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 평양에서 영화를 배운 안나와 BIFF, 그리고 북한영화
[청로 이용웅 칼럼] 평양에서 영화를 배운 안나와 BIFF, 그리고 북한영화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현재 국내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중에 2018년 10월 13일 현재 누적관객수 727명, 10월 13일 일간 관객수 3명인 영화가 있습니다. 9월 10일 오전 퇴계로 212 대한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시사회도 열렸던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 없었던 북한의 영화 촬영/제작 현장 최초공개!”라고 선전되고 있는 호주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Aim High in Creation!/2013년 제작)입니다. 이 영화의 홍보 자료에는 “세계 최초로 북한 영화산업 현장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특히 북한을 대표하는 영화인들이 김정일의 영화교본을 바탕으로 하는 그들의 영화 제작 기법은 물론 연기 지도 방법까지 직접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外/ 2018.09.13 개봉/ 전체관람가/ 상연시간 96분/ 출연 : 박정주, 리관암, 배용삼, 윤수경/ 줄거리; 대규모 탄층 가스 채굴의 위협이 시작된 호주 시드니. 영화감독 안나는 자신의 가족과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선전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선전영화를 제작하는 평양으로 향한다. 감독, 배우, 촬영가, 작곡가 등 북한을 대표하는 영화인들을 만나 도움을 청한 안나는 그들만의 독특한 영화 제작 기법을 배운 후, ‘평양 스타일’의 단편영화 촬영에 들어가는데…과연 안나는 평양 멘토들의 기대대로 영화를 만들어 마을을 살릴 수 있을까? 영화광 김정일의 영화교본 '영화와 연출’의 규칙에 따라 영화를 만들어보는 기상천외한 시도이자 혁명적인 코믹 어드벤처!”- 위는 영화 홍보 글입니다. 영화교본 '영화와 연출’? 김정일의 <영화예술론>입니다. 이 영화는 9월 29일 KBS-TV "남북의 창“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10월 5일 한 언론은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선전영화를 만들기 위해 평양으로 간 호주 영화감독 안나가 북한을 대표하는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독특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다. 서구 영화인 최초로 북한 당국의 정식 허가를 받아 영화를 촬영한 감독은 지금껏 영화나 방송에서 소개된 것보다 더욱 생생한 평양의 모습과 베일에 가려졌던 북한 영화, 북한 대표 영화인들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영화에 담아 다양한 볼거리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10월 12일 총 관객 1명...지금까지 총 727명!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기간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개최되었고, 23회 부산국제영화제 BIFF/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2018.10.04~2018.10.13)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북화영화는 없었습니다. 다만 허겁지겁(?) 내년 얘기를 꺼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던 날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건이 형성된다면 관계당국과 협의해 북한영화와 영화인을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2001년과 2003년 두 차례 북한영화를 상영했지만 인적 왕래는 없었다“며 ”영화감독과 배우의 영화제 참가를 전제로 북한영화를 초청하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내년 9월에 개최되는 평양영화축전에 참가해 북한 인사들과 접촉할 뜻도 함께 내비쳤습니다. 또한 “종전선언으로 남북의 물적 인적교류가 대폭 확대되고 자신의 신념과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가감 없이 전달되야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한 영화교류가 이뤄 질 것"이라고...뭘 알고 떠드는 건지...문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아시는지... 북한영화! 앞으로 그 실체를 낱낱이 소개할 예정입니다. 여기서는 용어해설을 하기로 합니다. <조선말대사전(2)>은 “영화: 필림에 찍어서 운동적이고 조형적인 영상으로 보여주는 예술의 한가지. 대사와 함께 행동과 생활을 통하여 인간과 그 생활을 화폭으로 보여주는 종합예술이다. 사상주제적 내용이나 현실반영의 특성에 따라 예술영화, 기록영화, 과학영화, 텔레비죤영화 등으로 나눈다.”고 했고, “영화예술: 객관적 현실을 필림(화면)에 찍어 영상으로 보여주는 운동성과 조형적직관성, 종합성과 시공간성, 편집적 특성을 체현하고있는 극예술의 한 형태.”(1515쪽)라고 기술했습니다. 북한 <백과전서(5)>는 “영화: 현실을 생동한 움직임 속에서 직관적으로,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의 한 종류. [특성]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영화는 우리 당의 힘있는 직관적인 선전선동수단입니다. 영화는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여줄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시간에 오랜 기간의 력사적 사실들과 사건들을 직관적으로 생동하게 보여줄 수 있으므로 근로자들을 교양하는데서 소설이나 신문보다도 낫고 무대의 제한을 받는 연극보다도 우월합니다. 영화가 여러가지 예술형식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힘있는 대중교양수단이라는데 대하여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김일성저작집》12권, 9페지)”라고 기술했습니다. 북한영화는 한마디로 조선로동당의 “힘있는 직관적인 선전선동수단”입니다. ‘복합어(합친말)’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주체예술영화’ (주체적예술영화 등), ‘혁명적영화예술’, ‘사회주의, 공산주의 영화예술’, ‘사회주의영화예술’ 등이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주체사상’에 입각한 이론 형성과정에서 생긴 낱말로,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우리 당 사상사업과 영화예술>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영화예술은 본질에 있어서 수령의 혁명위업에 복무하는 예술이다. 수령의 혁명사상과 수령의 혁명위업을 떠나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영화예술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수령의 혁명사상을 구현하지 않고 수령의 혁명위업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영화예술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영화예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사회의 요구에 맞는 혁명적 영화예술이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자면 수령의 혁명력사와 빛나는 업적, 령도의 현명성, 고매한 덕성을 깊이있게 형상하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쓰이는 영화 관련 용어들을 보면, 남한의 사전에 없거나 뜻이나 음(音)이 상이한 것들이 많습니다. 상호 교류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가 아주 많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도 많습니다. 한 영화제 관계자가 잘 알지도 못하고, ‘미주알고주알’할 분야가 아닙니다. 앞으로 진정한 한반도 영화의 등장을 기대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1949년의 조선로동당 창건과 2018년의 당(黨)창건일
[청로 이용웅 칼럼] 1949년의 조선로동당 창건과 2018년의 당(黨)창건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994년 7월 8일 새벽 사망한 북한의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행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에서 “우리 당의 혁명사상, 당의 유일사상의 진수를 이루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적인 주체사상이며 우리 당의 유일사상체계는 주체의 사상체계입니다.”라고 천명했습니다. 이 대회(11.2~13)에서 ‘로동당 규약’ 전문(前文)에 “조선로동당은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함으로써, 주체사상은 ‘로동당’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1926년 10월에서 1931년 12월 사이에 김일성이 ‘창시’했다는 ‘주체사상’이 1967년 12월 김일성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발설되었고, 1970년 11월에 ‘조선로동당규약’에 명문화된 것입니다. ‘조선로동당규약’의 전문(前文)에는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 조선로동당은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 의해 이룩된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킨다. 조선로동당은 자본주의사상과 마찬가지로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로동계급운동에서 나타난 수정주의, 교조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의 순결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견결히 투쟁한다. 조선로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조선로동당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을 당건설과 당활동의 기본원칙으로 삼는다. 조선로동당은 주체사상에 기초한 전 당의 사상의지적 통일단결을 계속 강화한다. 조선로동당은 프로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총로선으로서 천리마운동과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추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당규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제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조문에서 ‘령도(領導)’란 “(이끌어나아가는 위치에 서서) 어떤 계급이나 조직 또는 인민대중을 통솔하고 지도하는것 곧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며 강력한 정치적력량으로 만들고 그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하며 승리에로 이끌어 나거는 것”(《조선말대사전(1)》, 959쪽)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의 모든 분야는 ‘김일성+조선로동당규약+사회주의헌법’의 합일문자인 ‘주체사상’의 이론 속에서만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면 ‘조선로동당’의 출발은?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시에 입항,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분국'의 명칭을 거부하고 위원장에 추대됩니다. 북조선분국은 1946년 6월 22일 분국 제7차회의에서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을 연고로 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합니다. 1946년 11월 23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이 이루어져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나 1949년 6월 24일 북로당에 흡수되고, 6월 30일 "조선로동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은 “조선로동당은 선군혁명의 세련된 참모부이며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 향도자이다. 우리 당과 같이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높이 모시고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속에 백전백승의 빛나는 력사를 창조하여온 존엄 높은 혁명적 당은 없다...오늘 미제와 남조선의 집권보수세력은 6.15통일시대의 흐름을 가로막으며 조선반도의 정세를 긴장시키고 있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높이 내외의 반통일분렬주의 세력의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고 이 땅우에 통일되고 번영하는 강성대국을 일떠세우기 위하여 더욱 과감히 싸워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 권력의 상징인 ‘조선로동당’의 본부 당사(黨舍)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집무실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그곳은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당사는 평양 김일성광장 인근 10만평 부지에 화강암으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인데, 여기에는 김 위원장의 집무실뿐 만 아니라 조직지도부 등 당 핵심 부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당 정치국 확대회의 등 중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립니다. 또한 김 위원장은 매년 1월1일 이 청사에서 육성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인사가 이곳은 방문한 것은 2018년 3월5일 문 대통령 특사단이 처음입니다. 2018년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밝게 웃으며 손을 맞잡은 채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1층 로비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한 뒤 문 대통령은 방명록에 "평화와 번영으로, 겨레의 마음은 하나"라는 문구를 적고 서명을 했습니다. 이후 계단을 이용해 2층 회담장으로 이동한 두 정상은 오후 3시45분 본격적인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김 위원장 집권 이래 이곳에서 정상 간 회담이 열린 건 최초라고 합니다. 2017년 10월 10일은 조선로동당 72주년 창건 기념일! 그날 평양에선 문화예술무대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펼쳐졌는데, 이런 행사들은 대부분 매년 같습니다. 김정일 시대의 것을 그냥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2018년 10월 10일은? 북한 <로동신문>은 조선로동당 창건 73년을 맞아 “일심단결의 기치 높이 승리와 영광만을 떨쳐갈 것이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총진군에서 일심단결의 위력을 남김없이 떨쳐야 한다”, “모든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무조건 한다는 결사의 각오를 안고 경제건설 대진군에서 일심단결의 위력을 총폭발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은 2018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일을 맞아 특별한 정치행사 없이 예년 수준으로 조용히 기념일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행사들은 2017년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로동신문>은 중국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보도했습니다. 독재자(獨裁者)! ‘독재자’란 견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가진 집권자를 말하며,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인 사람을 빗대어 일컫기도 합니다. 원뜻은 "홀로(獨) 재단(裁)하는 자(者)" 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독재자의 길을 걷지 말기로 기원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필자의 와 칭다오(靑島) 관광
[청로 이용웅 칼럼] 필자의 와 칭다오(靑島) 관광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동북아시아(東北亞細亞, Northeast Asia)는 아시아의 동북부 지역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한, 중, 일 3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넓은 의미로는 몽골, 러시아의 극동 지역 및 시베리아도 포함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몽골, 일본, 러시아 극동 지역 및 시베리아를 가리킵니다. 필자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사이버 강좌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경남대), <동북아 정세(情勢)와 문화의 이해>(경기대)를 개설한 이유는? 21세기 동북아시아는 엄청난 변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새 세계질서의 하위체계로서 동북아의 국제 정치구조도 급격히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의 북방외교, 일본의 UN 장악 의도, 중국의 남중국해의 패권 장악을 위한 해군력과 공군력의 증강, 북한의 핵무기 개발, 한국-대만의 관계악화 등 동북아 정세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 동북아의 안보 체제는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구소련과 중국을 봉쇄함으로써 구축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현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구조나 그 대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교양 사이버강좌로 개설한 대학은 거의 없습니다. 이에 경남대학교는 본(本) 사이버강좌를 개설했습니다. 필자는 이 과목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웹사이트(이용웅교수의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도 함께 개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 안정과 번영을 위해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정화히 연구하고 파악하여야 하며 동북아시아권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카페를 통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합니다. 이 카페의 목표는 동북아 정세와 동북아 문화의 이해를 통해 한반도 통일의 열쇠를 찾는 것입니다. 동북(東北)아시아! 이 지역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동북아 국가들이 신세계 평화 구축체제에 의존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북한이나 중국의 폭발적 체제변화나 구 소련(舊 蘇聯)의 민족분규의 확산 등 이 지역의 심각한 잠재적 문제들에 대해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동북아 평화구조나 방안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한과 동북아지역 국가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통해서 안정과 번영,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그래서 동북아지역 국가들의 국내외 정세는 한반도 문제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동북아 지역의 정세는 최근 들어 중요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국가주의, 그리고 한반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10여년 사이에 아태지역의 정치경제적 위상은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거기다가 2018년 새 모습으로 등장한 북한의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동북아 정세의 핵(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는 기본적으로 냉전적 요인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지역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고, 여기에 중국이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대해 나가고 있으며, 최근 러시아도 과학기술, 석유와 가스 등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상황입니다. 필자는 한반도의 평화, 안정과 번영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학생들에게 급변하는 ‘동북아시아’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고, 그때 그때 동북아 정세를 홈페이지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강좌의 핵심은 한반도의 모든 것과 중국의 정세(政勢), 역사, 문화입니다. 한반도는 필자의 사이버강좌 <북한의 문화예술>과 병행 연구되고 있으며, 중국은 각 지역을 직접 찾으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1992년 한·중 수교 바로 직전에 북경에서 열린 한·중교수세미나에 참석한 이래 자주 중국을 방문해서 자료 수집을 해왔습니다. 지난 9월에는 중국 칭다오(靑島,청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그 자료들을 종합, 오는 11월부터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와 <동북아 정세(情勢)와 문화의 이해>를 통합하여 새로운 강좌를 촬영할 예정입니다. 칭다오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중국 속 유럽’이라 불리우는데,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푸르고,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유럽풍 붉은 지붕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1897년부터는 독일의 조차지로, 1914년에는 일본이 점령하면서 50여 년간 외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뼈아픈 역사가 오늘날 칭다오만의 ‘이국적인 정취’를 만들어 냈습니다. 조계지 시절의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보존된 구(舊)시가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요트 경기가 열렸던 신(新)시가지 일대에 호텔과 식당이 대거 입점하면서 주말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도시박물관(青岛市博物馆), 청도포도주박물관(青岛葡萄酒博物馆), 청도비주박물관(青岛啤酒博物馆)이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보통 ‘와인’이라고 하고, ‘비주(啤酒)’는 맥주입니다.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주말 해외여행지가 바로 중국 산동성에 위치한 칭다오입니다. 5.4광장, 잔교, 운소로 미식가, 라오산 등이 관광코스...이중 맥주박물관은 중국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청도비주, 즉 칭다오맥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청도시박물관은 1959년이 시초이고, 2001년 새로운 청사가 건립되었습니다. 박물관은 지역의 특성과 청도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중국 <인민일보>(2018.9.18.)는 “문화관광부-칭다오(靑島) 라오산(嶗山)과 핑야오(平遙)고성 등 관광지에서 ‘1티켓제’ 방식의 가격 혁명을 시도해 입장권 유효 기간 확대 등으로 현지 숙박업, 요식업 및 지역 특산물 판매까지 호황을 누렸다. 이에 전문가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특색 관광 문화와 고부가가치 관광 서비스업을 육성해 관광 산업라인을 형성하면 숙식은 물론 오락과 쇼핑 등 다방면에서 관광지 경제 발전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관광지 발전모델로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최근 대한민국의 한 여행사는 ‘청도관광’을 홍보하느라 난리굿입니다. 동일 상품을 소개하면서 일정, 요금 등을 가지고 장난(?)...10월 5일 한 일간지는 “한국, 중국인 관광 선호국가 4위…재방문 유도할 ‘3거리’ 개발해야/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 700만 시대, 외면 받는 한국”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는 어떤 대중(對中)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중국의 문화관광부(文化和旅游部)는 ‘칭다오(靑島)’까지도 정책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18년 대학교·대학생·대학교수·대학 연구소의 현주소
[청로 이용웅 칼럼]2018년 대학교·대학생·대학교수·대학 연구소의 현주소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기사1/요약] 2018년 9월 12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형사24단독 이현경 판사는 항공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미국 유학생 정모(27)씨에 대해 "엄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정씨는 지난 3월 미국 뉴욕을 출발해 인천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항공기에 탑승한 순간부터 착륙할 때까지 14시간 동안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다른 승객이 자신의 좌석을 밟았다는 이유로 좌석 교체를 요구하면서 그런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담배를 입에 물기도 했다. 당초 검찰은 벌금 500만원에 처해 달라며 약식기소했지만 그가 이에 불복하면서 정식 재판으로 진행됐다. [기사2/요약] 개밥 주는 조교·유리잔 던진 교수…대학가 여전한 교수 '갑질' XX대 소속 A교수는 연구년을 맞아 해외로 떠나면서 조교 B씨에게 자신이 기르는 개의 밥을 챙겨주라고 지시했다. 이 교수는 귀국 후 열린 회식 장소에서 B씨에게 욕설을 하고 유리잔을 던지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학교수들의 ‘갑질 횡포’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박경미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2017~2018년 대학 감사자료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제자들에게 ‘갑질’을 일삼은 대학 교수들의 민낯이 그대로 담겼다. [기사3/요약] 서울대 대학원생 1380명 "나는 이런 일까지 당해봤다"/ 서울대 인권센터 조사 발표 - "교수·선배 논문 대필" 16%/ "성 비하 발언 들었다" 19.8%… "강제로 행사에 동원" 28.1% // 한번 찍히면 졸업도 못해 - 9년간 졸업 거부당한 학생, 술취해 칼 들고 교수 찾아가 "연구는 문제가 없어도 교수가 학생을 싫어하면 졸업이 안 됩니다. 어떤 학생이 9년간 졸업을 거부당한 끝에 술에 취해서 칼을 들고 교수를 찾아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울대 인권센터가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에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폐해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10일 발표했다. [기사4/요약]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를 최종 발표/ 최하위권인 재정지원제한대학 2유형에 속한 5개 전문대학 중 3개 대학은 교육부의 대학 평가에서 연속 최하위 등급을 받았다. 이들 대학은 자구책을 마련해 대응하고 있으나 몇몇 대학은 폐교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가 대학 기본역량 진단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진단에서 자율개선대학‧역량강화대학에 들지 못한 전문대는 10곳으로 이 중 5개 대학은 재정지원이 전면 제한되는 재정지원제한대학 Ⅱ유형에 들었다. 위 4개의 [기사/요약]은 최근 일간지에 게재(揭載)된 [2018년 대학교·대학생·대학교수·대학 연구소의 현주소]입니다. 여기서 영국의 전(前) 수상 W.처칠이 1948년 5월 13일 오로스대학에서 한 연설을 찾아봅니다. 그는 “대학교육의 목적은 너무 실제적이 아닌 편이 좋다.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상매(商賣)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우리는 모든 생계를 세우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대학의 교육을 유효하게 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위대한 책과 자기 나라의 문학을 독서하는 일의 중요함을 믿고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대학 교육을 받은 자는 권태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현대생활의 도피소를 찾아 헤메일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전(前) 하버드대학 총장 J.B.코난트는 ‘하버드 대학 3백주년 연설에서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은 신성한 땅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학교(大學校)! 대학의 역사는 중국 주나라 때의 국학기관이나 BC 387년경에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아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현대적 의미의 대학은 중세 말경에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대학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대학(의학)과 볼로냐대학(법학), 프랑스의 파리대학으로서 12세기에 창설되었습니다. 대학생(大學生)!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의 졸업생은 마거릿 대처, 토니 블레어,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를 포함한 26명의 영국의 총리,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전 캐나다의 총리 레스터 피어슨, 존 터너, 호주의 총리 밥 호크, 토니 애벗,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얀마 민족민주동맹 당수 아웅산수찌,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등이 있습니다. 대학교수(大學敎授)! “세계 최고의 석학이라고 불려지는 하버드대, 스탠포드대 교수들도 하루하루 위기감 속에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1시간 강의를 위해 3시간을 준비하고 10시간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말은 그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강의에 임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어느 한국의 대학교수) 대학 연구소(大學 硏究所)!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가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 외교·안보 부문에서 대학 연구기관 중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매주 발간되는 한경비즈니스 제1157호(2018.1.29.~2.4)에 따르면,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는 총 358점을 획득해 외교·안보 부문에서 전체 6위, 대학 연구기관 가운데 1위를 차지했습니다. 외교·안보 부문 1위는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위는 통일연구원, 3위는 세종연구소, 4위는 한국국방연구원, 5위는 아산정책연구원이 차지했습니다. 극동문제연구소가 뒤를 이었습니다. 대학 연구기관 가운데 10위권 내에 포함된 곳은 저의 연구소가 유일했습니다. 필자는 40년 동안 대학교수로 살았습니다. 경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시작해서 현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로 있습니다. 지금은 강단(講壇)이 아니라 사이버강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18년 2학기에는 경남대·경기대 등의 3,500명 학생들이 필자의 4개 과목(3시간/3학점)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공과목이 아닌 <동북아 역사와 문화>, <북한의 문화예술>,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 <이미지메이킹과 자기관리>라는 과목명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연구비 2백만 원 이상 받은 적도 없습니다. 대학원생과 함께 한 적도 없습니다. 평생 열(熱)과 성(誠)을 다해 강의하고 있을 뿐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한많은 대동강, 대동강 김선달 설화, 대동강 단상(斷想)
[청로 이용웅 칼럼] 한많은 대동강, 대동강 김선달 설화, 대동강 단상(斷想)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북녘땅 오백리길 목숨 걸고 왔다만/ 찾아온 내 님은 옛 친구의 아내더냐/ 그토록 기다리던 그 님이건만/ 눈물로 바라보며 돌아선 심정/ 너만은 알고 있겠지 한많은 대동강아// 행복을 빌어주며 몸은 비록 간다만/ 그리운 그 모습 어디 간들 잊을소냐/ 그토록 자나깨나 그리던 님을/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선 심정/ 너만은 알고 있겠지 한많은 대동강아”- ‘한산도 작사 · 백영호 작곡 · 이미자 노래’의 “한많은 대동강”(1966년)입니다. 동명(同名)의 영화 주제가로 영화의 줄거리...해방 직후 주인공은 북한군 군관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후, 남한으로 내려옵니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그는 평양 탈환 작전에 참여합니다. 평양에 입성한 그는 옛 애인을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북한군 군관이 된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픔을 뒤로 하고 그녀의 행복을 빌며 전선으로 떠납니다... 당대(當代)의 최고 배우들, 김지미 · 남궁원 · 최무룡 · 박노식 등이 등장하는 <恨많은 大同江>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인기가 있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이었던 1966년 필자는 정부에서 구성한 제1차 파월장병위문단의 일원으로 한 달간 베트남과 타이완을 방문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필자는 전쟁영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당시 불어학과 4학년이었던 필자는 알랭 드롱(Alain Delon)이 주연하는 프랑스 영화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선지 “한많은 대동강”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직도 ‘대동강’이 뇌리(腦裏)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동강은 필자의 관심 대상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때 필자는 김선달의 설화에 매료되었습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김선달의 이야기는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서 발생했는데, 각종 야담집과 입소문을 통해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설화 속 김선달의 사기행각 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어수룩한 한양의 부자 상인을 속여 대동강을 팔아먹은 사건이다. 조선 후기의 풍자적인 인물인 봉이 김선달에 관한 설화는 이미 19세기에 퍼진 이야기인데, 기발한 재치와 재주, 지혜, 풍자, 익살, 유머가 총동원된 일종의 소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재미있게 읽고는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선달은 여타 재담가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황해도에서 전래되는 설화에는 그가 대동강뿐만 아니라 대동강변의 오리 떼까지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평양의 봉이라는 사람은 어수룩한 시골 부자에게 대동강에 있는 오리를 팔아먹기로 했습니다. 김선달은 겨울날 시골 부자를 대동강변에 데려간 다음 물 위에서 놀고 있는 수천 마리의 오리를 가리키며 “저 오리들은 다 내가 기르고 있는데 길이 잘 들어서 내 말을 잘 듣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그가 오리가 날아갈 만한 시각에 지팡이를 번쩍 드니 오리 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잠시 후 지팡이를 아래로 내리니 오리 떼가 모두 물가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시골 부자는 감탄하면서 봉이에게 거금을 주고 오리 떼를 사들였습니다. 며칠 후 시골 부자가 대동강변에 나와 보니 오리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놈들이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면서 사방으로 찾으려 다녔고, 지금까지도 찾으러 다닌다고 합니다. 대동강(大同江)! 필자가 2005년 평양에서 첫 상봉한 대동강은 고고(高古)하고 고고(孤高)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장막 속에 갇힌 듯 애잔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양안(兩岸)에는 주체사상탑 등 거대한 기념물들이 자리 잡고 있고, “이수일과 심순애”에 등장하는 대동강변 부벽루(浮碧樓)는 초라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강은 여전히 한반도의 중심이었습니다. 대동강은 평안남도 낭림산맥에서 발원하여 평안남도를 관류한 후 서해로 흘러들고, 평안남도 대흥군 낭림리 북부 2,118m 지점 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영원군·덕천시·개천시·순천시·평양특별시와 황해북도 송림시·황주군 일대를 지나 남포직할시와 황해남도 은율군 경계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거대한 강입니다. 최근 제3차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평양은 크게 각광을 받았고, 평양랭면·순안국제공항·백화원·목란관·만수대창작사·대동강수산물식당 등은 뉴스거리가 되었지만, 정작 소개되어야 할 대동강은 외면(?) 당했습니다. 오히려 ‘대동강변에 배 모양으로 세워진 대규모 레스토랑’ 때문에 대동강이 화면에 보였습니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야당 대표가 “대동강변에 낚시꾼들도 많이 나와 있고 중국 사람들 모여 체조하듯이 모여서 체조하고…."라고 말한 기사!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시장에게 대동강의 수질을 언급했다는 뉴스! 실제로 평양시의 열악한 하수 처리 시설 때문에 나빠진 대동강의 수질! 이미 서울시의 평양과의 포괄적 협력 방안에 수질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협력하면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동강’하면 짚고 넘어야가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196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경비정에 붙잡혀 원산항으로 끌려갔습니다. 북한은 약 30년이 흐른 1999년 나포했던 푸에블로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겼습니다. 1866년의 '미제 침략선 미국의 셔먼호 격침 기념비' 옆이었습니다. '대미 항전 승리'의 전리품으로 전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엔 대동강 지류인 보통강변의 전승기념관 '노획무기 전시장'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북한 <로동신문>(2018년 1월 23일)은 푸에블로호 나포 50주년을 맞아 “항복서를 밟으며 지나온 노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미제가 우리 군대와 인민 앞에 바친 항복서에서 피 절은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끝끝내 침략전쟁의 길을 택한다면 원수들의 모든 본거지가 멸망의 최후 무덤으로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올 1월과 9월의 온도차는 매우 큽니다. 북한의 핵무기 폐기보다 푸에블로호 반환이 미국인들에겐 훨씬 더 크고 값진 선물이라는 여론도 있습니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하는데...아름다운 이 가을에 푸에블로호 문제를 쉽게 푸는 김정은 위원장이 된다면 조금은 신뢰받는 지도자로 평가될 것입니다. 단상(斷想)! 심순애는 비관하고 대동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이수일의 친구에 의해 구출됩니다. 친구는 이수일에게 재회를 권하지만 금전에만 몰두할 뿐 듣지 않습니다. 그러던 이수일도 신경쇠약으로 휴양 차 청량암에 머무는 동안 자살하려는 어느 남녀를 구출해주고 심경이 변합니다. 한편 심순애는 친정으로 돌아와 이수일에 대한 연모의 정이 지나쳐 광증을 일으킵니다. 둘은 결국 서로 과거를 뉘우치고 재회! 북한의 과거에 대한 참회(懺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백두산에 울려퍼진 과 북한의 아리랑 전설
[청로 이용웅 칼럼]백두산에 울려퍼진 과 북한의 아리랑 전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문경 새제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다/ 약산 동대 진달래꽃은/ 한 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 피네/ 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내가 돌아간다/ 치어다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려굽어보니 백사지로구나/ 만경 창파 둥둥 뜬 저 배야/ 저기 잠깐 닻 주거라 말 물어 보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 창작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이 때는 유교적 전통문화와 개화문명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가치관의 혼란이 나타나고, 외세의 침탈로 피폐해진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시대였습니다. 사설 중에는 유성기·윤선·자동차·자전거 등의 개화문물이 나타나고, 그 속에서 흔들리는 세태가 풍자되어 있습니다. 사설에 대한 기원설화는 두 가지가 전하는데, 하나는 진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설이향과 소영공자의 이야기입니다. 사설 내용에 욕·상소리·한탄·익살 등이 응집되어 부인네들의 야성을 거침없이 노출시키고 있으며, 또한 도서 지방의 지역성을 표출하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런 남도 민요가 북한 땅 백두산 천지에 울려퍼지다니...2018년 9월 19일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양정상회담’ 사흘째인 9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백두산 천지에서 남측 특별수행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뒤 남한 땅의 가수 알리(34)가 노래하는 진도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알리는 두 정상 앞에서 천지를 배경 삼아 무반주로 '진도 아리랑'을 들려줬는데, 정상들은 R&B 창법과 판소리 발성이 묘하게 뒤섞여, 천연스럽고 구수하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을 부르는 알리를 넋 놓고 쳐다봤습니다. 특별수행원에 포함됐던 알리는 "어릴 때 배운 판소리가 이렇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판소리’는 김정은의 조부와 부친이 싫어해서 북한 땅에서 자취를 감췄었습니다. “판소리 음조와 발성법의 기본이 여유롭고 긴 시조의 음조와 탁성(쐑소리)이었으므로 그것은 아름답고 유순하고 우아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노래 음조와 자연스러운 발성법에 맞지 않는다. ⪡판소리는 남녀 성부가 갈라져있지 않고 쐑소리를 내기 때문에 우리 시대 인민들의 사상 감정과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김정일선집> 2권, 59페지). 지난날 판소리가수들은 쐑소리를 내는 것을 마치도 자기들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질로 간주하면서 탁성을 창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탁성은 가수들의 발성에서 남녀 성부가 구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목소리마저 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판소리는 우리의 민족성악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민족악기의 음색에서 탁성이 나게 한데도 적지 않은 작용을 하였다.”(<조선의 민속전통 6> 민족음악과 무용, 202쪽) 이런 북한 ‘판소리’의 내막을 보면, 알리의 노래가 완전한 판소리는 아니더라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한민족 고유의 민요가 불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소위 ‘민요의 재형상’이라는 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재형상한 민요’에는 조선로동당의 ‘방침’에 따라 “민요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준 것과 가사와 선률의 일부를 개작하여 재형상한 것이 있다.”(조선의 민속전통 6)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책들은 ‘민요의 재형상’을 논할 때, “《민요를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 재형상하여야 한다. 지난날의 민요에는 가사에 어려운 한문투가 섞여있는것도 있고 표현에서 고티가 나는것도 있다.》(<음악예술론>)”는 김정일의 ‘지적’을 인용합니다. 해방 후 재형상한 민요는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성주풀이> 등의 개작입니다. 여기서 <진도아리랑>도 포함된 “아리랑 전설”의 글을 읽어봅니다. <조선민족음악전집>(민요편 3)은 한반도 전역의 ‘아리랑’ 50곡을 수록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비율은 거의 반반입니다. 이처럼 많은 아리랑에 대해, <민요따라 삼천리>(최창호/평양출판사)는 “《진도아리랑》,《본조아리랑》,《신조아리랑(신아리랑)》,《밀양아리랑》,《영천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해주아리랑》, 《서도아리랑》을 비롯하여 《열두 아리랑》에 《열두 고개》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이에 깃든 전설들도 각이하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과의 리별이 어렵다는 뜻에서 《아난리(我難離)》라고 부른 것이 오늘에 와서는 《아리리》로 되였다는 점과 고생의 한계를 넘기기 어렵다고 하여 《고계(苦界)》라고 부른 것을 오늘에 와서는 《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아리랑의 전설들에서 일치하게 찾아볼수 있는 공통점.”(14쪽)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이 책에 기술된 “아리랑 전설”의 말미(末尾)이다. “...리랑이 넘어간 고개마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던 성부는 너무도 억이 막혀 가슴에 칼을 대고 그 자리에 엎어졌던 것이다. 한편 집을 떠난 리랑은 성부는 자기를 배반할 녀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발길을 돌려 고개마루에 올라서니 집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든 리랑은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가슴에 칼을 박고 쓰러진 성부를 발견하였다. 그는 성부를 부여안고 몸부림치며 땅이 꺼지도록 통곡하다가 그의 시체를 고개마루에 묻고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가버렸다. 그후 사람들은 성부의 무덤이 있는 고개를 《아리랑고개》로 부르게 되였고 성부가 온밤 리랑을 찾으며 부르던 노래를 《아리랑》으로 부르게 되였다고도 전해온다.”(1986년 인민배우 김진명의 구술.) 북한은 2002년부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홍보와 외화벌이를 톡톡히 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조부 김일성의 90주년 생일을 기념해 부친이 만든 작품으로. 2007년 8월 ‘세계적으로 가장 큰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으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됐습니다. 2018년 “빛나는 조국”을 선 보였는데, ’그 나물에 그 밥‘ 같습니다. ”조국’보다는 ‘아리랑‘이 낫지 않을까요? 김정은 위원장! 더 이상 예술을 ’선전선동‘에 이용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아리랑‘을 영원한 한민족의 상징이 되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김정은 위원장!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라는 작품은 당신의 할아버지를 위해 당신의 아버지가 온 정성을 다해 제작한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공연을 계속해왔는데...예의상 관람한 노무현 전(前) 대통령을 비난받게 한 그런 작품이지만 예술작품으로 개작(改作)하면 홍보도 되고 외화벌이도 될 겁니다. “빛나는 조국”은 아닙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추석(秋夕)과 의 “민속명절의 계승발전”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추석(秋夕)과 의 “민속명절의 계승발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난 다음에 맞은 2012년 추석날 “다심한 은정은 추석날에도”와 “선군시대에 더욱 활짝 꽃펴나는 민속전통”라는 기사를 실었다. 앞 기사에는 김정일이 1987년 10월 어느 날 “산소에 가는 사람들이 날씨가 좋아야 하겠는데…”라고 했고, “앞으로 추석날이 오면 그저 묘 보러 갈 사람들은 가라는 식으로 하지 말고 교외뻐스 운행도 조직하고 필요하면 일군들의 승용차까지 뛰게 하며 거리가 먼데는 철도에서 림시 렬차를 편성하여 운행하게 하여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뒷 기사에는 “추석과 같은 민속명절들을 뜻 깊게 쇠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고 이런 날에는 우리 인민들이 어떤 음식을 해먹고 어떤 유희오락을 놀았는가에 대하여 하나하나 깨우쳐주신 분도 다름 아닌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우리 나라에 민속으로 내려오는 명절이 몇이나 되는가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일군들에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선사람에게는 추석날에는 산소에 가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풍습들이 있는데 이런 풍습들을 사회주의생활양식에 맞게 잘 살려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몸소 그 유래에 대하여서까지 설명”해 주었다고 기술했습니다. 추석(秋夕)! 추석은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 한가윗날로 부르기도 하며, 음력 8월 15일에 치르는 명절로서 설날과 더불어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명절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 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음력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큰 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오후 10시경에 그치는데, 음력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모두 행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추석의 전날(음력 8월 14일)부터 다음날(음력 8월 16일)까지 3일이 공휴일입니다. 북한의 추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85년 이전의 한국과 같이 추석 당일 하루공휴일입니다. 1967년 5월, 봉건 잔재를 일소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음력설을 비롯한 민속명절을 공식 금지했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부터 추석에 한해서 성묘 등이 부분적으로 허용했고, 이후 김정일의 조선민족제일주의 주창에 의해 1988년 추석을 시작으로 음력설, 단오 등을 민속명절로 부활, 휴일로 지정했으며, 2003년부터 양력설 대신 음력설을 기본 설 명절로 쇠게 하고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일반 주민들은 집에서 따로 차례를 지내지 않고, 차례 음식을 준비해 성묘를 가기도 합니다. 북한의 <조선의 민속전통>은 “8월 추석”란 제목의 글에서 “추석은 우리 인민이 옛날부터 쇠는 명절입니다...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기에 이미 8월 추석을 큰 명절로 쇠군하였습니다. 그러니 추석은 삼국 초기나 그 이전시기부터였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추석은 우리 인민들이 풍년농사를 지어놓은 기쁨을 안고 즐기는 날이었고 돌아가 조상들을 위하여 지성을 표시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남과 북이 낱말 표현은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그리고 “근래에는 추석달을 바라보며 소박한 꿈이 담긴 시와 노래를 읊거나 부르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남과 북이 낱말 표현은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거의 같은데...추석 때 남쪽에서 “반달”을 노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북한의 명절! 민속명절과 사회주의 사회에 맞추어 새롭게 생성·발전된 명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민속명절은 단오·추석·설날·한식 등이며 이 가운데 추석은 1988년, 설날과 단오는 1989년에 공휴일로 제정되었고 이후 명절을 사회적으로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립 이유와 유관합니다. 사회주의적 명절은 국가적으로 대규모 행사가 곁들여지는 명절(김일성 생일, 김정일 생일, 조선인민군창군기념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 헌법절, 9·9절), 계층과 직업에 따른 기념명절(공군절, 해군절, 건설자절, 금속노동자절, 광부절, 일급노동자절, 6·6절, 방송절, 식수절, 지방산업절, 지질탐사절, 철도절, 출판절, 체육절, 교육절, 어부절 등), 민족해방운동과 국제적 기념일(해방기념일, 보천보전투승리기념일 등)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명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입니다. <조선의 민속전통>의 “7.민족명절의 계승발전”을 보면, ”우리 인민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탄생하신 4월 15일과 주체위업의 계승자이시며 우리 인민의 친애하는 지도자이신 김정일동지께서 탄생하신 2월 16일을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로, 민족적 명절로 성대히 맞고 있다. 오늘 이 두 명절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공동의 명절로 쇠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문장입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명절로 쇠고 있다는 것인지...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2018년의 추석! 대한민국은 9월 21일부터 대이동이 시작됐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추석 특별교통대책 기간(21~26일)에 전국에서 3664만 명이 고향에 가거나 국내외 여행에 나서리라고 예측했습니다. 귀성 기간에 2092만 명, 귀경 기간에 1572만 명입니다. 하루 평균 611만 명으로, 작년 추석(628만 명)보다는 줄었지만 그래도 평소(321만 명)의 2배에 가깝습니다. 또한 국토교통부는 올해 연휴 기간 닷새 동안 하루 평균 9만 명씩 총 45만 명이 해외로 떠난다고 집계했습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들은? <조선의 민속전통>에 있는 것처럼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라는 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노래는 남과 북이 같은데! “달이 유난히도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또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박화목/호접)! 그 밤이 아름다운 추석! 필자가 모든 분들께 추석 인사를 드립니다.-“천고마비(天高馬肥)와 구추풍국(九秋楓菊)의 계절에 맞은 한가위에 고마운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靑魯 拜上”-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만수대의 전모(全貌)와 文 대통령이 찾은 만수대창작사
[청로 이용웅 칼럼]만수대의 전모(全貌)와 文 대통령이 찾은 만수대창작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에 평양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한다는 보도가 있자, 우리의 한 일간지는 9월 19일 “만수대창작사는 北 외화벌이 선봉…유엔 대북제재 대상”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신문은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방문하기로 한 만수대창작사는 지난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북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곳...1959년 평양에 설립된 만수대창작사는 북한의 최대 규모 예술창작단체로 ‘북한 예술 수출의 선봉’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체제 선전을 위한 작품 생산을 주로 한다. 북한 곳곳에 세워진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제작한 게 만수대창작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날 오후 문 대통령은 만수대창작사를 방문, 창작사 사장 등의 영접을 받은 뒤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은 1층 로비에서 ‘예술이 남과 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를 2018.9.19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방명록을 작성했습니다. 이어 3층으로 이동해 그림, 도자기 등 미술품을 주로 관람했습니다. 평양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보면서 안내자에게 “평양성이 아직 남아있나”라고 물었고, 이에 북측 관계자는 “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해칠보 소재 그림 설명을 들으면서 그는 “금강산 바깥쪽은 해금강이고 칠보산 바깥쪽은 해칠보구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층으로 이동한 그는 풍산개 그림 작품을 보면서 “풍산개는 저도 선물받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보석화 기법을 설명을 들으면서는 “이쪽에만 있는 기법인가요”라고 물으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분명 대통령이 만수대창작사를 찾은 것은 일정 중의 하나일 뿐이고, 어떤 면에서는 문화예술 애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라서 긍정적 평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만수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인터넷은 만수대(萬壽臺)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중구역에 위치한 대동강 서안의 구릉지대로 높이는 60m’이라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을 포함한 만수대대기념비, 천리마동상, 만수대예술극장이 들어서 있고, 김일성광장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대동강, 서쪽으로는 보통강과 접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평양의 ‘만수대 궁전터’는 고구려 평양성에 있던 왕궁터 유적인데, 이 터에서 만수대라는 이름이 처음 쓰여졌습니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이루어진 평산성 형식의 큰 도성이었는데, 이 궁전터는 내성 안에 있었으며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쌓을 때 함께 건설되었습니다. 궁전터는 평양성의 북쪽 부근과 중성 및 외성 그리고 성 밖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위, 겹겹이 돌려막은 성벽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만수대’는?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8)>은 “만수대 : 혁명의 수도 평양의 중심부 대동강 오른쪽 연안에 있는 언덕. 아름다운 명승지 모란봉의 남쪽 릉선에 잇달려 솟아있다. 남쪽 또는 북서쪽의 장대재, 남산재, 창관산 등이 서로 이어져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에서 하나의 구릉렬을 이루고 있다. 북서쪽 비탈면은 물매가 매우 급하나 남동쪽으로 가면서는 느리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김일성·김정일의 동상이 있는데, 이런 풀이만 보고는 만수대의 전모(全貌)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수대대기념비’와 ‘만수대창작사’에 대한 설명에서 확인됩니다. ‘만수대대기념비’는 “주체61(1972)년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단이 집체창작하여 평양 만수대 언덕에 세운 대기념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여오신 영광에 찬 전 로정과 그 과정에서 쌓아올리신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세운 대 기념비.”(조선대백과사전(8)>,608쪽)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항일혁명투쟁탑”과 “사회주의혁명 및 사회주의건설 탑>이 있습니다. 그러면 ‘만수대창작사’는?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8)>은 “만수대창작사 : 미술 작품의 창작과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기관.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와 배려에 의하여 주체48(1959)년 11월 17일에 창립되였으며 1970년대초에 들어와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지도와 배려에 의하여 조각창작단을 모체로 하고 거기에 중앙미술제작소를 비롯한 미술 창작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새로운 종합적인 미술창작기지로 꾸려졌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는 그 이름을 만수대창작사라고 지어주시였으며 천리마동상을 창작하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를 받은 1959년 11월 17일을 창립일로 정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문예사상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독창적인 문예방침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을 반영한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한 미술작품들을 창작함으로써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에 힘있게 이바지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하고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조선대백과사전(8)>은“만수대창작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지지도 사적비> 만수대창작사에 깃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멸의 혁명사적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세운 혁명사적기념비. 주체 87(1998)년 4월 15일 창작사 구내에 세웠다.” 그리고 “만수대창작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지지도 사적비> 만수대창작사에 깃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혁명사적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세운 혁명사적기념비. 주체 87(1998)년 4월 15일 창작사 구내에 세웠다.”고 기술했습니다. 최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북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만수대창작사의 예술작품들이 여전히 중국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의 유명 예술거리 ‘789 예술구’에 있는 ‘조선만수대미술관’의 웹사이트에서 만수대창작사 소속 작가의 예술 작품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비밀스럽지만 살아있는 미술관이었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기관을 방문한 문 대통령이 어떤 곳인지 알고 들어갔는지...통일부 관계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주체사상과 김일성 가문(家門)을 위한 ‘수령형상미술’의 중심임을 알고서도 간건지...대한민국의 현실을 볼 때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은 ‘잘못된 만남’입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손잡은 문재인-김정은” 두 정상의 모습을 보면서, 만수대창작사 방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답변이 궁해집니다. 하지만 아직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은 엄연(儼然)히 존재합니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진짜 성공을 기원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평양속도”, , 남북정상회담의 평양
[청로 이용웅 칼럼] “평양속도”, , 남북정상회담의 평양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대동강변(大同江邊) 부벽루(浮壁樓)에 산보(散步)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兩人)이로다. 악수논정(握手論定)하는 것도 오늘 뿐이요. 도보행진(徒步行進) 산보(散步)함도 오늘 뿐이다.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어이하여 심순애야 못 참았느냐. 남편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然故)냐. 불연(不然)이면 금전(金錢)이 탐이 나더냐”(이수일과 심순애(장한몽)/노래:고복수·황금심)/ “장한몽(長恨夢)”은 조중환(1884∼1947)의 번안소설인데, “대동강변 부벽루”로 시작되는 옛 노래가 더 유명합니다. 그리고 노래의 서두(序頭) 때문에 과거의 평양(平壤)은 정감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양이 6.25전쟁 때 폐허(廢墟)의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국방부 당국자는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공세를 준비 중이던 북한군을 향해 98대의 B-29 폭격기가 26분 동안 960t의 폭탄을 퍼부으며 융단폭격을 가했다”며 “평양에 대해서도 밤낮으로 폭격을 가해 전쟁 뒤 평양에 제대로 남아 있는 건물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미군의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는 2채의 건물만 남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2층 이상 건물 가운데 현재 평양 제1백화점으로 사용하는 건물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 이후 김일성은 “평양속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양 재건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때 김일성은 “수많은 건설장들을 찾으시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 주시였을 뿐 아니라...건설을 빨리 할 수 있는 방도를 환히 밝혀”주었고, “그리하여 평양시에서는 7천세대분의 자재와 자금으로 2만 여 세대를 건설할 수 있는 예비가 탐구되였으며 그해 살림집 한 세대를 단 14분 동안에 조립하는 《평양속도》가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 슬로건은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된 이후에 다시 제시되었습니다. 그 중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 평양 순안 국제공항의 확장 공사는 모두 공식적으로 ‘평양속도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양은 계속해서 김일성의 도시, 주체사상의 진원지로 인식되고 왔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통해 평양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섰습니다. <로동신문>도 적극 홍보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북한의 평양 자랑-칠흑같은 평양의 밤과 불꽃놀이”라는 기사입니다. 또,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펴낸 <명소에 깃든 전설(평양)>이라는 책자를 보면 “평양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도시이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김일성), “평양은 우리 인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의 도시입니다.”(김정일)라는 글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그 단행본에 수록된 <유서 깊은 평양>의 내용(요약)입니다. “평양은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우리 나라 관광의 중심으로 되고 있습니다...평양은 또한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 속에서 ≪류경≫ 또는 ≪류영≫이라고도 불리워 왔습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강들로 에워싸인 평양에는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색다른 풍경을 펼쳐놓군 하였습니다. 제고장의 아름다움을 남달리 사랑해온 우리 선조들은 평양의 절경을 자랑하고 싶어 ≪류경≫이라는 이름을 쓰기를 즐겨하였습니다. ≪류영≫이라는 이름 역시 옛날 평양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병영이 버드나무숲속에 자리잡고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하기에 예로부터 평양의 아름다움을 두고 노래한 시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15세기의 시인 조위는 평양의 명승을 ≪서경을 여덟으로 읊노라≫라고 하면서 평양8경을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이 을밀대의 봄맞이, 부벽루의 달구경, 영명사의 노을빛, 보통강나루의 나그네배웅, 대동강의 배놀이, 애련당의 비물소리, 마탄여울의 눈석이, 대성산의 푸른 숲입니다. 그전날의 평양8경의 모습은 변했어도 평양의 가는 곳마다에는 새로운 ≪평양8경≫의 황홀경이 펼쳐져 관광객들을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평양은 대기념비적건축물들이 많아서 관광도시로서의 특색이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도시형성구도에 맞게 배치되여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는데 그 건축물들은 다 최근에 지은 것들입니다. 우리 인민은 청춘의 혈기와 아름다움에 가득찬 륭성번영하는 평양을 사랑하며 노래합니다. -고요한 강물 우에 불빛이 흐르네/ 못 잊을 추억을 안고 내 마음 설레네/ 끝없이 걷고 싶어라 내 사랑 평양의 밤아/ 지새지 말아다오 아름다운 평양의 밤아// 깨끗한 구슬땀을 내 여기 바치였네/ 청춘의 푸른 꿈도 여기서 꽃 피웠네/ 끝없이 걷고 싶어라 내 사랑 평양의 밤아/ 지새지 말아다오 아름다운 평양의 밤아-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 노래소리가 은은히 흘러넘치는 평양의 그 어데를 그 어느 때든 걸어보십시오.…웅장화려한 거리마다 창조의 발걸음들이 드바쁜 아침이며 무수한 불빛들이 행복에 웃는 밤. 그 어데를 보아도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넘치고 그 어느때 보아도 긍지와 열정으로 가슴 불타오르게 하는 주체조선의 수도 평양입니다.”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평양에 체류 중입니다. 평양순안공항에는 “평양을 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평양에서 18일부터 2박3일간 열리는 3차 남북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평양시민들이 인공기와 한반도기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포옹하고, 공식 행사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시내에서 카퍼레이트를 하고, 정상회담장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회담 기간 동안 평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상회담에서는 크게 비핵화 북미대화 촉진, 남북관계 개선, 군사긴장 및 전쟁위협 종식의 '3대 의제'를 두고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청와대는 전했습니다. ‘비핵화’ 문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펑양’은 어떻게 소개가 될지 궁금합니다. 평양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날까요? “위대한 민족대단결의 경륜으로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의 성스러운 위업을 앞당겨” 나가는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과감하게 ‘비핵화’를 선언하고, 평양을 ‘평화의 메카’로 만들기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우리의 땅이었던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어제와 오늘
[청로 이용웅 칼럼]우리의 땅이었던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어제와 오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최근 한 역사학회는 '대마도(對馬島)에 살아있는 환단고기의 숨결'이라는 주제로 역사 강좌를 개최했는데, 주제는 '임나는 대마도·쓰시마의 유래와 자연환경·대마도를 삼한이라고 기록한 이유'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일본 대마도가 한반도의 ‘부속섬’이었다는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했다는 한국상고사를 서술한 역사책입니다. ‘임나(任那)’는 일본 기록에서는 낙동강 유역의 여러 가야국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나오고, 명칭은 광개토왕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보이는 것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한 고지도(古地圖) 박물관 관장은 “과거 우리나라는 대마도를 점령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대마도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국 대마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대마도를 포기하게 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대마도는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 빼앗겨버리면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 목소리를 높여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은 우리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 우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백과사전은 “쓰시마섬. 대한해협의 중간쯤에 위치한 일본의 섬으로 '대마도'라고도 부름. 섬의 인구는 약 34,000명 내외이며, 거리상으로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이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에 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에 침입했다. 이에 1419년 6월 세종은 이종무에게 군사를 내어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이종무는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으로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여 대마도로 진격했다. 이 정벌을 통해 왜구의 배 127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왜구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고 한 달여 만에 철수했다. 쓰시마섬에 대한 정벌 혹은 토벌은 고려시대 창왕 때와 조선시대 태조 때에도 행해진 바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산포(馬山浦)! 마산은 필자가 근무했던 경남대학교가 있는 고장입니다. ‘가고파’의 고향으로, 무학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합포만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필자의 보금자리는 그 해안과 접해 있었는데, 마산항을 오가다 보면 ‘대마도 행 여객선’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필자는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도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 삼청동에 있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부산 경남을 자주 오가게 되었는데, 친우와 제자들이 대마도 얘기를 가끔 꺼냈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볼만한 섬’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 살인더위를 겪으면서 문득 그 섬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대마도(TSUSHIMA)의 역사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조정은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였습니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在文籍昭然可考-대마도 예어 경상도지계림 본시아국지지재재문적소연가고)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마도를 불법으로 병합한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후 1909년 청나라와 소위 간도협약을 맺었는데, 일본이 만주 땅을 중국에 할애하는 대신 만주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얻어내는 협약입니다. 그런데 대마도는 오키 섬보다 부산과 거리가 가까우며, 조선 때까지 우리의 영토였는데 언젠가부터 일본인들이 무단점거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첫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1948년 8월 18일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요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발칵 뒤집히며 반발했고, 이에 대해 일본 총리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이대통령의 요구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맥아더는 이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방해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 대통령의 발언을 제지했습니다. 일본이 대한민국의 독도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인데, 독도 수호(守護)는 물론, 대마도 반환요구'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마도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으로 되어 있고, 총면적은 714㎢에 이릅니다. 이 섬은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깝습니다. 한국 남단에서는 53km, 일본 규슈(九州)에서는 147km 떨어져 있습니다. 대마도는 산림이 많다 보니 농사는 해안지대 일부에서만 가능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서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잡은 어물을 배에 싣고 한반도로 가서 물물 교환하여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대마도 가는 뱃길은 멀지 않았습니다. 260년간 조선과 일본, 두 나라 교류에 가교역할을 했던 곳, 조선통신사가 떠오르는 곳, 그곳의 이즈하라항(嚴原港)에 도착하면, 조선통신사 교역 200주년 기념벽화를 보게 되고,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조선통신사의 비(碑)와 덕혜옹주 결혼 경축 기념비도 만나게 되고,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대마도의 북섬과 남섬을 이어주는 만관교(萬關橋)가 있는 미쓰시마를 거쳐 가미쓰시마와 히타카츠...마우다 해수욕장,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 슈시의 단풍길, 한국전망대도 보게 됩니다. 기후가 부산과 유사한 대마도는 절경(絶景)도 비경(秘境)도 없는 섬이지만 우리나라 서민들의 휴양 장소로는 제격입니다. 부산과 지척(咫尺)이고, 낚시와 등산하기가 좋은 곳입니다. 여객선 운행의 수준을 높이고 사계(四季)의 아름다움을 알린다면 많이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일본인들이 발을 들여놓을 자리 하나 없게 만든다면? 필자는 오는 시월부터 새로 재촬영하는 사이버강좌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에서 일본 대마도를 강의할 것입니다. 이 과목을 수강하는 경남대, 경기대 등의 학생들에게도 적극 홍보할 것입니다. 우리의 땅이었던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실질적인 우리 땅처럼 만들 수도 있겠단 망상을 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