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 남북 체육교류를 재개시킨 북한 농구의 어제와 오늘
[청로 이용웅 칼럼] 남북 체육교류를 재개시킨 북한 농구의 어제와 오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공격기술에는 걷기, 달리기, 조약, 정지, 돌기 등 공을 가지지 않고 수행하는 이동기술과 공을 가지고 수행하는 기술이 있다. 공을 가지고 수행하는 기술에는 련락, 잡기, 넣기, 몰기, 몸빼기, 급출발, 급정지, 방향바꾸어달리기, 돌기 등이 있다.”(<조선대백과사전(7)>, 614쪽). / ‘리바운드’를 ‘튄공’, ‘드리블’을 ‘공몰이’라고 하는 북한의 ‘롱구(籠球)’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의 ‘농구(籠球)’입니다. 1997년 사회안전성 소속의 압록강체육선수단의 남자 ‘롱구’팀이 <태풍>으로 개명하여 프로팀으로 출발한 북한 프로 농구, 1999년 서울에 왔던 <우뢰>도 프로였습니다. 그 때 서울에 왔던 ‘리명훈’은 우리 농구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농구인들 사이에서 "빨리 통일이 되어 서장훈을 포워드로, 리명훈을 센터로 쓰면 아시아 정상은 물론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8강은 충분할텐데"라는 말이 돌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리명훈은 서장훈과 만나기도 했는데 각각 서장훈이 대한민국 최고의 농구선수, 리명훈이 북한 최고의 농구선수로 소개되었습니다. 그 뒤 ‘북한 농구’하면 ‘리명훈’이라고 했는데, 김정은이 북한의 수장(首長)이 된 뒤에는 그와 미국의 괴짜 농구선수가 늘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농구는 남북 스포츠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1999년에 최초로 ‘남북통일농구대회’가 태동(胎動), 첫 대회가 1999년 9월 평양에서 열렸고, 2차 대회는 12월에 서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화제는 단연 북한의 리명훈 선수였습니다. 키가 235㎝에 달하는 리명훈은 서울의 2차대회 둘째 날 28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이와 같은 남북 농구의 교류는 남북의 상호 이해에 도움이 되었고, 이후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제무대에서의 남북 농구대결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있었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북한 농구대표팀은 중국을 꺾고 우승한 대한민국에 101-85로 완패했지만, 일본을 꺾고 5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북 대표팀은 8년 만에 만났습니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96-66으로 30점차 완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2003년 평양 류경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 때 남북 농구 교류전이 마지막으로 열렸습니다. 그리고 2018년... 남북은 2018년 6월 18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남북체육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은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남북은 공동보도문에서 “7월 4일을 계기로 평양에서 남북통일농구경기를 개최하기로 하고 가을에는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고 밝혔습니다. 평양 경기에 남측 남녀 선수단을 북측에 파견하며, 경기는 남북선수 혼합경기와 친선경기 형식으로 진행되고, 규모는 선수단과 심판, 지원인력 등 약 101명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남북의 체육 교류를 농구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4·27 남북정상회담 후 첫 공식일정으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던 중 이런 뒷얘기를 털어놨다고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은 회담에서 “‘경평축구’보다는 농구부터 하자"며 “세계 최장신인 리명훈 선수가 있을 때만 해도 우리가 강했는데, 리 선수가 은퇴한 뒤 약해졌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 위원장은 10대였던 스위스 유학 시절 미 프로농구(NBA)의 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데니스 로드먼과 만나면서 농구광(籠球狂)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데니스 로드먼! 훌륭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미국의 전직 농구선수에 빠진 김정은!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개최 몇 시간을 앞두고 싱가포르에 모습을 나타낸 로드먼은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를 하다가 감정이 복받친 듯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문을 열어놓고 새롭게 출발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웃기는(?) 미국인이 우리 속담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속담에 “개에 호패(號牌)”(격에 맞지 않고 지나침)라고 했고,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제 직분에 맞지 않는 딴 생각을 하다가는 실패를 한다는 말입니다. 김 위원장이 ‘농구광’이라면, 그의 아버지는 ‘축구광’이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9년 6월 2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인 “체육을 발전시킬데 대하여”에서 “우리는 체육사업에 큰 힘을 넣어 나라의 체육을 하루빨리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겠습니다. 체육에서는 축구가 기본입니다. 축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체질에도 맞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축구가 북한 체육의 기본이라고 했는데, 아들은 농구를? 7월 4일 한 일간지는 [농구단 싣고 평양에 내린 특전사 침투용 공군 수송기…북 인사 “왜 군용기 타고 왔나”]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신문은 “허재 감독과 한국 남녀 국가대표 농구선수단 등 101명이 3일 공군 C-130H 수송기 2대를 타고 방북해 평양 땅을 밟았다...이번에 방북단이 이용한 C-130H는 현재 공군이 직접 운용 중인 기종이다. 작전부대에 배치돼 운용 중인 실전 공군기가 북한 지역을 찾은 건 6·25전쟁 이후 처음이다.”라고 했습니다. 남북통일농구경기는 7월 4일에는 혼합경기로 남북 선수들을 섞어 ‘평화팀’, ‘번영팀’으로 편성하여 경기를 펼치고 7월 5일에는 친선경기로 청팀(남측), 홍팀(북측)으로 나눠 경기를 합니다. 경기 장소는 류경정주영체육관입니다. 대표단장의 말처럼 “15년 만에 통일농구대회 참관을 위해서 출발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한반도 평화의 초석이 되고 이번 평양 통일농구대회가 한반도 평화를 더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부산문화재단의 “부산發 남북문화교류 진단”
[청로 이용웅 칼럼]부산문화재단의 “부산發 남북문화교류 진단”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부산항은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님아…// 해 저문 해운대에 달은 떴는데 백사장 해변가에 파도만 밀려오네 쌍고동 울어 주던 연락선마다 소리쳐 불러 봐도 말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픈 내 님아…(돌아와요 부산항에/元曲) .부산을 사랑하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 중 하나입니다. 1976년부터 경남 남해안 바닷가 교육 현장에서 ‘밥벌이’를 시작한 필자는 아직도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라는 직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구소가 서울에 있어 수도에서 살고 있지만, 부산·경남은 필자에게 제2의 고향입니다. 그 때 그 시절에는 부산과 경남은 한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서 내려온 필자에게는 부산, 특히 해운대가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산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서울 관악산 자락에 있는 필자의 집에서 서울 종로구 삼청동 연구소까지 일반버스, 지하철, 마을버스 타고 1시간 30분 걸립니다. KTX는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는 2시간 40분 소요, 1시간 10분 차이입니다. 서울-부산 기차 요금은 경로 30% 우대, 왕복 83,800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루 여행지로는 최적(最適)의 도시입니다. 더군다나 부산에 안삼현 시인과 제자 최종일, 성봉경, 백창준 등이 있어 만나면 행복합니다. 이처럼 좋은 부산의 [부산 문화재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포럼에 초청해 주었습니다. 옛 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부산문화재단은 ‘부산발 남북문화 교류 방안’을 모색하는 포럼을 6월 27(수) 오후 2시 30분 포럼을 열었습니다. 이 재단 주최로 열린 포럼 <2018년 부산 문화로 통(通)>은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평화와 화해의 흐름 속에서 부산광역시가 남북관계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문화적 통로를 찾자는 취지에서 마련됐습니다. 박영정 박사가 ‘현재까지의 남북문화교류 현황 및 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 문화예술분야 교류·협력사업의 전망’을 주제로 발제했습니다. 발제자는 오늘의 남북 관계를 바탕으로 ‘남북문화교류 전망과 과제’를 상세하게 제시했는데, “부산지역 남북문화교류 사업 제안”에서 “영화의 거점 도시인 부산의 특성을 살려 북한의 문화의 전당-조선예술영화촬영소, 부산국제영화제-평양국제영화축전 등 교류와 협력은 조기 추진 가능”을 개진(開陣)했는데, 발제자의 연구가 좀 더 필요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자로 나선 진희관 인제대 교수는 “2018 남북정상회담과 부산의 남북교류협력 과제-부산과 교류 가능한 북한의 지역과 교류 방향”에서 “부산시의 남북교류 발전을 위한 중장기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박은영 통일부 사무관은 “남북 사회문화교류협력 프로세스-사회문화교류를 위한 프로세스”에서 “민간 남북 사회문화교류협력 추진 흐름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조봉권 국제신문 문화부장은 “구체적인 준비를 미리!-남북 문화교류, 부산 문화예술계의 시선으로”를 발표했습니다. 필자는 “부산 발(發) 남북 문화교류 시 유의해야 할 북한 문화 특징”을 발표했습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북한의 사상문화, 주체사상과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헌법 서문, 조선로동당 규약 전문, 북한 국화(國花), 우리식 문화예술, 북한문학, 북한영화, 북한음악,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북한 식(食)문화, 부산 발(發) 유라시아 대륙까지 철도로!, 부산·경남의 남북 문화교류 연구 등을 Ppt.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 소제(小題)들은 우리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북한문화에 실체를 북한말로 소개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 북한 헌법 서문과 조선로동당 규약의 전문(前文)은 북한 문화 이해의 첩경(捷徑)입니다. ※서문(序文)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 기치밑에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분야에서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은데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였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헌법이다.” ※조선로동당규약 전문(前文) :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조선로동당은 프로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총로선으로서 천리마 운동과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추진한다.”(《조선중앙년감(1981)》)라고 되어 있다. 북한의 ‘당규약’은 ‘북한문학예술 개관’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북한문학예술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북한 헌법, 즉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의 제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식 문학예술은 ‘우리 식 사회주의’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구미의 사회주의 뿐 아니라 구 소련과 중국 식 사회주의에서 탈피한 순수한 북한식 문학예술을 지향하겠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70년대 말부터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라는 “혁명과 진실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를 더욱 철저히 세우며 위대한 주체사상의 기치밑에 조국혁명의 종국적승리를 앞당겨나가기 위하여 영광스러운 당중앙에서 제시한 전략적구호.”(《백과전서(6)》,514쪽 ;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2002년 6월 15일의 “남북(북남) 공동선언”에서 “4.남(북)과 북(남)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남북문화교류는 한마디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헌법’이 존재하는 한 남북문화교류는 쇼윈도(show window) 안의 보석(寶石)...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진실된 선택이 문화교류의 열쇠일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6.25전쟁의 김일성, 강원도 화진포의 김일성
[청로 이용웅 칼럼] 6.25전쟁의 김일성, 강원도 화진포의 김일성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누군가 “전쟁은 활발하고 훌륭한 역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선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비참한 전쟁으로 기록된 ‘6․25’가 발발한지 68주년이 되는 오늘도 우리 국민들은 여느 때처럼 잘 먹고 잘 잤습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한 일간지가 한국전쟁 발발 68주년, 남북한 화해 무드에 종전선언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6. 25’라는 날을 가볍게 넘기는 것은 아닌지...우리 국민들은 삼백육십오일 내내 ‘분단의 아픔’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물론 분단의 현장에서 고난의 역사를 반복하며 ‘활발하고 훌륭한 역사’를 추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괴상한(?) 주먹밥을 먹어보고 내뱉은 어린이들도 있고, ‘끊어져버린 철도, 그리고 그 상처를 덮어주려는 듯 철길을 뒤덮고 있는 무성한 수풀’ 속에서 갈라진 비극의 땅을 혼(魂)으로 체험한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또 한국판 <안네의 일기>를 낳지 못한 한국문학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전쟁문학에 대한 재조명도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끝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전쟁’이란 영화는 있겠지만, 전쟁은 영화처럼 시작과 끝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병법의 손자(孫子)는 “전쟁이란 국가의 중대사로 사생(死生)의 분기점이며, 흥망의 경계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고 스톱’도 아닌 전쟁판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만용(蠻勇)과 피의 살육(殺戮)을 일삼는 아레스신(神) 때문도 아니고, 미친 듯 도륙(屠戮)을 한 황폐의 여신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은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의 소산일 뿐입니다. 그러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한마디로 전쟁광(戰爭狂)들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래 역사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 광적인 자(者)는 무수합니다. 현대사만 보더라도 히틀러, 무솔리니, 그리고 김일성 등이 있습니다. 1950년 평양의 군사신문인 <조선인민군>은 “남한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38선 이북의 영토에 불의의 침공을 가해왔다”는 내각의 성명을 기사화했습니다. 그리고 사설에서 “조국통일의 날이 왔다! 모든 조선인들은 조국과 인민과 그리고 경애하는 김일성수령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며 독립과 통일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 남조선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해 어서 전선으로 나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기원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북한공산군은 아무런 정당성도 갖추지 않은 채 예고 없이 도발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했다”고 딘 에치슨(Dean G. Acheson)의 단언이 아니더라도 증거가 명명백백(明明白白)합니다.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6․25관련 외교문서목록을 받아내면서 모든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안에는 <조선인민군>의 허위가사를 믿고 있는 소수 무리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김일성의 남침’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는데도 말입니다. 김일성은 전쟁광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북한사람들은 오늘까지도 김일성을 태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물론 총칼에 의한 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학자들까지도 김일성 찬양에 급급하다니...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지난 88년에 발행한 <문예론문집 4>에는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김일성이고, 그 작품들에 대한 평론의 기준은 아들 김정일의 권한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학자들은 김정일을 ‘시가문학’에 뛰어난 문학의 대가(大家)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위대한 수령님 높이 모시고/ 주체의 한길로 억세게 나아가리/ 사나운 풍랑도 폭풍도 헤쳐/ 조선을 이끌고 미래로 가리/ 아, 조선아 너를 떨치고」라고 썼는가 하면,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수령형상문학’을 탄생시켜 김일성을 영생(永生)하는 태양(太陽)으로 조작했습니다. 이런 ‘6․25’의 원흉(元兇)이 강원도 화진포에 존재(?)합니다.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은 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의 성을 찾았습니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화진포의 성은 지상 2층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함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이 별장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훼손돼 방치되다가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강원도 고성군 홈페이지) 필자는 2018년 ‘6.25’를 맞아 그곳을 찾았습니다. 과거 수차례 방문했었던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은 여전했고, 보수한 흔적도 보였습니다. 강원도 고성군이 “2018년 2억 900여 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화진포 등 관광지의 시설개선. 화진포 관광지의 경우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이기붕 부통령 별장 구간의 화진포 관광지 걷기길(해변로) 보수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 주차장 주차선 정비(도색) △화진포 해변로(금구도 포토존) 정비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 진입로 노후 휀스 교체, 편의시설(쉼터) 조성 등이 추진.”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계속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화진포의 성, 일명 ‘김일성 별장’은 원래 외국인 선교사 셔우드 혼이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습니다. 화진포의 성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석조 건물로 당시 건축물로서는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6.25 전쟁 당시 훼손되어 방치되던 것을 2005년 3월 복원한 것입니다. 내부에는 6.25 전쟁과 북한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별장’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고성군이 ‘화진포의 성’을 달리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셔우드 홀의 예배당은 유산입니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년~1991년)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고성군이 “화진포의 성(6.25전쟁이 담긴 예배당)”으로 명칭 변경하면 어떨는지요? 아무리 ‘김일성’에서라도 ‘6․25’ 원흉(元兇)의 이름은 한반도에서 지워져야 마땅합니다. ‘6.25전쟁 68주년 추념식’이 왠지 쓸쓸해 보인 2018년 6월 25일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 한드레벌의 지평선(地平線)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 한드레벌의 지평선(地平線)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의 월간 화보지 <조선> 2011년 5월호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함경북도 태천군에 끝간데 없이 펼쳐진 한드레벌. 해방(1945.8.15) 전 용드레질로 올망졸망한 뙈기논들에 웅뎅이의 물을 한드레씩 퍼서 고달프게 농사를 짓던 곳이여서 그 이름에도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져있다. 조선로동당의 웅대한 대자연 개조 구상에 따라 지난날 락후와 빈궁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이곳 한드레벌은 사회주의 땅답게 전변되였다...주체89(2000)년 1월 토지정리된 한드레벌을 찾으신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시며 정말 멋있다고, 천지개벽이 되였다고 하시면서 벌의 이름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어 전변의 력사를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고 뜻깊게 말씀하시였다.”(20~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 2011년의 기사에는 ‘선군8경’라는 한글도, ‘先軍八景’라는 한자(漢字)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월간지 <천리마> 2005년 5월호는 ‘아름다운 조국강산’이라는 연재물에서 “선군8경-한드레벌의 지평선”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를 살펴보면, “선군시대의 복받은 대지에 펼쳐진 천지개벽의 모습이 한가득 실려있는 한드레벌의 절경. 지난날 물 원천이 너무 없어 실개천의 밑바닥을 파헤치고 조금씩 고이는 물을 한드레박씩 길어다가 농사를 짓는 벌이라 하여 그 이름도 한드레벌”(83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위 기사는 “땅도 달라지고 사람들도 달라졌다. 눈뿌리 아득하게 펼쳐진 한드레벌의 지평선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혁명 령도 밑에 강성대국으로 치달아 오르는 우리 조국의 자랑스러운 참모습이다. 그렇다. 한드레벌에 펼쳐진 지평선의 절경에도 선군시대가 비껴있어 그리도 아름다운 내 조국의 땅으로, 복받은 대지에 울려가는 천지개벽의 찬가로 길이 전해 갈 것이다.”(83쪽)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지평선(地平線)’...“얕고 무거운 하늘이 두껑마냥/ 하염없는 권태에 시달려 앓는 마음 짓눌러/ 사방 온통 껴안은 지평선으로부터/ 밤보다도 더 슬픈 어둔 별을 쏟을 때.”...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의 문학세계에 존재하는 ‘지평선’, 그 지평선이 ‘선군8경’ 중 하나랍니다. ‘지평선’을 국가를 대표하는 절경(絶景)으로 선정한 나라는 북한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 2005년 5월호도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한드레벌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여기서는 “함경북도 태천군에 펼쳐진 일망무제한 한드레벌은 선군시대에 변모된 무수한 벌들중의 하나이다...벼바다 설레이는 청신한 가을날 아침해살이 안개속에 잠긴 벌판으로 퍼져나가 마치 하늘과 땅이 맞붙은 것과 같은 풍경은 황홀함의 절정을 이룬다...과거와 현재가 집약되여있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을 오늘 조선 인민은 선군8경의 하나로 자랑하고 있다.”(20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천리마>와 <조선>의 글을 읽고 나면, ‘한드레벌의 지평선’이 8경에 선정된 것은 ‘쌀’과 ‘기아(飢餓)’가 배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평원으로 변모한 한드레벌의 희한한 전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2001년에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3)>에 기술된 “한드레벌에는 정리되기 전에 소가 들어 가 논을 갈수 없는 뙈기논을 비롯하여 무려 1만 3천 130여개의 올망졸망한 논들이 있었다. 토지 정리후 약 1만개의 뙈기논이 없어 지고 3천 200여개로 정리되였다. 논두렁의 길이는 무려 3천 600여리였으나 절반이상으로 줄어 들었다. 이처럼 큰 규모의 규격포전으로 정리됨으로써 한드레벌은 영농작업의 종합적기계화를 실현할수 있게 되었으며 태천군의 주요알곡생산지로 전변되였다.”(578쪽)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1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가 펴낸 <조선중앙년감 주체90(2001)년>에는 “한드레벌의 새 전설”라는 글에서 주체89(2000)년 1월 24일 김정일이 “눈길을 헤치시고 태천군 은흥리의 한드레벌을 찾으시였다...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시기에 대자연개조사업에서 창조된 이런 기적은 력사에 빛날 경이적인 사변.”(75쪽)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김정일이 텅빈 곡식 창고들을 채우기 위해 죽는 힘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드레벌’ 입니다. 북한의 <아동문학》주체 94(2005)년 3월호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룩하신 대자연개조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는 력사의 중견자, 선군시대창조물”(54쪽)이라고 했습니다. 오죽이나 경제가 어려웠으면 한드레벌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현혹하는 선전선동(宣傳煽動)에 이용했을까요! 2017년 가을, 북한 당국이 군부대 전체에 군량미를 바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량강도 소식통은 “지난 10월 초, 김정은이 표창을 했던 갑산군 주둔 43여단 직속 구분대 군인들이 밤에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 습격에 나섰다”면서 “지역 주민들이 지어놓은 강냉이를 싹쓸이해갔다”고 전했습니다. 이쯤 되면 ‘선군이고 나발이고 없는 것 같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한드레벌을 아는지 모르는지...’핵‘ 소리에 헥헥대던 그가 2018년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북중정상회담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은데...아무리 바빠도 함경북도 태천군에 납시면 어떨는지...북한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쌀‘일 것입니다. 끝으로 한드레벌의 지평선을 소재로 한 시(詩) 중 하나인 “한드레벌의 종달새”(양춘식 씀.<아동문학>, 39쪽)를 다음에 소개합니다.// “쪼롱쪼롱 빗쪼롱 고운 종달새/ 규격포전 한드레벌 지평선 좋아/ 봄들판에 봄맞이 가을 부르며/ 하늘에서 고운 목청 노래불러요/ 야하 선군8경/ 한드레벌 지평선 내 조국의 선경// 쪼롱쪼롱 빗쪼롱 고운 종달새/ 장군님의 그 사랑 가슴 뜨거워/ 한드레벌 지평선 날아예면서/ 선군조선 내 나라 노래 불러요/ 한드레벌 지평선 내 조국의 선경“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전쟁과 평화, 그리고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청로 이용웅 칼럼] 전쟁과 평화, 그리고 2018년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6·25전쟁에 간호장교로 참전한 이후, 지금까지 한 생애를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당시 경기여중에 재학 중이던 박옥선 할머니는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간호장교 시험을 쳤고, 전쟁터로 떠나던 날, 그녀의 아버지는 “가지 마라”, “잘 다녀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뒤돌아서서 눈물만 닦으셨죠, 그 모습이 박옥선 할머니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으로 평생 한으로...박 대위는 “악하게 살아가는 게 전쟁이다. 저 사람을 안 죽이면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있으면 안 돼”. 할머니는 전역한 지도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6.25 참전 유공자회에서 일하고, 80대 중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앞장서서 참전 유공자와 그들의 가족을 보살피십니다.“ (KBS 스페셜 <전쟁과 여자>) 2018년 6월 6일 오전 6시, 필자는 서울 동작구 현충로(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했습니다. 현충원은 1955년에 창설되었으며 143만m2의 대지 위에 17만 1천여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입니다. 맨 먼저 채명신 장군의 묘지를 찾았습니다. 채 장군은 1965년부터 4년 동안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냈으며 베트남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별세했는데, 운명하기 전에 '나를 파월장병이 묻혀 있는 묘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장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현충원의 장병묘역에 사병들과 함께 안장시켰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박옥선 대위는 지금 이 시간에도 6.25 참전 유공자와 그들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채명신 중장은 지금 이 시간에도 현충원 장병묘역의 맨 앞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든 베트남전쟁이든 유공자는 무수(無數)합니다. 참전 유공자와 그들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는 사람들과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호국영령(護國英靈)들! 그들은 한반도의 전쟁(戰爭)과 평화(平和)를 잇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필자는 6.25전쟁, 한국전쟁(북한:조선해방전쟁)을 1950년 6월 25일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시 금천구)에서 만났고, 베트남전쟁(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은 1966년 7월 베트남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 채명신 장군을 만났습니다. 정부가 조직한 제1회 파월장병위문단의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표로 맹호부대를 방문했을 때 만난 그는 지체 높은 장군이 아니라 자상한 특무상사처럼 보였습니다. 그 후 귀국해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현충원에 갈 때마다 채 장군을 맨 먼저 만납니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주체 39(1950)년 6월 25일부터 주체 42(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에 우리 인민의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미 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외래침략자들과 리승만 괴뢰도당의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진행한 정의의 전쟁. 조선인민은 조국해방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세계전쟁 력사에서 처음으로 미제에게 내리막길의 시초를 열어놓았다.”(<조선말대사전>,1387쪽)고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전쟁이란 인종·부족·민족·국가 등과 같은 각종 집단 상호간에 발생하는 무력 투쟁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국가 상호간, 특히 주권국가 상호간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무력투쟁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사회과학적으로 전쟁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 전쟁을 '사회적으로 용인된 일정한 형식으로 시작하여 계속되는 투쟁, 즉 관습 또는 법에 의해 인정된 형식을 갖춘 하나의 제도'로 파악합니다. 어쨌든 무력투쟁은 전쟁의 도화선(導火線)이 되고, 그 전쟁은 결국 종지부(終止符)를 찍게 됩니다. 하지만 소리 없는 전쟁은 실체가 보이질 않습니다. 미국의 전(前) 대통령 J.F.케네디는 “인류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전쟁이 인류에게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우리는 냉전의 휴지점(休止點)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니다. 핵실험 중지 조약은 하나의 이정표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상적 시대를 도래시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책무를 면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기회와 이 세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또 만약 우리가 새로 찾아낸 희망과 이해를, 적대적인 새로운 장벽과 병기로 바꾸어 놓는다면, 만약 또 이 냉전의 휴지(休止)가 재개(再開)로 이를 뿐, 그 종식(終熄)에 도달하지 않으면 후세는 우리들 모두를 지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 케네디의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특히 케네디의 ‘새까만 후배’인 트럼프는 알고 있어야 할텐데...회담도 하기 전에 김정은을 압박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가 하면...6월 7일(현지시각) 그는 종전선언에 관한 질문에 북미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 종전에 대한 합의에 서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상황을 보면서 북한과 종전선언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미국’이 아니라 ‘한 명의 미국사람일 뿐인데...그런데 그의 말을 김정은의 말보다 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 남한 사람들은 김정은 위원장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북한을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김정은도 트럼프처럼 ‘북한’이 아니라 ‘한 명의 북한사람’일 뿐! 북한도 헌법이 절대적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헌법”입니다. 북한의 ’전쟁과 평화‘의 근저(根底)는 ’김일성헌법‘입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의 종전과 평화는 북한 헌법의 개정부터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2018년 6월 12일은 분명 역사적인 날입니다. 두 정상이 한반도의 종전(終戰)과 평화(平和)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다음 케네디의 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는 희망이나 꿈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들을 우리의 당면한 유일의 목표로 한다면 부질없이 실망과 회의를 초래할 뿐이다.”(<평화의 전략을 구(求)하여>)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유년시절의 유월, 자연대합창 155마일, 그리고 현충일(顯忠日)
[청로 이용웅 칼럼] 유년시절의 유월, 자연대합창 155마일, 그리고 현충일(顯忠日)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평상시 같으면 이 잡듯 뒤지는 조간신문을 악몽 때문에 건성으로 넘기는데 천연색 사진 한 장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습니다. 뚫어진 철모에 담긴 이름 모를 꽃 세 송이가 전쟁의 잔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 이 사진이 준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온 겨레의 가슴 속에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상흔이 되살아나 아픔을 주는데, 이 정경이 한없는 비애를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시간은 현충일 전야입니다. 얼마 전에 시청한 특집극의 영상 위에 노랑 꽃송이가 겹쳐 떠올라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하고 펜을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유년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충청도 두메에서 농군으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개 콧구멍만한 전답을 팔아 서울 근교로 이사를 하고 돈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방고래에 불을 넣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덕분에 필자는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갖가지의 과실수가 울창하였고,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이 온 집안에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황해하시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 산등성이에서 본 서울 쪽 하늘이 붉은 노을보다 더욱 붉었습니다. 김일성이 꽃밭에 불을 지른 것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늘에서 새우 젖 독 같은 것이 떨어지는가 하면 큰 아버지 공장의 고무신들이 지하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은 생각이 났습니다. 안양 근처에서 배가 고파 토마토 밭에 들어가 허겁지겁 훔쳐 먹다가, 가족들을 잃고 헤맨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말 기적적으로 어머니 품에 다시 돌아와 실컷 울었지만 개미떼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은 기차를 탔을 때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철도노조 간부로 재직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기차를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힘이 우리를 살린 모양입니다. 헌데 두메의 고향 “청양군 비봉면 청수리‘에는 불행히도 기찻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찾아간 곳이 외갓집이 있는 대천이었습니다. 거기서 외할아버지 따라 꼴 베러 다니며 쇠파리를 알았고, 논 고동을 잡는 재미에 거머리를 우습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천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 메고 신나게 논길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주었던 외삼촌이 부상을 당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장소는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덕분에 누룽지를 훔쳐 먹을 기회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뒤 이어 일가들만이 모여 사는 이 마을에 군복을 입은 사람이 왔다만 가면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는 일도, 감이나 밤을 따는 일도 모두가 따분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덕분인지 전세(戰勢)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값진 물건들은 고사하고, 숟가락 한 개...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년시절의 사진이 없습니다. 초상의 일부를 이미 그 때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사진은 나와 인연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신문 사진이 뇌리 속을 스쳐 다시 자세히 보았습니다. <평화를 부르는 ‘자연대합창’ 155마일>이라는 제목 아래 괴뢰군파리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어린 멧돼지 형제가 정겨웠습니다. ‘용(龍)늪’의 끈끈이주걱이 ‘우아’하고,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튼 백로들의 찬란한 삶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의 유월의 모습은 너무도 서정적이었습니다. 정처 없는 피난의 여정이 시작되면서 남으로 향한 무수한 발길이 스쳐간 역사의 현장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연에도 신록이 파도처럼 출렁거립니다. 북녘 땅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황야에서 한 많은 종명(終命)을 고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이슬처럼 사라진 그분들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정전협정상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각각 2㎞라고 규정된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 세월이 흐르는 동안 ‘DMZ’라는 약어는 분단의 상징으로서 군사분계선이나 휴전선이란 단어보다 더 많이 쓰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분단의 아픔 속에서 통일 염원 꽃피우는 희망의 땅, 양구군과 인제군에 걸쳐 있는 대암산의 용(龍)늪은 비무장지대와 접경지역에서 자연환경적으로 높은 관심과 보호를 받고 있는 곳입니다. 해발 120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넓이 315㏊, 둘레 1045m 규모입니다. 아쉽게도 작은 용늪은 이미 그 원형을 상실해 숲이 돼버렸고 현재 큰 용늪만 남아 있습니다. 2017 6월 7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조선로동당 위원장 김정은(金正恩)이 전날인 6월 6일 조선소년단 8차대회에 참석해 “소년단원들은 제국주의자들과 계급적 원수들을 미워하고, 언제나 혁명적 경각성을 높이며, 원수들이 덤벼든다면 용감하게 싸울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한의 6월 6일은 현충일(顯忠日)! 이틀 뒤, 지대함 순항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수발을 동해로 발사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5월 29일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스커드 계열 탄도미사일을 쏜 지 10일 만입니다. 미국의 전(前) 대통령 J. F.케네디는 “핵무기의 참화는 바람과 풀과 공포에 의하여 확산되어 대국이건 소국이건 부유한 나라건 가난한 나라건 동맹국이건 비동맹국이건 모두 파괴하고 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18년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顯忠日)입니다. 2017년 6월 6일의 북한 조선소년단 8차대회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남북정상회담 이후 세상이 바뀐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남북이 가깝게 보입니다. 남북은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습니다. 아직은...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倒何事不成)이라...우선 필자는 현충일에 원충원을 찾아갑니다. 여러분! 현충원에서 만나실래요? 우리는 6.25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김일성의 평양남새과학연구소와 북한의 ‘식의주(食衣住)’
[청로 이용웅 칼럼] 김일성의 평양남새과학연구소와 북한의 ‘식의주(食衣住)’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평양시 동편 대동강과 남강 남안(南岸)에 위치한 사동(寺洞)구역은 평양 교외에 있습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과 율리면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은 1946년 평양특별시 동구역에 편입되었고, 1958년 사동구역으로 개편 신설되었습니다. 사동구역은 '광공업'과 '근교농업' 등이 발달한 지역으로, 평양탄광기계공장, 종합주물공장, 사동도자기공장, 미림젖소농장, 미림관문발전소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장천동에 있는 평양남새과학연구소는 김일성이 '창설'해 주었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한의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을 보면 '남새'를 "무우, 배추, 아욱 따위의 심어서 가꾸는 나물."(752쪽)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1)>은 '남새'를 "부식물로 먹기 위하여 심어 가꾸는 밭작물 곧 ≪배추, 무우, 오이, 가지, 고추, 호박, 마늘, 파 같은것≫을 통털어 이르는 말. 잎남새, 열매남새, 뿌리남새가 있다. // ~를 심다. ~를 가꾸다. △ 겨울~, 고급~, 저장~, 줄기~, 풋~, 햇~, 뿌리~, 양념~, 얼갈이~, 열매~, 온실~, 잎~, 여름~, 봄~."(567쪽)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에선 '의식주'를 '식의주(食衣住)'라고 합니다. 뜻도 남한의 "사람 생활의 세 가지 요소인 옷과 음식과 집." 보다 넓은 의미, 즉 "먹고 입고 쓰고 사는것."(위 사전,1909쪽)이라고 합니다. 이 풀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집'을 '쓰고 사는 것'이라고 한 것과 '식(食)'이 먼저 나온 것입니다. 이 점만 가지고 북한에선 먹는 것이 삶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평양남새과학연구소가 북한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23)>은 김일성이 평양남새과학연구소를 '창설'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평양온실오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그가 "세계적 범위에서 남새자원을 수집하여 연구사업을 할수 있도록 그 체계까지 세워"(26쪽)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전은 연구소가 "새 품종 육성과 재배 기술을 연구 도입하여 수도는 물론 전국적 범위에서 남새생산을 과학기술적으로 하도록 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26쪽)고 자랑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육성'했다는 품종 중에서 '평양'이란 고유명사가 붙은 이름을 가진 품종을 살펴보면, 평양분홍(1958년 육성), 평양봄붉은무우(1972년), 평양배추2호(1974년), 평양여름풋배추(1977년), 평양온실오이(1977년), 평양단수박(1978년), 평양사철홍당무우(1978년), 평양사철오이(1978년), 평양세치홍당무우(1978년) 등입니다. "열매색이 분홍빛이 도는 도마도품종"(위 사전, 35쪽)이라는 '평양분홍'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1970년대에 '육성'된 품종들입니다. 평양시 룡성지역에 위치한 평양온실농장도 김일성이 "처음으로 세워주신 온실남새생산기지"(<조선대백과사전(23)>,79쪽)라고 합니다. 이 농장은 "24여 정보에 달하는 대규모의 자동화된 현대식온실남새생산기지로 됨으로써 수도시민들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남새(오이, 도마도, 고추, 쑥갓, 부루, 배추 등)를 겨울철에도 공급"(위 사전,80쪽)한답니다. 이쯤 되면 일부 평양시민들은 천재지변이 없는 한, 채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평양남새과학연구소가 "전국적 범위에서 남새생산을 과학기술적으로" 지도해 주고 있기 때문에 북한 전역에서 야채 걱정은 없다고 큰 소리 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옛날 일? 1990년대에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김정일은 '비공개 연설'에서 “천리마 제강연합기업소 쪽으로 가보니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길가에 쭉 늘어섰습니다. 다른 지방에 가보아도 어디에나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차 넘치고 있으며, 역전과 열차 칸에는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오늘 식량문제로 하여 무정부상태가 조성되고 있는데는 정무원을 비롯한 행정경제기관 일꾼들에게 책임이 있지만, 당일꾼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도, 시, 군당 일꾼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고파 일하러 나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풀 먹는 집짐승과 버섯 같은 것이라도 기르게 하면 식량보탬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다큐멘터리 김정일>,306쪽)라고 했답니다. "불난 끝은 있어도 물난 끝은 없다"고 했던가요. 계속되는 물난리와 가뭄(북한에선 가물이라고 함)에 '나랏님'인들 어찌 했겠습니까!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김일성∙김정일은 죽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2012년, 2015년에 평양남새과학연구소를 현지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었습니다. 그는 "연구소에서 다수확 품종의 남새(채소)종자를 새로 육종해 내는 성과를 이룩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연구 시찰 보도는 없었습니다. '육성'된 품종에 대한 홍보도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합니다. 유월의 첫날, 문득 엣 ‘보릿고개’가 떠올랐습니다.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서 농가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던 말입니다. 유의어(類義語)는 궁절(窮節),궁춘(窮春),맥령(麥嶺),춘궁2(春窮),춘궁기(春窮期),춘황(春荒),맥령기(麥嶺期)입니다. 지금 북한의 보통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고 있을까요? 지금 북한의 정계는 요동치고 있습니다. 고급관리가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는 등...결국 북한의 '식의주(食衣住)'가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힘들게 ‘보릿고개’를 넘고 있을 북한 주민들은? 동족의 아픔을 달래주는 일은 민족 화합의 첩경이며,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우리도 북한의 ‘보릿고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의 남·북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왜 미국·중국·소련 등과 씨름하고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미끈 유월”! 유수(流水)처럼 흘러갈 유월입니다. 미국의 작가 J.스타인벡은 “불만의 겨울”에서 “유월은 모든 가능성(可能性)을 배태(胚胎)하는 계절(季節)”이라고 했습니다. 하루 빨리 북한 경제가 회생되어서 북한 주민들의 식탁에 정말 깨끗한 남새가 풍성하게 오르고, '식의주'가 다시 '의식주'로 바뀌기를 기원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함경남도 원산 와 강원도 원산
[청로 이용웅] 함경남도 원산 와 강원도 원산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너는 지금 이 눈에서 멀고/ 명주조개 찾으러/ 몸 잠그고 헤엄치던 물들아/ 지금은 너무 아득한 저 하늘 밑/ 알알이 미끄러져 날리던 모래에/ 기대고 히살지으며 마음 부풀던 시절.”(모윤숙 / 해당화로 덮인 흰 모래벌) 위는 원산 명사십리(明沙十里)를 노래한 시(詩)입니다. ‘명사십리’는 남대천을 비롯한 내륙 하천들의 퇴적작용과 바다의 해수작용에 의해 형성된 갈마반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4㎞ 길이의 모래해변을 가리킵니다. 옛 기록에는 이 지역을 단순히 ‘연도(連島)’, 즉 ‘육계도(陸繫島)’라고만 표현하고 있을 뿐 사장(沙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며, ‘백사평포(白沙平鋪), 명사(鳴沙)’라는 표현만 눈에 띱니다. 여기서 백사평포라는 표현은 오늘날 비치(beach)에 해당하고, ‘명사(鳴砂)’는 모래알이 곱고 가늘기 때문에 맨발로 걸으면 발 아래에서 부드러운 마찰음이 들리기 때문에 지어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옛 기록에서는 명사(明砂)보다도 명사(鳴砂)를 더 많이 사용했으며, 근세에 들어오면서 ‘명사십리(鳴砂十里)’가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바뀐 것입니다. 원산이란 이름은 둥글게 생긴 산을 낀 고장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지명으로서, 후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둥글 원(圓)자가 소리가 같은 으뜸 원(元)자로 바뀌었습니다. 1895년 부군제를 실시하면서 함흥부(咸興府) 덕원군으로 개편되었고, 그 이듬해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함경남도 덕원군으로 되었습니다. 1912년에 덕원군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를 신설하고 관하에 여러 면을 두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원산부의 대부분 지역이 덕원군에 편입되었으며, 그 일부와 옛날 일본 거류지, 청나라 거류지 지역 등을 통합, 새로운 원산부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1943년에 덕원군이 폐지되면서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습니다. 1945년에 원산시로 개편되었습니다. 이곳이 함경남도 원산시였습니다. 1946년에 원산시가 소련군정 치하에서 강원도로 되었고, 도청 소재지가 된 이후 행정 구역이 계속 조정되면서 현재 행정구역은 38동과 15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원산은 강원도입니다. 지난 해, 한 남한 언론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원도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을 시찰했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김정은 동지께서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장을 현지지도하셨다"며 "건설장의 여러 곳을 돌아보시면서 공사 규모와 진척 정형, 자재와 설비 보장대책 등 건설 전반실태를 요해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김정일 사망 전, 북한 <로동신문>은 “위대한 사랑 길이 전하라, 항구문화도시의 밝은 불빛이여! 선군시대 또 하나의 선경을 펼친 원산시의 불장식을 보고”라는 기사를 게재했는데, 서두에서 “항구문화도시 원산시가 새 모습을 펼치였다. 《불의 도시》이다. 분명 이 아닌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다. 우아하고 신비한 불의 장막을 펼친 거리거리들, 불장식, 불조명으로 새롭게 단장된 아빠트들과 공공건물들, 봉사망들…산은 산대로 불산이고 불의 도시를 통채로 안고 출렁이는 바다는 말 그대로 불바다이다. 꿈 아닌 이 현실을 두고 불의 도시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다. 《불강원도》, 《강성도》! 평균해발높이가 1,000여m나 되는 태백산줄기가 동서를 막고 있어 산줄기를 넘지 못한 바다바람이 비가 되여 내리고 산마다 물이 많고 골마다 물줄기여서 《물강원도》라 불리웠던 이 땅, 우리 이제 격정과 환희의 붓을 들어 《물강원도》가 《불강원도》로 된 극적전환의 그 사연을 전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동신문>은 “60여년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아드님과 함께 시내를 바라보시며 어버이수령님의 뜻 깊은 발자취가 어려 있는 원산시를 잘 꾸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력사의 지점, 바로 여기서 시의 전경을 관망하는 우리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잊지 못할 그날 어머님의 눈가에 비쳐진 원산은 초라하고 기형적인 자그마한 시가지였다. 그러던 원산이 천지개벽하였다.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송도거리, 해안거리, 내원산거리, 개선거리가 건설되고 원산시를 병풍처럼 둘러막은 동명산에는 초고층살림집들이 즐비하게 일떠섰다.”고 했습니다. 또한 신문은 “천지개벽한 원산시의 희한한 밤풍경은 우리 장군님께서 선군시대와 더불어 펼쳐주신 또 하나의 사회주의선경이다. 도시의 불장식을 두고 최고급의 건축예술이라고 한다. 불장식된 밤의 원산이야말로 예술화된 리상적인 도시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어버이수령님의 사연 깊은 발자취가 찍혀있는 뜻 깊은 곳을 잘 꾸려야 한다시던 어머님의 념원이 어려 있는 땅 원산은 수령님께서 생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항구문화도시로 꾸리시려고 깊이 마음 쓰신 땅이였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북한 수장 김정은 위원장은 1982년에서 1984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출생연도도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출생지도 아버지 김정일은 백두혈통을 강조하며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했으나, 그는 원산 초대소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이 최근 강원도 항구도시 원산에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하는 등 특구로 지정해 국제적 휴양도시로 개발하는 것도 김정은 출생지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됩니다. 만일 김일성 부자에 이어 출생지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 북한은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핵실험장의 갱도와 부대시설을 폭파했습니다.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핵실험장 폐기를 34일 만에 이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북한 발 뉴스에는 풍계리와 함께 강원도 원산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숙소가 원산에 있었으며, 김정은 위원장이 원산 갈마 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시찰했기 때문입니다. 원산은 김 위원장과 그의 어머니 고용희씨가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이곳 개발은 북한 최고의 역점사업으로 꼽히고 있다고 합니다. 원산시를 중심으로 평양과 금강산 사이에는 관광-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함흥, 통천, 고성, 고산 등 인접 시, 군과 연결되는 도로망도 발달해 정기 버스가 운행되고 있는 곳도 있고, 원산에서 평양까지는 147km 입니다. 앞으로 여러 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강원도 원산]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우리의 압록강(鴨綠江)에 담겨있는 문학예술의 세계
[청로 이용웅 칼럼] 우리의 압록강(鴨綠江)에 담겨있는 문학예술의 세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백두산 천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 : 滿洲)과의 국경을 이루는 국제 하천으로, 혜산·중강진·만포·신의주 등을 거쳐 용암포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은 허천강·장진강·부전강·자성강·독로강·충만강·삼교천을 비롯하여 100㎞를 넘는 여러 하천들과 수많은 지류로 형성되어 있다. 이 강은 직선거리로는 400㎞정도이나 상류 쪽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2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강의 길이는 803.3㎞이고, 유역 면적은 3만 1,226㎢이며, 가항 거리는 698㎞이다."(남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압록강의 명칭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이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패수(浿水)·염난수(鹽難水)·마자수(馬訾水) 또는 청수(靑水) 등의 이름으로도 나온다. 부여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고구려에서는 청하(靑河)라고도 불리었다...그 외 아리나례강(阿利那禮江)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아리가 ‘태양’의 신령성(神靈性)을 나타내는 우리 고어에서 유래된 말일 것으로 보인다.”(남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압록강-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남쪽 비탈면에서 발원하여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면서 평안북도 신도군 신도읍에서 조선 서해로 흘러드는 강. 우리 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서 그 길이는 803.0㎞에 달한다. 류역 면적은 무려 64,739.8㎢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 나라에 속하는 류역 면적은 32,557,7㎢이다. 압록강은 량강도, 자강도, 평안북도의 18개 시, 군과 중국의 단동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지나 흐른다...압록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투쟁 업적을 담아 싣고 흐르는 력사의 강이다. 또한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동지와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일가분들의 혁명활동 사적이 어려 있는 뜻 깊은 강이다.”(북한<조선대백과사전>) 우리의 역사 속에서 ‘고구려(高句麗)’하면 ‘주몽(朱蒙)’입니다. 그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류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놀던 중 때마침 웬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알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의 말을 들었다고 드디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삼국유사/고구려조) 위 신화(神話) 속에서 류화는 어느 날 햇빛을 받아 잉태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 알이 주몽이었다고 합니다. 이 신화에 비친 압록강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 당대의 명문장가로 평가된 이제현(李齊賢),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맹(姜希孟) 등의 문학예술 속에서 도도히 흘러내렸습니다. 문헌기록으로는 <삼국유사> 외에도 <삼국사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왕운기(帝王韻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이 있으며, 중국의 역사 기록물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성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으니 하백(河伯)의 세 딸이 아름다웠는데 압록강 물결을 헤치고 나와 웅심 물가에서 놀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압록강은 특히 한시(漢詩)의 주제로 많이 읊어졌는데, 이제현의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한림을 보내며(送李翰林還朝)>, 권근(權近)의 <압록강을 건너다(渡鴨綠)>, 강희맹(姜希孟)의 <압록강을 지나면서(過鴨綠江)> 등이 있습니다. 이제현의 <송이한림환조(送李翰林還朝)>에 있는 “압록강 푸른 버들은 이별을 아끼지만 금원에 핀 꽃들은 좋은 놀이를 기다리리. 술잔 들며 언제 다시 회포를 논해볼까 백발인 내 신세를 산수간에 부치려네(鴨江柳暗牽離思 鼇禁花開待勝遊 樽酒論懷更何日 白頭身事付蒼洲)”....여기서 압록강은 이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조정으로 돌아가는 벗 이한림(李翰林)을 배웅하면서 읊은 시입니다. 중국으로 사신으로 가던 권근(權近)은 <도압록 渡鴨綠>에서 “쓸쓸하다. 변방 고을 나무나무 고목인데 한가닥 긴 강물 요양성 건너로세...”라고 읊었습니다. 일제강점기...시인 김형원(金炯元)의 <압록강반에서>, 유도순(劉道順)의 <압록강 뱃사공> 등의 시는 북간도로 쫒겨가는 백성들의 서글픔을 압록강 강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에 나온 민요 “이 서방 떠난 날 흐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김 서방 또 짐 꾸리네/ 삼천리 강토가 넓다드라만/ 오척의 신구도 둘 곳 없다네/ 넘기는 백두산 원한에 닳고/ 건너는 압록강 눈물에 부니/ 닥치는 요동벌 한숨차네”도 서러운 노래였습니다. 소설(小說)로는 황해도 해주 출생의 망명 작가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이후 월북한 김만선(金萬善)의 <압록강> 등이 있습니다. 물론 김정일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만든 4.15문학창작단에서 창작한 수령형상소설도 <동트는 압록강> 등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월간 잡지들인 <조선문학>, <청년문학>, <청년문학>, <조선예술>은 지속적으로 김일성의 업적과 압록강을 연계시킨 문학예술작품들이 게재(揭載) 했습니다. 압록강도 김일성과 주체사상의 선전선동 도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 압록강은 문학작품 속에서 신화적 상징적 배경으로,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한민족의 심성에 비추어진 민족의 강이 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 요녕(遼寧)성 단동(丹東)시와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를 잇는 신압록강대교의 개통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착공한 신압록강대교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공사를 마쳤지만, 개통이 미뤄져 왔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압록강은 새로운 강으로 거듭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타 지역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단동 신구지역, 조선 황금평, 위화도와 맞붙은 이곳에 신압록강대교가 있는데, 향후 이 대교가 개통되면 압록강이 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강은 김일성의 강도 아닌, 북한의 강도 아닌. ‘우리의 압록강(鴨綠江)’이 될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강원도 감자와 북한 선군팔경(先軍八景) “감자꽃 바다”
[청로 이용웅 칼럼] 강원도 감자와 북한 선군팔경(先軍八景) “감자꽃 바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소설가 박종화(朴鍾和.1901∼1981)는 “일찌기 강원도는...옛날엔 교통이 불편하던 산협(山峽) 지대...땅은 넓고 사람은 희소하니, 대문만 나서면 산이요 밭이다. 평야가 없으니 화곡(禾穀)을 심을 생각을 안한다. 쌀밥을 아니 먹으니 반찬도 그리 필요치 않다. 감자를 심고 콩을 거두어, 감자밥에 산채(山菜)를 씹으니 소금 한 가지면 그만이다.”(청산백운첩/靑山白雲帖)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옛 이야기이고, 작가의 주관적 시선(視線)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뭄과 홍수 등 극한상황이 겹치면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에 대한 욕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감자 등이 도입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감자는 1824~25년 경에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직접적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인삼 서리하러 넘어왔을 때 먹고 버티려고 감자를 심었던 게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감자가 조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감자를 심자, 정부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무산군의 수령 이형재가 감자를 보급하려 할 때도 감자를 심던 사람들이 벌 받을까봐 시치미를 떼며 씨감자를 주지 않아, 많은 양의 소금과 교환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입되어 감자는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는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청나라 심마니가 조선 국경에 몰래 침입하였다가 재배가 손쉬운 감자를 산중에서 재배했는데, 그들이 떠난 후 감자가 그대로 자라게 되고 번식력이 높아서 식량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무산지방의 수령은 소금을 내걸고 감자의 전파에 힘써서 각지에 전파시켰고, 양주, 철원, 원주 등지에서 구황작물로서 한 몫을 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강원도 감자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입니다. 1920년경 독일에서 들여온 신품종 감자가 강원도 난곡 농장에서 재배되었고, 이것이 화전민에게 퍼져 강원도의 주요 산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무산지방의 감자’입니다. 무산군(茂山郡)은 함경북도 중부에 있는 군(郡)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형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을 세워 크게 기념하는 무산지구전투’는 1939년 김일성의 항일 부대가 현재의 대홍단군 지역인 무산군으로 진격해 들어와 군사 작전을 벌인 사건이었습니다. 현재의 무산군의 범위는 1952년의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서쪽의 백두산·마천령산맥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군이었습니다. 현재의 무산군은 대홍단군·백암군·삼지연군 동부(량강도)의 범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감자꽃 바다”의 ’대홍단군(大紅端郡)은 현재 량강도(兩江道)입니다. 1998년 이전까지 북한에서 ‘밭곡식의 왕’은 옥수수였습니다. 1956년 김일성의 지시로 재배하기 시작한 옥수수는 주체농법인 밀식재배의 대표적인 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료가 부족한 북한의 현실을 감안하면 옥수수는 밀식재배로 생산량 증가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시작한 옥수수 재배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식량난과 대량 탈북으로 이어지는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 김정일이 옥수수 재배에 따른 문제점을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택한 것은 감자였습니다. 그는 그해 10월 량강도 대홍단군을 찾아 감자를 ‘밭곡식의 왕’ 이라고 말하면서 감자의 증산을 독려, 대체작물이 옥수수에서 감자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의 월간 홍보잡지 <조선>은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조선의 최북단에 있는 량강도 대홍단군은 김일성주석께서 항일무장투쟁을 벌리신 곳이며, 이곳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여러차례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신 유서 깊은 곳이다.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대홍단을 감자 명산지로 만드실 원대한 구상을 안고 여러 차례 현지지도하시면서 감자농사혁명을 일으키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이곳의 넓은 대지, 대홍단벌에 감자밭이 펼쳐지게 되였으며 감자꽃들이 피어나는 6~7월이면 무연한 흰 꽃이 피여나 황홀경을 이룬다. 그 감자꽃 바다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엄혹한 시련을 겪던 지난 세기 90년대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던 김정일...그이께 최대의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뜻 깊은 혁명 사적이 깃들어있는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를 두고 우리 인민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의 길에서 이룩된 사회주의 선경, 《선군8경》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작문(?)’! 다음은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를 소재로 한 시(詩) 중 하나인 ‘가사’ <감자꽃 바다에서 떠날줄 모르네>(리광 씀)이다. “대홍단벌 아득히 감자꽃 피여났네/ 처녀총각 다가서며 그 향기 맡아보네/ 겨우내 땀흘린 그 보람 꽃에 어렸나/ 감자꽃 잎새마다 입술을 대여보네/ 아 제대군인 총각과 대홍단벌 처녀/ 감자꽃 바다에서 떠날줄 모르네// 하이얀 감자꽃 그 빛갈 담아선가/ 청춘의 마음도 티없이 깨끗해/ 감자꽃 진한 향기 가슴에 안아선가/ 처녀총각 터치는 진정도 뜨거워라/ 아 제대군인 총각과 대홍단벌 처녀/ 감자꽃 바다에서...” ‘꽃’...‘바다’...얼마나 많은 詩人들이 인간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낱말인가요! 그 시인들의 언어를 보면, “달에게 그 가슴을 드러내 놓은 바다”, “하늘 밑에서 반짝이며 유동하는 바다”, “활짝 편 부채 그대로의 바다”, “태양과 죽음의 바다”...이처럼 아름답거나 의미가 깊은 ‘바다’라는 언어에 “꽃”을 합성하면 더 수려한 언어가 됩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 ‘꽃바다’에다 ‘감자’를 더했습니다. 위대한 시인들도 쉽게 찾지 못할 언어입니다. 이것이 ‘선군8경’ 중 하나! 비록 선경(仙境)은 아니지만, 곧 그 바다에는 감자꽃이 핍니다. 잘 자라서 북한 백성들의 식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