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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희 서양화가, 대한민국 파워리더‘문화예술공로’ 대상 수상영예
도문희 서양화가, 대한민국 파워리더‘문화예술공로’ 대상 수상영예
[선데이뉴스신문=장순배 기자]강렬한 표현주의적 색채로 알려진 도문희 서양화가가 지난 28일 대한민국 파워리더 대상식(대회장 조정식 FXRENT그룹 회장)에서 한국현대미술의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며 낭만적인 서정을 거친 표현주의로 독자적 예술세계를 창조하는 등 문화예술부문에 남달리 기여한 공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문화예술공로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한민국 파워리더 대상 시상식은 21세기 상생과 화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미래와 국가 발전을 위한 정치•경제•문화예술•언론 진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성원들의 귀감이 되는 파워리더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져, 국가 발전에 헌신하고 기여한 훌륭한 군・관・민의 파워리더들을 발굴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시상함으로써 파워리더들이 국가의 융성한 발전에 아낌없이 기여하고 보다 많은 국민들의 참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권위 있는 시상이다. 한편 대회조직위원장인 선데이뉴스신문 발행인 신민정은 이번 “‘대한민국 파워리더 대상’ 시상식을 통해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도 혁신적인 노력과 헌신으로 국가와 사회가 발전하는데 일조를 해 온 수상자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소감을 전하며, 더불어 “각자의 위치에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분들을 보면서 앞으로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 촛불이 되어 주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참조:사단법인 한국언론인 연합회와 비영리단체 한국언론연합회는 다른 단체입니다. 대한민국파워리더대상시상은 비영리단체 한국언론연합회에서 주최하였으며 사단법인 한국언론인 연합회와는 무관함을 알립니다.
대한민국 대표 서양화가인 박수근 화백의 작품 <소와 유동>과 마주하다.
대한민국 대표 서양화가인 박수근 화백의 작품 <소와 유동>과 마주하다.
[선데이뉴스=정성남 기자]제 기억으로는 88올림픽 이전으로 기억 합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의 청계천 8가는 헌 책방은 물론 온갖 물건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며 그나마 그 뿌리가 남아있는 것이 지금은 황학동 벼룩 시장인 것 같아요. 88 올림픽 전에 청계천 8가를 걷다 우연치 않게 눈에 들어 온 그림을 보고 저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제 고향은 상주인데 어릴 때 그 곳 농촌 모습을 보는 듯한 그림이 제 눈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예전 농촌은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곤 했는데, 저 역시 속세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 풀 먹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그림은 아마 제 어릴 때 추억이 담겨 있는 모습과 똑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연민의 정감을 느끼며 발길을 멈추었고 그림을 구매하였습니다. 속세 시절부터 본인도 서예와 미술을 공부하였던 터라 작가들의 작품 안에 심혈 어린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어 더 더욱 애착이 가는 그림 이었습니다. 이 후 출가하여 사찰에서 불심을 공부하고 정진하던 중 부처님과 같이 스스로 고행과 수행을 병행하고자 산 속 움막이나 동굴 등에서 오랫동안 벽면 수행을 하였기에, 본 그림은 제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아마 3~4년 전쯤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법당에서 동자들이 나와 그 동자들 전부가 황금 부처님으로 변하는 것 이였어요. 더 이상했던 것은 초파일 전날 양수리에 사시는 보살 분이 절에 와 하는 말이 스님 어제 꿈을 꾸었는데 “동자들이 법당 밑에서 나와서 순금으로 다 변했어요”라고 꿈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나와 똑 같은 꿈을 꾼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법당 밑에 무슨 이상 일이 있는지 궁금해져 그 날 불자와 함께 법당 밑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법당 밑에는 옛날 오래된 박스가 있었는데 그 박스를 꺼내 열어보니 예전 청계천에서 구입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구입 당시의 기억도 있었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 떠 오르기 시작했어요.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상한 마음에 그림을 사진 찍어 지인에게 보내줬더니 박수근 화백의 그림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그 지인에게 박수근이 누구냐는 질문을 했으며 온라인을 통한 검색을 하니 그 검색결과 내가 소장한 그림과 동일한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게 바로 <소와 유동>이었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 박수근의 소와 유동을 소장하고 있다는 법정스님을 양주시에서 만나 보았다 ♦ 본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언제 불문에 입문했는지요 법명은 법정이며 지금은 00에(본인의 요청에 의하여 지명을 밝히지 않음)시골집을 구해 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문에 들어갔다 나오고 다시 입문하는 등 아마 2~3번 정도 입문하고 나오고 하는 과정을 겪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인생에 대한 회의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 같아요. 즉, 물질이 아닌 그 모르는 어떤 존재에 대한 갈구심이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3년에 무작정 집을 가출 했습니다. 그 이 후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삭발하고 불문에 입문을 하게 된 것은 20대입니다. 그러다 혼자 문경의 산 꼭대기에 토굴을 찾아 그곳에서 기숙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제가 불문에 발을 디딘 최초의 역사입니다. ♦ 입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아주 다양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예전에 지금의 개인택시와 비슷한 한시택시가 있었는데 그 차를 운전했습니다. 당시 돈이 떨어지면 몇 푼 벌어서 다시 공부하고 하는 형태의 생계형과 학업용 운전이라는 직업이었지요. 그 외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잠시 잠깐 한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지만 지금 제 기억으로는 조금 전 말씀 드린 한시택시 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20대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게 되었어요. 이런 모든 것들은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기 위해 일을 한 것 입니다. 공부를 했지만 흔히들 이야기 하는 전공 등과는 거리가 먼 애기 입니다, 그때 어린 나이에 가출한 저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러니 학비나 생활비를 충당할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었습니다. ♦ 어린 시절에 가출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나 동기가 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때는 무조건 집이 싫었으니까요. 집이 싫고 학교에 가면 배울게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 집에 계신 아버지에게 배우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당시 한문으로 저는 편지를 쓰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 가서 뭘 배우겠어요. 건방진 얘기이지만 배울게 없었어요. 그리고 어른들에게 실망 한 것이 큰 이유일 수도 있었어요. 당시 동네 어른들에게 한문으로 이름을 쓰라고 하면 어른들은 쓰지 못하는 거에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이 아! "내가 여기 있다가는 바보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뭘 알고 나온 게 아니고 무조건 가출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냥 동경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딘가에 더 넓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곳이 있다는 막연한 동경심 때문에 미지의 세계를 그리며 실망감과 함께 이루어진 가출로 그때부터가 고행 아닌 고행이 된 것 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어려서부터 저는 한문을 좋아했어요. 국민학교 3학년 때 가출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때 가출에 대해서 지금도 후회를 하거나 하는 이런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후회할 짓을 애초 하지 않았습니다, 설상 했다 해도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고 살아가는 편 입니다. ♦ 취미나 특기는? 글쎄요 미대 다니는 학생이나 교수 등등을 제가 강의를 해 준 적이 있었어요. 동양화를 주로 가르치고 했어요. 그리고 글은 내 멋대로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때 본인의 글과 그림에 대한 작품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내 글과 그림들 입니다. 지금도 작품 아닌 활동이라고 할까요. 명상이나 면벽 수행 중 느낀 화두나 착상이 생각나면 수시로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중입니다. ♦ 그렇다면 글, 그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공부를 하면서 하기 시작했어요. 옛날에 창의 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직접 행을 해서 느낀 것, 즉, 가상적인 문법과 기승전결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글이나 그림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 하면 그건 이미 죽은 글과 그림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나 화가가 와서 이게 무슨 체냐고 물어볼 때도 있는데 저는 바로 대답을 해주곤 하는데 “법정 체”라고 말입니다, 내가 쓰면 법정체고 추사가 쓰면 추사체라고 말입니다. 결론은 정법과 사법은 없다고 봅니다. 결국 자신의 가슴과 영혼이 담겨있는 본인만의 독특한 것을 외부로 나타내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 합니다. 마음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 돌아본다면 정법과 사법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어떤 것에 기준해서 그 관에 묶인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모든 종교는 다 똑같아요. 법화경 속에 나오는 ‘一佛成(일불성)’ 법은 하나이지 두 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나일 뿐이고 너는 너일 뿐이지 그런 것이 불교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나 기독교의 예수가 말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이나 같은 것 입니다. 기독교가 좋으면 교회로 가고 불교가 좋으면 절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앉은 자리가 불편하면 그것은 사법이라고 결론지을 수가 있는 것으로 모든 종교는 차이가 아닌 말 그대로 종교로서 자신의 믿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 합니다. ♦ 그 동안 종교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다면 내 마음으로 좋아했던 분은 경봉 스님(작고)과 그 다음은 일흥(작고)스님인데 내 마음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람 들이며, 현재 살아 계신 분 중에는 법인스님을 좋아합니다 ♦ 근래에 들어오면서 가끔은 종단 등 불교계의 유명 스님들이나 단체가 정치적 개입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이점에 대한 생각은 그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공부를 하는 분들이 정치적 개입을 한다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면 정치적 개입을 한 적이 있지만 그런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으로 개입한 것으로, 스님은 스님다운 그 어떤 행(行)을 했을 때 스님이지 그럴지 않은 행(行)을 할 때는 스님이 아니지요. 가령 삭발 했다고 스님이라면 옷만 걸치면 다 사람이라는 말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기독교나 불교나 어느 종교던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것을 두고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논어 안언편을 보면 공자가 자신의 나라인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망명을 하고 1년이 지나면서 제나라의 왕 경공을 두 번째 만났을 때,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께서 대답한 말로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자식은 자식 다워야 한다는 말과 같이 종교인은 수행자로서 자기 본분에 맞는 종교인 다워야 맞는 것입니다. 오늘 만남에 대한 본질인 법정스님이 주장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옮겨보기로 한다. ♦ 이 그림과 관련하여 스님의 생각을 말씀 하신다면 나 자신도 묵화를 하지만 박수근화가의 “소와 유동”은 어린 시절에 흔히 있었던 소를 몰고 풀을 먹이는 어린 유동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자기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박수근 화가에 대한 평을 본다면 단조롭지만 독창적 화법으로 소박한 우리네 서민을 그려낸 작품에선 평면적인 질감, 어두운 색채를 통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화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들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그림의 연대 추정은 육이오 전쟁 이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6.25 전쟁 후 60년대의 소와 유동 그림은 그림에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소장한 이 그림은 그림 전체가 소 등에 힘이 있고 살아있는 느낌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당시 물감은 국내 것이 없었으며 있다면 일본 아니면 미국산 물감들을 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감정을 받아보았으나 감정불가라 합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지금 남아있거나 알려진 것은 거의 50년대 이 후 그림인데 박수근 화백이 그 이전에 그린 그림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감정 불가라는 것은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할 수가 없는데 아쉬운 것은 박수근화백 사인이나 직인이 없다는 겁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위작이라면 왜 사인이나 직인이 없겠는가 입니다, 위작일수록 진품을 모방하고자 직인이나 사인을 만들어 넣었을 것이니까요 지금 이 그림을 보면 표구화된 된 이 나무는 소나무 입니다, 아주 오래 된 소나무로서 천을 감고 그림을 싸기 위해 박은 못 역시 오랜 된 못입니다, 6호 사이즈인데 오래 시간이 지나며 그림의 일부가 들고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물감이 들고 일어나는 정도만 보아도 그림의 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일반 감정 전문가들이 감정을 해 주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마 이런 물건을 소지한 분들이거나 미술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 문화와 유산 보존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 합니다. ♦ 그렇다면 스님은 왜 이 그림에 대해 이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는지요? 저는 이 그림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많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유명 화가는 아니지만 글과 그림을 두루 섭렵한 사람 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제가 소지하고 있다고 제가 이 그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림이 점점 원형을 유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세월 법당 밑 박스에 오랜 시간을 방치해 놓았으며 그 이 후에도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림은 작가로서는 그리는 행복이 있으며 일반인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관 입니다. 아무리 좋은 그림도 유산적 가치가 있다는 보물도 보관의 실수로 인하여 훼손 된다면 그 보물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진품이라는 확신과 함께 누군가에 의해 전문적인 보관과 전시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저는 불제자로써 이 그림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정당한 대중의 평가를 받고 박수근 화백을 그리워하는 애호가들에게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유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문화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 그림을 보존 및 전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새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이 급 선무라고 생각하여 이 그림을 이제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박수근 화백은 단조롭지만 독창적 화법으로 소박한 우리네 서민을 그려낸 작품에선 평면적인 질감, 어두운 색채를 통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화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 중 ‘빨래터’는 김환기 ‘무제’가 경매에 나오기 전까지 국내 미술품 사상 최고액 (2007년, 45억 2,000만 원)을 기록했다. 강원도의 유복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를 여의며 회화에 대한 재능을 스스로 닦아나간 그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 빨래터에서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마주하고 나선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 결혼을 하였으며, 이 후 그의 많은 작품들은 한결 같이 한국의 가장 서민적인 삶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던 바, 행상을 나온 장사꾼들, 빨래하는 아낙네, 동네의 소녀와 소년들, 집으로 돌아가는 서민들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던 것으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은 오롯이 캔버스에 담아냈다. 그림으로 그리기에 서민들은 놀라운 주제는 아니었지만 훗날 박수근의 그림들은 “가장 한국인의 서민 정서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그림을 잘 모르는 기자는 법정스님이 보여준 박수근 화백의 <소와유동>과 그 외의 또 다른 그림, 그리고 법정스님의 자작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지금 미술업계의 혼란스러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거론되고 있다. 이 시점에 스님이 소지하고 있는 박수근 화백의 <소와유동>은 그 진위를 가름하고 알리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과연 어떤 방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만남이었다.
[선데이뉴스]인상파 서양화가 박의현 초대 전시회
[선데이뉴스]인상파 서양화가 박의현 초대 전시회
[선데이뉴스=칼럼니스트 로즈박]인상파서양화가 박의현초대전이 옥계해수욕장 솔향누리 한국여성수련원 전시장에서,8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1000호 대작 “옥계 앞바다 푸른 소나무"를 비롯해 크고 작은 작품 30여점이 전시 된다. 작가는 짙은 코발트빛으로 표현한 따뜻한 묵호항의 불빛과 포구의 모습, 인근 강릉과 삼척에 이르기 까지,옥계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의 사계절을 풍경으로 담아냈다 박 의현, 한국 화단에서 그는 빛과 색의 연금술사로 불린다. 시인이 글머리를 풀어내듯 그는 색을 통해 대상을 탐구하며 형태를 표현 한다. 그의 색은 늘 아련하다 첫사랑처럼 수줍다가 어느새 붉어 터지는 여인의 웃음처럼 농염하다. 일견 오쟁이 넓은 사내의 품새처럼 깊고 푸르다. 작품속의 그의 꽃들은 사랑의 빛이다 형 형의 색들로 번져가다가 입을 벌려 툭툭 웃음 짓는다. 언뜻 거칠어 보이는 붓 자욱은 어느새 빛의 뽀오얀 속살로, 꽃들을 아찔하게 얼 비친다. 그는 전업 작가다 30년을 오롯이 작가로 살아온 그가 추구 하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수줍음 많은 그의 성격처럼 보이지 않는 무수한 색의 시선으로 풍경 속에 낮게 스며들게 했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들은 그가 일관 되게 추구해온 자연의 풍경이 되어, 어떤 대상도 그의 화폭 속에서는 결코 포박되지 않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온유한 심성 속에서도 전란을 지나온, 강인한 삶의 여정이 여실히 들어나는 부분이다. 그는 이번전시를 통해 아무나 스스럼 없이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한다. 잘 말린 돌미역을 머리에 이고 장을 나서는 할머니가 잠시 별스러운 듯이 그의 그림을 바라보다 툴툴, 소금기를 털고 일어서고, 웃음소리에 파래 향기가 나는 아이들이 뛰놀다가 가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8월, 불 화덕 같은 태양아래 서 있는“옥계 앞바다 푸른 소나무 ” 그의 그림 앞 에 서보라 그의 작품들이 파도소리를 불러내고, 햇살을 머금으며 ,바람을 몰고 오는 장쾌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박의현작가프로필 개인전 및 부스5회 해외단체전 한-중 교류전30회이상/한-말레이시아 교류전/한-미 교류전/한-영 교류전 한-프랑스 교류전/한-일 교류전/한-그리스 교류전/한-홍콩 교류전 한-터키 교류전 국내전 대한민국미술축전/한국미술협회전/한중수교23주년교류전 강릉 미협전/강원 미협전/한국 전업미술작가 협회전/심미회전 국내 회원전 및 단체전120여회 현재 -(사)한국 전업작가 미술협회 강원지회장 -(사)한국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강원지부 -한국미술협회강릉지부 -심미회 -버즐아메리카(국제작가)
[S포토]W-ART SHOW 2014,  조명숙 서양화가 청마작품 전시
[S포토]W-ART SHOW 2014, 조명숙 서양화가 청마작품 전시
[선데이뉴스]조명숙 서양화가가 청마작품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호텔의 고급문화공간과 부스형식의 아트페어를 결합한 '융합형아트쇼' W-ART SHOW 2014가 오는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잠실동 롯데호텔월드 B1 사파이어 볼룸에서 열린다. 서양화가 조명숙화가는 갑오년(甲午年) 말의 해에 어울리는 청마 작품을 선보였다.푸른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놀며 꽃길을 힘차게 달리는 역동적인 작품이다. 청마는 유니콘을 의미하기도 하며 행운과 성공을 안겨준다 하여 조명숙 화가의 청마작품은 인기가 많다. 한편 국내·외 35개 컨템포러리 갤러리들이 참가해 회화, 판화, 조각, 사진 그리고 미디어아트 등 국제적인 수준의 작품들과 기획전시를 선보이는 이번 아트페어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수준 높은 컬렉터와 신진 컬렉터 발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서양화가 조명숙 씨는 단국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서양화과 석사 졸업 일본 동경동양미술학교 화화과 졸업 개인전 24회와 단체전 200회 참여 일본 동경신주구회화전 은상 대한민국예술대전 입선을 한바 있으며 작품소장으론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버스 한인교회, 컬럽버스 시청,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한인회 성민수양관 서초구청 서초구민회관 등지에 소장되어 있다.
인터뷰-서양화가 남궁혜영 개인전 ‘내면의 꽃’
인터뷰-서양화가 남궁혜영 개인전 ‘내면의 꽃’
[ 최혜빈 기자 ] 가을은 서양화가 남궁혜영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0월 1일부터 8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갤러리에서, 10월 10일부터 17일까지 과천시 가원미술관에서, 그리고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남궁화백의 작품 경향은 ‘섬으로부터 꽃에 이르는 길’ 또는 ‘꽃에서 섬으로 가는 길’로 표현할 수가 있겠다. 그녀는 자신의 ‘섬’ 이야기를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섬풍경은 마치 꿈속이나 오래전 기억에서 건져 올려진 환상이나 그리움의 조각들처럼 다분히 신비스럽고 비밀을 간직한 이미지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붓질로 좀더 깊고 풍부하게, 형상은 점차 단순화되어 표현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꽃’ 이야기를 “간절하게 표현하고 싶은 그 무엇에 조차 잠시 뒤로 하고, 무한함과 설레임으로 충만한 흰 화면 앞에서, 고단한 삶의 무게를 덜어줄 부드러운 휴식을 취하고자 했다“면서 ”결국 무엇을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보다는, 또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을 그리기보다는, 결코 꽃을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꽃의 형상을 띠게 되었고, 이내 꽃을 그린 결과가 되었을 뿐이다” 라고 이번 ‘내면의 꽃’ 개인전시회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평을 하고 있다. 남궁화백의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의 세계를 오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 내면의 신비한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작품의 세계는 곧 자신의 내면이자 외면에 대한 뜨거운 외침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그림을 쉬면서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세월을 보내기도 했던 남궁화백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되는 2006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포스터 작가로 선정된 우수작가로 미술계에 이슈가 되었다. 선정된 심사의 주된 평이 “서양화이면서도 동양적으로 느껴진다” 였다. 그녀의 작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신비한 환상 속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말처럼 “직선보다는 곡선이, 둔탁함보다는 가벼움에, 물맛이 느껴지는 겹쳐 칠한 색채를 즐기면서 어느새 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고 토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 가을이 깊어가는 광화문 지하철역 지하 보도에 자리잡은 ‘광화랑’에서 남궁혜영 서영화가의 작품을 바쁜 시간 중에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심의 스트레스를 잠시라도 치유할 수 있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궁혜영 개인전 섬-아름다운 환상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섬풍경은 마치 꿈속이나 오래전 기억에서 건져올려진 환상이나 그리움의 조각들처럼 다분히 신비스럽고 비밀을 간직한 이미지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붓질로 좀더 깊고 풍부하게, 형상은 점차 단순화되어 표현된다. 글 : 남궁혜영 작가노트 [2013. 10. 1 - 10. 8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갤러리7(T.02-580-1300, 서초동)] [2013. 10. 10 - 10. 17 가원미술관 (T.02-504-3730, 과천시 문원동)] 볼과 몸을 어루만져 나를 뉘어 줄 휴식 같은 무엇, 그것이 때론 사람이기보다 꽃이나 구름, 음악, 따스한 공기, 한 폭의 그림이라면 더 좋겠다. 하지만 내 속을 모르는 철없는 무엇이 아니라, 지나온 과거와 앞으로의 그리움까지 담아 날 보고 웃고, 끄덕이고 품어준다면 그 위로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궁혜영은 바로 이것을 그렸다. 위로와 휴식같은 꽃, 인식의 저편에 자리해 세상물정 모르는 꽃이 아니라 그녀의 속을 품어 아픈 듯 사랑하듯 위로하듯 내 앞에서 쉬어가라고 말하는 원숙한 꽃을 그렸다. 열정과 냉정, 불안과 우울의 총합, 보라색 꽃이 그녀 앞에서 잠시 쉬어가라 위로를 건넨다. 남궁혜영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거제도 중학교에서 잠시 미술교사 생활을 하다 결혼과 함께 그림을 접었다. 잠시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잠시가 23여 년이 걸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하룻밤도 편히 자지를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색과 그림으로 남궁혜영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확인해야 하는데, 결혼과 일상에 묻히니 가슴만 답답할 뿐 앞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마흔이 넘어서 어렵게 용기를 내어 다시 붓을 잡았고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6년 제 11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에 그녀의 새 그림이 선정되었다. 한지 부채 위에 검고 푸른 새가 날개짓을 하는 그림으로, 특히 푸른 빛과 둥근 선은 영화관계자들에게 서양화지만 동양적 느낌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무명의 그녀 그림이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에 등장한 것은 ‘낭중지추’, 즉 재능과 열정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아마도 대중과 바로 호흡하기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태생적 자신을 오래오래 두고 고민해보는 방식으로 세상과 만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아직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닿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최종 안착지는 ‘섬’. 그러나 이 섬을 그리는데 아직은 자신의 심상에만 품고 있을 뿐, 다만 그 섬으로 가는 길에서 누드와 새, 그리고 꽃을 휴식처럼 그리고 있다고 한다. 섬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는 남궁혜영이 평생을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또한 그녀의 섬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섬뿐만 아니라 그녀의 그림은 모두가 그렇다. 꽃 그림의 경우도 꽃을 직접 보고 그리거나 사진 혹은 스케치를 시작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꽃도 보고, 구름도 봐 두었다가 캔버스 앞에 앉는 순간, 자신의 심상으로 토해낸다. 세상 모든 것을 세월의 흐름에 맞춰 편하게 보고 있다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이가 그리는 꽃은 실제의 세상에는 없는 꽃이고 만질 수도 없는 꽃이다. -작가노트- 내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자 했을 때, 나의 지나온 삶에서 아주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내게 있어 가장 찬란하고, 자유롭고, 행복했던 시절, 그 기억의 한 지점에 아름다운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익숙한 도시와 가족으로부터 일탈된 한 여행자로서 마주친 낯선 섬 풍경에 관한 환상과 그리움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뜰악에 핀 꽃은 / 뿌리를 땅에 내리지도 않았고 꽃병에 꽂힌 꽃도 아니다 / 마치 눈을 깜빡였을 때 허공에 남아있는 잔상처럼 / 잔영 속을 부유하는 환영처럼 있다가도 없어질 듯 / 그렇게 덧없게 사라질 운명.... < 저작권자 ⓒ선데이뉴스신문=www.newssunday.co.kr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면 무단전재 & 재배포 가능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sundaynews1@hanmail.net>
서양화가 예송 김영근 '소나무 의인화'의 거장
서양화가 예송 김영근 '소나무 의인화'의 거장
예송 김영근화백은 40년의 화력을 쌓아온 대한민국의 대표작가이다. 일생동안 독학으로 창작생활을 해온 그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며 국내 최고의 작가로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평생을 함께한 작업, 그의 소나무 의인화는 삶의 희노애락을 녹이며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의인화 작가이다. 지난달 바이올렛갤러리의 초대기획전인 의인화작품전을 6월 26일부터 7월 9일까지 전시하였다. 김화백은 계속되는 찜통더위에 지쳐있는 팬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원한 여름을 보내라고 부채에 정성스럽게 순수작품을 그려 그림을 선물하였다. "많은 분들이 신청하였으나 작업시간이 오래걸려 열분을 선정하여 보내주어 아쉬다"며 미안해하였다. 그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작품생활한지 40여년 만에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고 한다.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 고향으로 터전을 옮긴 예송 김영근화백은 “초기에는 소나무를 사실적으로만 그렸다.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는데, 어느날 소나무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고 한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지나온 세월 동안 그는 ‘소나무화가’로 자리를 잡았다. 소나무를 사람의 형상으로 의인화시킨 에로스적인 작품은 김씨만의 독창적인 시각이며, 자연과 소나무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사랑은 김화백의 예술적 원동력이고 생명력이다. 김화백은 스마트한 시대에 맞춰 소셜네트워크를 이용해 활동하고 관객들과 함께 소통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