계획을 대내외에 제시하는 공식 신년사에 해당합니다. 그 내용은 주로 전년도를 총결산하고 신년의 정치, 경제, 대외관계 등 부문별 정책 노선을 담았습니다. 신년사가 처음 등장한 1946년부터 1994년까지는 주로 고(故) 김일성 주석이 방송을 통해 육성으로 발표했으나, 김 주석 사망(1994.7.8) 이후 1995년부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하지 않고, 당보(로동신문), 군보(조선인민군), 청년보(청년전위) 등 3개 신문에 공동사설 방식으로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2011년 1월 1일에도 ‘신년공동사설’을 발표했고, 사망한 김정일 없는 2012년 1월 1일에도 같았습니다. 2013년 1월 2일, 중국의 관영 신화(新华)통신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1월 1일 오전 9시, TV 방송과 라디오방송을 통해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다"며 "창조, 혁신, 대전환을 올해의 표어로 내걸었으며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산력 제고, 민중생활 개선 등을 포함한 경제건설을 강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북한 최고지도자가 육성으로 직접 신년사를 발표한 것은 김일성 전 주석에 이어 19년 만에 이뤄진 것"이라며 "그동안 로동신문·청년동맹·조선인민군 등 3대 기관지의 공동사설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년사를 대신해 왔는데 올해는 김 위원장이 직접 육성으로 발표했다"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처럼 시작된 김정은의 신년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2018년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승리 해로 될 것입니다. 조선로동당과 공화국 정부는 인민의 믿음과 힘에 의거하여 주체혁명 위업의 최후 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투쟁과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체 인민의 존엄 높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주의 강국의 미래를 반드시 앞당겨 올 것입니다. 모두다 조선노동당의 영도에 따라 영웅조선의 기상을 떨치며 혁명의 새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라고 했습니다. 2019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지난해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고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을 확대강화하기 위하여 책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6.12조미공동성명에서 천명한대로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두 나라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에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불변한 립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것이라는데 대하여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가지 실천적조치들을 취해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양 속담에 “혀는 강철이 아니자 사람을 벤다.(The tongue is not steel, yet cuts it.)라고 했습니다. ‘촌철(寸鐵)이 사람을 죽인다. 말이 무섭다는 뜻’입니다. 한반도의 남·북한 백성들이 모두 새겨둬야 할 말입니다. 2019년에는 남·북한의 모든 지도자들이 ’신년사‘ 등 모든 말에서 백성들을 우롱하는 말을 하거나 허언(虛言)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가 거짓이 없는, 한반도 평화를 위하는 신년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고구려 왕성터 안학궁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청로 이용웅 칼럼]고구려 왕성터 안학궁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J.W.괴테(Goethe/1749-1832)는 <동서시론>에서 “삼천년의 역사에서 / 배울 것을 모르는 자는 / 아는 것도 없이, 암흑 속에 있어라 / 그날 그날 산다 해도.”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역사의식은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사회 현상을 시간적 계기에서 포착하여, 그 추이에 주체적으로 관련 지어 나가려는 의식.”은 무엇일까요? 바로 ‘역사의식(歷史意識)’입니다. 하지만 이 낱말을 설명하라고 하면 망설이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역사는 거짓말”이라고 한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의 말처럼 ‘왜곡된 역사’로 가득합니다. 특히 우리의 주변 국가들은 특별히 거론치 않더라고 엄청나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자국(自國)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우겨대고, 거짓 역사를 명문화 합니다. 이런 작태를 보고도 말 한 마디 못한다면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반만년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한반도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을 가로 막고 있는 장벽(障壁)이 문제입니다. 2006년 4월, 한반도 역사 연구에서 남과 북이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안학궁터 남북 공동발굴사업’입니다. 그 당시 남한의 서울특별시는 ‘평양 안학궁터 남북 공동발굴사업’을 고구려연구재단과 공동 추진했습니다. 이 사업은 양쪽 전문가들이 안학궁터에 대해 공동발굴조사를 하는 사업으로, 남측에서는 고구려 관련 전문가 등 19명, 북측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소속 교수 등 15명이 참여했습니다. 남측은 4월 8일부터 19일까지 북측과 공동으로 평양 안학궁터를 조사한 결과 이곳이 고구려 시대에 초축(初築.처음 축조)된 왕성임을 확인했고, 성벽에 대한 시굴을 실시한 결과 성벽 구조가 다른 고구려시대 성곽들인 평양 대성산성이나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사각추 모양 석재를 이용한 ’들여쌓기’ 방식을 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조사는 고구려 장수왕 때인 서기 427년 평양 천도와 함께 그 궁성으로 활용된 곳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안학궁터에 대한 남북 최초의 공동조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발굴사업 관계자는 “과거에 안학궁터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자료와 유물들을 직접 검토한 결과 5세기 이후 고구려 유물임이 분명한 연화문와당과 적갈색 승문(繩文.새끼줄 무늬) 암키와, 회청색 승문 암키와 등이 포함됐음을 확인했다”고 하고, 이로 볼 때 “안학궁이 고려시대에 처음 축조됐다는 논란은 잠재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6)>의 ‘안학궁’에 대한 설명입니다.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있던 고구려왕궁. 안학궁은 427년 즙안의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에 옮긴 때로부터 586년 평양성에 다시 수도를 옮길 때까지의 고구려 왕궁이였는데 그후 페허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안학궁터를 발굴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으며 복원된 안학궁 모형사판을 보아주시고 안학궁복구사업을 원상대로 진행할 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안학궁모형사판과 안학궁건설도면을 보아 주시고 안학궁복구에서 제기되는 방향과 방도에 대하여 밝혀 주시고 해당한 조치를 취해 주시였다...안학궁의 매개 궁전들은 회랑으로 서로 련결되였다. 회랑의 정면너비는 남궁, 중궁, 북궁으로 들어가면서 차츰 좁아 졌다. 안학궁에는 크고작은 다양한 정원들이 꾸려 졌으며 그 가운데서 궁성안 동쪽 낮은 지대 남쪽에 자리 잡은 정원이 제일 크고 화려하였다. 안학궁의 집자리에서 2,590개의 기둥자리를 찾아 내였다. 여기에는 많은 주추돌과 주추자리들이 남아 있다. 주추돌들은 깨바위들을 둥글거나 네모나게 다듬어 만든 것이다. 안학궁터에서는 암기와 수기와, 마루기와 등이 알려졌다.,,”(529~530쪽) 중국 측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2004년 3월1일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습니다. 2006년 4월 8일고구려 왕성터 평양 안학궁지 공동발굴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던 고구려연구재단은 불과 석 달 여 만인 2006년 8월 20일 교육인적자원부 지휘 아래 출범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이래서 안악궁지 같은 어제의 역사는 잊혀져 갔습니다. 오늘의 역사! 2018년의 고구려연구재단! 2018년 3월 1일, 서대문구 독립공원내 서대문형무소 출구, 3.1절 행사를 마친 시민들이 군악대 뒤로 줄지어 모여 있었습니다...문 대통령 행렬이 형무소 건물을 지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문 대통령을 향해 피맺힌 호소 외침이 터져나왔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매국지도 웬 말이냐!”, “동북아역사재단 김도형 이사장을 해임해 주십시오!” 우리의 ‘역사의식(歷史意識)’는? 상당수의 한국인이 역사의식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주무부처인 문화관광체육부는 수장부터가 역사의식이 없다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술년(戊戌年)을 되돌아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장관이 남북정상회담에 빠져 한반도 전부를 보지 못한 것 같고, 우리나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열광(?)하는 듯 했고...안학궁터 발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國寶)’ : 제1호 평양성, 제2호 안학궁성터(안학궁지), 제3호 보통문, 제4호 대동문, 제5호 숭인전, 제6호 숭령전, 제7호 묘향산 보현사 구층탑, 제8호 대성산성, 제9호 청암리성, 제10호 대성산성 남문, 제11호 대성산 연못떼, 제12호 대성산 고구려 무덤떼, 제13호 영명사 법운암, 제14호 용곡서원, 제15호 용산리 고구려 무덤떼, 제16호 연광정, 제17호 부벽루, 제18호 칠성문, 제19호 을밀대, 제20호 청류정, 제21호 최승대, 제22호 전금문, 제23호 평양종, 제24호 홍복사 육각칠층탑, 제25호 금강사터, 제26호 호남리 사신무덤, 제27호 상원 검은모루유적. 북한의 국보가 북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 한반도 역사, 한민족 역사의 국보입니다. 이제 남·북이 다시 안학궁터 발굴 공동조사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기대해 봅니다. 괴테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고,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중국 개혁·개방 40주년과 시진핑(習近平)주석의 연설
[청로 이용웅 칼럼] 중국 개혁·개방 40주년과 시진핑(習近平)주석의 연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중국 광둥성 선전(深圳)은 1978년 12월 18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 천명에 따라 80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도시다. 조용한 어촌 마을이 지금은 인구 1200만명이 넘는 첨단 산업 도시로 탈바꿈했다...몇 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의 청년들은 화웨이·텐센트 등에 취업하기 위해 선전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젊은이들은 단순 취업이 아니라 창업의 꿈을 갖고 선전으로 달려와 스타트업을 설립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부른다. 선전이 젊음의 도시인 이유는 대다수 인구가 외지인이고, 평균연령 33세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차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 길거리의 식당에서 만난 중국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지난 40년 개혁·개방이 이룬 중국의 발전상을 읽을 수 있었다...” 위의 글은 2018년 12월 20일(목) <중앙일보>에 실린 [시론] “개혁·개방 40주년 중국 선전의 청년 스타트업 충격”의 일부입니다. 집필자는 대학교수이며 과학자입니다. 필자는 이 분야에 문외한(門外漢)이라서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고, ‘중국 개혁·개방 40주년’를 주목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40주년 경축식이 12월 18일 오전 10시에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고, 시진핑(習近平) 중공중앙 총서기, 국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경축식에 참석해 담화를 발표했는데, 대한민국의 언론매체들은 이에 대해 크게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동북아 정세로 볼 때, 한국이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됩니다. <인민일보>(12월 19일)에 따르면, 경축식은 중앙라디오TV본부(中央廣播電視總臺)와 신화망에서 현장 생중계를 진행했고, 인민망, 앙시망(CCTV.COM), 중국망 등 중점 뉴스사이트와 인민일보사, 신화사, CCTV뉴스 클라이언트 등 뉴미디어 플랫폼에서 동시 중계 방송을 했습니다. <인민일보>는 “시(習) 주석은 개혁·개방 40년 과정을 회고하며 중요한 내용을 개괄”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입니다. ♦1가지 ‘위대한 정신’: 개혁개방 정신 : 개혁개방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개혁개방 정신은 민족 정신을 더욱 풍성하게 해 당대 중국인의 가장 뚜렷한 정신 지표가 되었다. ♦3차 ‘위대한 도약’ ;40년간 봄바람과 비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개혁개방은 중국의 모습, 중화민족의 모습, 중국인의 모습, 중국 공산당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중화민족은 일어서서 부유해진 후 강대해지는 위대한 도약을 맞았다! △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창건, 발전을 지나 개선이라는 위대한 도약을 맞았다! △중국인은 굶주리는 데서 부유한 중산계층으로의 위대한 도약을 맞았다! ♦3대 ‘이정표’ : 중국 공산당 건립,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개혁개방과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업 추진은 5•4운동 이후 중국에서 일어난 3대 역사적 사건이고, 근대 이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한 3대 이정표다. ♦10개 ‘시종’ 40년 개혁 과정 회고 ; 40년간, 우리는 시종일관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 여시구진(與時俱進), 구진무실(求真務實) △경제건설 중심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정치 발전노선 △사회주의 선진문화 발전 △발전과 함께 민생 보장과 개선 △환경보호와 자원절약 △군대에 대한 당의 절대적 지도 △조국의 평화 통일 대업 추진 △독립자주적 평화 외교 정책 △당의 지도 강화와 개선을 견지했다... ♦9가지 소중한 ‘노하우’ ; 개혁개방 40년간의 9대 시사점을 토대로 시진핑 주석은 다음과 같은 9가지를 견지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반드시 모든 사업에 대한 당의 지도를 견지해 당의 지도를 강화 개선해 나간다. ∎반드시 인민 중심을 견지해 인민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을 실현해 나간다. ∎반드시 마르크스 주의 사상을 견지해 실천을 토대로 한 이론 혁신을 추진해 나간다. ∎반드시 중국 특색 사회주의 길을 견지해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견지 발전해 나간다. ∎반드시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제도 개선과 발전을 견지해 중국 제도의 장점을 증강해 나간다. ∎반드시 발전을 첫 번째 임무로 견지해 중국의 종합 국력을 증강해 나간다. ∎반드시 개방 확대를 견지해 인류운명공동체 공동건설을 추진해 나간다. ∎반드시 전면적이고 철저한 당 관리를 견지해 당의 혁신력, 응집력, 전투력을 제고해 나간다. ∎반드시 변증법적 유물주의와 역사적 유물주의 세계관과 방법론을 견지해 개혁, 발전, 안정 관계를 올바르게 처리한다. 시진핑 주석이 위의 9가지를 견지해 나가야 한다고 밝힌 사실은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 <인민일보>(12월 19일)는 “40년 전인 1978년, 5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이 개방의 문을 열었다. 40년 후 이 오래된 땅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은 천지개벽 수준의 큰 변화를 맞이했다. 40년 동안 점차적으로 더 많은 외국인들이 이 신비한 땅을 찾았고 눈으로 직접 이 나라와 국민들을 보았다. 중국인을 직접 본 외국인들은 그들의 눈과 그들의 목소리로 ‘중국에서의 작은 이야기’와 ‘느낀 점’을 전하고 있다.”고! 12월 14일에는 개혁개방 40주년 경축 문화예술행사 “우리의 40년(我們的四十年)”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는데, 시(習) 주석을 비롯해 리커창(李克強), 리잔수(栗戰書), 왕양(汪洋), 왕후닝(王滬寧), 한정(韓正), 왕치산(王岐山) 등 당과 국가 지도부 및 3000여 명의 관중들이 함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그만큼 시진핑에게는 중요한 ‘개혁개방 40년“이었습니다.<인민일보>는 [특별기획] 사진으로 만나는 중국 개혁개방 40년史…‘경제발전’편, ‘교통변혁’편, ‘핵심기술’편, ‘해외교포 한마음’편, ‘문화생활’편도 게재(揭載)했습니다. 시 주석은 정세(政勢) 뿐 아니라 문화(文化)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중국은 4대 문명이 발생한 고국(古國) 중 하나이며, 오랜 동안 중국민족은 과학기술 방면에서 세계의 선두에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지진관측기를 발명했고, 수학 영역에서 원주율을 정확하게 계산해 냈습니다. 세계 최초의 천체관측기도! 중국 고대의 4대 발명품 등은 중국민족이 과학기술 방면에서 창조해낸 기적! 이런 나라가 개혁·개방 40주년을 기념하며, 미래의 중국을 설계하고 있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프랑스의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1890~1970) 전(前) 대통령은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관련 없는 정치적 현실은 어는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 대륙에는 중국과 관련 없는 평화도 전쟁도 상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중국 를 통해 본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청로 이용웅 칼럼]중국 를 통해 본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이번 2018학년도 2학기에 필자의 사이버강좌(경남대·경기대 학생 9백명 수강)을 마치고 새롭게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2학기 총 3,800명 수강 학생들의 성적 평가 때문에 잠시 촬영을 중단했는데, 다음 주 속개할 예정입니다. 그 와중에 자료를 틈틈이 보았는데, 기존 강의 자료 중에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 자료는 [난징대학살 추모관 르포]입니다. “유골 1000구 발견된 곳에 추모관. 12초마다 죽어나간 희생자 기려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폭염에도 하루 수만명 관람 "먼저 반성해야 용서도 하는 법, 일본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이를 공중으로 던진 뒤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부르는 모습을 봤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다." - 중국 작가 린위탕(林語堂)은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이렇게 고발했습니다. 여름 어느 날,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시의 낮 기온은 38도까지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시내에 있는 난징대학살 추모관은 방문객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이부터 학생 단체 관람객, 노(老)부부까지 뙤약볕 아래 줄지어 추모관을 찾았습니다. 추모관 관계자는 "전국에서 온 방문객이 오늘 하루에만 수만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일본군이 난징에서 30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만행을 기록한 비극적 역사의 현장입니다. 난징대학살 추모관에 들어서면 마치 무덤처럼 지하로 들어갑니다. 추모관은 1000구가 넘는 학살 피해자 유골이 발굴된 '만인갱(萬人坑)'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중국은 1982년 일본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 침략'이란 문구를 '진출'로 바꾸자 격분했습니다. 당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 침략의 비석을 세우라"고 지시했고, 1985년 추모관이 완공됐습니다. 추모관의 원래 명칭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난징 동포 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입니다. 덩샤오핑이 직접 비석 글씨를 썼습니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중국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성폭행한 뒤 학살한 사진만으로 벽면이 가득 찼습니다. 추모관 입구의 여성 조각상에는 '살해된 아기도, 생매장된 남편도 돌아오지 못하네', '달아나자, 악마가 온다' 등의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추모관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당시 12초마다 중국인이 죽어나갔다는 의미"라고 알려줬습니다. 당시 희생된 시신은 기차 2500량을 채우고, 시신을 포개면 빌딩 74층 높이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필자는 새로운 자료를 찾기 위해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를 검색했습니다. 마침 12월 13일이 제5회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모일이었습니다. 중국은 2014년 2월, 12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표결을 통해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국가 추모일로 지정했습니다. 중국은 지난 13일 난징대학살 81주년을 맞았는데, 일정에 따라 추모일 당일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식 개최 외에 별도로 6가지 추모 행사를 진행했는데, 반기 게양식, 난징시 일부 지역 추모 행사, 전국항전주제기념박물관 추모 행사, 해외 화교 및 교민 단체 추모 행사, ‘세계평화법회’, ‘촛불제’ 행사 등입니다. 그리고 첫 국가 추모 지역 관련 법규의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조례>는 또 추모 행사를 거행하거나 관련 시설을 참관할 경우에 진심으로 희생자들을 기리고, 조용하고 엄숙한 태도로 국가 추모 시설을 모독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며, 시설 환경과 분위기에 맞지 않는 표식이 있는 옷차림을 삼가해 공공질서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현지시간(미국 캘리포니아) 12월 8일, ‘미중평화우호촉진회’, ‘미국화교사회단체연합회’가 공동 주관한 ‘난징대학살과 진주만 사건 희생자 추모 행사’가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중미 2차 대전 기념비’ 앞에서 거행됐습니다. 현지시간(토론토) 12월 9일, 캐나다 첫 난징대학살 희생자 기념비가 토론토에 세워졌습니다. 현지 화교 단체, 토론토 주재 중국 총영사관, 캐나다 연방, 성, 시의회 및 유태인계 등 기타 민족 단체 대표 약 천여 명이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습니다. 이 밖에 일본에서도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 및 일본 침략군 만행 폭로를 위해 일본 지식인들이 히로시마,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해 역사를 되새기고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내일을 열어가길 호소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언론은? 대한민국 <위키백과>는 “난징대학살이란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100인 참수(경쟁斬首競爭)은 중일전쟁 시기의 중국에서 일본의 두 군인들이 누가 먼저 100인을 군도(軍刀)로 살해하는지를 겨루었다고 알려진 사건.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했다고 기술했습니다. 1771년(영조 47)에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에 "신(神)이 호랑이를 만들었을 때는 비록 살생(殺生)만하고 표독(慓毒)스러우나 가죽이라도 쓰이도록 했고, 뱀은 간악(奸惡)하나 약제(藥劑)로서 인간에게 이(利)를 주도록 했다. 그런데 대체 그놈의 표독하고 간악(奸惡)하기만 한 왜인(倭人)들은 무엇에 쓰자고 만들어 냈을까?“라고. 일본 극우파(極右派)의 선조? 필자와 친한 일본 현대인들은 아주 예의(禮儀) 바르고 심성(心性)이 정말 곱습니다. 다만 일본 지도자들의 품성(品性)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매년 12월 13일이 되면 중국을 찾아 속죄(贖罪)해야 할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월남과 월남전(越南戰) 영웅, 오늘의 베트남 축구 영웅
[청로 이용웅 칼럼]월남과 월남전(越南戰) 영웅, 오늘의 베트남 축구 영웅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는 베트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수도 : 하노이(Ha Noi, 인구 약 722만 명) ★면적 : 330,341㎢(한반도의 1.5배) ★인구 : 9,554만 명(2017, UN) ★민족구성 : 비엣족(86%)외 53개 소수민족. ★시차 : 우리시간 - 2시간. ★언어 : 베트남어(공용어). ★정부형태 : 사회주의 공화제(공산당이 유일정당) ★의회구성 : 임기 5년 단원제(의석수 500석) ★국가 지도자 (집단지도체제) 당서기장 겸 국가주석 : 응우옌 푸 쫑(Nguyen Phu Trong) ★우리나라와의 관계- 수교 ; 55.10. 월남공화국 승인./ 56.05. 외교관계 수립. / 75.04. 대사관 철수(월남 패망 직전) / 92.12. 외교관계 수립. 위의 자료를 보면 한 나라의 외교부가 다른 나라 명칭을 2개(월남/베트남)로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월남’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월남전쟁’, ‘파월장병위문단’...월남전쟁(越南戰爭)!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벌인 전쟁.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군 및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군과 싸워 이겨 1969년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미군 철수 후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짐으로써 남북이 통일되었습니다.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진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65년 2월 비둘기부대 2,000여 명, 이어 10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를 파병했고, 그 외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가 파병되었습니다. 1966년 미국의 추가파병 요청으로 4월 혜산진부대가, 8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습니다.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으로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였습니다. 1968년 5월부터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1971년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습니다. 전국대학생파월장병위문단! 대한민국 정부는 전국대학생파월장병위문단을 결성! 위문단은 1966년 7월 1일 船便(선편)으로 仁川港(인천항)을 출발했습니다. 전국 33개 대학에서 선발된 95명의 이들 위문단은 1개월 동안 월남전선에서 베트콩 섬멸작전에 분투하는 비둘기·청룡·맹호부대 등을 방문하고 장병들의 노고를 위문하는 한편 각 대학에서 마련한 위문품을 전달했습니다. 위문단은 월남 문교상(文敎相)을 예방하고 ‘사이공’대학 등을 방문하여 월남대학생과 친선도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귀국 길에 타이완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그때 필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함께 했습니다. 1965년 주월한국군 사령부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소장이 취임했는데, 1966년 필자는 퀴논 맹호부대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필자는 매년 현충일에 그의 묘지를 찾습니다. 그는 월남전쟁의 진정한 증인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전 파병 결정, 하지만 채 장군은 개인적으로는 월남전 참전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하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가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6.25 전쟁에서의 경험을 활용하여 정립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이용해 '두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2013년 11월 25일 사망한 월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은 생전의 유언대로 국립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아닌 파월장병 제2묘역에 일반 병사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1990년대의 베트남의 모습!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1966년의 초라한 모습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현장이었습니다. 학술회의에 참석한 베트남 교수들은 20년 뒤에는 자국(自國)이 크게 발전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세계는 베트남이 괄목한 성장을 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베트남에 때 아닌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2018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 ["생큐, 박항세오" 수백만 명이 뛰쳐나왔다]를 발췌 인용합니다. “생큐, 박항세오(감사합니다, 박항서 감독님).” 2018년 12월 6일 밤 베트남 전역은 ‘박항서 매직’으로 들썩였습니다. 이날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베트남 하노이 미딘경기장에서 열린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준결승 2차전에서 필리핀을 2-1로 꺾고 10년 만에 결승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 2차전 합계 4-2로 2008년(첫 우승) 이후 다시 결승 티켓을 차지해 말레이시아와 우승을 다투게 됐습니다. 12월 7일 <베트남 익스프레스>는 “총리와 시민 모두 열광했다”며 “베트남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어나와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금성홍기(베트남 국기)와 태극기가 뒤섞인 감격스러운 밤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박 감독이 제압한 필리핀은 과거 잉글랜드 대표팀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시티 등의 사령탑을 지낸 명장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이끄는 팀입니다...올해 베트남에서 박 감독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따뜻한 ‘아버지(파파) 리더십’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박 감독이 가장 잘하는 것은 ‘명확하게 역할’을 정해주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박항서 감독! 현재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대한민국의 축구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트남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왜? 열정적이기도 하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언론들은 12월 8일(한국시간) "박항서 감독이 선수에게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양보했다"고 전했습니다.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12월 11일 말레이시아에서 스즈키컵 결승 1차전 원정 경기를 치르기 위해 12월 7일 비행기로 격전지 말레이시아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박 감독은 이륙 후 비즈니스석에서 나왔습니다. 필리핀과 준결승 1차전에서 허리를 다친 선수에게 좌석을 양보하고, 이코노미석에 앉았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파월장병 제2묘역과 박항서 감독의 이코노미석은 격은 다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12월 11일 베트남은 '스즈키 컵' 결승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와 2 : 2 무승부(無勝負)! 결승 2차전은 12월 15일(토) 베트남에서 열립니다. 박항서 감독을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사이버 강좌 의 새로운 시작(始作)
[청로 이용웅 칼럼]사이버 강좌 의 새로운 시작(始作)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이 모든 것들, 신(新)정부의 이상과 구상은 최초의 백일(百日)간에는 이룩되지 못할 것이며, 최초의 천일(天日)간에 끝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정권의 존속 기간 중에도 완료되지 못할 것이며, 혹시 또는, 이 지구 위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끝나는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始作)을 해보라.”(J.F.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우리말 큰사전>은 ‘시작’을 “처음으로 하거나 쉬었다가 다시 함.”,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시작’을 “무엇을 처음으로 하는것 또는 쉬었다가 다시 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합니다. 국내 언론들이 “문재인 대통령 숨 가쁜 정상외교 시작”이라는 보도를 한 이후, 동북아시아는 새로운 시작의 연속입니다. 필자의 동북아시아 강좌는 20 13년 <동북아 정세(政勢)와 문화의 이해>로 시작되었고, 이용웅 교수의 <동북아 정세와 문화의 이해>가 2016년 <동북아 역사와 문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018년 12월 5일 새로운 시작을 하였습니다. 사이버강좌 [동북아 역사와 문화]-동북(東北)아시아는 아시아의 동북부 지역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한국과 일본, 중국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중국 둥베이 지방과 몽골, 러시아 극동 지역을 포함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중국, 타이완, 몽골, 러시아 극동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21세기 동북아시아는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새 세계질서의 하위체계로서 동북아의 국제 정치구조도 급격히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의 북방외교, 일본의 UN 장악 의도, 플루토늄 도입, 중국의 남중국해의 패권 장악을 위한 해군력과 공군력의 증강, 북한의 핵무기 개발, 한국-대만의 관계악화 등 동북아 정세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 동북아의 안보 체제는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구소련과 중국을 봉쇄함으로써 구축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현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구조나 그 대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적의 개념이 불분명해지고, 이 지역에 한국과 중국의 두 개의 분단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방위체제의 등장이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에 필자는 사이버강좌 [동북아 역사와 문화]를 개설했습니다. 동북(東北)아시아! 이 지역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동북아 국가들이 신세계평화 구축체제에 의존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북한이나 중국의 폭발적 체제변화나 구 소련(舊 蘇聯)의 민족분규의 확산 등 이 지역의 심각한 잠재적 문제들에 대해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구조나 방안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한과 동북아지역 국가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안정과 번영,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그래서 동북아지역 국가들의 국내외 정세는 한반도 문제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 안정과 번영을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정세를 정확하게 연구하고 파악하여야 하며, 동북아시아권 국가들의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통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문화를 연구해 왔습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고, 동북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한반도 통일의 열쇠를 찾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기획한 경극 ‘금잠기’ 베이징 상연, 문학 작품 재해석 ; [인민망 한국어판 12월 4일] 지난 11월 29일 경극(京劇) ‘금잠기(金簪記)’가 베이징에서 최초로 상연됐다. 대학생들이 직접 기획한 해당 경극 공연은 현실주의를 비판하는 문학 대작 ‘금병매(金瓶梅)’를 통해 명(明)나라 말기 참혹한 사회적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인민망 한국어판 12월 4일. 원문 출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리용호 조선 외무상이 내일부터 방중 일정에 돌입한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4일 정례브리핑에서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부 부장 초청에 응해 리용호 조선 외무상이 오는 6일부터 8일까지 중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겅 대변인은 “리 외무상은 이번 방중 기간 중국 지도자와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며 “왕이 국무위원은 리 외무상과 중조(中朝) 관계, 조선반도 정세 등 공통 관심사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밝혔다.“[인민망 한국어판 12월 5일] 앞으로 <동북아 역사와 문화>에서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과 인민망 한국어판의 다양한 중국 소식들(위 2 기사)을 모아서 학생들과 함께 할 것이며,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도서관에 있는 북한 <로동신문> 자료를 선정하여 강의에 활용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 · 몽고 · 대만 · 극동 러시아 등의 자료를 강의에 반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극동문제연구소의 출판물들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조명할 것입니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는 1972년 설립된 이후 지난 46년여 동안 동북아시아 문제를 연구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구현해 나가는데 작은 보탬이 되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가 <동북아 연구> 총 18권, 단행본 <동아시아 질서 변화와 한반도 미래> · <동북아 新권력체제와 한반도 정책> · <동북아 지역협력과 북한의 체제전환: 시나리오를 통해 본 동북아 미래구도> · <동북아 질서에 대한 북한의 법제도적 시각> · <동북아 질서 재편과 북한의 정치경제적 변화> · <동아시아 신질서의 모색> · <동아시아 발전의 정치경제> · <동남아정치론> · <동아세아의 평화와 안보> 등의 발간입니다. 2018년 1학기 <동북아 정세(政勢)와 문화의 이해>는 경기대학교 학생 316명, <동북아 역사와 문화>는 경남대학교 학생 421명이 수강했고, 2018년 2학기 <동북아 정세(政勢)와 문화의 이해>는 경기대 학생 395명, <동북아 역사와 문화>는 경남대 학생 499명이 수강하고 있습니다. 오는 2019년 1학기에는 <동북아 정세(政勢)와 문화의 이해>와 <동북아 역사와 문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강좌를 만듭니다. “잘 시작된 일은, 반은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플라톤/Platon/BC 427경~BC 347경)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을 조심하라. 처음 한 걸음이 장차의 일을 결정한다. 그리고 참아야 할 일은 처음부터 참아라. 나중에 참기란 더 어렵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의 말을 새기면서, 서울 종로구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 스튜디오에서 실시하는 촬영 등 제작에 열(熱)과 성(誠)를 다하겠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마당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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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한국 현대에 성립된 연극 양식으로, 한국 전통연희의 공동체적 성격을 계승하여 무대와 관객의 적극적이고 집단적 소통과 시공간의 놀이적이고 유연한 운용을 핵심적 특징으로 하는 한국 현대에 성립된 연극 양식. 마당극은 한국 근·현대 연극문화가 지닌 식민주의적 성격과 순수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반성을 동력으로 하는, 연극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연극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연극사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연극양식이며, 진보적 연극운동의 주도적 양식이기도 하다. 전통연희의 축제적 성격과 열린 판의 운용 방식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였으며, 사회비판적 내용을 담고 집회 현장에서 공연되거나 공연 자체가 집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1990년대 후반 이후 마당극운동은 쇠퇴하였으며 마당극은 축제적인 연극과 교육연극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존재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서 방송국이나 국립극장 등이 주최한 상업적·관제적 마당극이 본격화되었고 이는 마당놀이라는 명칭으로 마당극운동 맥락의 작품들과 구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당극·마당놀이) 최근 <극단 미추> 대표 손진책 님이 보내준 <춘풍이 온다> 소식를 접하고, 잠시 과거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1980년대 어느 날...<마산 MBC> 손정수 PD가 전화를 했습니다. 시집 <하느님 전화번호>를 출판하고 하늘나라로 간 손(孫) PD가 그 당시 부탁한 것은 MBC가 마당놀이를 제작,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데 마산 공연 때 관객이 적을 것 같으니 학생들이 많이 구경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필자는 경남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경남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지도교수와 한국연극협회 마산지부장이었습니다. 그 뒤 필자는 매년 공연장에서 돼지머리에 지폐를 꽂았고, 마당놀이와 함께 했습니다. 그때 만난 마당놀이 중 하나가 <신이춘풍전>입니다. 소설 <이춘풍전>! 숙종 때 서울에 사는 이춘풍은 가정은 돌보지 않고 놀러 다니며 가산을 탕진하고, 급기야는 아내가 품을 팔아 모은 돈까지 다 없애고 빚까지 집니다. 그때 한 상인이 돈을 써서 벼슬을 사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최참판에게 다리를 놓겠다고 찾아갔으나, 용돈도 못 얻고 술대접만 받고 돌아옵니다. 춘풍은 돈이 떨어지자 기생 월향에게 까지 천대를 받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 김씨가 굶주려서 거동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춘풍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고는 아내에게 서약까지 합니다. 그리고 빚 낸 돈과 아내의 돈을 가지고 평양으로 장사를 하러 갑니다. 하지만 평양 명기 추월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어 기생집에서 하인노릇을...남편의 소식을 들은 김씨는 마침 이웃에 사는 참판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청을 드려 비장(裨將)이 되어 남복을 하고 평양에 갑니다...춘풍은 비장이 아내인 것을 알고 개과천선하여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힘써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을 이룹니다. “우리 문화의 해학과 여유와 풍자의 묘미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현하는 MBC 마당놀이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니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MBC 마당놀이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명공연으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으로 한 길을 달려온 MBC 마당놀이, 서민의 애환을 보듬어 주며 언제나 약자 편에 서는 MBC 마당놀이, 우리의 멋과 풍취를 오늘에 되살린 MBC 마당놀이...지난 20년간 마당놀이라는 장르가 정착될 수 있도록 애를 쓴 문화방송과 스텝들, 극단의 연출자와 배우들, 그 밖의 관계자 여러분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2000.11.17 문화관광부 장관) 그게 아닌데...마당놀이하면 MBC 마당놀이를 생각하시는 분이 많지만, 원래 마당놀이는 MBC와 극단 미추가 함께 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부터 MBC와 극단 미추가 따로 마당놀이를 진행했습니다. 2008년부터 MBC는 장충체육관에서, 극단 <미추>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2008년부터 MBC는 마당놀이 원년 멤버인 김성녀, 윤문식, 김성녀, 김종엽씨가 아닌 다른 멤버로 계속 마당놀이를 3년 동안 진행했고, 극단 <미추> 마당놀이는 원년 멤버로 공연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원조 마당놀이는 MBC 마당놀이가 아닌 극단 <미추> 마당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2009년 12월, 극단 <미추> 마당놀이와 손진책 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손(孫) 연출 님의 초대로,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가 공연되고 있는 서울 월드컵경기장 북측광장 마당놀이 전용극장을 찾았습니다. 손진책 연출과 ‘김성녀·윤문식·김종엽’ 콤비가 함께 만든 <이춘풍 난봉기>는 <신이춘풍전>과 마찬가지로 <이춘풍전>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춘풍 난봉기>는 고유의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한 우리 고전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노래와 춤과 같은 연희적 요소들을 동원하여 현대의 사회상과 절묘하게 조화시킨 작품으로 훌륭했습니다. 필자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2018년 12월, 극단 <미추> 마당놀이와 손진책 님을 <춘풍이 온다>에서 다시 만났게 되었습니다. <국립극장>은 “유쾌하고 속 시원한 풍자와 해학으로 뻔했던 연말연시의 풍경을 확 바꾸어 놓았던 마당놀이가 올해도 어김없이 관객들을 찾아온다. ‘심청전’부터 ‘춘향전’, ‘흥보전’ 등 고전 소설을 배꼽 빠지는 놀이판으로 탈바꿈시켰던 국립극장 마당놀이! 2018년 네 번째 작품으로 ‘이춘풍전’을 각색한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를 선보인다. 지난 마당놀이가 해오름극장에서 화려한 무대와 볼거리를 선보이고 하늘극장 원형무대에서 원조 마당놀이의 느낌을 살렸다면, 올해는 달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긴다. 중극장 규모의 달오름에서 더욱 가족적이고 포근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 이춘풍의 애드리브와 속 시원한 풍자, 귓가에서 연주되는 신명나는 음악과 코 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재담을 생생하게 즐기며 마치 무대 속에 들어와 있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연 시작 전 엿 사 먹기,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는 길놀이와 고사,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뒷 풀이 춤판 등 마당놀이를 더욱 즐겁게 해줄 놀 거리와 볼거리도 놓치지 말 것. 연말연시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겨울 추위도 잊게 할 흥겨운 마당 놀이판을 함께 즐겨보자!“고 했습니다. 2018년 <춘풍이 온다>에는 ‘김성녀·윤문식·김종엽’ 콤비가 없습니다. 김성녀 교수가 ‘연희감독’으로 참여할 뿐입니다. 하지만 <춘풍이 온다>에는 벌써 열풍(熱風)이 붑니다. 젊은 출연자들의 에너지 넘치는 <춘풍이 온다>는 2018년 12월 6일(목)에 막을 열고, 2019년 1월 20일(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달오름극장 앞의 장사진(長蛇陣)를 기대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