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④황해북도 “범안리의 선경(仙境)”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④황해북도 “범안리의 선경(仙境)”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길에 [이북5도위원회]가 있습니다. 이 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행정구역상의 도(道)로서 아직 수복되지 아니한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를 포함한 경기도와 강원도의 미수복 시. 군을 관할하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산하의 정부기관’입니다. 위와 동일한 지역을 북한은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라고 칭합니다. 대한민국 지도에 없는 도(道)는 자강도. 량강도. 황해남도, 황해북도입니다. 같은 황해도인데...북한은 1954년 시월에 남북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옛날 임꺽정의 근거지인 구월산, 룡연반도의 몽금포 등이 있는 황해남도는 산지(山地)가 적고, 평야와 구릉지대가 많아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필자가 공식 방문했던 신천군(信川郡)은 ‘신천팔경(信川八景)’이 있어 아름다운 농촌처럼 보였습니다. 논밭이 비옥해 보였고, 농기구수리소도 수준 이하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수저수지 등 농업생산에 중요한 세 걔의 저수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해북도의 북동부는 상대적으로 높은 산악지대이지만 도(道) 면적의 91%가 500m 이하의 저지역입니다. 상대적으로 남도 보다는 농업 환경이 나쁘지만, 서흥군(瑞興郡)의 경우는 산림면적이 73%인데, 서흥호(瑞興湖)가 있어 농공업 등에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이 곳은 ‘선군팔경(先軍八景“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북한의 월간 <조선> 2005년 4월호는 “한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 같기도 하고 또 기러기를 많이 볼 수 있다고도 하여 범안리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황해북도 서흥군의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다. 아담하고 산뜻한 기와집들과 문화후생시설들, 마을 뒤산의 무성한 과일나무숲, 꽃들이 만발한 마을길과 서흥강을 가로막으며 솟아오른 발전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산촌의 풍치이다. 원래 범안리는 산기슭의 자그마한 마을로서 산간벽지로 불리워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세기 90년대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 이곳 일군들은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무질서하게 널려져있던 낡은 집들을 털어버리고 100여동의 문화주택과 30여동의 문화후생시설, 양어장과 발전소를 일떠세워 범안리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2001년 7월 11일 이른 새벽 범안리를 찾아주신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아름다운 마을풍경을 부감하시며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고, 바로 여기가 로동당시대의 무릉도원이고 사회주의선경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가장 준엄하고 시련에 찼던 시기에 범안리의 새 풍경이 마련된것으로 하여 이곳은 오늘 두리 조선에서 선군8경의 하나로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년 뒤, “범안리의 선경”을 소개한 <조선>(6월호)에는 ‘선군팔경’이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2005년의 기사와 거의 같은 내용인데, ‘선군팔경’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지금 김정은 시대에도 “先軍타령”은 여전한데 왜 그랬을까요?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은 “범안리의 새 전설”이라는 북한 시(詩)입니다. “호수같이 펼쳐졌소 바둑무늬양어장 백학마냥 나래폈소 새 기와집 처마들/ 장군님 가꿔주신 선군8경 범안리 찾아주신 그날부터 늘어나는 새 전설/ 그이께서 오신 새벽 하늘걷힌 이야기 칠색송어 주신 날에 샘통 터진 이야기/ 범안리 이름대로 기러기떼 내리고 서해의 갈매기도 양어바다 구경왔소/ 전설속의 무릉도원 그 뉘 본적 없어도 그이께서 펼쳐주신 예가 바로 무릉도원/ 장군님 선군길은 천지개벽 천만리 강성대국 꽃피우는 새 전설의 천만리요” 고작 ‘100여동의 문화주택과 30여동의 문화후생시설, 양어장과 발전소’가 있는 ‘산간벽지’가 ‘선경’이 된 것은 2001년에 김정일이 범안리를 찾은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남한에서는“선경(仙境)”을 “1.신선이 산다는 곳. 2.경치가 좋고 그윽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은 “선경(仙境)”을 “전설에서, 신선이 산다고 하는 경치가 아름답고 그윽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황해북도의 ‘선경’은 어불성설(語不成說)! 과거 선군정치를 표방한 김정일 시대부터 총정치국장은 실질적인 군 서열 1위이자 실질적으로 권력 서열 2위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최용해에 의해 권력 서열 2위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북한 수장(首長) 김정은이 ‘선군’에서 ‘선당(先黨)’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킬 결심을 한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도 평가 절하하려는 불효자 김정은? 북한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청로 이용웅 칼럼]‘누비옷의 2017년 맑은 정신’과 <침향(針香)>의 6번째 작품전
[청로 이용웅 칼럼]‘누비옷의 2017년 맑은 정신’과 <침향(針香)>의 6번째 작품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白衲淸賓 黑頭陀人; 누비옷의 맑은 정신을 한 흑두타라는 사람은/ 辭國師己 便入三神; 국사 되기를 사양하고 삼신산으로 들어갔다./ 觀磎路 捿一法身; 쌍계의 길을 들여다보니 한 법신이 머물며/ 每食松實 以度空春/ 늘 소나무 열매를 먹고 빈 봄을 보내면서/ 是何境界那; 아~ 아~하는 이는 무슨 경계인가?/ 頭流山色插天碧; 두류산 빛과 하늘이 푸르다.” 하동 쌍계사에 모셔진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의 진영(眞影)에 실린 영찬(影讚), 스님의 초상화를 보고 찬양하여 지은 글입니다. 혜소는 ‘남북국 시대 하동 지역에서 활동한 선종의 고승’으로, 804년(애장왕 5년) 당나라에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대사(神鑒大師)에게 출가하였으며, 이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공부하다 830년(흥덕왕 5년) 귀국하여 상주와 지리산 등지에서 남종선(南宗禪)과 범패 음악을 널리 전하여 선종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비록 스님의 영찬을 지은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진감스님의 행장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스님의 삶을 함축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 영찬 속에서 “白衲淸賓 ; 누비옷의 맑은 정신”은 혜소의 삶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 ‘전통 누비’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지음)을 보면 “누비 : 무명, 비단 따위를 안팎을 맞추어서 그 사이에 솜을 두고 줄을 죽죽 지게 박는 바느질.”, “누비옷 : 누비 옷감으로 지은 옷.”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비 민저고리”, “누비 바지”, “누비 저고리”, “누비 치마” 등도 있습니다.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사회과학출판사)을 보면 “누비 : 천을 겹으로 안팎을 맞추어서 줄이 죽죽 지게 박은 바느질 또는 그렇게 만든 것. 흔히 솜을 두고 박는다.”, “누비옷 : 누벼서 지은 옷. / 두툼한 누비옷을 입은 농군들이 식량 바리를 싣고 싸우는 인민군대들을 찾아 눈 쌓인 철령을 넘고 있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한보다는 설명이 자세합니다. 그리고 “누비 바지”, “누비 솜옷”, “누비 저고리” 등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누비 유물은 1974년 4월에 조선 시대 광주이씨(廣州李氏) 선산 묘에서 출토된 복식으로 솜을 이용한 전형적인 누비입니다. 이에 비해 1981년 6월 발견된 조선 시대 전주 이씨(全州 李氏) 탐릉군(耽陵君/1636~1731) 묘에서 출토된 누비옷 16점은 솜을 쓰지 않고 두 겹의 피륙만으로 누벼졌습니다. 21세기 들어, ‘누비옷’이 잘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에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 해평 윤씨(海平尹氏) 선산(先山에서 출토된 죽은 아이의 염습 의류로, 누벼서 지은 아기의 옷 때문입니다. 그 선산에서 ‘어린이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시신을 염할 때 사용되는 삼베 염포(殮布)나 이불을 대신하여 아기 누비옷을 사용하였습니다. 현재 남한에는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누비장’도 있고, 그가 지은 누비옷을 입고 해외를 순방한 대통령 부인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국내 언론방송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누비옷 장인(匠人)입니다. 그는 연구원을 설립해 후학도 많이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누비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발전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만 10년 전! 누비를 사랑하는 전통누비연구회 <침향(針香)> 회원들이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고 “첫번째 누비전‘을 2007년 12월 26일(수) 오후 2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열었습니다. 많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정 의정 회장은 "자랑스러운 회원들"을 강조하면서 회원 모두가 하나 되어 바늘의 향기를 온 누리에 전하겠다고 소신을 피력했습니다. 침향(針香)의 첫번째 누비전은 12월 31일(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뒤, <침향> 가족들은 착실하게 창작 활동을 해왔습니다. 정 회장이 지은 옷을 입고 여러 차례 해외를 순방한 입법부 수장의 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방송은 물론 회원들도 잘 몰랐을 정도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침향> 공방에서 일본인 제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한·일 문화 교류도 활발히 했습니다. 올해는 일본 니카타, 교토 등지의 문화단체와 예술인들과의 상호 방문을 통해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시즈오카의 나오미 씨는 수시로 한국을 방문해 누비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 십년 뒤!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전통누비연구회 <침향> 회원들은 “여섯 번째 작품전‘을 2017년 12월 6일(수) 오후 2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개최합니다. 정 의정 회장은 “꼬마전구들이 가로수를 친친 감는 철이 왔습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볼 수는 있어도 돌아가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여섯 번 째 침향 문을 열어볼까 합니다. 부디 오셔서 격려와 칭찬 많이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초대의 글로 “여섯 번 째 작품전 침향”을 알렸습니다. <침향>의 여섯 번째 작품전은 12월 12일(화)까지 계속됩니다. <침향>은 2018년 5월에 니카타에서 한·일 합동 전시회를 여는 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전통누비연구회 <침향(針香)>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청로 이용웅 칼럼]“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와 김정은의 친필(親筆)
[청로 이용웅 칼럼]“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와 김정은의 친필(親筆)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1월 29일 새벽 북한이 평안남도 평성 일대에서 동해 위로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관련해서, 김정은이 이를 직접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친필 서명이 공개됐습니다. 북한이 중대발표를 예고한 29일 낮 <조선중앙TV>는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진은 김정은 ‘로동당 위원장’의 화성-15형 미사일 발사 친필 명령서입니다.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로케트<<화성-15>>형 시험발사준비를 끝낸 정형보고에 "시험발사 승인한다. 11월 29일 새벽에 단행! 당과 조국을 위하여 용감히 쏘라" 라고 썼습니다. 김정은의 친필입니다.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은 “친필(親筆)”을 “친히 쓴 글이나 글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필비(親筆碑)”는 “백두산 3대 장군이 친히 쓰신 필적을 그대로 새겨 세운 비.”라고 했습니다. 친필비 글씨는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숙· 김정일’, 김정은의 세 직계가족에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웃기는(?) 풀이는 북한 <로동신문> 2001년 4월 29일字 기사 “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김금선)와 유관합니다. 필자는 김정일이 “오늘 우리 서예는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인민들의 혁명적인 사상감정과 높은 뜻을 반영하고 있으며 필치도 달라지고 서체도 새로워 졌다.”고 전제하고, ‘인류 서예사에는 탁월한 서예적재능으로 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서법을 형성하고 거기에 자기의 이름이나 호를 붙여 서체를 명명한 예(例)’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 자기 시대의 걸출한 위인의 필체를 칭송하고 만대에 길이 빛내이려는 당대 인민의 한결 같은 념원과 의사를 담아 위인의 필체를 뜻 깊게 명명한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이번에 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를 뜻 깊게 명명함으로써 백두산3대장군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만대에 길이 빛내이고 주체서예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세 명필체의 주인공은 북녘땅의 초대 독재자 김일성과 그의 부인 김정숙, 그리고 독재 계승자 김정일 입니다. 이 셋의 글씨는 누가 봐도 악필(惡筆)입니다. 북한은“서예(書藝)”를 “글씨예술. 일정한 뜻을 가진 글자나 글귀를 조형적으로 써서 인간의 사상감정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조형예술의 한 형태”라고 하면서, 악필을 명필(名筆)로 호도(糊塗)한 것입니다. 다음은“백두산3대장군의 명필체”내용입니다. “《태양서체》 주체의 영원한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은 인류서예사에 전무후무한 만고의 명필대가, 서예의 거장이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불면불휴의 혁명활동을 벌리시면서 새형의 혁명적서예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데서 지침으로 되는 독창적인 사상을 밝혀 주시고 몸소 주체서예의 본보기를 마련하시였다. 《태양서체》는 인류서예 사상 처음으로 주체사상으로 일관된 심오한 철학적내용과 기념비적성격을 가진 위대한 서예의 절정이다. 또한 주체의 서풍으로 일관되였으며 힘 있고 굳세며 활달한 명필체이다. 그리고 글씨구성이 완벽하게 조형화되고 글의 뜻과 내용을 선명하고 감명 깊게 형상하는 명필체이다. 《태양서체》는 이처럼 인류서예사에 있어 본적이 없는 걸출하고 독창적이며 완벽한 명필체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친필서체-《태양서체》는 우리 민족의 국보이며 만년유산이다.” “《백두산서체》 위인의 필체에는 위인의 풍모와 기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천재중의 천재, 장군 중의 장군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명필체에는 그이께서 지니신 백두의 슬기와 기상이 그대로 차넘친다. 《백두산서체》는 그 시작으로부터 끝날 때까지 중단함이 없이 주옥 같은 명제와 명문장, 명문구로 일관하게 필을 달리는 일필휘지의 절정이다. 거대한 바위들을 련이어 옮겨놓은듯 한 특대형의 글자들과 그 글자들이 이루는 하나하나의 글줄,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린 거대한 필봉으로 천연바위의 절벽이 깊이 패이도록 억세인 힘을 가한 듯이 시원스럽게 그어 진 획들의 기묘한 필압, 준마의 나는듯 한 기상이 어려 있는 박력 있는 속도감, 정녕 그 어떤 조건에서도 전진을 멈추지 않고 통이 크게 작전하고 실천하는 장군의 배짱과 담력, 군사지력과 령군술이 그대로 비껴 있다. 위대한 장군님의 친필서체-《백두산서체》는 그 조형성과 생활력으로 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전 세계적 범위에서 폭풍과 같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해발서체》 위대한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동지의 높은 혁명정신과 숭고한 념원은 그이께서 남기신 구호문헌글발들에 그대로 어려 있다. 《백두산에 장수별 떴다 백두산 장수별 삼천리를 비친다.》, 《조선청년들, 속히 달려 나와서 항일전에 힘 있게 참가하자.》와 같은 글발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심을 지니신 위대한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동지께서만이 쓰실수 있는 표현이며 생동한 화폭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세로형식으로 글자들을 배렬하시여 키높이 자란 나무의 모양새와 잘 어울리게 쓰시였다. 구호나무의 긴 부분을 차지하는 전반필체는 한자세에서 쓰신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다. 글씨규격에 따르는 글줄 및 글자배렬, 글자크기와 획의 굵기, 모든 글자들의 모양새와 같은 조형적요소들의 완벽한 형상. 참으로 위대한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동지께서 백두산밀영과 청봉숙영지에 남기신 구호문헌글씨들은 우리 인민들에게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과 조국광복의 서광을 안겨 주는 위대한 해발로 영원한 빛을 뿌리고 있다.” 서예 역사 뿐 만 아니라 인류 역사 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개발새발’ 쓴 글씨도 명필, ‘갈매기’ 글씨도 명필, 할아버지 김일성 글씨도 명필, 할머니 김정숙 글씨도 명필, 아버지 김정일 글씨도 명필! 그럼 김정은의 필체는? 악필이 분명합니다. 그의 글씨를‘명필체’라고 하고, 《미사일서체》나 《평성서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 그는 악필 하나 써놓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다. 얌전히 앉아 글씨 공부나 하면 좋으련만.
[청로 이용웅 칼럼]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날
[청로 이용웅 칼럼]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교정(校庭)에는 부형(父兄)이나 모자(母子)로 보이는 이들이 서성대는 풍경이 금년 역시 적지 않다. 60의 노친(老親)이 보면, 40의 아들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니 장정(壯丁)이 다 된 자식이지만 후견을 하러 나온 심정은 짐작이 간다. 지방 출신의 수험생은 좀처럼 그렇지도 못할 것이고 보면, 선배들의 격문(格文)이나마 더욱 반갑기도 할 것이다.”- 언론인 천관우(千寬宇/1925~1991)가 <신세시기(新歲時記)>에서 1990년대 이전의 수험장을 묘사한 글입니다. 그리고 ‘수능’, 대학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試驗) 시대가 이어집니다. 1994학년도부터 대한민국의 대학 입학 평가에 도입된 시험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수능’이라고 부릅니다. 무조건 암기해야만 하는 문제점과 통합적인 사고력을 개선하기 도입된 ‘수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기존 수능제도 자체에 대한 대수술을 해야만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왜 일까요? 프랑스의 대학입시 시험 ‘바깔로레아(Baccalaureat)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창의력과 논리성을 지우게 되는 제도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육제도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입시제도 때문에 울고 웃지 않습니다. 수험생들도 최선을 다하면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그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최선을 다한 수험생들 중에는 그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는 입시정책 그리고 교육행정가로 변신한 정치꾼들의 교육정책 등이 참교육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수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해마다 수능 한파를 유행시켰던 추운 날씨 뿐 아니라 지진이 발생하여 총체적 난국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수능’은 8시 40분 ‘국어’를 시작으로 아무 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명한 신세대들은 지금 이 시각에 열정을 다 쏟고 있습니다. 신세대들이 수능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악몽을 막아준다는 드림캐쳐(dreamcatcher) 등 가능한 당사자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는 재치 있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시험에 대한 압박감보다는 청소년기를 마감하고 성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어 하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수능’ 전후 펼쳐지는 각종 이벤트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부산·경남의 일부 학교에서는 현대식 제사인 수능대박기원고사를 지냈는데...‘수능 응원제·수능 기원제·감사 기원 미사·고3 수험생을 위한 기도·촛불 기원제·대입 고사 전원 합격 기원제·수능 대박 기원 촛불 행사·수능 대박 기원 점등식·수험생을 위한 사랑의 콘서트’ 등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오늘 시험은 5교시가 ‘제2외국어/한문’으로, 오후 5시 40분에 종을 칩니다. 이번 2018년 수능시험에 응시한 60만 명의 학생들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후회 없이 시험장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60만 모두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선사하고 싶습니다. 이 말은 <맹자>의 상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울 만큼 넓고 커서 어떠한 일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당당한 기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국민들이 했으면 하는 일은 걱정이 태산(泰山)인 수험생 가족들에게 칭찬과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수험생 모두에게도 행운(幸運)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지금 저의 외손자도 시험장에 있습니다. 품성이 ‘공자 맹자’인 이규민(서울고 3년)군을 비롯한 60만 수험생들이 최선을 다해주기를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스튜디오(오늘 강의 촬영)에서 빌고 또 빕니다.
[청로 이용웅 칼럼] 자강도 강계시와 강계정신, 그리고 김정일과 김정은
[청로 이용웅 칼럼] 자강도 강계시와 강계정신, 그리고 김정일과 김정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대한만국의 지도에는 북한의 행정구역인 량강도(兩江道)와 자강도(慈江道)가 없습니다. 량강도의 서쪽에 위치한 자강도의 동쪽은 함경남도, 남쪽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에 접해 있으며, 서쪽과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습니다. 1949년에 평안북도의 일부 지역과 함경남도의 장진군을 통합하여 새롭게 신설하면서 이 지역의 중심지역인 자성군(慈城郡)의 ‘자’와 강계군(江界郡)의 ‘강’자를 따서 ‘자강도’라고 명명했습니다. 자강도의 중심에는 강계가 있습니다. 강계시(江界市)는 자강도의 도청 소재지인데, 과거엔 지형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조선(1392년~1910년)시대에는 이곳이 군대 집합처였으며, 강계읍성은 압록강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강계시는 4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장자강이 흐릅니다. 장자강(將子江)은 독로강(禿魯江)을 개명한 이름이며, 자강도 룡림에서 발원하여 만포를 거쳐 위원에서 압록강에 합쳐집니다. ‘독로’는 강계의 옛 이름인데, 여진족의 말이어서 쓰지 않고, ‘장자(將子)’는 원래 있던 ‘장자산’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김정일이 한국전쟁 때 장자산에 피신했다고 혁명사적지로 기념하는 것과 유관하다는 후문(後聞)입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압록강의 지류인 장자강은 강계시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을 감돌아 흐른다. 물매가 급한 산악하천인 장자강은 오늘 전력생산기지일 뿐 아니라 관개용수와 공업용수, 음료수 그리고 떼길과 배길로도 리용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이곳을 ‘선군팔경(先軍八景’ 중 하나로 선정하는 해프닝을 벌렸습니다. 바로 “장자강의 불야성(不夜城)”입니다. 소형 발전소들을 건설해 놓고, 거기다가 선전선동용 ‘문화주택’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혀놓은 꾸며진 경치입니다. 강계는 미인(美人)이 많은 고장으로 알려졌지만, 국가가 정책적으로 중요시한 도시였습니다. 이 전략적 요새에도 유명한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1436년에 축조된 ‘남산을 포괄하고 장자강과 북천강의 절벽을 돌아 강계 중심부를 성 안에 아우르고 있는 평산성 형식의 석성’인 강계읍성, 강계읍성의 남장대인 망미정(국보 65호), 그리고 ‘관서8경(關西八景)’의 하나로 유명한 인풍루(국보 64호), 옛 강계부의 관청 건물였던 강계 아사(국보 66호)등 입니다. 그런데 김정일 시대에서 강계의 꽃은 ‘강계정신(江界精神)’ 입니다. ‘강계정신’은 1990년대 체제붕괴까지 거론되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요구했던 당대의 시대정신이자 경제회생의 기치를 의미하며, ‘고난의 행군’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강도가 가장 모범을 보였다 하여 도(道)의 대표 도시인 강계와 이곳 주민들의 투쟁정신을 하나로 묶어 ‘강계정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강계정신은 김정일이 1998년 1월 자강도 인민경제 여러 부문을 현지지도한 것을 계기로 고창(高唱)된 경제선동의 구호입니다. 경제난이 최악이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8년 1월 16∼21일,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강계시를 현지지도, 중소형발전소 등을 자체 건설해 경제난을 극복하고 있는 모습을 ’강계정신’으로 규정, 주민동원을 위한 구호로 ‘강계정신’을 제시했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강계를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로동신문>은 그 때를 “지난 세기 90년대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공장들이 숨죽고 불빛마저 꺼져 자강도의 어딜 가나 어둠이 가셔질 줄 몰랐다. 바로 이러한 때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자강도를 여러 차례 찾으시여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길을 밝혀주시고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용기를 안겨 주시였다. 하여 자강도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어났다.”고 하고, “오늘 장자강은 자기의 손으로 가꾼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락원의 밤을 지새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비껴 흐르는 것으로 하여 그 모습 더욱 유정하게 안겨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을 정보화하기 위해서는 정보기술발전계획을 똑똑히 세우고 이 사업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계속 튼튼히 틀어쥐고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가 “튼튼한 물질적 토대와 기술 력량이 갖추어진 자강도전자업무연구소는 발전전망이 대단히 크다고 하시면서 전체 종업원들이 꾸준히 노력하여 연구소를 끊임없이 번영하는 기업소로 전변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고 전했습니다. 독재자 김정일은 죽어가는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강계정신’을 내세웠고, 나름대로 경제 살리기에 애를 쓴 흔적이 강계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2012년 조선노동당 창건 67주년을 맞아 북한은 자강도 강계시에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나란히 건립했습니다. 2013년 7월 김정은 제1비서는 자강도 강계시의 강계트랙터공장 등을 방문했는데, 이 공장은 군수공장으로써 김일성 주석이 30차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3차례나 방문하였습니다. 이 공장에서 깅정은은 현지지도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고, ‘모란봉악단’의 파격적인 공연을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강계정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론 알겠지요! <로동신문>은 최근 북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전원회의 관련 공훈국가합창단, 모란봉악단, 왕재산예술단의 예술인들이 강계시에서 첫 공연을 진행했다며 보도했습니다. 김정은이 4년 만에 또 ‘쇼(?)’를 벌인 것입니다. 죽어가는 경제를 생각하면 강계정신을 계승하는 일을 해야 마땅한데...김정은은 2017년 7월 28일 자강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미사일 1발을 발사했습니다. 그가 핵(核)의 늪에서 나와, 백성을 더 이상 도탄(塗炭)에 빠뜨리지 말기 바랍니다.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③한드레벌의 지평선(地平線)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경팔경(先軍八景)-③한드레벌의 지평선(地平線)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의 월간 화보지 <조선> 2011년 5월호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함경북도 태천군에 끝간데 없이 펼쳐진 한드레벌. 해방(1945.8.15) 전 용드레질로 올망졸망한 뙈기논들에 웅뎅이의 물을 한드레씩 퍼서 고달프게 농사를 짓던 곳이여서 그 이름에도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져있다. 조선로동당의 웅대한 대자연개조구상에 따라 지난날 락후와 빈궁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이곳 한드레벌은 사회주의 땅답게 전변되였다...주체89(2000)년 1월 토지정리된 한드레벌을 찾으신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시며 정말 멋있다고, 천지개벽이 되였다고 하시면서 벌의 이름을 고치지 말고 그대로 두어 전변의 력사를 후대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고 뜻깊게 말씀하시였다.”(20~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 2011년의 기사에는 ‘선군8경’라는 한글도, ‘先軍八景’라는 한자(漢字)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월간지 <천리마> 2005년 5월호는 ‘아름다운 조국강산’이라는 연재물에서 “선군8경-한드레벌의 지평선”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를 살펴보면, “선군시대의 복받은 대지에 펼쳐진 천지개벽의 모습이 한가득 실려있는 한드레벌의 절경. 지난날 물 원천이 너무 없어 실개천의 밑바닥을 파헤치고 조금씩 고이는 물을 한드레박씩 길어다가 농사를 짓는 벌이라 하여 그 이름도 한드레벌”(83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위 기사는 “참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한 선군정치의 빛발아래 이 땅은 복 받은 대지로 천지개벽하였다. 땅도 달라지고 사람들도 달라졌다. 눈뿌리 아득하게 펼쳐진 한드레벌의 지평선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혁명 령도 밑에 강성대국으로 치달아오르는 우리 조국의 자랑스러운 참모습이다. 그렇다. 한드레벌에 펼쳐진 지평선의 절경에도 선군시대가 비껴있어 그리도 아름다운 내 조국의 땅으로, 복받은 대지에 울려가는 천지개벽의 찬가로 길이 전해 갈 것이다.”(83쪽)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지평선(地平線)’...“얕고 무거운 하늘이 두껑마냥/ 하염없는 권태에 시달려 앓는 마음 짓눌러/ 사방 온통 껴안은 지평선으로부터/ 밤보다도 더 슬픈 어둔 별을 쏟을 때.”...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의 문학세계에 존재하는 ‘지평선’, 그 지평선이 ‘선군8경’ 중 하나랍니다. ‘지평선’을 국가를 대표하는 절경(絶景)으로 선정한 나라는 북한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 2005년 5월호도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한드레벌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여기서는 “함경북도 태천군에 펼쳐진 일망무제한 한드레벌은 선군시대에 변모된 무수한 벌들중의 하나이다...벼바다 설레이는 청신한 가을날 아침해살이 안개속에 잠긴 벌판으로 퍼져나가 마치 하늘과 땅이 맞붙은 것과 같은 풍경은 황홀함의 절정을 이룬다...과거와 현재가 집약되여있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을 오늘 조선 인민은 선군8경의 하나로 자랑하고 있다.”(20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천리마>와 <조선>의 글을 읽고 나면, ‘한드레벌의 지평선’이 8경에 선정된 것은 ‘쌀’과 ‘기아(飢餓)’가 배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대평원으로 변모한 한드레벌의 희한한 전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2001년에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3)>에 기술된 “한드레벌에는 정리되기 전에 소가 들어 가 논을 갈수 없는 뙈기논을 비롯하여 무려 1만 3천 130여개의 올망졸망한 논들이 있었다. 토지 정리후 약 1만개의 뙈기논이 없어 지고 3천 200여개로 정리되였다. 논두렁의 길이는 무려 3천 600여리였으나 절반이상으로 줄어 들었다. 이처럼 큰 규모의 규격포전으로 정리됨으로써 한드레벌은 영농작업의 종합적기계화를 실현할수 있게 되었으며 태천군의 주요알곡생산지로 전변되였다.”(578쪽)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1년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가 펴낸 <조선중앙년감 주체90(2001)년>에는 “한드레벌의 새 전설”라는 글에서 주체89(2000)년 1월 24일 김정일이 “눈길을 헤치시고 태천군 은흥리의 한드레벌을 찾으시였다...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시기에 대자연개조사업에서 창조된 이런 기적은 력사에 빛날 경이적인 사변.”(75쪽)이라고 말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김정일이 텅빈 곡식 창고들을 채우기 위해 죽는 힘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드레벌’ 입니다. 북한의 <아동문학》주체 94(2005)년 3월호는 “한드레벌의 지평선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이룩하신 대자연개조업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는 력사의 중견자, 선군시대창조물”(54쪽)이라고 했습니다. 오죽이나 경제가 어려웠으면 한드레벌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현혹하는 선전선동(宣傳煽動)에 이용했을까요! 2017년 가을, 북한 당국이 최근 군부대 전체에 군량미를 바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양강도 소식통은 “지난 10월 초, 김정일이 표창을 했던 갑산군 주둔 43여단 직속 구분대 군인들이 밤에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 습격에 나섰다”면서 “지역 주민들이 지어놓은 강냉이를 싹쓸이해갔다”고 전했습니다. 이쯤 되면 ‘선군이고 나발이고 없는 것 같습니다. 김정은이 한드레벌을 아는지 모르는지...’핵‘ 소리에 헥헥대던 그가 요새 좀 잠잠한데...이 참에 함경북도 태천군에 납시면 어떨는지... 끝으로 한드레벌의 지평선을 소재로 한 시(詩) 중 하나인 “가사 한드레벌의 종달새”(양춘식 씀.<아동문학>주체94(2005)년 제3호, 39쪽)를 다음에 소개합니다.// “쪼롱쪼롱 빗쪼롱 고운 종달새/ 규격포전 한드레벌 지평선 좋아/ 봄들판에 봄맞이 가을 부르며/ 하늘에서 고운 목청 노래불러요/ 야하 선군8경/ 한드레벌 지평선 내 조국의 선경// 쪼롱쪼롱 빗쪼롱 고운 종달새/ 장군님의 그 사랑 가슴 뜨거워/ 한드레벌 지평선 날아예면서/ 선군조선 내 나라 노래 불러요/ 한드레벌 지평선 내 조국의 선경“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의 선군팔경(先軍八景)-②‘다박솔 초소의 설경(雪景)’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의 선군팔경(先軍八景)-②‘다박솔 초소의 설경(雪景)’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995년 원단(元旦), 당시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주민들에게 ‘신년사’ 대신 "피눈물 속에 1994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라는 메모 형식의 글을 보냈습니다. 이날 새벽. 김정일은 ‘금수산 기념궁전’을 참배하고, 가장 먼저 '다박솔 초소’를 방문했습니다. ‘다박솔 초소’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동해안의 포병부대(해군사령부 소속) 초소에 불과했습니다. 눈길을 헤쳐고 병사들을 만난 그는 “나는 오로지 군을 믿고 나아가겠다.”라는 취지의 담화를 나누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다박솔 초소 방문’을 본격적인 선군정치의 출발점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 없는 동해안의 초소에 불과했던 ‘다박솔 초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팔경’ 중 하나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지구촌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선정(選定)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멋지게(?) 이 ‘다박솔 초소’의 경치 중에서 설경(雪景)을 ‘팔경’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북한의 월간지<천리마> 2005년 2월호는 ‘아름다운 조국강산’이라는 연재물에서 "선군8경-다박솔 초소의 설경>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위대한 장군님께서 초소를 찾으셨던 그날의 설경은 참으로 장관이였다. 촘촘히 늘어선 다박솔에 밤새 내려앉은 서리꽃이 아침해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뿌리고있어 참으로 희한한 설경을 이루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초소의 절경을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이런 곳을 다박솔초소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시였다.”(87쪽)라고 적혀 있습니다. 위 기사는 “그렇다! 다박솔초소의 언덕은 결코 이 땅의 평범한 산길이 아니다. 다박솔초소의 언덕, 그 이름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펼치시는 선군정치와 함께 조국이 알고 인민이 알고 세계가 아는 선군의 산정으로 시대의 절정우에 높이 솟아오르게 된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 장군님 다박솔초소를 잊지 못하신다. 다박솔초소의 설경은 가장 엄혹했던 시기의 잊지못할 주체84(1995)년 양력 1월 1일과 함께 우리 군대와 인민의 마음속에 뜨겁게 자리잡은 선군8경의 하나로 영원히 빛나리라.”(87쪽)로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월간 화보지 <조선> 2005년 2월호도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다박솔초소의 설경”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김정일이 ‘다박솔초소’를 방문한 다음, 그가 “분계연선의 최전방지휘소와 눈덮인 고지, 파도 사나운 섬초소에 이르기까지 수만리 전선시찰의 길을 쉬임없이 걸으시였다. 이 길에서 그이께서는 인민군대를 혁명과 건설에서 선봉적 역할을 다해나가는 주력군으로, 제일기둥으로 키워 사회주의조국을 지키고 강성대국건설의 새 시대를 열어놓으시였다. 다박솔초소에 펼쳐지는 설경은 위대한 선군령장의 불멸의 자욱과 더불어 선군시대의 절경으로, 선군8경의 하나로 자랑높다.”(13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천리마>와 <조선>을 글을 읽고 나면, ‘선군8경’이 ‘절경(絶景)’이나 선경(仙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여산(廬山) 풍경에 헌 쪽박이라”(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당치 않다는 말)고 했는데...어쨌거나 북한은 이 ‘다박솔초소의 설경’을 ‘절경’으로 선전하느라 열심이었습니다. 그 선전 방법 중 하나가 문학작품 창작입니다. ‘다박솔’이 뭔지도 모를 것 같은 어린이가 <다박솔 초소야>라는 시(詩)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수많은 ‘다박솔 초소’를 소재로 한 작품 중 하나인 <다박솔의 눈송이>(<조선문학>주체94(2005)년 제1호, 6쪽)입니다. “눈송이 흰 눈송이/ 다박솔 솔잎에 흰 눈송이/ 조용히 깃드는 이 마음에/ 가득히 고여라 뜨거움이/ 이제는 그때로 부터 머나 멀리/ 세월은 흘렀어도/ 그 엄혹하던 력사의 그날을 못잊어/ 그날처럼 고요한 눈송이 흰눈송이/ 여기 그 어디에 서도 들려오는 듯 싶다/ 수령님의 한생어린 붉은기/ 장군님 마음속에 안으시고/ 여기에 먼저 찍으시던/ 그 발자국 소리가 다른 길은 우리에게 없기에/ 딴 목숨도 우리에게 없기에/ 설의 첫 인사도 병사들과 나누시며/ 스스럼없이 포가에 손을 얹으시고/ 하시던 그 말씀이/ 하늘가 저 멀리/ 그날에 말없이 바라보시던/ 장군님 뜨거우신 그 마음/ 지금도 그 가슴에 뜨거워/ 흰눈이 어찌 무겁다 하랴/ 흰눈이 어찌 뜨겁다 하랴/ 너는 그날에 벌써 오늘을 안았거니/ 너보다 뜨겁고 무거운것 있으랴/ 자랑스런 오늘의 선군이 시작된 못잊을/ 그날을 새기고 또 새기는/ 이 마음에 불탄다/ 그날의 붉은기런 듯/ 붉은 노을이 비껴간다 하늘땅에/ 눈송이 붉은 눈송이/ 다박솔 솔잎에 붉은 눈송이/ 준엄하던 지나간 그날을 되새겨주는/ 붉은 눈송이 붉은 눈송이” 본(本)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의 선군팔경(先軍八景)-②‘다박솔 초소의 설경(雪景)’에는 사진 4장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중 김정일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북한의 월간 <KOREA> 2005년 1월호 기사 “On the road of sungun Leadership Into an Invincible Army”의 사진 [사진 설명 : The leader Kim Jong Il gives on-the-spot guidance at the Tabaksol post 0n January 1, Juche 84(1995)]입니다. 그런데 ‘선군팔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늘의 수장(首長)이 이 사진을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나마 문학예술에 애정을 가졌던 김정일을 떠올리게 하는 ‘다박솔 초소의 설경’입니다. 김정은이 2018년 원단(元旦)에 ‘선군정치’의 요람(搖籃)을 찾지 않는다면? 북한의 선군정치는 ‘빛 좋은 개살구’?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군팔경(先軍八景)-①‘백두산의 해돋이’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선군팔경(先軍八景)-①‘백두산의 해돋이’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의 월간 <조선> 2004년 10월호는 “위대한 선군의 기치 따라 광명한 미래에로 전진해가는 조선에서 ‘선군8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백두산의 해돋이, 다박솔 초소의 설경, 철령의 진달래, 장자강의 불야성, 울림폭포의 메아리, 한드레 벌의 지평선,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 범안리의 선경이다.”(12쪽)라고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죽은 김정일의 머릿속에서 나온 선전선동용 팔경입니다. 그리고 2005년 1월에 발간된<조선>은 “새롭게 형상된 선군8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콤퓨터필림화 선군8경’을 창작했다고 하면서, 이 미술작품들은 “고난의 행군을 강성대국건설에로 이어놓으신 김정일 령도자의 선군혁명실록을 길이 전하는 국보적인 명화들로서 만난을 헤치고 조국번영의 일대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군대와 인민을 힘있게 고무추동하고있다.”(22쪽)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선군팔경’의 근저(根底)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조선인민군창작사의 “김일성상 계관인, 로력영웅, 인민예술가 박창섭, 인민예술가 리춘성, 인민예술가 리상문, 공훈예술가 최일봉, 최평훈, 류동수, 박명국, 리명수, 최진혁을 비롯한 창작가들”이 그려 제작된 ‘선군팔경’ 2장 중 첫 번째 그림을 “백두산정의 붉은 노을과 보석처럼 보이는 부석들, 다박솔초소의 특이한 설경과 까치들, 금방 피여난 철령의 철쭉꽃, 장자강반을 밝히는 불빛들”, 두 번째 그림을 “울림폭포에 비낀 칠색 령롱한 쌍무지개, 천지개벽한 한드레벌의 전경과 대홍단벌의 감자꽃바다, 범안리의 풍요한 대지 우에 날아예는 학들과 양어장의 물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팔경 중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경치는 ‘백두산의 해돋이’, 노을과 부석(浮石=화산의 용암이 갑자기 식어서 굳어진 돌)들 뿐입니다. 2004년 10월호 <조선>은 <선군8경 백두산의 해돋이>라는 기사의 서두(序頭)에서 “백두산(2,750m)은 우리 나라의 북부 량강도 삼지연군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이곳에서 두둥실 떠오르는 아침해는 그지없이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태양의 끝머리가 보여서부터 그 밑부분이 지평선우에 솟을때까지는 약 7분이다.”(12쪽)라고 했습니다. 제법 잘 이 절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끝은 “백두산은 김일성주석을 모시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를 비롯한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나라의 광복을 위하여 피어린 항일대전을 벌린 곳이며 김정일 령도자께서 탄생하시여 총포소리를 자장가소리처럼 들으시며 자라나신 유서깊은 곳이다. 하기에 조선인민은 백두산을 가리켜 민족의 넋이 깃들어있고 조선혁명의 뿌리가 내린 조종의 산, 혁명의 성산이라고 부른다. 오늘 백두산의 해돋이가 그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것은 이곳 자연이 펼치는 매혹과 함께 그가 담고 있는 심오한 의미로 하여 선군조선의 첫째가는 절경으로 되고있다.”(12~13쪽) 입니다. 결국 불함산(佛咸山)이라는 별칭을 가진 백두산(白頭山)에서 가장 ‘매혹’(?)적인 곳은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이고, 그 때문에 백두산이 “선군조선의 첫째 가는 절경”으로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12)>을 보면 "백두산밀영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 조선혁명의 중심적 령도 거점으로 꾸리시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중심지로 리용하신 비밀근거지이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탄생하신 혁명의 성지. 량강도 삼지연군 백두산기슭 소백수골 안의 대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백두산 밀영에는 이 일대의 봉우리들가운데서 주봉을 이루는 높이 1,798메터의 정일봉이 거연히 솟아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소백수골에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꾸려지게 된 때로부터 백두산밀영은 조선혁명의 본거지로, 중심적령도거점으로 되었다. 백두산 밀영은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동시에 심장부였으며 우리의 중핵적인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 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두산 밀영=김정일 출생지’ 입니다. '백두산 밀영'은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해서 '혁명의 성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거짓말’ 입니다. 그 때문에 북한 사람들의 백두산 관광은 대부분 거짓된 '성지 순례' 입니다. 지금도 백두산은 죽은 김정일을 우상화한 “백두광명성전설”로 덮혀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김정일 우상화 문학예술 작품’이 백두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북한 시인 리영백의 “백두밀영 고향집에 흰 눈이 내리네” 입니다. -“백두밀영 고향집에 눈이 내리네 / 송이송이 속삭이며 정답게 내리네 / 향도성 솟아 오른 그날을 못잊어 / 흰 눈송이 내려 앉네 귀틀집 지붕 우에 // 백두밀영 고향집에 눈이 내리네...”- 죽은 김정일이 ‘억지춘향’으로 만들어낸 ‘선군팔경’!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긍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의 아들 김정은은 아마 ‘억지팔경’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밀영 고향집 ,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 위치한 핵실험장, 평안북도 대관면 금창리의 핵시설, 철봉각이라고 불리는 평양 국사봉 김정은 벙커,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 예정지인 해군기지, ‘백두 형통’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김정은 본인의 출생지 등등(等等)을 제2의 ‘선군팔경’으로 부르고 싶을지도...필자의 망상(妄想)이 아니길!!!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백두산 땅 빼앗기에 재미 들린 중국인들! ‘백두밀영’ 외에는 백두산 구경도 못하는 북한 주민들! 조부와 부친이 ‘조종(祖宗)의 산’이라고 한 백두산을 잘 모르는(?) 북한의 수장(首長)! 그가 핵실험이 백두산 화산 폭발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선군팔경(先軍八景)-①백두산의 해돋이’를 자랑하면서 백두산을 자주 오른다면...비록 선전선동이었던 ‘해돋이’이지만 핵(核) 중독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자의 망상(妄想)이 아니길!!!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소설 <황진이>, 기생 ‘황진이’의 삶과 묘지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소설 <황진이>, 기생 ‘황진이’의 삶과 묘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진이는 자리에서 뛰쳐 일어 나 이금이를 붙안았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 생겼니?” 그제야 이금이는 무너지듯 진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은 걷잡을수 없는것이기는 해도 여름철의 마른 번개처럼 눈물이 없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흐느낌이였다. “아씨, 이제는 그이가 더는 못 견딜것 같다구 그래요.”, “못 견디다니…누가 그러디?”] (491쪽 / 띄어쓰기 등 북한말) 윗글은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가 2002년에 발간한 황석중의 장편소설 <황진이>의 한 대목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황석중은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손자이고, 북한의 저명한 국문학자 홍기문의 아들입니다. 작가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으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작가로 2004년 남한에서 제19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명월 황진이’! <브리테니커사전>의 “황진이‘를 인용, 그녀의 일생을 알아봅니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이고,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불리운 조선조 최고의 명기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으며,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습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靈柩)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습니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는데,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는 등...그녀에 대한 일화(逸話)는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 벽계수를 만났을 때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습니다. 그리고 긴 삶의 여정(旅程)!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해집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기생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황진이를 소개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성공단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던 2004년 조선중앙사진선전사가 펴낸 <고려의 옛수도 개성>이라는 책자는 황진이의 무덤까지 소개했습니다. 북한에선 정말 이례적인 사건(?)입니다. 왜냐구요?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말대사전>은 “기생(妓生)”을 “낡은 사회에서, 노래와 춤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비천한 계층의 여자”(616쪽)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북한은 “녀자”는 “녀성들은 사회발전에서 수레의 한쪽 바퀴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논다.”고 여성을 기만(欺瞞)! <고려의 옛수도 개성>은 “개성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오늘은 온 겨레의 통일열망이 굽이쳐 흐르는 도시로, 우리 인민의 행복이 넘쳐나는 력사문화도시로 더욱 빛나고 있다.”면서 ‘명월 황진이의 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진이>에 등장하는 서화담의 ‘신도비’로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자에는 <황진이가 머리채로 쓴 시>(“날아흩어 3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리는가 의심도다.)가 사진으로 담겨 있습니다. 북한의 <문학예술사전>은 ‘문학(文學)’을 설명하면서 “문학발전의 력사는 인민대중의 리해관계를 반영하는 진보적문학과 착취계급의 리해관계를 반영하는 반동적문학과의 투쟁의 력사였다.”라고 기술했습니다, 황석중의 <황진이>도, ‘황진이’ 이야기도 모두 ‘주체사상’이라는 틀 속에 있습니다. 진정한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북한 땅입니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청로 이용웅 칼럼] ‘군중미술’·‘민중미술’과 이강용 화백의 작품세계
[청로 이용웅 칼럼] ‘군중미술’·‘민중미술’과 이강용 화백의 작품세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조선대백과사전(18)>은 “주체사상의 기치 밑에 개척되고 자주시대 미술의 본보기로 개화발전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술의 자랑찬 력사는 주체미술의 혁명전통을 마련하여”주고 “혁명발전의 매 시기 미술이 나아갈 앞길을 뚜렷이 밝혀”주었으며 “미술가들을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 준 김일성과 김정일의 “뜨거운 사랑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력사”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술(美術)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북한 미술입니다. 이 같은 북한 미술에는 ’군중미술(People’s Art)‘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중예술, 군중음악, 군중문학 등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매년 발행되는 <조선중앙년감>을 보면 “당의 문학예술활동의 대중화방침이 더욱 철저히 관철됨으로써 각계층 근로자들 속에서 사상예술성이 높은 문학작품들이 수많이 창작되였으며 군중예술활동도 더 활발히 벌어졌다...이해에 군중예술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였다. 제1차 군인가족예술소조경연, 전국인민예술축전, 제27차군무자예술축전, 전국 청소년학생들의 독창, 독주, 독무경연, 전국웅변대회 등이 진행되였으며 이 과정에 인민군군인들과 각계층 근로자들의 문화적소양이 더욱 높아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군중예술“은 전문 예술인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창작 행위를 의미합니다. 가령 전시가 된 일반 탄광 근로자의 그림은 ’군중미술(People’s Art)‘의 하나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중미술(民衆美術/People’s Art)‘은 1980년대 중반 부산 지역에 등장한 리얼리즘 미술입니다. 민중미술은 5·18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자행된 광주 학살과 폭력에 저항하고, 기존 미술계의 고답적이고 추상적인 화풍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미술계의 새로운 사조(思潮)입니다. 이를 위해 민중미술가들은 역사와 민중을 형상화하는 리얼리즘 미술을 추구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五一八民主化運動記錄物)”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군사정권의 부당한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 기록물들로, 2011년 5월 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5.18’이 대한민국 민중미술의 시금석(試金石)이었습니다. 민중미술가들은 역사와 민중을 화폭에 끌어옴으로써 민중 미술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와 19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의 결성을 기점으로 조직적인 민중미술 운동이 전개되면서, 더 많은 미술인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강용’ 이었습니다. 그 무렵 ‘노동운동의 기지’였던 마창공단 지역에서 걸개그림과 깃발 등을 제작하다 인연을 맺은 서울미술공동체에 합류한 그는 1984년 서울로 상경해 첫 단체전에 참가, 다음 해 <시대정신 판화전>과 신군부의 대표적인 민중예술 탄압 사례로 꼽히는 <한국 미술 20대 힘전>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작품을 빼앗기고 항의하던 작가들이 구속되는 와중(渦中)에서 그는 남은 작품들을 모아 부산에 이어 마산에서 <해방 40년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 “붓을 노 삼아 ‘역사에서 우주로’ 민중미술 오디세이 40년” - ‘화업 40년’ 개인전 연 이강용 화백 화가는 물론 그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리기 위해서 살아왔고 그리기 위해서 살고 있으며 그리기 위해 살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천재 화가’란 뜻...“그는 역사라는 이름의 소멸과 승부한다. 그의 작업은 소멸의 역사에서 불멸의 꿈을 되짚은 회화적 복기다.” 최근 어느 일간지 기자가 쓴 화가 ‘이강용’의 이야기입니다. 화가 ‘이강용’, 그는 장인정신이 투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전업(專業)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를 천재작가라고 한 기자의 말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그의 삶과 창작세계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함부로 천재작가 운운하는 것은 모독이 아닐까요? 물론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끝없이 정진(精進)하고 있는 뛰어난 화가에게는 결코 찬사(讚辭)가 아닐 것입니다. ‘이강용’!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산의 한 다방에서 첫 개인전 연 뒤, 오로지 창작에만 매진했던 그! ‘민중미술가’라는 굴레를 쓰고도 고향의 토굴에서 작업에만 매달렸던 그! 경남 마산에서 출생해서 지금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인 그는 ‘민중미술의 사실주의적 시선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멸되는 존재의 운명에서 태어나는 영혼의 불길을 놓치지 않은 낭만주의자’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강용’은 환경(環境)과 미술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계속해 왔습니다. 또한 경남불교미술협회 창단에 앞장을 설 정도로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종교적 작품세계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산 미술계의 자존심인 서양화가 이강용 화백이 마산 정법사에서 10월 20일(금)부터 26일(목)까지 개인 작품전을 엽니다. 그는 전시회에서 '미륵-불화, 환경-풀꽃, 우리 고향-마산' 등을 주제로 오일파스텔로 구현한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서울에 버금가는 질(質) 높은 미전(美展)이라는 평가입니다. ‘이강용’의 작품을 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문득 피카소(Pablo.R.Picasso /1881~1973)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화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릴 수는 없다. 그는 다만 상실된 것, 망각된 것, 또한 오해된 것을 재발견 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