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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 이용웅 칼럼] 태극기(太極旗)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기(國旗)입니다.
[청로 이용웅 칼럼] 태극기(太極旗)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기(國旗)입니다.
[선데이뉴스신문]다음은 필자가 <선데이뉴스신문>(2018년 5월 6일 字)에 쓴 “깃발·한반도기(韓半島旗)·태극기(太極旗)·인공기(人共旗)”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 누구인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단 줄을 안 그는.“ (깃발/ 유치환) // ”깃발“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이상을 향해 동경의 끈을 놓지 않는 깃발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모순성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한의 한 백과사전은 “태극기는 우리 나라의 국기로, 국민 정신을 상징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숭고한 표현이다. 태극기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882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1883년에 정식으로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정식 공포한 것은 1949년 10월 15일이다. 태극기는 우주 만물이 생겨난 근본 원리인 태극의 이치를 본떠서 만들었다. 흰 바탕의 깃발 한가운데에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나타낸 태극 도형은 우주의 근본인 음과 양을 상징하며, 끝없는 계속을 나타낸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창조성과 무궁한 발전을 뜻한다...문화의 창조와 인류의 평화를 상징하는 태극기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좌표인 동시에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을 나타낸 표현이다”라고 했습니다. 2018년 8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입니다. 이 날을 맞아 필자는 대한민국 국기(國旗)와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페이지(Walter Hines Page/1855~1918)는 “나는 조국을 사랑하고 그 헌법을 준수하고 국기를 존중하며 모든 적의 침략에서 조국을 수호하는 것이 조국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어 봅니다. 필자의 맹세나 페이지의 신조(信條)는 너무도 당연한데 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태극기(太極旗)는 분명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기(國旗)입니다. 마침 2018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미국서 찾아낸 최초 태극기 도안”를 실었습니다. 한 대학교수가 최근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 슈펠트 문서 박스(The Papers of Robert W. Shufeldt Subject File, Box 24) 속 '한국 조약 항목(Korean Treaty Items) 1881~82'에 들어 있는 태극기 그림을 발견하고, 8월 13일 <조선일보>에 공개했습니다. 종이에 펜으로 그리고 채색한 가로 17㎝, 세로 8.5㎝ 크기의 이 태극기는 청·적색 태극 무늬와 검은색 4괘(卦) 등 현재 태극기와 같은 원형을 갖추고 있지만, 태극의 형태와 괘의 좌우 위치는 차이가 있는데, 그림 위에는 '코리아(Corea)', 아래에는 '깃발(Ensign)'이란 글씨(사진 참조)가 적혀 있습니다. 이 태극기 도안 발견에 대해 한 학자는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 수호통상조약 당시 역관 이응준이 만들어 게양했다는 조선 국기가 태극기였음이 확실해졌다"며 "이것이 최초의 태극기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약 당시 미국 관리가 조선 국기를 보고 그린 이 태극기 도안은 그해 9월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박영효가 그려 일본 숙소에 게양한 태극기보다 4개월 이상 앞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최초의 태극기가 1882년 5월 이응준이 만든 것이라면 이해 9월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를 모본으로 삼아 국기를 만들면서 괘의 좌우를 바꾼 것이 되고, 박영효 태극기는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교관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 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실린 '조선 국기'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고, 1883년 3월 6일 조선 정부는 태극기를 국기로 정식 반포했다고 기술했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는 1884년 미국 공사 수행원이던 주이가 입수한 '주이 태극기'이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는 '데니 태극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대한제국실에서 “고종이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제73주년 광복절 기념, 1주일간의 특별한 만남-”이 열리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2018년 8월 19일(일)까지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고종이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를 특별 공개“한다고 했습니다. [보도자료 : 이는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자신의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하사한 태극기이다. 데니는 1886년 청나라 리훙장(李鴻章, 1823-1901)의 추천으로 고종의 외교고문이 되었지만, 자주외교를 원하는 고종의 뜻에 따라 청나라의 부당한 간섭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선이 주권독립국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과 협조할 것을 권고하는 등 청나라를 견제하는 외교 활동으로 청나라의 미움을 받아 1890년 외교고문직에서 파면당했다. 이때 고종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데니에게 내린 선물이 이 태극기이다. 이는 가로 263cm, 세로 180cm인 대형 태극기로, 바탕은 흰색 광목 두 폭을 이어 만들었고, 태극은 붉은색과 푸른색 천을 오려서 바느질 했다. 4괘의 위치는 지금의 태극기와 같지만 깃봉을 다는 위치가 다르며, 태극의 푸른색과 같은 푸른색 천으로 만들었다. 데니의 가족이 보관하다가, 1981년 후손 윌리엄 랠스턴William Ralston이 대한민국에 기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이기현(02-2077-9455) 담당자는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준비한 이 일주간의 특별한 만남의 현장을 꼭 방문해 주기 바란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2018년 8월 15일 아침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 태극기가 게양(揭揚)됩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걸린 광경이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태극기(太極旗)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기(國旗)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 개성공업지구 폐쇄와 금강산관광 중단은?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 개성공업지구 폐쇄와 금강산관광 중단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018년 7월 31일 ‘무엇이 북남관계의 새로운 려정을 가로막고 있는가’ 라는 제하(題下)의 글에서 “판문점 선언 리행에 대하여 진정한 태도와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민족 우에 외세를 올려놓고 북남관계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며 어려운 국면 타개보다는 쉽고 평탄한 길만 골라 짚고 북남관계의 분위기 조성으로 치적광고에만 집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 청와대 주인은 바뀌었지만 이전 보수<정권>이 저질러놓은 개성공업지구 폐쇄나 금강산관광중단에 대한 수습책은 입 밖에 낼 엄두조차 못하고 도리어 외세에 편승하여 제재압박 목록에 새로운 것을 덧올려 놓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또 <로동신문>은 “남조선 당국이 민족 우에 외세를 우선시한다면 구태여 마음에 없는 관계개선 타령을 늘어놓느라고 목이 쉬지 말고 <동맹강화>에 힘을 넣으면서 생겨먹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고,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구태와 경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가지고 북남관계를 대하여야 할 때이다. 온 겨레가 남조선 당국의 행동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다. 북남관계의 개선과 발전, 협력교류와 화해단합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적대와 대결의 기나긴 나날을 보낸 남조선의 현 당국이 뼈 속 깊이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 당국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북남관계 개선에 진정으로 발 벗고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로동신문>은 결론적으로 현 문재인 정부가 개성이나 금강산 문제에 대해 이전 보수정권과 별다른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신문은 과연 ‘개성공업지구 폐쇄가 유엔 제제 때문인가’라고 반문했고, “세계적인 명산으로 이름 높은 금강산은 민족의 자랑이고 겨레의 긍지로서 다른 그 누구보다 우리 겨레가 마음껏 경치를 향유하고 기쁨을 누려야 한다. 자기 민족의 명산을 부감하는데 외세의 제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타국의 이방인들은 제 마음대로 금강산관광을 하고 있지만 지척에 있는 동족은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북남과계의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로동신문>이 개성공업지구 폐쇄와 금강산관광 중단에 대해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과거에 없었던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되돌아보기로 합니다. 북한이 2016년 2월 6일에 4차 핵실험을 단행한데 이어 장거리 미사일(광명성호) 발사를 감행하자 우리 정부는 2016년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개성공단 폐쇄의 이유는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미사일에 투입된 정황이었습니다. 그러자 북측은 "개성공업지구에 들어와 있는 모든 남측 인원들을 2016년 2월 11일 17시까지 전원 추방한다."고 밝혔습니다. 그후 개성공단의 재개와 확장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지만 아직도 개성공단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막혀 있습니다. 개성공업지구! 야당의 한 의원은 “개성공단 재개야말로 북한의 비핵화 시간표를 앞당기는 해법”이라고 했고, 또 다른 야당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비핵화의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제재 완화는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최근 북한 석탄 밀매에 손 놓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이중적 처사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개성공단 재개 입장 발표는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은 바람직하지만, 그들이 과연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는...무릇 정치인은 공인(公人)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 운영하는 국제방송인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VOA)는 “미국 국무부는 안정을 저해하고 도발적인 북한의 행동에 맞서 개성공단을 폐쇄한 2016년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한 미국 상원은 “남북 주민들의 교류와 경제협력 활동을 지지하지만, 북한이 비핵화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제재완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무부는 그렇다 치고, 일개 의원 주제에 타국의 문제에 대해 ‘제재완화는 없을 것’이라고 하다니! 이건 ‘제재’나 ‘제재완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통일부는 2018년 8월 3일 "개성공단 재개 문제는 장기적 차원에서 본다면, 대북제재 해제 이후에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발표했습니다. 관계자는 이날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개성공단 재개와 관련해서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다. 정부가 개성공단 재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바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며 이같이 밝히고, "정부는 비핵화 진전에 따라서 재개 문제를 검토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금강산 관광!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국정연설에서 남북기본합의서 등과 함께 6.15 및 10.4 선언 이행을 북측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정부는 관광객 피격 사망 관련 남측 조사단의 현장조사 요구하고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했습니다. 그러자 북측은 7월 12일 북한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 담화를 통해 금강산 사건에 “유감”이나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며 현장 조사를 거부했고, 다음 날 <로동신문>은 이명박 대통령 국정연설은 “논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2018년 8월 3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15주기를 맞아 금강산을 방문했는데, “올해 안으로는 금강산관광이 재개됐으면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며 소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 “현대그룹이 남북 사이의 사업을 주도하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현대그룹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두 사람의 말을 굳게 믿어봅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 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1994년의 북녘 땅은 ‘슬픈 바다’! ‘악몽의 땅’!
[청로 이용웅 칼럼] 1994년의 북녘 땅은 ‘슬픈 바다’! ‘악몽의 땅’!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993년 12월에 행해진 제3차 7개년 경제 계획의 총결산을 통해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한 북한의 김일성은 ‘경제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이팝과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은 채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직접 현장에 나가 ‘일꾼’들을 다그쳤습니다. 김일성은 기근(饑饉)에 대한 공포 때문에 1994년 상반기에만 50여 차례의 현장지도에 나섰습니다.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는 옛말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그는 ‘죽어 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습니다. -“1994년 7월 7일 : 아침부터 분주히 돌아갔다. 어제 경제부문 책임일꾼협의회에서 교시하신 집행 대책안을 빨리 만들기 위하여 정무원과 위원회, 각 부들과 연계를 가지고 제기된 자료들을 종합하였다. 오후 4시 9분쯤 수령님께서 전화로 제시된 과업의 진척사항을 물으셨고, 정무원 사무국과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구체적인 분공안을 만들고 있다고 보고했다...비바람 치던 8일 새벽 2시,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심장이 더는 과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고동을 멈추었다. 가슴을 치며 수령님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문득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계시는 것을 알고 몸매무시를 바로 하고 섰다.”- 윗글은 북한 로동당출판사가 펴낸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중에서 “아, 수령님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입니다. 7월 8일! “음악 명상을 즐겼고, ‘산삼꽃’에서 나는 산삼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보양하고, 각종 한약재가 들어있는 베개를 베고 자면서 장수를 꽤했다”는 김일성의 죽음! 그의 ‘영결식’은 이틀 연기되었는데, 이유는 끝없는 조문행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영결하는 의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에 가슴 치며 목메어 흐느끼는 수백만 평양시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눈물의 바래움을 받으며”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날 열린 추모대회도 ‘슬픔의 바다’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북녘 땅과 북한 사람들이 모두 ‘슬픔의 바다’ 속에 ‘빠졌다’는 말이데...겉으로 보면 1994년의 북한 잔혹사는 ‘위대한 수령’의 죽음인데...그것은 아닌 것 같고...그러면 이 장막(帳幕)의 땅의 1994년 잔혹사는? 1994년! 1994년은 한반도 폭염의 역사의 획을 그은 해였습니다. 그해 폭염일수는 22.8일에 달해 1900년 이래 폭염일수 1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대구의 7월 월평균 기온이 30도(30.2도)를 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경기도 양평은 그해 7월 11일부터 31일까지 21일 연속 폭염경보가 발령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4년은 7월 초에 장마가 끝나면서 우리 국민들은 극심한 가뭄과 함께 더욱 힘든 무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1990년대 중반 2년 동안 계속된 대홍수와 다음 해의 극심한 가뭄으로 북한의 농업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비효율적 농업정책, 경제성장 저하 등으로 1997년에 이르러 북한의 식량부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풀이나 나무껍질을 먹고 있다고 구호단체들은 전했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특히 1994년의 가뭄은 ‘대폭염의 악몽’이었습니다. 북한 잔혹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말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살인더위는 김일성의 ‘슬픈 바다’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김일성은 죽기 바로 직전에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폭염(暴炎)과 왕(王)가뭄, 그리고 기아(飢餓)에 죽어간 백성들을 위해 왕(王)의 도리를 다했을까요? 과거 조선시대 정조 18년(서기 1794년)에는 폭염이 극심해 공역(供役)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더위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정조는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공역을 감독하고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며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주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주는’ 약을 새롭게 처방해 무려 4000정을 조제한 뒤 화성지역 공역소에 하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약이 바로 더위를 먹었을 때 복용한다는 ‘척서단(滌暑丹)’ 입니다. 성종 15년(서기 1484년) 성종은 혹서로 고통 받는 죄수들이 많아지자 강력범죄자를 제외한 수감자들에 대한 석방을 명했다고 합니다. 성종은 “이처럼 호된 더위에 가벼운 범죄로 갇혀 여러 날 동안 형문을 받다 억울하게 그 목숨을 잃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며 보방(保放)토록 했다고 합니다. 살인더위로 인해 경범죄를 저지른 죄인에 한해 일종의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입니다. 지금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은 1907년 10월 1일 서울에 대한제국 농상공부 산하 관측소 설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기온 측정이 시작된 지 올해로 111년째입니다. 2018년! 현재 남한의 폭염지수(暴炎指數)는 계속 갱신되고 있습니다. 8월 5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날까지 공식 관측소가 있는 전국 95곳 중에서 60%에 해당하는 57곳이 올해 역대 최고기온을 새로 썼습니다. 강원도 홍천은 8월 1일 수은주가 41.0도까지 올라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습니다. 현 정부는 이에 대해 지금 무슨 대책을 하고 있을까요? 허기야 8월 6일이 입추(立秋)입니다. 가을 오길 그냥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가요? 2018년! 북한도 폭염 대책에 비상이 걸렸고, 가뭄 걱정까지 겹쳤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은 8월 2일자 1면에 ‘온 나라가 떨쳐나 고온과 가물(남한:가뭄) 피해를 막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자’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사설은 “이번 고온 현상은 예년에 볼 수 없던 최대의 자연재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일부 지역의 기온이 40도를 넘겼다고 전했으며, <조선중앙TV>는 8월 1일 평양의 기온이 37.8도라고 전하며 “기상 관측 아래 당일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다가 북녘땅에 '고난의 행군(1996~2000년)'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악몽(惡夢)의 땅이 아니 되기를 빌어봅니다! 끝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소설가 이무영(李無影/1908년~1960년)의 <기우제(祈雨祭)>를 소개합니다. -“불만 그어대면 땅덩이 전체가 그대로 불바다가 될 형편이다. 식물 뿐 아니라 인간이고 짐승이고 시들대로 시들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농마국수와 남한 함흥냉면에 대한 자료(資料)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농마국수와 남한 함흥냉면에 대한 자료(資料)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한 인터넷 언론매체는 북한의 실정을 보도하면서 “최근 북한 대부분 시장들에서 냉면이 불티나게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시원한 오이냉국에 감자 전분으로 만들어진 농마국수를 찾는 주민들이 국수집마다 줄지어 서있다고 합니다. 손님들이 몰리다보니 국수집들에서는 찜통더위보다 더 뜨거운 판매열기에 들떠 있다고 합니다. 냉면을 찾는 주민들이 많다보니 일부 국수집들에서는 국수분에 눌러서 판매하는 국수도 만들고 한편으로는 대홍단 전분공장에서 생산되는 분탕(말린 농마국수)으로 손님들에게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국수를 만들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농마국수는 여름에는 냉면으로, 겨울에는 온면으로 팔리는데요.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은 지역이 평양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농마국수는 전국 어디를 가도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농마? 대한민국의 국어사전에는 “농마 : 농삿말+農馬”, “농마 : 넝마 (평남)”라는 풀이 외에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인터넷에서 “녹말(綠末; 문화어:농마) 또는 전분(澱粉)은 분자식(C6H12O6)n 의 탄수화물에 다수의 α-글루코스 분자가 글리코시드 결합에 의해 중합한 천연고분자”라고 했는데, 위의 ‘문화어:농마’에서 ‘문화어’는 “북한에서, 평양말을 중심으로 하여 문법, 어휘, 철자법 등을 엄격하게 규범화한 언어를 이르는 말”을 뜻합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농마 : ① <화학> 엽록소를 가지는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에 체내에서 만들어지고 당류로 바뀌여 식물의 씨앗, 뿌리, 줄기 등에 저축되는 탄수화물의 하나. 흰쌀·강냉이·밀·감자 등에 많이 들어있다. 물엿, 포도당의 원료를 비롯한 발효, 제과, 제약, 식료공업 등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주 원료로 리용된다.”(880쪽)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마국수 : 농마로 누른 국수. 주로 감자농마로 누른 국수를 가리킨다./ ~국수와 밀국수.”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 5>은 “농마 : 아밀로즈와 아밀로펙틴으로 이루어진 다당류. 전분이라고도 한다. 저장당질로서 고등식물 특히 감자와 고구마 등의 감자류와 벼, 강냉이, 밀 등 알곡작물에 많이 들어있다...농마는 흰쌀, 강냉이를 비롯한 낟알과 감자, 고구마 등의 주성분인 만큼 사람의 영양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여러 공업분야(식료공업, 발효공업, 섬유제지공업, 화장품공업, 제약공업) 등에서도 널리 리용된다.”(306쪽)고 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 5>은 “농마국수 : 감자나 녹두에서 얻어낸 농마가루로 만든 국수. 주로 감자농마로 한다. 우리 나라 북부지방에서 해먹어온 지방특식이다. 오늘은 우리 나라에 풍부한 감자농마로 여러 곳에서 농마국수를 만들어 먹고 있다. 농마국수는 매끈매끈하고 매우 질긴 것이 특징이다. 농마국수를 만들려면 먼저 농마를 채에 쳐서 끓는 물로 익반죽을 한다. 이때 명반을 물에 타서 조금 넣으면 국수오리가 매끈매끈하고 질기며 빛갈이 좋아진다. 반죽이 다 되면 분틀에 눌러 끓는 물에 1분 30초 가량 익힌다. 물이 끓지 않을 때는 국수가 풀어진다. 익힌 국수는 빨리 찬물에 넣어 2~3회 물을 갈아가면서 헹군 다음 물기를 찌운다. 한편 소고기나 닭고기, 김치, 오이, 배 등으로 꾸미를 만든다. 국수국물은 고기국물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다. 국수는 그릇에 담고 그 우에 꾸미를 보기 좋게 놓고 국수국물을부은 다음 실닭알, 실고추, 실파 등으로 고명하여 낸다.”(307쪽)고 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료리전집(1)>은 “국수는 우리 인민들이 즐겨 먹는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고려시기에 쓴 책인 <룡비어천가>에 고려사람들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국수를 많이 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수가 고려 시기는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리용되였으며 그 가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국수를 일상음식으로 뿐 아니라 오리가 길다는데로 부터 장수의 상징으로, 없어서는 안될 별식으로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국수는 리용하는 낟알가루에 따라 메밀국수, 농마국수, 강냉이국수, 밀국수 등으로 나누며 마는 방법에 따라 찬국수, 더운국수, 쟁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회국수 등으로 나눈다. 예로부터 메밀국수는 평양랭면이 유명하였고 감자농마국수는 함흥농마국수가 유명하였다.“고 했습니다. 남한의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는 “함흥냉면(咸興冷麵). 농마국수”는 “함경도에서만 감자녹말로 국수를 뽑은 까닭에 독특한 맛의 함흥냉면이 발달했다. 이유는 함경도에서는 메밀을 대량으로 재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경도는 메밀 재배가 어려워 상대적으로 풍부한 감자를 갈아서 녹말로 만든 후에 국수를 뽑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감자를 재배한 지역 역시 함경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서 1824년과 1825년인 순조 갑신년과 을유년 사이에 만주의 심마니들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 땅에 감자를 심었다고 적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감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함경도 회령군 수성천에 사는 사람들은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는다고 했다. 감자가 함경도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까닭에 함경도 음식 중에서는 감자로 만든 음식이 유독 많다. 함흥냉면 역시 그중 하나다. 함흥냉면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냉면은 아닌 것이다. 본고장인 함경도에서도 냉면 대신, 녹말국수 또는 농마국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농마국수라고 하지 함흥냉면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은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평양냉면이 크게 유행을 했기 때문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만들어 파는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자 함경도 출신들도 농마국수라는 향토색 짙은 이름 대신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팔았다. 심심한 맛의 평양 물냉면과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게 양념을 한 비빔냉면인 함흥냉면이 동시에 인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세간(世間)의 이목을 집중시킨 평양냉면! 방북 남한 예술단 단원들의 '옥류관에서 맛 본 진짜배기 평양랭면‘에 대한 찬사! 평양 옥류관보다 더 좋은 식재료를 쓰는 남한 전통냉면집의 냉면 맛은 과연 평양의 것보다 맛이 못할까요? 서울에서 1946년부터 냉면을 팔고 있는 식당의 ‘평양전통냉면’, ‘평양전통비빔냉면’이라는 메뉴는? ‘평양랭면’의 정체(正體性)은? ’함흥냉면‘만 존재하는 남한의 ’농마국수‘가 앞으로 어떻게 소개되고 상업화될지...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 모두가 북한 땅을 뿌리로 하고 있지만 한민족의 전통음식입니다. 우리 한민족 모두가 제대로 된 전통 식(食)문화를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금강산(金剛山), 유네스코 세계생물권보전지역 지정.
[청로 이용웅 칼럼] 금강산(金剛山), 유네스코 세계생물권보전지역 지정.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생물권 보전지역’은 유네스코 인간과 생물권 계획(MAB·Man and the Biosphere program)이 생물 다양성 보전과 자연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결합시킨 육지 및 연안(해양생태계) 지역을 뜻합니다. 생물권 보전지역은 관련 국가의 신청을 받아 MAB 국제조정이사회(ICC)가 지정합니다. 지정되면 생태적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지구상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자연 유산으로써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됩니다. 유네스코는 생태적 가치가 큰 지역을 세계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환경보전과 생태계 변화 감시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7년 8월 7일, 북한 국가과학원 생물다양성연구소의 이충성 연구사는 <조선중앙방송>과 의 인터뷰에서 "현재 금강산 자연공원을 세계 생물권 보호구로 등록하기 위한 사업을 마감단계에서 진척시켜 나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최근 연간에만도 우리나라의 명산들을 세계 생물권 보호구로 등록하고 국제적 수준에서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사업들을 활발히 진행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개발 분야로 되고 있는 생태관광을 개발하고 현실에 효과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과학 이론적 기초도 마련해 나가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때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금강산의 지명도를 높여 관광을 활성화하려는 차원에서 등재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정부 당국자도 "북한은 2000년대 초반 금강산을 국제관광특구로 지정해 관광산업을 활성화를 시도했다."며 "2008년 남측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이후 한국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한 뒤 중국과 동남아 국가의 관광객 유치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자 홍보 차원에서 유네스코에 등록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북한의 백두산(1989), 구월산(2004), 묘향산(2009), 칠보산(2014)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관광 차원에서만 등재를 추진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마침내 대한민국의 ‘순천’과 함께 북한의 ‘금강산’이 2018년 7월 25일(수) 제30차 유네스코 인간과생물권사업 국제조정이사회(18.7.23-27, 인도네시아 팔렘방)에서 나란히 유네스코의 신규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제조정이사회 이사국들은 이 두 곳이 동시에 지정된 데 대해 축하를 보내고, 금번 동시 지정이 한반도 평화를 향한 흔들림 없는 추진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명하였습니다. 또한 이사국들은 금번 동시 지정을 계기로 북한 생태자원 연구 등 유네스코를 통한 남북한 협력이 더욱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으며, 유네스코가 인간과생물권사업(MAB)을 비롯한 유네스코 프로그램을 통해 남북한 협력 및 한반도 평화 정착에 더욱 적극적으로 기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금강산은 한민족의 명산(名山) 중의 명산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 생물권보전지역을 지키는 일을 남북한이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남쪽에서는 금강산 산자락에도 갈 수 없습니다. 2008년 7월 이후 금강산 관광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2011년 6월 17일, 금강산국제관광특구지도국 대변인 명의로 "금강산국제관광특구지도국은 특구법에 따라 특구내의 부동산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정리하게 된다."면서 "특구 내 부동산을 보유한 현대아산 등 남측 당사자들은 30일까지 특구로 오라"고 통고했습니다. 아직도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습니다. 필자는 지난 해 추석 때 칼럼 “그리운 금강산과 추억(追憶)의 금강산”에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소개했습니다. -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 만 년 아름다운 산 못가본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 만리 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 - 그리고 “폭포수는 은절구통같이 봄절벽을 찧고/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로 청산을 재도다/ 달빛은 희고 눈빛도 희며 천지도 모두 희고 / 산도 깊고 물도 깊고 나그네 근심 또한 깊도다.”라고 노래한 김삿갓도 소개했습니다. 금강산에 대한 명시(名詩)들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수없이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금강산이 절경(絶景)임을 의미합니다. 생물 다양성 보전은 당연한데 뒤늦은 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금강산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남한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자연환경”에서 “금강산의 지체 구조는 지금으로부터 약 1천만 년 전인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傾動性撓曲運動)으로 형성되었다. 지반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수직의 절리가 탁월한 흑운모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거의 대부분이다...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와 침식으로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함께 수많은 골짜기마다 노암(露巖)의 수직절벽·암대(巖臺)·폭포·분류(奔流)·심담(深潭)을 형성해 놓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내금강(內金剛)을 흐르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들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나, 외금강(外金剛)의 하천들은 길이가 짧고 경사가 매우 급하여 침식력이 더 크므로 산세의 험한 정도나 골짜기의 깊은 정도에 있어서 외금강 쪽이 훨씬 뛰어나고 지역적 범위도 넓다. 그리하여 흔히 내금강은 온자우아(蘊藉優雅)하여 여성적이고, 외금강은 웅건수특(雄健秀特)하여 남성적이라고 비교한다. 금강산의 동쪽 해안에는 수원단(水源端)으로부터 구선봉(九仙峰)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석호(潟湖)와 기암이 어울린 해금강(海金剛)이 있다. 금강산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는 지리적 위치에 따른 변화 많은 기상 조건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금강산이 아름다운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2018년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됩니다. 남북은 지난 6월 22일 금강산에서 적십자회담을 갖고 공동보도문을 통해 “8·15를 계기로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미구(未久)이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릴 것도 기대해 봅니다. ‘세계 생물권보전지역의 리더 대한민국’라고 하는데, 남북이 상호 협력하여 금강산을 더욱 더 아름다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月刊 의 1953년 7월 27일과 2018년 7월 27일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月刊 의 1953년 7월 27일과 2018년 7월 27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의 홍보 월간지 <조선>은 2011년 7월호에서 “위대한 령도, 승리의 7.27”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인 7월 27일을 맞을 때마다....미제가 조선전쟁에 저들과 남조선괴뢰군만이 아닌 일본과 15개 추종국가의 무력까지 동원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는 ‘허위사실 유포’로 시작됩니다. 이 글은 “나라가 해방되여 5년, 공화국이 창건되고 인민군대가 정규군으로 된지 겨우 2년밖에 안 되는 청소한 조선과 100여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을 몰랐다는 미제와의 대결은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엄혹한 시련이 아닐수가 없었다.”로 이어졌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리고 “조선전쟁을 도발한 장본인인 미국대통령 트루맨의 신세도 달리 될수 없었고 제2차세계대전시기 련합군의 총사령관이였던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신공세> 기도도 박살났다. 결국 미제는 전쟁에서 패배를 자인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제국주의 련합세력에게 심대한 군사 정치적 패배를 안겨준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는 오늘 김정일령도자의 선군령도와 더불어 빛나게 계승되고 있으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앞으로도 오직 백승의 한길로만 줄기차게 전진해 나갈 것이다.”로 끝을 맺었습니다.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서 미군 54,246명이 목숨을 잃었고, 8,176명이 여전히 실종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09년, 미국 상·하 양원 의회가 7월 21,24일 한 법안을 통과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입니다. 그 때 2009년 7월 27일 오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조기게양"을 임시조치로 지시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모든 연방정부 기관들은 모두 7월27일에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미국의 국가 기념일이 1년 365일 중에 총 19일이 되는데, 미국에선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의 참전용사 추모일(Veterans Memorial Day)과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일: Korean War Armistice Day)에 조기게양을 합니다. 북한은 이 때가 되면, 다채로운 행사를 펼칩니다. 특히 청년학생들의 경축무도회가 매년 각지에서 펼쳐집니다. 북한 <로동신문>에 따르면, “수도의 무도회장들은 우리 당과 인민의 최고령도자이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로 높이 모시고 뜻 깊은 전승절을 맞이한 크나큰 기쁨을 안고 모여온 청년학생들로 차넘치였다. 전승의 축포가 오르던 력사의 그날 전설적 령장을 우러러 터치던 우리 군대와 인민의 격정의 환호인양 무도회장들에 《김일성대원수 만만세》의 노래 선률이 울려퍼지자 무도회가 시작되였다...《우리의 7.27》,《우리의 노래는 승리의 노래》 등의 노래에 맞추어 춤률동을 이어가는 참가자들의 얼굴마다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력사상 처음으로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를 깨뜨리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한 영웅조선의 청춘으로 살며 투쟁하는 긍지와 자부심이 한껏 어려있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에 죽고, 김정은이 집권한 첫 해인 2012년 7월 27일의 축하행사들은 김정은 우상화를 본격화했습니다. ‘전승절 경축 공훈국가합창단 음악회’에 대한 기사를 실은 <로동신문>은 먼저 행사를 소개하고, “대를 이어 누리는 수령복, 장군복을 가슴깊이 새기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전승의 환호성을 조국통일의 축포성으로 울려갈 천만군민의 한결같은 지향과 념원을 반영한 음악회는 관람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음악회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영웅전사들의 투쟁정신으로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결사옹위하며 주체혁명위업을 총대로 믿음직하게 수호할 우리 군대와 인민의 드팀없는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런 우상화(偶像化)는 2017년 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사전은 “침략(侵略.侵略)”을 “남의 나라에 처들어가 자주권을 짓밟으며 략탈을 하는 것. 무력침략, 경제적 침략, 사상문화적 침략과 같은 것이 있다. 침략과 략탈은 제국주의의 본성이며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침략군대”를 “=침략군/ 제국주의 침략군대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략탈을 일삼고 인민을 살육하는 것을 본능으로 삼으며 소수의 착취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반인민적 군대이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어휘를 설명한 사전은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말대사전 3>(223쪽 )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반대로 설명을 했는지 놀라울 뿐 입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위 설명의 주인공임을 스스로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북한은 남침을 인정하고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내년부터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 정전일(Korean War Armistice Day)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1953년 7월 27일는 결코 남‧북한 모두의 ‘승리의 날’의 날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북한이 잘못을 사죄하고 6.25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추모해야 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8년 7월 27일은 치열했던 3년간의 한국 전쟁을 종식한 군사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018년 오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로 시작하는 ‘6 25 노래’를 아는 젊은이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6.25 전쟁의 참상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정전 65주년 기념일’은 더 더욱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북한은 7월 27일을 “우리 인민의 제2의 해방날”인 “전승절(戰勝節)”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매년 이 날이 되면 ‘전쟁 승리 타령’을 합니다. 대부분의 남한 언론매체들은 ‘7월 27일’을 거의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은 “65년 유예된 평화…눈앞에 온 종전선언 [오늘 정전협정 65돌] 1953년 7월27일, 전쟁 멈춘 날”로 시작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7월 27일은 ‘정전협정일’이지 “전패절(戰敗節)이 결코 아닙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문학작품을 통해 본 기차(汽車)와 남북철도 연결
[청로 이용웅 칼럼] 문학작품을 통해 본 기차(汽車)와 남북철도 연결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산모롱이 고지에 별안간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는가 하니 시꺼먼 물체가 씩씩거리며 산허리를 꺾어 돈다. 기차다. 가로 놓인 신작로 한 복판의 레일을 타고 기차는 정거장을 바라보았다. 뀌익 소리를 냅다 지르며 숨이 찼다.”/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으로 <백치(白痴) 아다다>를 쓴 소설가 계용묵(桂鎔默/1904∼1961)의 <바람은 그냥 불고>(1947년)의 한 대목입니다. 그가 쓴 <백치(白痴) 아다다>는 193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발표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발표된 작품 중에서 ‘기차’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에는 유진오(兪鎭午/1906~1987)의 <화상보(華想譜)> 등이 있습니다. 1939년부터 1940까지 <동아일보>에 발표된 <화상보> -“수원역 플랫폼에서 한 사나이가 대륙행 특급을 기다린다. 그가 곧 장시영이다. [오후 사십오 분 착 경아] 그는 다시 포켓에서 전보를 꺼내어 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그 전보를 친 여인이다...수원역에서 차가 멎자 시영은 특급 열차에 오른다. 경성역에 도착하기까지 경아와 동행하기 위해서다.”- 문학작품의 ‘기차’에 대한 말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많고 다양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여행할 때 반드시 나의 일기책을 가지고 간다. 왜냐하면 기차에서 읽을 감각적인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1913~1995)는 “그의 머리 속에는 내리막을 달리는 기차가 떠오른다. 최종열차다. 땅 끝까지 가서는 바다에 빠진다는 것이다.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기차는 목이 쉬도록 울며 발목이 휘어지도록 뻗대어 본다.”고! 지구촌의 남녀노소(男女老少) 중 많은 사람들은 ‘기차’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낭만적인 사람들은 기찻길 옆 꼬불꼬불한 시냇물에 몸을 실고 달리기도 하고, 낭만열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상도 합니다.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필자에게는 유난히 기차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피난열차, 통학열차, 알프스등산열차, TGV프랑스열차, 유레일패스유럽열차, 시베리아야간열차, 신칸센(Shinkansen), 그리고 KTX 등등. 필자에게는 기차가 행복한 추억이며 낭만입니다. 우리 철도청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철도의 역사는 1896년 3월 29일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허가해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99년 9월 13일 궁내부 내장원에서 서북철도국을 설치함으로써 철도행정이 시작, 1906년 7월 1일 일제통감부에 의해 설치된 철도관리국이 철도업무를 담당,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후에는 총독부 철도국, 1945년 8·15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운수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에는 교통부에서 담당하다가, 1963년 9월 1일에 독립채산제를 채택하고 특별회계로 운영되는 외청인 철도청으로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철도청 발족 이후 1967년 증기기관차의 운행은 종료되었고, 1973년 전기 기관차 운행이 개시되었습니다. 그 역사 속에 6.25전쟁이 있었습니다. ‘6.25’는 한반도를 황폐화시켜 6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와 1000만 여명이 넘는 이재민을 남겼고, 철도·도로·교량·항만 등이 파괴되어 사회 경제적 기반이 크게 흔들려 큰 피해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휴전선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철도 등은 여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동해선은 1950년에 끊겼고, 경의선의 경우 1951년 6월12일 서울-개성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동안 북한은 경의선을 평부선(개성-평양)·평의선(평양-신의주)으로, 함경선을 강원선(고원-평강)·평라선(평양-나진)·함북선(청진-나진)의 구간으로 나누는 등 해방 전의 철도망을 개편해 기본 철도망으로 삼고, 삼지연선(혜산-삼지연)·청년이천선(세포-평산)·북부내륙선(만포-운봉-혜산) 등을 신설했습니다.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2007년 5월 17일(목), 남북 열차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휴전선을 넘어 끊어진 한반도의 맥을 이었습니다. 문산역에서 출발한 경의선은 버스로 남측을 먼저 방문한 북측대표 50명과 남측대표 100명을 태우고 51년 6월21일 이후 56년 만에 휴전선을 넘었으며, 동해선은 오전에 버스로 휴전선을 넘은 100명의 남측대표가 북측대표 50명과 함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57년 만에 제진역을 향해 남방한계선을 통과했었습니다. 경의선의 경우 1951년 서울-개성 운행이 중단된 이후 56년 만에, 동해선은 1950년 이후 57년 만에...군사분계선(MDL)을 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 남한의 언론은 “남북열차 시험운행이 갖는 의미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철길을 열면서 남북 물류 인프라 완성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정부는 보고 있다. 2000년 남북 직항기가 하늘 길을 열었고 2003년 '동·서해지구 남북관리구역 임시도로 통행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잠정합의서'로 육로를 뚫었고 2005년 8월 남북해운합의서로 바닷길을 연데 이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또한 “철도로 물자 뿐 아니라 승객 수송까지 가능해진다면 남북 간 접점을 넓히고 남북경제공동체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고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한반도종단철도(TKR)가 러시아횡단철도(TSR)나 중국횡단철도(TCR) 등 대륙철도에 이어진다면 한반도가 해양과 대륙을 잇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면서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를 향한 꿈을 실현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었습니다. 남북이 2018년 7월 20일 동해선 철도 연결구간을 공동점검 한 데 이어, 7월 24일에는 경의선 철도 연결구간에 대한 공동점검에 나섰습니다. 우리 측 공동점검단 15명은 이날 오전 경의선 육로로 방북해 북측 점검단과 함께 경의선 연결구간 가운데 북측 구간을 점검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한반도 분단 이후 철도는 단절되어, 한때 대륙철도의 한 축이었던 남한의 경의선, 경원선은 수도권 외곽지역의 미미한 여객수요를 처리하는 지선으로 전락되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꼭 연결되어야 합니다. 7월 27일! 북한은 ‘6·25’를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고, 1973년 휴전협정 20주년부터 휴전협정체결일(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로 제정한 데 이어 1996년 43주년에 이날을 국가적 명절인 전승절로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일부 단체들은 벌써 ‘통일열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망사항’은 좋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하게 오르는 지혜가 절실(切實)한 때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김일성이 명명(命名)한 북한 ‘과일군’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청로 이용웅 칼럼] 김일성이 명명(命名)한 북한 ‘과일군’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2018년 7월 21일 KBS-TV는 색다른 북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과일군에서 온 첫물 복숭아 ”와 “북한 김정은, 황해남도 과일군 시찰” 입니다. -[조선중앙TV 보도 : "올해 첫물 복숭아를 가득 실은 과일수송대가 14일 평양에 도."] 이곳에 모인 수많은 복숭아들은 다시 보육원, 학교, 상점 등으로 보내진다...[이순녀/ 월향과일야채상점 점장 : "첫물 복숭아를 받아 안을 때마다 정말 책임감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한 알도 허실함이 없이 우리 주민들에게 골고루 차려지도록 하겠습니다."] 이 복숭아 모두는 바로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수확한 것. [조선중앙TV '청춘 과원에 주렁진 인민 사랑의 열매' : "몸소 과일군이라고 이름도 새롭게 지어주시고 대규모 과일 생산기지로써 자기의 사명을 다하도록 걸음걸음 세심히 이끌어주신 우리의 수령님."].../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과수의 고장 황해남도 과일군을 현지지도했다고 7월 21일 보도.- 대한민국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과일군’을 “북한의 주요관광지인 남포직할시와 근접하며, 과수원을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어 1986년부터 소규모의 해외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군의 서쪽 해안에서 8㎞ 정도 떨어져 있는 초도는 예로부터 국방상의 요지였으며, 고려초에 건축되었던 풍천성이 현재 남아 있다. 초도춘운이라는 풍천팔경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산동반도에 가까워 해상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또한 4㎞나 되는 백사장과 숲이 아름다운 용학반도가 있으며, 군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비파곶의 경치도 아름답다. 황해남도 학(천연기념물 제14호)과 원당리의 삼광향나무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 4>은 “과일군 : 황해남도 북서부 조선 서해안에 있는 군. 동부는 송화군과 은률군, 남부는 장연군과 잇닿아 있으며 북부와 서부는 조선 서해에 면하고 있다...과일군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65년 1월, 1967년 5월, 1971년 5월, 1976년 9월, 1993년 9월 친히 이곳을 찾으시여 과수업 발전방향과 그 수행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신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1971년 4월 친히 이곳을 찾으신 영광의 혁명사적이 깃들어 있다...[경제] 과수업 발전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으나 해방 전까지 밭농사를 주로 하는 락후한 농업지대로 되어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금 황해남도에는 한 개 군에 거의 8,000정보의 과수원을 가진 큰 규모의 과수종합농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군의 이름을 과일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일군은 이름 그대로 온 군이 하나의 큰 과수업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이런 큰 규모의 과수원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고 했습니다. 1965년 1월 23일 “숫눈길을 밟으시며 여기 과일군 북창분장에 수령님께서는 무연히 펼쳐진 과원을 바라보시며 ⪡과수원이 굉장합니다. 사과나무들이 청소년시절이구먼...⪢”이라고 하고 대견해 했다고 합니다. 위의 북한 자료에서 알 수 있은 것처럼 원래 ‘과일군’은 없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구려시대에는 굴을현, 신라시대에는 굴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에는 풍주, 이어서 풍천으로 불리다가 송화군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 10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화군 서부지역인 진풍면·천동면·상리면·하리면·풍해면·운유면·류리면이 분리되어 신설되었습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1개 읍(邑)과 22개 리(里)로 되어있는데, 읍 명칭도 ‘과일’이고 역(驛)도 ‘과일’ 입니다. 과일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과수단지로 개발하여 ‘1백리 청춘 과원’으로 불리고 있고, 과수원이 군 전체 경지면적의 70%에 이르고, 군 이름이 나타내듯이 사과를 비롯하여 배·복숭아·감·포도·살구 등의 생산량이 북한에서 가장 많으며, 과수원의 길이는 40㎞에 이른다고 하니까 김일성의 업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에는 ‘과일군’ 외에도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군명(郡名)이 있습니다. 바로 량강도(兩江道)에 있습니다. 한반도의 지도에서 남한과 북한의 큰 차이는 도명(道名) 입니다. 남한 지도에 없는 행정구역은 황해북도·황해남도, 그리고 자강도(慈江道)와 량강도(兩江道) 입니다. 량강도는 1954년 10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 만든 도(道)인데, 압록강과 두만강이 함께 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량강도는 현재 1개 시(市)와 11개 군(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유명사가 3개가 됩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 작은 아버지 ‘김형권’ 그리고 부인 ‘김정숙’ 입니다. 김일성은 한술 더 떠 절친인 ‘김책’의 이름을 따 시(市)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김정일군’을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과일군을 방문하기 직전에 ‘현지지도’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의 함경북도 어랑천발전소 건설장 현지지도 소식은 <로동신문> 7월 17일자 1면(사진)에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 신문은 평소의 두 배인 12면으로 증면해 9개면에 걸쳐 김 위원장의 함북 지역 경제현장 8곳 현지지도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평안북도 신도·신의주에서 량강도 삼지연군을 거쳐 함북까지, 북-중 접경지역을 포함한 북부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며 3주 가까이 ‘경제 시찰’을 이어가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문득 뜬금없이 사필귀정(事必歸正/ 처음에는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감.)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북한의 2017년 실질 경제성장률(GDP)이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서 수출길이 사실상 막힌데다 가뭄 등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경제 규모가 큰 폭으로 위축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제2의 ‘고난의 행군’ 시기가 오지 않아야 할텐데! 지금 한반도는 폭염경보와 폭염주의보 속에서 뜨거운 태양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선 ‘가뭄철’(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고 으레 가뭄이 계속되는 때)이 예상됩니다. 북한에선 ‘가물철’(가물이 계속되는 철)이라고 합니다. 통일도 좋고 평화도 좋지만, 한반도가 “가물철 물웅뎅이의 올챙이 신세”가 안 되도록 서로 협력했으면 합니다. “가물철 물웅뎅이의 올챙이 신세”는“가물로 하여 곧 말라버려서 밑창이 들어나고야말 물웅뎅이 속에서 우글거리는 올챙이 신세라는 뜻으로 ⪡멀지 않아 죽거나 파멸당할 운명에 놓인 가련한 신세⨠를 비겨 이르는 말.”(북한 조선말대사전)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싱가폴과 평양의 야경(夜景), 그리고 장자강의 불야성(不夜城)
[청로 이용웅 칼럼]싱가폴과 평양의 야경(夜景), 그리고 장자강의 불야성(不夜城)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이 암흑(暗黑) 속에 한 가닥 빛이 들어왔다. 대기권 내, 대기권 외 및 수중(水中)에 있어서 일체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에 관하여 모스크바에서 교섭이 타결되었다.”(J.F.케네디) / 그 뒤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났는데도 ‘핵실험’이라는 ‘암흑’은 북한 수장(首長)의 손 안에 있고, 미국 수장은 그의 몸짓에 따라 울고 울기도 합니다. 그들이 지난 6월 북미정상회담 때 만났던 싱가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황홀한 빛’을 생각했습니다. 김정은은 북미정상회담 하루 전인 2018년 6월 11일 밤 호텔을 나와 싱가포르 곳곳을 구경했습니다. 그때 숙소인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전망대에서 야경을 감상한 김정은은 자신을 수행하던 싱가포르 외무장관에게 "싱가포르가 듣던 바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건물마다 특색이 있다"며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당신 나라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많이 배우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인 '조선의 오늘'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시의 야경을 강성 국가의 수도답게 황홀하고 희한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6월 22일 보도했습니다. 이 매체는 김정은이 "도시 건축물들과 그 주변의 불 장식을 고상하고 품위 있게 우리 식으로 더 잘하라"며 이같이 지시했다고 전했습니다. "평양야경도 황홀·희한하게 하라"는 김정은의 야경 개선 지시가 싱가포르 야경 감상 이후에 나온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싱가포르 방문으로 김정은이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대북 소식통은 "싱가포르 방문을 계기로 평양시 야경을 개선하려 할 가능성이 크지만 열악한 전력 사정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를 보면 북한의 ‘선전선동(宣傳煽動)’은 볼만합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평양의 밤풍경”이라는 기사에서 “창조와 혁신으로 들끓는 평양의 모습은 나날이 아름답게 변모되여 가고있는데 수도의 밤경치는 더욱 신비경을 펼치고있다. 강성대국건설에 떨쳐나 조선인민의 기상인듯 전설속의 천리마는 어두운 밤하늘을 날며 광휘로운 빛을 뿌리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마다 힘과 용기를 안게 된다. 환희로웠던 조국해방의 력사적인 그날을 추억케하는 장중한 개선문도 김일성주석의 불멸의 업적을 길이길이 전하려는 인민들의 마음담아 천지가 환하도록 밝은 빛을 뿌리고 있다. 그런가하면 남산재에 우뚝 솟은 인민대학습당과 보통강반의 인민문화궁전, 조선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전하는 모란봉의 을밀대며 토성랑의 보통문도 불장식으로하여 자기의 자태를 불빛에 담아 자랑하고있다. 영광거리, 천리마거리 등 모든 거리들의 가로수들마다에는 온갖 《열매》들이 주렁지고 하늘의 별무리가 이 땅에 다 내린듯 불꽃들이 반짝이여 평양의 밤경치는 황홀경을 이룬다. 정녕 강성대국의 려명이 밝아온 선군조선의 수도 평양의 밤은 비약하는 래일을 부르며 영원토록 밝은 빛을 뿌릴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선전선동’은 참 볼만합니다. 2016년 5월부터 북한 축구팀을 이끌어 온 노르웨이 출신 예른 안데르센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더 머무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사임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그가 북한을 떠나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북한 스포츠에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농구광 김정은이 축구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국인 감독을 제대로 대우 못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외국인 감독으로는 두 번째로 북한 축구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2018년 3월까지 팀을 이끌었습니다. 2년 가까운 재임 기간에 9승6무5패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북한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예른 감독이 남한의 K리그1(1부리그) 인천 유나이티드 사령탑에 올랐다. 그는 6월 9일(한국시각)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와 2019년 12월까지 계약을 맺었다”라고 밝히며 관련 사진을 올렸습니다. 한국에 온 ‘북한의 히딩크’는 6월 15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내 목표 1순위는 인천을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것”이라며 “앞으로 북한 대표팀·리그팀과 교류전, 북한 선수들의 K리그 진출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1월부터 오후 7시 이후 불을 켜기가 어려웠다. 오후 10시에 꺼지던 훈련장 조명은 오후 6시에 소등했다. 평양 시내를 다니는 자동차 수도 줄었다. 송유관을 막았다는 말이 돌았다. 기름 자체가 부족하다 보니 필수적인 이동을 제외하고는 차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 밤에 창밖을 보면 예전과 달리 깜깜했다. 외국에서 내게 돈을 송금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시스템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전력 생산에 대한 ‘선전선동’은 김일성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장자강의 불야성(不夜城)”을 선군팔경(先軍八景)의 하나라고 자랑했습니다. 월간 화보지 <조선>은 “장자강은 오늘 전력생산기지일 뿐 아니라 관개용수와 공업용수, 음료수 그리고 떼길과 배길로도 리용되고 있다. 약동하는 생활의 랑만과 정서가 한껏 흘러넘치는 장자강은 밤이면 또 밤대로 대낮처럼 밝은 별천지를 펼쳐놓아 황홀경을 이룬다.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앉은듯 강변을 따라 층층이 들어앉은 살림집들에서와 공장, 기업소들마다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 불밝은 창가에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의 창조적 희열과 랑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강도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부 자강도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어날 힘도 없다고 합니다. 어느 소설가는 “어두움! 모든 욕심이 이 어두움 때문에 일어난다. 나는 이 어둠과 싸워 이겨야 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아내려고 두 눈을 힘주어 크게 떠 보았다. 그러나 어둠은 역시 어둠이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암흑의 협곡(峽谷)에서도 그 끝에 불빛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불빛이 독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선량한 백성들을 기아(饑餓)에 허덕이게 했고, 김정일도 ‘고난의 행군’을 감행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의 ‘황홀한 야경’ 타령을 할 게 아니라, 모든 북한 주민들이 희망의 빛을 볼 수 있게 온 몸을 다 바쳐야 할 것입니다. 김 위원장의 의무는 그들에게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아주는 것이 아닐까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3.1민족봉기”, 3·1운동 100주년, 3.1절 민족화합기도회
[청로 이용웅 칼럼]“3.1민족봉기”, 3·1운동 100주년, 3.1절 민족화합기도회
★ “3.1민족봉기 :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주체8(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 반일봉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하여 고귀한 피를 흘린 날입니다.⨠(<김일성전집> 3권, 185페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쌓이고 쌓인 조선인민의 민족적 울분과 사무친 원한은 마침내 주체 8년 3월 1일에 전만족적 반일투쟁으로 폭발하였다...⪡그때 여덟살이었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 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 까지 갔다. 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미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렬을 따라갔다. 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김일성 저작집> 45권, 36~37페지). 평양시민들의 시위대렬은 삽시에 10만여명으로 늘어났다...”(<조선대백과사전(13)>) / ‘3·1운동’을 ‘3.1민족봉기’이라고 하는 북한입니다. 타계한 김일성이 8세 때 시위에 가담했다니...믿어야겠죠! ★ 3.1운동(기미독립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 삼일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서울에 있던 20여 명은 2월 28일 밤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가지고 거사 계획에 대한 마지막 검토를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의 정보망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의 3.1운동에서는 8세 소년의 시위 이야기는 없습니다. ★ “文 대통령, 김정은과 3·1운동 100주년 공동사업 추진 : 문재인 대통령은 7월 3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남북이 함께 3·1 운동 100주년(2019년)을 기념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와 정부는 오는 8월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간 민간 교류 분위기를 내년 3·1운동 공동 기념행사로 이어가겠다는 계획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거듭 대한민국 건국(建國) 시점을 1919년 임시정부로 규정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3·1운동으로 분출된 민족의 역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조선일보>,2018.7.4.)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7월 4일, 정부가 100주년을 맞는 2018년 3·1절에 맞춰 남북 대표단이 함께 열차로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고위 당국자가 밝혔습니다. 이 당국자는 “지난 3일 3·1절 100주년 행사를 위한 기념사업추진위원회(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식 발족함에 따라 관련 사업을 본격 추진할 것”이라며 “관련 부처에서 공동 방중 계획을 연초부터 검토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당국자는 “남북관계 진전에 맞춰 남북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한 1단계 검토를 이미 마쳤다”며 “남북한의 대규모 대표단이 함께 열차를 타고 국내외에서 진행했던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대단한 일, 잘하는 일입니다. 그동안 국내외 많은 단체들과 한국인들, 외국인들까지도 3.1운동을 제대로 평가하고 기리기 위해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3.1절 민족화합기도회가 그 중 하나입니다. 1986년 정근모(鄭根謨/1939~)박사가 민족화합(National Reconciliation)을 위하라는 ‘소명’을 받고, 1987년 초에 귀국하여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설립자인 최태섭(崔泰涉/1910~1998) 회장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벽산 그룹 김인득(金仁得/1915~1997) 전 명예회장, 이한빈(李漢彬/1926~2004) 전 경제기획원 장관, 서영훈(徐英勳/1920~2017)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1987년 3월에 민족화합기도운동을 발기하여 1988년 3월1일 종로성결교회(현 삼성제일교회)에서 제1회 3.1절 민족화합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과학기술처 12대(1990년), 15대 장관(1994∼1996년)을 지낸 정근모 박사는 미시간 주립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뉴욕공과대학 전기 및 핵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 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을 주도했으며, 한국인 최초 세계 원자력한림원 회장과 세계 에너지회의 부의장 및 종신 명예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또한 미국 국무부 국제개발처(AID) 자문위원, 호서대학교 총장, 명지대학교 총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 속에는 항상 3.1절 민족화합기도회가 있었습니다. 필자도 그와 3.1절 민족화합기도회에서 만났었습니다. 함께 일하면서 5명의 발기인들의 ‘3.1정신’을 확인했으며, 정근모 박사의 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사업도 이런 노력들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2018년에도 3월 1일 오전 7시 서울 삼성동 삼성제일교회에서 제31주년 3.1절 민족화합기도회가 열렸습니다. 2019년 3월 1일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3.1절 민족화합기도회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