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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시가 써 내려간 사랑, 시인 김평 ‘그 발자취를 걷다’
[인터뷰] 시가 써 내려간 사랑, 시인 김평 ‘그 발자취를 걷다’
Q. 안녕하세요. 시인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 김평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김외식입니다. 저는 한흥당 수연 김경필(도동서원) 선생님의 자손입니다. 저희 조부시지요. 굉장히 엄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친구랑 싸워서 맞고 돌아오면 “왜 맞았냐”고 혼날 정도였으니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좀 특이한 면이 많아요. 어릴 적에는 마을에서 신동이라고 불렸어요. 그래서 나이가 어림에도 아이들보다는 어른들과 많이 어울렸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았어요. 머리가 좀 비상했던 것 같아요. 동네가 아주 시골이라 버스가 안 다녔어요. 도시를 가려면 큰 강을 건넜어야 했지요. 처음 도시를 알게 된 것은 친구를 통해서였죠. 그렇게 대구라는 도시를 알게 됐죠. 대구 대륜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입학을 했어요. 이후에 2학년 때 군대에 가게 됐죠. 정말 웃긴 건 저희 아버님이 저를 군대에 빨리 보내시려고 호적에 본 나이보다 많게 등록했어요. 그래서 군대도 빨리 갔죠. 당시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랑하는 지금의 아내(당시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거였어요.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아내와 헤어지는 것은 정말 힘들더라고요. 대학교 때는 일찍부터 영어강사로 과외를 나갔었어요. Q. 아내분과의 일화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아내가 너무 보고 싶으니까, 군대에서 밤마다 편지를 썼어요. 어느 날은 보초를 서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그래서 담을 넘어 근처 점포에 가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정신이 없었는 지 편지에 군에서 쓰는 칼을 같이 넣어서 보낸거예요. 편지를 받고 아내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겨요. 그거 때문에 혹시 아내가 도망을 안 갔는지도 모르죠. 아내와 근 10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너무 아끼다보니 손도 잘 못잡았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이거 하나는 제 스스로 지키고 있어요. 그리고 아내에게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Q. 어떻게 ‘시인’이 되셨나요? 사실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쓴 건 아니었어요. 아내한테 편지를 쓰려고 온갖 책을 다 읽었었죠. 시도 사실 사랑에서 시작된 거예요. 책을 많이 읽다보니 자연스레 지식이 많아졌고 먼저 수필을 쓰기 시작했죠. 수필을 쓰다 보니까 더 마음을 함축해서 표현할 수 있는 시도 쓰게 된 거죠.. 시기로 치면, 고등학교 때부터에요. 1980년대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죠. 당시 4학년 때 학생회장이 됐어요. 학생회장이 되고 동문들의 어깨에 앉아 학교 앞 거리를 활보했던 게 생각나네요. 그렇게 대학 시절을 보내고 졸업 한달 전에 한전 산하 원자력발전소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 근무지에서 노무자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최초의 잡지 ‘빛터 창간호, 제 2, 3집’을 발간했어요. 또 외국인들과 많이 어울렸고, 그를 통해 외국의 선진의식도 빨리 배우게 됐고, 자연히 견문이 넓어졌어요. Q. 시인으로서 가장 좋아하는 ‘시’가 있다면?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참 좋아합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 잘 없어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사람은 이름처럼 산다고 하잖아요. 자꾸 불러주는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게 사람이라니까요. Q. 혼돈의 시대, 시가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공자는 ‘시를 300편 읽으면 사무아’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를 300편 정도 읽으면 사악한 마음이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시를 많이 읽음으로 이 마음이 정화가 되고, 사람간의 전쟁과 갈등이 사라진다고 믿어요. 요즘 인터넷에 등재된 시들을 보면,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시어에 은유(메타포), 비유가 없어요. 그냥 서술이죠. 시도 공부를 해야하고 또 ‘은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잘 모르는 한 가지. 시인을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거예요. 시인은 관형어에요. 직함이나 직업을 뜻하는 말이 아니죠. 그래서 김평 시인이 아니라, 시인 김평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맞아요. Q. 명시는 어떤 시일까요? 옛날은 수명이 짧아서 일찍 죽었기에, 미사어구가 들어간 이미지 시가 많았죠. 요즘은 수명이 길어졌기에 인생의 경륜, 지식이 모두 함께 녹어난 삶을 담은 시가 명시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저는 ‘시’를 쓸 때 사소한 걸로 쓰지 않으려 노력해요. 시에도 삶과 생명이 담겨 있어야 해요. Q. 인생에 가장 큰 고비가 있었다면? 한전에 있을 때 상사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왔던 거요. 그 이후에 고생을 많이했죠. 지금은 생각해보면 조금 참을 걸 하는 생각도 들어요. 참는 것도 경험이고 깨달음이니까요. Q. 시인 김평이 가장 애정하는 자신의 시는? “달성 비슬산 창꽃 속 여왕님”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우리나라 신문과 방송에 다 나왔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JTBC에서 시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거예요. 제 시를 가지고 “박근혜 前 대통령을 옹호하는 시”라고 평했는데, 사실 이 시의 본 뜻은 그게 아니었어요. 이 시는 박 前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도 6년 전에 쓴 시였죠. 또 당시 정치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 하지 말고 똑바로 해”라는 충언으로 쓴 시였어요. 기회가 되면 JTBC관계자들은 “사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인의 ‘시’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난도질 했으니 당연히 사과해야하는 것이 이치잖아요? 달성 비슬산 참꽃 속 여왕님 달성 비슬산 참꽃 속에 여왕님 한 분 계시네 하늘 향한 왕관 쓰고 더없는 태양 향해 오롯이 서 있네 흰 붕대 감기운 손 마디 마디 국민의 아픔 연분홍빛 꽃잎 물결 도탐게 꽃피우네 달성 비슬산 참꽃 지구 만왕 데불고 오월의 여왕 되시어 참꽃 대궐 이루네 -김평 Q. 앞으로 계획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일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싶어요. 최근에 단체를 만들었는데, '세계문화예술인 유니온(연합)'입니다. 여기엔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매년 세계평화를 위해 노래하고자 합니다. 최근에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영어로 변역한 시집도 만들고 있어요. 이 코로나도 무심코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말과, 관계가 모두 더럽다보니 닫아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불’이 아니라 ‘물’의 시대로 바뀝니다. 내가 혼자 화려하게 타올라 잘 살기보다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코로나 이후에는 나누고 봉사하는 삶이 돼야 합니다. 서로 돕지 않으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정치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온 인류가 코로나를 통해 모두가 평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인 김평이 걸어온 길 ◇1953년 합천 쌍책 출생, 본적은 독도리 안용복길 2로, 초계중 및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계명대 건축과 수석으로 졸업. ◇1981년 9월 대학교로부터 최고 영예인 '명예기패'를 수상,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관리자과정)을 졸업. ◇계명대학교 직선 학생회장(2부)을 지내며, 80년 민주화의 봄시절 국내 최초로 민주화 선언 (80.4월 전두환,신현확 퇴진 선언)을 위해 국내 최초로, 민주적 절차로 2.28 탑을 행진하여 일약 계명대학교를 국내 민주화 대학 성지로 고양시키는 한편 광주민주화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고,그후 군부독재 종식의 토대가된 노태우 6.29선언의 발판이 되었으나,아직도 역사적 진실이 힘 있는 자의 부정의한 역사왜곡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역사적 진실이 묻혀져 있는 매우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있음. ◇1981년 대학 졸업 전, 한국전력공사 1기로 공채시험에 합격, 울진원자력 및 기타 각부서에서, 토ㆍ건 감독관으로 근무. 한전 100년만에 최초 특진으로 감독과장으로 진급, 20여년 동안 한전에 봉직. *울진원자력 감독관으로 근무시 '한울문학회'를 결성, 한전 최초로 문예지 "빛터 창간호,제2,3집을 발행인 및 주간. *충남지사 근무시에 월간지 《들국화》1,2,3호 발행 및 주간으로 문학활동, *특히, 울산화력발전소 근무시에는 간부 및 직원 시창작강의를 통해 직원들의 정서함양에 크게 기여함. *또한 초계중학 총동창회에서는 총무직을 수행, 최초로 동창회지 《草友誌》발간, 발행인을 맡아 창간함. *1993년 한전일산열병합 준공기념 시비 및 휘호석 전국 공모전에 시 <백석동 유래비>와 휘호"光明無崖" 및 설명석으로 각각 대상으로 선정됨,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 1등급 한전사장상을 수상. *1997년 월간『순수문학』시 부문 신인상에 박태진 박재삼 원영동 진동규시인의 천료로 문단에 등단. *1998년 한전 울산화력 문예대전 시부분 금상 수상, *2005년에는계간《지구문학》에 '5.18을 말한다' 외1편으로 신인수필문학상 수상으로 수필가로 문단에 등단. *2009년에는시집《난초의 눈물》영랑문학상 본상 '젊은시 최우수상'을 수상. *2019.8.11.중국중심예술전람전 중국중심문학상(자유시 부문) 수상. *2019.8.19.대한민국유명작가 국회갤러리 초대전에 대한민국 건국100주년기념문학상(서사시 부문)-등을 수상. *2019,11,1일 <독도사랑 나라사랑 독도사수대회 제13회 특집>에 민족시인으로 '특별공로상'(울릉군수) 수상. *2020, 전국기자협회 주관,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대상 문학발전 대상:부문 (문학부문) 수상. *2020년 제24회 황금펜문학상 수상. 힘내라 대한민국 유명작가시화전. (노벨타임즈 주관) *2020.09.05.일 U.N NGO,NOBEL TIMES주관 '문화예술 지도자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 공로훈장 수상. *한전근무시에는 한전 공로 1등급 사장상 수상외 표장장,공로패,감사패 10여회 수상으로 한전 최다 수상기록 보유. *초계중학 총동창회 공로패 수상(총동창회장).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인터뷰] 달항아리 속 명화를 담다, 김중식 청평아트인갤러리 방문기
[인터뷰] 달항아리 속 명화를 담다, 김중식 청평아트인갤러리 방문기
[선데이뉴스신문=박민호 기자] 겨울의 한기가 조금 잦아든 지난 15일. 지인의 소개를 받고 한 화가의 미술관을 찾아갔다. 경기 청평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높은 산 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흰 외벽과 원목으로 된 지붕은 고전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내부는 마치 산속 산장 같이 아늑했다. (사진=김중식 청평아트인갤러리 전경) 차에서 내리자 대문 앞으로 선홍색 니트를 입은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김중식 화백이었다. 미술관은 총 3층으로 돼 있었다. 3층은 거주공간, 2층은 전시 및 미팅실, 1층은 화가의 작업실이었다. 기자가 본 김중식 화백의 첫인상은 조금 날카롭고 무뚝뚝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따뜻함과 순수한 정이 느껴졌다. 우리는 3층에서 북한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함께 오손도손 차를 마셨다. 그리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Q. 안녕하세요. 화백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중식입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왔어요. 40년 정도 됐죠. 선화 예술 고등학교를 나왔고 군대는 공군으로 다녀왔습니다. 이후 대학을 복학해서 85년도에 프랑스에 가게 됐죠. 지금까지 쭉 그림 그리는 사람, 화백으로 한 길을 걸어왔어요. 생각해보면 힘든 일도 정말 많았습니다. (사진=김중식 화백) Q. 살아 온 얘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어디부터 해야할까…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프랑스에 가서 많은 화가들을 만나게 됐죠. 김창렬, 이우환, 박서보, 백남준 화백 등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90년도에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결혼도 파리에서 했고요. 제가 예전에는 정말 잘 살았어요. 그 당시 살던 동네에서 최고로 잘 사는 축에 속했으니까요. 당시 금액으로 500~1000만원 정도를 송금 받었어요. 파리 연예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았었죠. 아마. 생활이 힘들어지게 된 계기는 형님의 보증을 서면서부터였어요. 그때 돈이 없어서 집안이 기울게 됐어요. 그 이후부터 많이 고된 길을 걸었죠. 원래 잘 살다가 갑자기 무너졌어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버스 정류장에서 잤던 기억도 있어요. 낮에는 노가다를 4년 정도 하고, 식당에서 주방장으로도 몇 년 동안 일을 했어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때도 그림은 혼자서 계속 그렸었죠. Q. 다시 화가로서 일어서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어느 날 한식집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대 학장이었던 김봉구 선생님이 식당에 찾아왔어요. 그분이 식당 벽에 걸려 있던 제가 그림을 본 거죠. “이 그림을 누가 그렸냐’고 물어봐서 종업원들이 주방장이 그렸다고 했죠. 그런데 그분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면서, 여기에 있기는 너무 아깝다고 했었죠. 이후에 식당에서 번 돈으로 1톤 트럭을 사서 전국을 돌자고 마음 먹었어요. 각 갤러리를 찾아가서 제 개인전을 하게 해달라고 했죠. 그때 5천 800만원짜리 창고를 사서 밤이고 낮이고 그림을 그렸어요. 진짜 목숨 걸고 작업을 했죠.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당시엔 힘들었던 작가들이 모여서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지냈던 기억이 나요. 한호 작가라고 있어요. 그 분과 오래 같이 있었어요. 그 이후에도 작업실을 20번 이상 옮겨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회사 회장님이 절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이 “내가 땅은 있는데 돈은 없다. 그러니까 공간을 마련해서 그림을 한번 걸어보자”고 황당한 제안을 했죠. 처음엔 “이상한 사람 아닌가?” 생각했는데, 진짜 “등기까지 다 해주는 거냐”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땅이 있으니까 원하는 곳으로 딱 찍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이 공간이 탄생한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감사하기도 하고… 저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요. 만약 옛날처럼 부유했으면 지금까지 그림을 안 그렸을 거예요. 저는 이 미술관을 만들게 된 것에 큰 감사함을 느껴요. Q. 최근에는 판화 작업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을 하게 된 동기는? 제가 다니는 교회의 LED광고를 본 게 시초였어요.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뒤에 LED전광판에 광고 문구가 계속 옆으로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어요. LED판이 점자로 돼 있잖아요. 그래서 ‘달항아리’와 연관지었죠. 달항아리의 뜻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의미거든요. 항아리 안에 사물이 들어가면 아름다워질 수 있고, 재탄생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항아리 안에 인물을 집어넣게 된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국내 유명인물들을 그렸는데, 국제 페어에 나가려고 보니까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계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인사들의 얼굴을 그리게 됐어요. 누군가 제 그림에 관심을 가져야 소통도 할 수 있으니까요. 10년 넘게 이 작품을 하면서 많은 걸 이뤄냈어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나, 작품이 있다면? ‘동경아트페어’도 기억에 남고, 중국에서 초대를 받아서 했던 전시도 생각나요. 그리고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은 마우쩌둥 수양딸인 강림 주석이 여기에 왔던 거예요. 그는 전세계 화교 연합회의 총재에요. 그분이 우연히 와서 ‘마우쩌뚱’ 작품과 오드리햅번 작품을 주문해서 갔죠. Q.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작품을 독자 분들이 참 좋아해주셔요. 이 작품은 아트 상품으로도 많이 만들어 판매하고 있어요. (사진=김중식 화가가 가장 애정하는 자신의 작품 중 하나인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Q.(사진기자의) 친언니도 미대를 갔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미대를 접은 상태거든요. 미술을 준비하는 젊은 2030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교과서처럼 얘기해줄 수도 있어요. 열심히 그림만 그리라고요.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고… 만약 취미로 그린다면 상관이 없지만 솔직히 전업으로 하고 싶다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게 좋을 듯해요. 미술업계가 전체적으로 녹록치 못해요. 특히 전통 동양화 같은 경우는 수요가 없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리 유명해도 작가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죠. 요즘 젊은 세대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겠죠… Q. 미술업계 구조의 틀이 바뀌어야 하는 걸까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정부 지원도 한계가 있고요. 외국처럼 작가의 수준이 단계별로 나눠졌으면 좋겠어요. 평생을 그림에 목숨을 건 사람과,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다르겠죠. 실력이 없어도 아무나 페어에 나갈 수 있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에요. 세대 교체도 시급해요. 물론 나이가 드신 화백들 중에도 깨어있는 분들도 있지만 이미 오래된 분들은 옛날의 사고방식을 쉽게 바꾸질 못해요. 사고방식의 변화가 쉽지 않아요. 작가는 마지막 장식을 잘해야 하거든요. 계속 시대에 맞춰 발전해 나가야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요즘은 작가가 작업실에 박혀서 그림만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자기 홍보도 할 줄 알아야 해요. 저도 서울역 LED 광고판에 3개월간 광고비를 주고 광고를 했었어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독자와 어떻게든 만나려 노력을 해야죠. 또한 다작을 해야 해요.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작품이 한 달에 하나 나오면 독자들과 자주 소통하기가 어렵겠죠. 저는 여유가 좀 생기면 작품을 많이 만들어 전국에 있는 카페 매장에 전시하고 싶어요. 작품은 대중들에게 알려져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가장 힘든 부분이 있으시다면? 모든 작가가 그렇겠지만… 작품을 팔 때가 가장 힘들죠. 얼마나 노력을 해야겠어요. 예를 들어 어머님들 입장에서 돈이 있으면 김치 냉장고를 바꾸지,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놓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해요. 매일매일 200명에게 인사 메시지를 남겨요. 그렇게 하루에 20~30명. 쌓이면 한 달에 600명 정도가 되잖아요. 그렇게 제 그림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늘어난다는 게 뿌듯해요. Q. 가슴에 새기고 다니시는 문장이나 격언이 있다면? “거만한 가슴에는 우정이 싹트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어요. 또…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도 좋아하고요. 만약 저를 좋아했던 어떤 여자분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날 때가 얼마 안남았다고 해서 병문안을 갔는데, 그분이 “야, 나 사실 옛날부터 너 좋아했었다”라고 하면 얼마나 어이없고 화가 나겠어요. 좀 미리 얘기해주지. 그래야 뭐 표현을 하든 진전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이게 저희 아버님을 통해 얻은 교훈이었어요. 아버지가 표현도 없고 방목형이셨어요. 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염을 하러 갔는데 눈물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요. Q. 인생을 살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있다면? 보람이라고 하면, 그래도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게 감사하죠. 또 김중식 후원회를 기업체에서 만들어 주셨어요. 매달 1번씩 후원의 날을 정해서 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눌 수 있게 됐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기업체와 함께 그림 경매를 하려고 구상하고 있어요. ‘화랑’과 상관없이 개인이 자유롭게 작품 경매도 하고 홍보도 할 수 있겠죠. 저는 복이 많아요. 참 감사한 일이죠. 만약 제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고 기회가 된다면 이 작업실을 다른 후임 작가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신년에는 외국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벨기에 관계자들과 추진하고 싶어요. 제가 좀 세계적으로 나가기 위해서 만들어 놓는 거예요. 미래를 위한 하나의 준비인 거죠.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공간을 또 만들어 봐야겠죠. 코로나 때문에 조금 차질이 있긴 했는데, 이제 또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진행해야죠. Q. 힘든데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게 삶이었으니까. 이번에 시리즈 작품으로 연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작가는 언제든 작품이 준비돼 있어야 해요. 언제 누가 오더라도 보여줄 작품이 있어야 하고, 홍보할 거리도 있어야 하는 거죠. 항상 준비가 돼 있는 것. 그게 프로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또 나에게 언제 찾아올 지 어떻게 알겠어요. 기회를 붙잡아야죠. Q. 화백님에게 가장 중요한 신념, 가치는? 제가 아는 대가 분들 중 남자 화백들을 보면 그 분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 준 건 대부분 옆에서 그분을 보필하는 사모님이더라고요. 화가는 세상 주는 사람이지만 화가의 부인은 하늘이 준 사람이래요. 옆에서 그 화가보다 더 고생하잖아요.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래서 주변의 소중한 인연, 관계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Q.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가들끼리 서로 돕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또 한 가지에만 안주하지 말고 시야를 넓게 보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다 같이 함께 끝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종료) “언제든 찾아오세요. 맛있는 양고기 구워줄게요. 와인도 같이” 인터뷰를 끝내고 가는 길, 산 비탈을 내려오는 내내 차창 위를 자꾸 올려다봤다. 산 속의 미술관에 사는 화가라… 마치 동화에 나오는 듯한 느낌.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한번 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굴곡진 인생이었지만, 끝까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김중식 화백. 더욱 찬란할 그의 여생을 기대해본다.
박상돈 천안시장 비대면 인터뷰...“천안형 뉴딜사업과 녹색 친화도시 준비”
박상돈 천안시장 비대면 인터뷰...“천안형 뉴딜사업과 녹색 친화도시 준비”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 기자] '행정의 달인' 박상돈 천안시장은 주요 정책은 시민과 소통을 통해 선정하고, 빠른 경제 회복으로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드리고 있으며 코로나19로 무너진 지역 경제 회복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 박 시장은 새로운 천안을 준비하는 ‘천안형 뉴딜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으며, 스타트업 타운과 연계한 의료·바이오 산업을 육성하고 그린 모빌리티 보급 확대와 친화경 자동차 선도도시 기반을 구축해 미래를 준비하는 녹색 친화도시를 추진 중이다. 1994년 대천시장 재임 시절, 보령시의 경제를 지탱해오던 석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보령지역 경제가 매우 어려워져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최초로 보령머드축제 아이디어를 개발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박 시장은 2021년은 시민 여러분께 꿈과 희망을 주는 한 해를 만들겠다며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을 위해 힘을 모아 ‘완전히 새로운 천안’을 위해 담대히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박상돈 천안시장이 당선 첫 해를 보낸 소회와 2021년 주요 계획과 비전을 비대면 서면인터뷰를 통해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Q. 취임 이후 기억에 남는 의미 있는 사업은? A. 의미가 없었던 사업은 없었지만, 그동안 이뤄냈던 성과를 살펴보면 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민생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던 것 같다. 코로나19 대응, 성성동 민간아파트 분양가 대응, 일봉산 민간공원 특례사업 주민투표 등이 기억에 남는다. 또 여기에 선거과정에서 약속했던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건립사업 재협상을 지켜냈으며, 천안삼거리공원 명품화사업도 합리적으로 재조정해 예산의 활용을 높였다. 성성동 민간아파트 분양가 대응은 시민의 주거복지 수준을 지켜드리고자 하는 기본적인 신념이었다. 집값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민생문제로 전문가들로 구성된 분양가심의위원회를 열어 천안시의 입장을 정리했다. 일봉산 민간공원 특례사업 주민투표는 시민의 의견이 우선돼야한다는 행정의 기본을 지키고자 노력했고 차이와 다름을 포용하는 지역사회 통합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었기에 비록 개표로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는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건립사업 재협상과 천안삼거리공원 명품화사업의 경우에는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예산을 축소하고 절약한 예산 전용 방안을 검토했다. 삼거리공원 명품화사업은 검토하면서 천안흥타령춤축제 등 대형 축제 현장으로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앞으로도 주요 정책은 시민과 소통을 통해 선정하고, 빠른 경제 회복으로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드리고 싶다. Q. ‘시민과의 100가지 약속’ 공약 중 가장 중점을 두는 공약은? A.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세 가지 목표인 ‘새희망 미래도시’, ‘고품격 문화도시’, ‘스마트 교통도시’를 실현하기 위한 공약 이행을 위해 집중하고 있다. 대중교통체계를 스마트하게 바꾸기 위해 안전한 대중교통체계를 도입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 수도권 전철과 천안시내버스 환승 도입을 검토하고, 심야버스 및 중앙버스차로제 도입 및 버스 간선·지선 체계 도입해 빅데이터 기술을 기반으로 합리적인 버스노선을 구축하겠다. 두 번째는 도시 인프라 정비는 물론 왕건 사적지 등을 재정비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천안의 문화적 자산을 승화시켜 품격 있는 문화관광 도시를 만들겠다. 천안의 정체성을 부여한 왕건 동상을 건립하고 문헌 고증을 통해 왕건의 사적공원을 조성하겠으며, 동남구 구도심 지역에는 동헌 건물과 누각을 복원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한 번에 충족할 수 있는 ‘올드타운’ 조성을 검토하겠다. 또 독립기념관 내 K-컬처 전시관 건립 및 K-아트 엑스포 개최를 검토할 예정이다. 불당동 시청사 인근 체육 용지에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세 번째는 혁신 기업을 중심으로 좋은 기업 유치에 힘쓰겠다. 좋은 기업이 많으면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등 선순환 구조가 구축된다. 이에 첨단산업공단 개발 등 기업하기 좋은 도시 인프라 구축을 통해 천안의 미래 먹거리 기반을 더욱 확충하겠다. 현재 추진 중인 산업단지 10개소를 조성하는 데 힘쓰고, 최근 선정된 스타트업파크를 비롯한 다양한 도시재생 뉴딜사업 및 KTX역세권 R&D집적지구 조성, 차세대 디스플레이(OLED) 혁신공정 플랫폼 구축으로 미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 천안과학기술산업진흥원을 설립해 연구개발 사업화, 제조혁신 기반 강화, 혁신생태계 조성 및 신재생 에너지 보급 등의 4차 산업시대 대비전략을 추진해 나가겠다. 또 지역 대학생과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 천안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돕겠다. Q. 2021년 중점 과제 A. 올 한 해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천안, 행복한 시민’이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 천안의 미래를 그리며 나아갔다. 2021년은 시민 여러분께 꿈과 희망을 주는 한 해를 만들겠다. 먼저 코로나19로 무너진 지역 경제 회복에 최우선을 두겠다. 소상공인 경영안정 도모 및 맞춤형 일자리 공급 확대를 위해 사회보험료 지원, 특례보증 융자금 이자 지원을 확대하고, 청년일자리 지원 플랫폼 구축 등 청년, 중장년, 소상공인에 대한 맞춤형 지원으로 지역주도형 일자리 창출을 증대하겠다. 천안사랑카드 2,000억 원 규모로 확대 및 골목상권 지원 강화 등으로 소비를 촉진하겠다.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1인 창조기업지원센터, 중소기업 기술지원, 기업스마트혁신, 지원단 운영, 스마트공장 보급 확산, 여성창업보육센터 운영 등으로 든든한 지역 경제의 토대를 만들겠다. 두 번째로는 변화된 시대를 선도하는 미래 전략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하겠다. 천안 그린 스타트업 타운을 성공적으로 조성하겠으며, 2024년까지 527만㎡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해 미래 먹거리 기반 확충 및 2만4000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KTX 천안아산역세권 연구개발(R&D) 집적 지구 조성, 강소연구개발특구 육성, 차세대 디스플레이(OLED) 혁신 공정 플랫폼 구축 등으로 미래 신성장동력 확보에 역점을 두겠다. 천안의 멋과 매력이 넘치는 문화 관광도시를 만들겠다. 독립기념관을 중심으로 K-아트 세계박람회, 흥타령춤축제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업성저수지, 풍서천 수변생태공원 조성과 태조산 레포츠 사업 및 수해복구 연계 사업 등으로 쉼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친환경 녹색도시를 만들겠다. 전국에서 제일 친절하고 편리한 스마트 교통도시를 실현하겠다. 시내버스혁신TF단을 운영해 시민들이 느낄 수 있도록 이용자 중심의 대중교통을 만들겠다. 수도권 전철과 시내버스 환승체계 도입과 천안 외곽 순환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천안~아산지역 연결도로도 최대한 조속히 개통하겠다. 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촘촘한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견고하게 구축하겠다. 아동 보호를 위한 전담팀과 아동 학대 예방 24시간 긴급전화, 천안형 어린이집 육성, 돌봄센터의 내실 있는 운영, 신혼부부와 청년 주거문제 해결 등으로 아이와 여성이 행복한 천안을 만들겠다. 새로운 천안을 준비하는 ‘천안형 뉴딜사업’을 본격 추진하겠다. 스타트업 타운과 연계한 의료·바이오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차, 수소연료 전지차 등 그린 모빌리티 보급 확대와 친화경 자동차 선도도시 기반을 구축해 미래를 준비하는 녹색 친화도시로 거듭나겠다. Q. 다양한 경력이 있으신데, 시장이 되시기 전 자랑할 업적 또는 기억이 강하게 남은 이야기 A.아무래도 최초로 보령머드축제 아이디어를 개발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94년 대천시장 재임 시절, 보령시의 경제를 지탱해오던 석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보령지역 경제가 매우 어려워져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심하던 중, 우연히 외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진흙을 바르는 좋아하는 장면에서 착안해 대천해수욕장의 천연자원인 머드를 활용한 여름 축제를 고안했다. 이후 대천해수욕장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머드(진흙)가 인체에 유익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이를 계기로 대천해수욕장에 머드 체험관을 설치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머드의 유익성을 알리게 됐다. 아산군수 재임기간에는 삼성반도체 공장 유치, 서산시장 재임 기간엔 현대·기아차 모닝 생산지를 유치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경력을 되살려 천안의 미래 신성장동력을 창출해 일자리 부족과 불편한 대중교통 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안을 해결하고 있다. Q. 코로나19 상황 속 지역 경제 안정을 위한 계획은? A. 앞서 천안시는 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긴급재난지원금과 소상공인 긴급생활안정자금 지원, 집합 금지 명령에 동참한 고위험 시설 8개 업종에 100만원씩 재난 지원금을 지원했다. 또 1,500억원 규모(일반발행·정책발행) 천안사랑카드를 발행했다. 천안사랑카드는 지난 4월 7일 발행한 후 현재 12만1444명이 가입했으며, 발행 8개월 만에 당초 목표액 100억 원의 15배를 훌쩍 뛰어넘어 지역경제 활성화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12월 한 달간 캐시백 혜택을 10%로 상향해 지급하고 있다. 또 천안시는 현재 10개의 산업단지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로 2024년까지 526만3126㎡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한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로 1조7000억원을 투입해 미래 먹거리 기반을 확충하고 2만4000개 일자리 창출에 나선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 인프라를 구축해 일자리 창출과 인구 증가, 지역경제 활성화의 선순환 구조를 이루겠다는 구상이다. K뷰티의 성장을 견인하게 될 LG생활건강퓨처일반산단은 구룡동 일원에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조성되며, 생명공학, 동물자원, 유전자 등 바이오기술(BT) 업종과 전자, 영상 등 정보기술(IT) 업종을 유치할 북부BIT산단도 성환읍 복모리 일원에서 2022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국토교통부 공모 사업으로 추진되는 직산도시첨단산단은 지역 산업 기반과 주변 환경 특성을 고려해 2차전지와 수소연료전기자동차 부품 관련 기업을 유치한다. 현재 토지 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식료품업, 섬유, 화학물질, 전자 부품 업종이 들어서는 동면의 바이오산단, 성거읍의 성거일반산단도 산단 승인을 완료하고 토지 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성남면과 수신면에 조성된 5일반산단은 확장하고 있으며, 지식기반 및 4차산업, 신재생에너지 등 전략산업 유치를 목표로 풍세면의 6일반산단도 추진하고 있다. 직산읍의 천안테크노파크일반산단은 산단 승인을 마쳤으며, 동면 일원에 추진 중인 천안 에코밸리일반산단은 국토부의 산단지정계획 승인을 받았으며 풍세2일반산단도 조성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2017년 국토부의 노후산업단지 재생공모사업으로 선정된 2일반산단도 재생·혁신사업을 추진 중으로 진입도로 확장 및 에코파킹 설치, 전선 지중화, 가로수 정비, 공원시설 개선, 어린이집 신축 이전 등 기반시설 개선과 업종 재배치 등의 공사를 진행한다. 이밖에 시는 KTX천안아산역세권 연구개발(R&D) 집적지구 조성, 차세대 디스플레이(OLED) 혁신공정 플랫폼 구축 등으로 미래 신성장동력 확보에 나서고 천안과학기술산업진흥원을 설립해 연구개발 사업화, 제조혁신 기반 강화, 혁신 생태계 조성 및 신재생에너지 보급 등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할 계획이다. Q. 코로나19 대응 상황과 계획은? A. 코로나19의 3차 유행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기에 천안시는 선제적이고 신속한 대응으로 코로나19의 지역사회 감염 확산을 최소화하고 있다. 천안시는 지리적 여건 상 유동인구가 많아 자칫 방역 대응에 소홀히 하면 걷잡을 수 없이 지역사회에 확산됨을 인지하고, 지역의 사회·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는데 모든 행정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충남에서 최초로 요양병원 등 고 위험 집단시설 내 종사자 및 이용자 5,000여명 선제적 전수검사를 통해 확진자 2명을 조기에 발견해 자칫 지역사회로 확산될 수 있었던 감염을 사전 차단했다. 11월에는 집단감염 방지와 방역 취약 군 보호를 위해 산업단지 내 외국인 근로자 4,000명을 대상으로 전수검사를 실시했다. 지난달 16일에는 시의회, 교육지원청, 의사회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위원회를 구축해 상황 발생 시 민·관 협력으로 신속한 조치와 대응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최근 전국적으로 대학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는 상황에서 지역 내 대학 코로나19 집단감염 예방을 위해 ‘지역대학 코로나19 청정지역 방역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코로나19 예방활동과 방역수칙 준수 분위기 조성에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의용소방대, 자율방범대, 자율방재단 등 지역 자생단체 회원들은 주 2~3회 읍면동별 방역취약지역을 돌며 촘촘한 예찰활동과 방역소독을 실시하고 있으며, 식당과 카페 등 다중이용시설이나 차량 이동이 많은 교통 지점에서 코로나19 예방 캠페인 전개에 앞장서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 연말․연시 모임 등 일상생활 속 동시다발적 감염이 지속되는 만큼 집담감염 위험시설 방역수칙 지도․점검을 한층 강화해 지금까지 5,000여개소 시설을 대상으로 2만5,000회 이상의 지도․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 마을 앰프와 공동주택 방송을 활용해 코로나19 예방 방역수칙과 확진사례 등을 안내하고 있으며 의사회, 각 자생단체와 시민들에게 코로나19 증상 발견 시 신속 검사를 받도록 수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는 아산시와 코로나19 등 재난발생시 공동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실무진 협업체계를 구축할 예정이며, 시기별로 중점시설 관련한 점검을 실시할 방침이다. Q. 공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A. 코로나19 등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해주고 있는 직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천여 공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앞으로도 방역과 시민의 일상·경제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코로나 청정지역’ 천안을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에 적극 대응하면서 올해 마무리해야할 현안을 점검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할 엄중한 시기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시민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많이 지쳐있겠지만 여러분의 노력과 정성이 우리 천안시민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조금 더 인내하고 힘내 주시기 바란다. 남은 한 달, 한 해를 조용히 되돌아보고 다가오는 희망찬 새해를 계획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시고,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을 위해 힘을 모아 ‘완전히 새로운 천안’을 위해 담대히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자. Q. 코로나 등으로 어려운 시민들에게 한 말씀. A. 존경하는 천안시민 여러분, 코로나19를 비롯해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 등 올해 시민 여러분들의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어 시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는 7일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로 격상하고 이에 따른 방역조치를 강화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시민 안전을 위해 전력을 다해 코로나19 이전의 행복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겠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시는 코로나19의 역경을 잘 극복해 왔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앞장서서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코로나19 외에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맞는 사회 전반의 구조변화를 선도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으며, 빠른 경제 회복으로 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드리고 천안의 정체성 회복과 문화적 가치를 향유하는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편리한 교통이 천안시민의 자부심이 되게 하겠습니다. 시민과 함께 나란히 걷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정을 지켜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상돈 천안시장 소개 박상돈 천안시장은 가난한 농부의 셋째로, 천안중학교(14회), 대전고등학교(47회) , 육군사관학교 28기,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석사)하고 나사렛대학교 법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박 시장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아산군수(현 아산시), 대천시 장(현 보령시), 서산시장, 제17대, 18대 국회의원(천안을)을 역임하고 2020년 4월16일 당선되어 천안시 시장으로 취임했다. 열린우리당과 자유선진당 소속이었으며 아산, 대천(보령) 시장과 1995년 마지막 관선으로 서산시장을 맡았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대천시장 재임 시 보령머드축제를 추진하였고, 국회의정 활동으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으로 균형발전에 기여하고, ‘부도임대아파트 임차인 보호법’. ‘노인장기요양특별법’. ‘아파트 발코니합법화’, ‘공인중개사 간판상호실명제’ 등을 법률발의를 통해 서민의 어려운 삶에 힘을 보태고 불합리한 행정 개선을 통해 규제개혁에 앞장섰다. 2020년 4월 15일 14만6429표로 46.38%를 획득해 14만4509표 45.77%를 얻은 한태선 후보를 누르고 두 번의 도전 끝에 시장직에 당선 됐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천안 국회의원 4석은 더불어민주당이, 같은 날 치러진 천안시장 재선거에서는 천안시민들의 교차 투표-국회의원은 민주당, 시장은 깨끗하고 행정경험과 국정경험이 풍부한- 국민의힘 박상돈 후보가 당선됐다.
[파란천사 인터뷰] 송창익 한국새생명복지재단 이사장 “‘행복한 대한민국’을 꿈꾸다”
[파란천사 인터뷰] 송창익 한국새생명복지재단 이사장 “‘행복한 대한민국’을 꿈꾸다”
-그늘진 곳에 희망의 빛이 되고자 꾸준한 나눔 활동-쪽방촌 독거어르신과 노숙인과 희귀난치병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서-선한 마음으로 주변을 돕는 ‘파란천사’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 기자]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며 이웃을 돕고 있는 송창익 한국새생명복지재단 이사장은 2007년 7월 27일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희망의 빛이 되고자 하는 꾸준한 나눔 활동으로 우리 이웃과 함께하기 위해 시작했다. 희귀난치병 환아 지원사업. 독거 어르신 지원사업, 노숙인 지원사업, 소년소녀가장 지원사업,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 무료급식 사업 등 소외되고 힘든 이웃을 위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송창익 이사장은 “2002년 척추를 심하게 다치고 사경을 헤매면서 나눔 실천과 생명사랑에 대해 직접 참여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설립 후 재원의 마련을 위해 기부천사 카드, 화환 기부 운동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 하루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쪽방촌 독거어르신과 노숙인과 희귀난치병으로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서며 치료비를 지원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14년째 헌신하고 있는 송 이사장은 시련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에서 ‘행복한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다. 다음은 송창익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Q. 한국새생명재단을 설립한 동기? 저는 청솔벤처산업(주) 대표이사, 일요저널(시사주간지) 발행인, (주)모아재텍 대표이사, 사회적기업 뉴라이프 대표 등 소위 기업가로 언론인이였습니다. 삶이 바뀐 것은 2002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척추를 다친 것이 계기였으며 13시간 이상의 대수술을 거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온몸이 마비될 뻔 했습니다. 다행히 6개월이 지나, 척추장애 6급 판정과 약간의 후유증이 남았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남은 삶은 약자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고, 2006년 7월에 한국새생명재단을 설립했습니다. ‘한국새생명복지재단’은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재단이며 ‘새생명’이라는 이름에는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자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희귀난치병 아이들의 의료비와 생활비 지원을 핵심 사업으로 하고, 그밖에 노숙인, 독거 어르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소년소녀가장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Q. 운영에 필요한 자금충당은 어떻게? A.후원자들에게 정기후원을 받아서 소액 기부로 기금조성을 하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바자회를 열기도 합니다. 요새는 코로나19로 둘 다 여의치 않아 상설 바자회 매장으로 ‘새생명 나눔가게’를 운영하면서 별도의 사업자로 수익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품나눔도 하고 후원받은 물품 중에서 선별한 제품,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여 후원금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랑의 화환기증운동’입니다. 각종행사에서 사용하고 버려지는 화환을 기부 받아 받침대를 팔아 확보한 재정으로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Q. 힘든 이웃을 위한 지원 사업은? A. 매월 희귀난치병 아이들과 청소년 25명~30명의 치료비와 장학금을 고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독거 어르신들의 생필품을 지원하고, 외로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나눔한마당’이라는 공연을 엽니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 노숙인과 쪽방촌 독거노인들 350명~400명 정도에게 빵, 우유, 생필품을 나눠주는 행사도 했는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대면을 할 수 없어서 중단된 상태이며 군부대 위문공연도 올해는 진행을 못하고 있습니다. Q. 어려운 이웃나라까지 봉사를 하게 된 계기? A. 재단 운용자산 중 현금은 10%도 안 되고, 90% 이상이 물품일 정도로 물품 기부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많이 올라가 있고, 기부물품은 기업이 시중에서 최대한 영리사업으로 유통하다가 남은 제품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제품 중에서 실질적으로 사용기간이 지났더라도 생활에서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제품들은 우리 국민들이 쓰기에는 수준이 떨어지지만, 아프리카 같이 어려운 나라에서는 이런 것도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물품들이 버려지기보다 필요한 곳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외에도 물품지원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몽골 희귀난치병 아이들을 5명 정도 선정해서 지원을 하고 있으며, 남수단 물품지원과 최근에는 캄보디아 쪽에도 매월 물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의약품, 비타민 같은 것도 보내요. Q. 사람은 서로 도움 받고, 도와줄 수 있을 때 아름답다? A. 봉사자들도 봉사해본 사람이 그 마음을 안다고, 중독성이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 느낌을 모르시는 분들에게 알려주고도 싶습니다. 제가 사회사업을 하면서 정말 보람도 되고,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들었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만 일을 할 때는 약간의 즐거움은 있지만 그렇게 큰 보람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그분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느낄 때는 두 배, 세 배, 열 배도 넘는 행복감이 돌아왔습니다. Q. 노숙자 재활 프로그램 중 만난 전과자가 준 교훈? A. 노숙자 재활 프로그램은 노숙인 들을 일반 신병처럼 해병대 군부대로 보내서 정신무장 교육도 하고. 여러 재활교육을 거쳐서 취직을 시키는 프로그램으로 2009년도에 서울시 사업으로 재활의지가 있는 노숙인 30명을 선정해서 한 달간 교육을 하고, 6개월간 관리를 하면서 사회로 복귀시키는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의 노숙인이 전과자에다가 집행유예인 상태로 범죄를 또 저지르고 수배된 상태였던 거예요. 취직을 시키고 말소된 주민등록을 살렸더니 경찰이 왔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살인미수 전과자였는데, 배고프고 돈은 없는 상태에서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갔어요. 밥과 술을 먹고는 주인 할머니를 칼로 위협해서 5만원을 빼앗고, 놀라서 쓰러진 할머니를 두고 달아났던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자수시켰어요. 제가 탄원서도 넣고 피해자와 합의도 얻어서 그 사람이 3년 6개월 형을 받고 안동교도소에서 생활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이 참 비참한 거예요.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환경에서 공부도 못했고 어렵게 살면서 결국에 이것저것 하는 것이 다 안돼서 노숙자로 전락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있는 동안 공부를 하게 했고, 그 안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합격하고 나와서 사회로 복귀시켰습니다. 그 노숙인 지원사업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기억이 남아요. 그때 얻은 교훈이 그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나눔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거죠. 제일 좋은 건 많이 가진 사람들이 나누어서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지만, 사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여유가 있으니까 힘든 사람들을 더 안돌아봅니다. 어려운 사람의 마음은 서민들이 더 잘 알아요. 그래서 오히려 서민들이 많이 후원하는데, 모든 국민들이 함께 모아 나눔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십시일반으로 모인 금액이 크기 때문에 정말 큰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A. 희귀난치병을 앓는 아이들 중에서 근육종을 앓는 자매가 있었어요. 그때 재단에서 아이들이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의료용 침대를 구해줬어요. 하지만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둘 다 6살, 4살 쯤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이 쓰던 침대를 필요한 다른 아이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죠. 더 많은 아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구요. Q. 재단을 운영하며 어려웠던 점과 이를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이 있다면? A. 재단을 운영하면서 제일 큰 시련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일이었습니다. 재단을 운영하면서 제일 필요한 건 재정확보입니다. 처음 1년 정도는 개인 사비로 출연해서 계속 운영했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재단이 초창기여서 후원자 유치도 쉽지 않았구요. 그때 대기업 롯데와 제휴를 맺어서 수수료의 0.2%를 기부 받는 ‘기부천사카드’를 만들기도 했는데, 또 했던 게 화환 기부사업이예요. 전국에서 경조사에 사용되는 화환에 드는 비용이 1조 정도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 업체가 화환의 재활 가능한 부분을 회수해갈 때 화환 가격의 10% 정도를 주고 갔거든요. 화환을 통해서도 충분히 재정확보가 가능하겠다는 판단을 했어요. 서울시의 지정을 받아서 화환사업만 전담하는 사회적 기업을 아예 만들고 2008년쯤에 사업을 시작했어요. 경조사 치르신 분들도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많이 하시고, 사업이 정말 잘 됐어요. 그것으로 노숙인이 화환을 만드는 일자리까지 창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맡겼던 두 명의 관리자가 개인적으로 수익사업을 하려고 모든 자료를 다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제 사비를 들여 사무실도 새로 확장하고, 인력도 충원한 상태였는데 그 일로 사업이 중단되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심지어 그 사람들이 저를 사기꾼으로 모는 음해성 발언을 화환업계에 퍼뜨리고, 서울시에 민원을 넣어서 감사를 받기도 했어요. 다행히 서울시에서 저의 투명성을 인정해줬고, 화환업계에도 다니면서 일일이 해명을 했지만, 그 과정을 겪는 2~3년이 정말로 저한테는 시련이었죠. 게다가 후원을 받기 위해 우리 재단 이름을 팔기도 해서, 이 일로 고소까지 했지만 벌금형으로 끝나고 계속 사업을 하더라구요. 그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사심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재단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눔을 하고 정말 우리 사회복지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을 거라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던 것에서 상처도 받았지만, 좋은 경험을 했죠. 지금은 그런 피해가 없도록 모든 자료를 직접 관리하고 있어요. Q. 코로나19로 대면이 힘든 연말인데 계획 중인 봉사활동은? A.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을 모을 수가 없어서 이전 년도보다는 위축됐어요.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희귀난치병 아이들, 장학생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보내고, 쪽방촌 어르신들께는 단체가 방문하는 대신 지역에 독거 어르신들을 관리하는 노인돌보미 선생님들을 통해 도움을 드릴 계획입니다. 또 지역 기업에서 기부 받거나 저렴하게 구매한 물품들을 각 지역에 계시는 후원자들께 택배비와 물류비만 받고 나눠주고 있어요. 그럼 그분들이 주변에 가까운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드리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Q. 선한 마음으로 주변을 돕는 ‘파란천사’가 되어주세요 A. 보통 연말이 되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움직임이 많아요. 특히 익명으로 동사무소나 파출소 같은 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남몰래 놓고 가는 분들을 ‘얼굴 없는 천사’라고 하죠. 정말 훈훈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봉사자들을 모아 함께 일을 하는 천사 운동, ‘파란천사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파란천사는 우리 재단에 월 만원의 정기후원으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 재난 등에 나서는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눔을 실천하는 활동도 하게 돼죠. 파란천사에게는 파란천사 뱃지와, 연말 소득공제를 위한 기부금 영수증도 발행해드려요. 또 파란천사들을 모아 시군구 단위의 지역위원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전국 행정구역을 동 단위까지 쪼개면 3600개 지역이 되요. 우리 재단이 서울 중앙에 있기 때문에 사실 시골이나 지방의 한 지역에 대해서는 잘 파악이 안 되거든요. 자기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파란천사들이 도움 받을 분을 발굴하고, 재단으로 보고하면 재단에서 파란천사를 통해서 그분들을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요. 지금 추진한 지 3개월 정도 됐는데 25개 지역이 선정 됐고, 24일까지 662명의 파란천사가 확보 됐습니다. 연말까지 1000명을 모으는 것이 목표고, 연말뿐만이 아니라 평소 생활 속에서 봉사하면서 파란천사 뱃지를 항상 가슴에 붙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합니다. Q.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저는 우리나라를 행복한 나라로 만들고 싶어요. 행복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들이 다 남을 배려하고 내가 아닌 이웃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우리사회는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이 모여 함께 사는 사회니까요. 모두 남을 배려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런 대표적인 모습으로 파란천사 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많은 분들이 선한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는 파란천사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송창익 이사장은 사회봉사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효과적인 지원과 기금조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송 이사장은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며 나눔으로 사랑으로 가는 아름다운 동행 ‘파란천사’이다.
[인터뷰] 문화기획자 우인기 감독!! 문화예술은 “언어이자 가장 자유로운 표현이다”
[인터뷰] 문화기획자 우인기 감독!! 문화예술은 “언어이자 가장 자유로운 표현이다”
[선데이뉴스신문=김명철 기자]오늘은 수원 화성문화제 총감독이자 2021년 함양에서 펼쳐지는 세계 시니어 아트 페스티벌 총감독으로 선임된 문화기획자이자 전통 공연예술을 이끄시는 우인기 감독님과 ‘문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질문: 감독님이 문화기획자로서 생각하시는 문화기획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답변: 문화예술을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과거를 지나면 현재가 나오고 현재를 지나면 또 과거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바로 “표현의 자유이자 우리의 예술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를 떠나 “현시대의 문화예술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과거의 문화를 미래로 만들어간다. ” 즉 “그것의 연결 고리는 사람이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연결하고 문화를 엮으면서 시대를 기록“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 현시점에서 감독님은 공연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답변: 공연문화는 다시 말해 “소통이고 아름다운 만남이자 협동"라고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음악. 미술. 전시.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의 콘텐츠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이것들을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전달하는냐?” 도 너무나 힘든 숙제이기에 쉽지 많은 않은 거 같습니다. “예전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듯이 너무나 훌륭한 예술인들이 많지만 이들에게 받으려고만 하지 주려는 것이 많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즉 예술인들의 퀄리티를 올려 주는 것은 본인들의 몫도 있지만 결국은 문화를 바라보는 대중들이다. 질문: 공연문화가 보다 성숙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한 말씀해 주세요? 답변: “문화는 한 국가의 자존심이자, 소중한 문화예술의 자원인 만큼 예전보다 지금보다 아니 미래의 준비를 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술 문화와 이 시대의 눈높이에 맞는 문화는 멀지 않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고 특히 “전통예술의 기본은 반드시 지키고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조건의 조건이어야” 합니다. 질문: 우리나라 문화의 정체성과 전통예술의 기본을 강조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답변: 네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잃었던 것들이 무엇 이였냐?"라는 것입니다. 나라도 잃었었지만 특히 가장 중요한 문화 말살이었거든요. “우리 문화 예술인들은 절대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문화를 잃는 것은 곧 나라를 잃는 것”과 같기 때문 이지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도 변하는 것 들이 있지만 우리가 지켜야만 할 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의 기본 바탕에 담겨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우리나라 한류 콘텐츠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한 말씀해주세요? 답변: 예를 들어 “요즘 k-pop이라는 장르로 세계에 위상을 많이 알리고 있지만 이런 콘텐츠를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과연 천년만년 갈 수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우리를 쫓아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망을 가면 안 됩니다. 지키는 것이지요.“ k-pop이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한류의 바탕도 우리의 기본적인 전통의 정신에서 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단한가요! 그 대단함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들로 만들고 지키고 보존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질문: 문화기획자로서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고 유지되고 전승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답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무악을 좋아하고 흥이 넘치는 민족이어서 문화예술의 자긍심과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입니다.” 세계와 미래의 앞에서 “우리의 문화는 중심이 되고 중요한 우리의 전통문화의 모든 것들을 잘 보존하고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만들어 나가는 동시에 미래의 후학들을 위해 우리는 지금보다 한걸음 더 앞서야 할 때이며, 우리가 밑거름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지금보다 더 좋은 문화, 더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달해 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공연문화 중에서 특히 전통문화의 재원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들을 발견하고 양성하기 위해서는 현재 계획하시거나 준비하시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답변: 현재 축제 총감독과 작품을 제작하는 예술감독으로 활동도 하고 있지만 후학들을 위해 지금 집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뚱맞다고 볼 수 있지만 역사 속의 한 인물을 발굴하여 지금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마술사입니다.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마술사의 우두머리를 얼른쇠라고 합니다. 그 얼른쇠라는 인물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실제로 완벽한 복원까지는 아니지만 교육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통 얼른쇠의 재담과 얼른(마술) 콘텐츠를 만들어 활동 중에 있으며, 전통 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질문: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간단히 한 말씀해 주세요? 답변: 네 앞으로의 계획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추억의 공연 등.. 차력. 무술. 마술. 그림. 음악 등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종합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특히 미디어 시스템을 통한 새로운 융복합 작품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여러 장르의 공연을 스토리화하여 대중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누구나 느끼고, 보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장르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연령층을 포함해 특히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콘텐츠가 없는 이 시점에서 우인기 감독님은 가장 아날로그 한 작품과 여기에 덧붙여 세련된 현대적 디지털 시스템이 접목된 작품 이 시대의 문화 흐름에 맞고 대중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 끝으로 우인기 감독님은 “문화예술과 역사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오늘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기시고 인터뷰는 마무리하였습니다. <문화기획자 우인기 감독 약력>2008~2010 부천 세계 무형문화엑스포 공연 연출 부장2012년 여수 세계 해양박람회 대서양관 프로그램 디렉터2014~2015년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 총감독2018 평창동계 올림픽 붐업 프로젝트 “샛바람 강바람” 총 연출현재(사) 국제문화공연 교류회 예술감독57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대표축제 이자 관광축제인 수원 화성문화제 총감독2021. 계룡세계 군 문화엑스포 추진 위원회 위원2021년 함양에서 펼쳐지는 세계 시니어 아트 페스티벌 총감독
[인터뷰] 1천만 노인사회… 노인과 공생하는 나라 만들기,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인터뷰
[인터뷰] 1천만 노인사회… 노인과 공생하는 나라 만들기,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인터뷰
(사진=김호일 대한노인회 회장이 '혜인(慧人)' 글씨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상꼰대’ ‘틀딱충’ ‘늙은악마’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다. 노인들은 과거 가난과 전쟁의 아픔를 견디고 오늘날 경제 10위권 대한민국을 이끌어 낸 주역의 세대지만, 이제 세대의 갈등 속 화석으로 남겨진지 오래다. 노인들은 이제 갈곳 없이 길을 배회하는 떠돌이의 신세로 남았다. OECD국가 중 노인빈곤률, 노인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기록한 대한민국.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며 웃어른을 공경했던 우리의 문화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이를 어느 한 계층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세태를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또한 이제 노인 인구 1천만 이상의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최근 10월 취임한 김호일 대한노인회 회장과 함께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사단법인 대한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호일’입니다. 이전에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 1천만 이상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있죠. 노인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의원때 ‘국회 노인복지 정책 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었습니다. 그렇게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게 됐죠. 그렇게 지금은 대한민국 노인 분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3번째 출마만의 일입니다. Q. 대한노인회장에 출마하시게 된 계기는? 의원직을 마치고 난후 제가 거주하는 아파트 경로당에서 노인분들과 어울리기 위해 경로당에 갔었어요. 그런데 당시 입주자 대표가 노인분들의 호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65세 이상 노인분들 명단을 뽑아서 선물도 돌리고, 같이 대화를 나누며 그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지요. 당시 주변에서 “국회의원 때부터 노인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으니, 자리를 하나 맡으셔서 노인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습니다. 해서 대한노인회 중앙회장 선거에 나서게 됐지요.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첫 선거인 16대 선거는 안타깝게 2등에 그쳤어요. 그후에 제 17대 회장 선거가 있었어요. 현재 봉착한 에로사항이나 어려움을 파악해서 공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약 7년을 전국연합지회를 찾으며 대화와 조사를 했지요. 당시 또 일이 있어서 당선이 되진 못했죠. 그런데 전 회장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사임하게 되면서, 18대 선거를 하게 됐고 드디어 회장에 당선됐습니다. 표 차이는 2등과 2배 차이로 압도적이었습니다. Q. 정말 축하드립니다. 대한노인회장으로서 보신 국내 노인 분들의 복지 수준은? 수명이 늘면서 사람들이 장수하게 됐지만, 늘어난 수명만큼 경제적 대책은 수립돼 있지 않아요.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연금을 받는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무방비 상태로 노후를 맞이하고 있어요. “노인에게는 한 달 용돈이 최소 30만원은 필요하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어요.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기에는, 대부분의 자녀가 자기 먹고살기도 급급하거나, 양육과 결혼 생활 때문에 노부모를 지원할 수가 없는 벅찬 현실이죠. 한국은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어요. 장애인·아동 복지 등은 사회 각층에서 목소리를 내 복지가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노인들의 경우, “나라가 힘든데 우리까지 목소리를 내냐” 등 상대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노인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함께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야 해요. 1천만 노인 시대가 오는 가운데 노인 복지는 이제 필수가 됐으니까요. 저는 앞으로 정치권에서 일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노인 복지에 대해 정부와 계속해서 소통해 노인 복지를 늘여나갈 계획이에요. Q. 좀 더 구체적으로 개선돼야 할 국내의 노인 복지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쉽게 말하면, 선진국이라 하는 복지국가들은 노인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후하게 주는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딱히 마땅한 복지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요. 최근 각 지자체 별로 교통비 지원을 하는 등 단계별 복지를 하는 곳이 점차 생기고 있기는 하나, 각 지역별로 천차만별입니다. 동시에 노인들에게 한달에 30만원을 지원하는 정책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노인 지원은 노인의 생활 지출을 줄여 기초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한노인회는 앞으로 노인들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첫째,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비를 전국의 모든 노인들에게 제공하자고 제안할 예정입니다. 지하철을 탑승함으로 노인 분들은 자연스레 걷게 되고 운동도 할 수 있죠. 그럼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와 동시에 노인 의료비 지출액(연평균 33조원 상당)도 줄어들죠. 노인들도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기를 원하지, 아픈 상태로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는 싫을 겁니다. 둘째, 종교 단체와의 자매 결연을 통해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대한노인회에서 자금을 마련해 종교 단체 등에 재료값을 제공하고, 노인 분들은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또래 노인들과 어울릴 수도 있게 됩니다. 셋째, 주말에 근무를 원하는 노인들은 주민센터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심심함과 무료함을 덜어주고, 일할 욕구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생활비도 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그 일자리는 청·장년층의 일자리를 뺐는 개념이 아니라, 노인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만들어 제공하는 겁니다. 요즘 청년 일자리를 정부서 많이 강조하는데 그만큼 또 중요한 게 노인 일자리 입니다. 예로 ‘문화재 발굴 사업’과 관련된 일자리의 경우, 청년층보다 노인층에 더 적합한 일자리라고 봅니다. 노인 분들이 청년들보다 흙과 유산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흙을 걷어 내는데에도 더 조심스러워 효과가 있겠죠. 그렇게 ‘노인 전용 일자리’를 탄생시키는 것이죠. 노인들에게 적합한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정말 일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과 환경이 어렵지 않은 이상은 노인들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열악한 분들은 나라에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해줘야겠죠. Q. 노인 연령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맞아요. 유엔은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기준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령화 시대가 돼서 노인 연령을 70세 이상으로 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노인의 기준 연령이 높아지면 동시에 정년퇴직의 연령기준도 높아져야 하기에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모순이 있어요. 모든 계층이 전부 연관이 돼 있는 거죠. 한쪽만 생각하면 다른 한쪽에 피해를 보게 된다는 한계점이 있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봉급 상한제, 차등제 등을 적용해서 유기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인들은 많은 급여가 필요하지 않지만 급여를 적게 받더라도 성취감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거죠. 또한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을 공유하는 등 상담자로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계층의 일자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청년층과 노인층의 삶의 상황과 패턴은 분명히 다릅니다. 노인은 노인으로서 적합한 일자리를 하는 게 잘실합니다. 그렇게 국가도 지출을 최소화하는 거죠. (사진-대한노인회 건물 1층 로비에 붙어 있는 글귀) Q. 한국 사회에서의 ‘노인’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을 ‘늙은이’‘꼰대’라 칭해서 “사회에서 물러나라”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영국 속담에서는 노인을 ‘지혜가 담긴 한 권의 책’이라고 존중하는 ‘공경과 공생’의 문화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처럼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인식의 전환도 시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려면 노인들도 함께 존중 받을 수 있는 인품과 모습을 갖춰 가야겠죠. 최근 고민을 하다가 제가 ‘노인’이라는 단어를 ‘혜인’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 해서 추진하고 있어요. 노인은 단순히 ‘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식을 바꿔 가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경험을 노인들에게 들어서 지혜를 구하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전해 줌으로 뿌듯함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게 각 세대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줄수 있게 말이죠. Q. 고령화 사회와 관련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 노인 인구가 늘면서 홀로 된 노인들을 짝지어 주는 문화도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여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더라고요. 서로 외로움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쉽지는 않아 보였어요. 또한 정치 분야에서는 미국의 경우, 원로 의원을 뽑는 제도가 있습니다. 노인만이 노인의 입장에서 무엇이 불편하고 어려운지 알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노인 문제만 다룰 수 있는 원로 의원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인의 경우, 대부분의 보험을 가입할 수 없는데 이런 부분은 정책 개선을 통해 노인들이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을 따로 개발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 노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저는 정치에 몸 담았던 입장에서 경륜과 경험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인 문제에 대해 현직에 있는 정치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군 이하의 지역에는 노인 인구가 35%이상이 될 거란 전망이 있어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 경륜과 경험 등이 정치에도 적용돼야 진정한 복지 사회가 설립될 수 있다고 믿어요. 최근에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 나라에 진정한 어른이 없다… 예전에 고 김수환 추기경처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수용해 더 옳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김호일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의 화환) Q. 정말 동감합니다. 회장님께선 혹시 인생의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이웃과 사회를 위해 유익한 사람이 되자. 내 스스로가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릴 때 가정의 덕을 크게 보지 못했었어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지요. 매마른 땅을 스스로 일궈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제 자녀들에게도 이 얘기를 늘 해주고 있지요. Q. 한국의 노인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성숙한 노인 복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한 덩어리가 돼 한목소리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단결해야 목소리에 힘이 있고, 노인을 위한 복지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단결하고 단합하기를 호소드립니다. 대한노인회를 중심으로 함께 뭉쳤으면 합니다. 지역 선거 시에도 노인들의 표가 하나가 됐을 때, 정치권에도 목소리를 내고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치인들도 노인들을 의식하고 노인 복지에 더 신경을 쓸 것입니다. 노인 분들에게는 권력·돈보다도 친밀한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노인들끼리 서로 얽히고 얽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즐기면서 살 수가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마련돼야 합니다. Q. 인생에서 가장 회장님께 큰 영향력을 준 사람? 우리 어머니가 평생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자식 둘을 키우기 위해 희생을 많이 하셨죠. 그 희생정신을 값지게 여기면서 저는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가장 큰 교훈이 되신 분이죠. 다시 뵙고 싶네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오늘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국내의 노인 복지를 위해 전심으로 뛰겠습니다. 대한민국 노인 여러분, 늘 지켜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인터뷰] '보라빛청춘, 들꽃 같은 여인아' 가수 국희를 만나다
[인터뷰] '보라빛청춘, 들꽃 같은 여인아' 가수 국희를 만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세월이 가네 청춘이 가네 인생길 가슴만 타네 새 장 속에 갇힌 청춘 던져버리고 북치고 장구치고 살아보잔다“ -국희 '보랏빛청춘' 中 오늘은 꽃처럼 아름다운 트롯 가수 ‘국희’님을 만나 그의 삶을 들어 보았다. 긴말은 생략. 가수의 삶을 느끼기 위해선 노래를 감상하면 된다. 먼저 그녀의 인생 노래를 읊어보자. (사진='보라빛청춘, 들꽃 같은 여인아'를 부른 가수 국희) Q. 안녕하세요. 가수 국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수 ‘국희’입니다. ‘보라빛 청춘, 들꽃 같은 여인아’ 현재까지 두곡을 내서 활동을 해 왔습니다. 저는 가수 생활을 뒤늦게 시작했어요, 평범한 주부이자 두 아들의 엄마로 살다가 50대가 돼서야 가수의 삶을 시작하게 됐죠. Q. 성격이 굉장히 밝게 느껴지는데, 좀 어떠신가요? 제 성격이요? 혼자 있을 때는 좀 덜렁덜렁 해요. 좀 천방지축이에요. 제가 집에서 셋째 딸이에요. 어릴 적 누가 이야기를 하면 꼭 반대되는 말을 했어요. 반항심 때문은 아닌데...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작은 것들에 욕심이 많았어요. 엄마가 무언가를 사오면 꼭 저 혼자 먹었어야 했어요. 성격이 좀 모났기 때문이죠. 아무래도 언니들이 있다 보니 질투가 많았던 듯해요. Q. 가수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음... 학창시절에도 그렇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방황이라고 할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요. 살다가 힘들어서 집을 나와서 살기도 했었죠. 물론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금방 돌아왔지만요. 저는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향이라서 더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장사를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웠는데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처음엔 분식집, 고깃집, 횟집, 다양하게 했지요. 늘 아침에 셔터를 올리고, 치열한 장사를 한 후에 다시 셔터를 닫는 인생을 살았었죠. 그러다 어느 날 삶에 큰 회의를 느끼게 됐어요. “이제 나도 내 삶을 살고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지금은 두 아들이 다 자라서 벌써 한놈은 장가가고, 한놈도 곧 가요. 남편과는 헤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세상을 떠났거든요. 기분이 묘했어요. 어느 제 생일날 아들 내외와 식사를 하는데 큰 아들이 저한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이제 엄마만 가면 된다”고요. 참 의젓하고 든든한 아들들이에요. 큰 아들은 아버지나 오빠 같이 든든한 남자친구 같고, 작은 아들은 묵묵한 딸 같은 친구 같아요. 작은 놈은 엄마가 어질러 놓은 옷까지 다 정리할 정도로 가정적이라니까요. (사진=가수 국희와 국희의 두 아들, 한 며느리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Q. 가장 보람됐던 일은? 제가 가장 잘했던 일은 두 아들을 기른 것도 있지만, 지금은 그를 넘어서 지금 제 자리에서 ‘국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에요.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해요. Q. 목표가 있으시다면? 원래 목표가 5층 건물을 갖는 거였는데,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다 까먹고, 이젠 사라졌네요. 하하... Q. ‘보라빛청춘’은 어떻게 받게 됐는지? ‘보라빛 청춘’은 가사를 받았을 때 가슴이 울컥했어요. 왜냐면... 노래 가사가 제 가슴을 울렸거든요. 사실 저는 원래 노래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장사를 하다가 큰 슬럼프가 와서 좀 쉬려고 하다가 우연히 시작하게 된 거죠. 우연히 알게 된 가수 신태풍 선생님이 계신데, 인연이 되서 곡을 받았아요. 그때 받았던 곡이 첫곡인 ‘들꽃 같은 여인아’에요. Q. 곡을 받으셨을 때, 보라빛 청춘의 어떤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셨을까요. “세월도 가고, 청춘도 가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을 보고 제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나는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짐했죠. 나도 멋진 인생 한번 살아보자고. 다짐 후에 멋진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신기하죠? 신인상도 받고 연예‧예술 시상식에서 모범상도 받았어요. Q.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저희 둘째 언니요. 저는 우리 엄마랑 1시간만 있으면 싸워요. 그런데 언니는 한결같이 어머니와 대화하고 모시더라고요. 언니는 언니인가 봐요. 최근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언니가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됐어요. 또 가수 한분이 생각나는데 '도훈' 선생님께도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이 자리를 들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진=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수 국희) Q. 좋아하시는 곡이나 가수가 있으신지? 주현미 선생님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 집에서 연습하면서 항상 따라 불러요. 또 김용림 가수님 노래를 좋아해요. 집에서도 혼자 노래를 불러요. 요즘은 유튜브로 다 볼 수 있잖아요.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관찰하려고 TV에 연결해서 큰 화면으로 따라 부르면서 연습을 해요. Q. 앞으로 하고 싶으신 일이 있다면? 남은 삶은 계속 가수 '국희'로 살고 싶어요. 두 아들도 결혼을 했고 오롯이 제 자신만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가수 국희로써 이름을 알리고 위해 활동에 전념하고 싶어요. 저는 주현미 선생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요. 늦게 갑작스럽게 시작했으니까요. 누군가 내 노래를 듣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게 전부에요. Q. 다음 곡은 언제쯤 준비가 될까요? 이종민 선생님이라고 계셔요. 그분한테 제가 가사를 드리고 곡을 붙여달라고 부탁했어요. 가사를 좀 더 수정해서 발매할 예정이에요. 제목을 ‘인생노래’라고 짓고 싶은데, 작곡가의 입장에서는 ‘행복의 노래’라고 지으면 어떠시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떻게든 결정되겠죠. 어떤게 나아요? Q. 좋아하시는 곡이나 가수가 있으신지? 주현미 선생님 노래를 정말 좋아해요. 집에서 연습하면서 항상 따라 불러요. 또 김용림 가수님 노래를 좋아해요. 집에서도 혼자 노래를 불러요. 요즘은 유튜브로 다 볼 수 있잖아요.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관찰하려고 TV에 연결해서 큰 화면으로 따라 부르면서 연습을 해요. Q. 앞으로 하고 싶으신 일이 있다면? 남은 삶은 계속 가수 '국희'로 살고 싶어요. 두 아들도 결혼을 했고 오롯이 제 자신만 남았잖아요. 그러니까 가수 국희로써 이름을 알리고 위해 활동에 전념하고 싶어요. 저는 주현미 선생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요. 늦게 갑작스럽게 시작했으니까요. 누군가 내 노래를 듣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게 전부에요. Q. 다음 곡은 언제쯤 준비가 될까요? 이종민 선생님이라고 계셔요. 그분한테 제가 가사를 드리고 곡을 붙여달라고 부탁했어요. 가사를 좀 더 수정해서 발매할 예정이에요. 제목을 ‘인생노래’라고 짓고 싶은데, 작곡가의 입장에서는 ‘행복의 노래’라고 지으면 어떠시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떻게든 결정되겠죠. 어떤게 나아요? Q. 두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제가 생일이었어요. 그전 날에 아들 부부와 식사를 했는데 아들이 “엄마 내일은 뭐해?” 물어보더라고요. 자고 있는데 큰 아들이 온 거예요. 소고기‧미역‧쌀‧간장 등을 사 온 거예요. 엄마가 미역국을 안 먹을 것 같아 만들어 줬데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너무 고마웠죠. “앞으로 더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달라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바람이 있다면, 아들들은 형제니까 우애를 지키며 살겠지만, 며느리들은 피도 안 섞이고 남으로 만났잖아요. 그러니 며느리들끼리 서로 친하게 자매처럼... 다복하게 살면 좋을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인터뷰를 하고 나니까, 저도 사랑이 하고 싶어졌어요. 잔잔한 밀물처럼 살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거친 파도처럼 살아왔거든요. 오직 저만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또 만인이 보는 방송에서 작은 언니랑 작은 형부 자랑을 하고 싶네요. 언니, 형부 사랑해요! (인터뷰 종료)
[영화정보]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피아니스트 포스터 & 연주곡 라인업 공개.
[영화정보]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피아니스트 포스터 & 연주곡 라인업 공개.
[선데이뉴스신문=김건우 기자] 「클래식 애호가들을 열광시킬 음악의 향연.」 베토벤, 바흐, 쇼팽 등 27곡의 클래식 연주와 함께 떠나는 피아니스트 '헨리 콜'과 평론가 '헬렌'의 가을 음악여행을 담은 클래식 뮤직시네마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가 무대공포증을 가진 피아니스트 ‘헨리’의 고독함과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감성 충만한 ‘피아니스트’ 포스터를 공개했다. [사진='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 '피아니스트' 포스터 / 제공=판씨네마] 공개된 포스터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그랜드 피아노와 마주 앉은 ‘헨리’의 실루엣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서 평생을 음악과 함께 해 왔지만 갑작스럽게 겪게 된 무대공포증으로 관객들과 심리적으로 멀어지고 무대 위 외딴 섬처럼 남아버린 ‘헨리’의 고독함이 비주얼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또한 포스터에는 영화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클래식 연주곡 27곡들의 정보도 담겨 있다. 영화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바흐, 슈만, 쇼팽,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위대한 작곡가들부터 스크랴빈, 스카를라티, 스메타나, 조르주 비제, 구스타브 홀스트 등 클래식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들의 곡도 포함되어 씨네필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취향도 완벽하게 만족시킬 영화가 탄생되었다. 주인공 ‘헨리’가 복귀 무대에서 엄청난 중압감을 견디고 힘겹게 연주한 피아노 독주곡은 베토벤의 소나타 23번 ‘열정’이며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갑자기 찾아온 무대공포증으로 연주 중 실수를 하고 마는 곡은 쇼팽 발라드 4번이다. ‘헬렌’의 도움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음악을 다시 즐기게 되는 순간은 조르주 비제의 ‘하바네라’와 함께 했으며 연이은 상실로 지친 헨리의 슬픔을 대변하는 곡은 바흐의 협주곡 D단조, BWV 974이다. 이외에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리스트의 ‘장송곡’,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등 수많은 명곡들이 ‘헨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파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예정이다. 예술적인 감각의 스페셜 포스터와 다양한 연주곡 라인업을 공개한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인터뷰>는 다가오는 11월 19일 전국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인터뷰] 든든한 형과 조금 부족한 동생, 서로를 품은 두 다리··· '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다
[인터뷰] 든든한 형과 조금 부족한 동생, 서로를 품은 두 다리··· '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무엇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요즘따라 기자가 뼈저리게 느끼는 말이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국내에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정말 많다. 누군가는 한걸음에 오르는 ‘계단’도 누군가에겐 오를 수 없는 산이고, 누군가는 매일 볼 수 있는 얼굴도, 누군가에겐 평생 볼 수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2살때 처음 소아마비를 가진 후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해내며 일생을 걸어온 한경열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진=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 Q. 안녕하세요. 회장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과 ‘영등포구 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한경열’이라고 합니다. 영등포구 장애인단체 연합회장도 함께 맡고 있죠. 지체장애3급입니다. 2020년부터 장애등급이 폐지돼 중증장애인(1~3급)과 경증장애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저는 1956년 6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한국전쟁 발발일과 날짜가 같죠. 전쟁 후 온 나라가 파괴됐을 당시 유행했던 소아마비를 2살때 처음 앓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장애를 가지게 됐죠. 다행이 1980년대 후반에 정부에서 장애등급 정책을 마련해 장애인들을 위해 복지카드가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1990~2000년대에 와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점점 늘어났죠. Q. 현재 국내의 장애인에 대한 복지 수준은 어떤가요? 물론 국내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많이 늘었지만, 아직까지 시민들의 인식이 그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워낙 경제가 급성장을 했다보니 생각이 물질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거죠. 최근에는 장애 인식 변화를 위해 관련 단체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 장애를 겪고 힘드셨던 일도 있으셨을텐데,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릴 적 학교에 입학할 때, 부모님께서 삼육재활원(장애인 전문 교육 시설)에 입소를 시키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싫어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죠. 당시 입시제도가 무시험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숭실중학교에 갔습니다. 숭실중학교는 당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녔어요. 학구열이 굉장히 높았죠. 그때까지는 장애에 대안 별다른 편견과 차별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후에 정부에서 한 교육방침이 내려왔는데, 장애인 학우들은 전학을 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때 제가 어머니께 “전학을 해도 되냐”고 여쭈어봤죠. 허락을 맡고 ‘영등포 중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이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체험하게 됐죠. 학교에 소위 노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거의 매일 괴롭힘을 당했어요. 상처도 많이 받았고요. 그때 힘을 키우기 위해서 집에서 돈 되는 것을 몰래 갖다 팔아서 친구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어요. 공부를 안하니 성적은 자꾸 떨어졌죠. 고등학교 때 일명 ‘실내화 사건’이 벌어졌죠. 저는 장애로 일반 신발을 신기 불편해 발목을 잡아주는 신발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영등포 시장에 가서 중고 해병대 군화를 사서 발목을 잘라서 신고 다녔죠. 그런데 어느날 실내화 검사를 한 거예요. 검은색이라서 실내화로는 사용할 수 없어 군화에 하얀 분필을 칠해 통과한 적이 있습니다. 덕택에 교련시간에 교련선생님 기록관 역활도 하게 됐지요. 그후로는 ‘워커’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고교 졸업 때까지 유명했죠. 지금도 이름 말고 별명을 부르는 친구들도 있어요. (사진=한경열 회장의 어린 시절과 사진, [첫번째]맨 오른쪽, [두번째]왼쪽) Q. 사회에 가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죠. 가장 큰 상처는 사회에서 받았어요. 당시 회사에서는 장애인을 잘 안 받아줬으니까… 서초동에 있는 회사에 첫 면접을 보게 됐어요. 들어갈 때는 다리를 잘 숨겨서 어떻게 장애를 걸리지 않았죠. 그런데 나갈 때 한명씩 나가다 보니… 결국 면접관이 알게 됐죠. 면접이 끝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면접관이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친구가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를 했는데, 당시에는 좋게 안 들렸죠. 그렇게 면접실에 다시 들어갔는데, 면접관이 “저희 회사는 아직 몸이 불편할 사람을 채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회사에서 나왔는데, 하늘이 칠흑 같았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면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없더라고요. 화장실에 가서 옷을 벗었어요. ‘나’라는 존재 가치가 없게 느껴졌죠. 근처에 고가도로가 있었어요. 고가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죠. 사회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데 “내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가도로 위에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데 친구 한명이 딱 생각 나더라고요. 서산에서 힘들게 일하는 친구였죠. 그래서 거기로 갔어요. 일숙 좀 하자고 부탁했죠. 10일 정도 지냈죠. “친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래?” 하면서 아니면 자기랑 같이 청과 시장에 나가자고 했어요. 따라 나갔죠. 일하는 모습을 보는데, 녀석이 정말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뭐라도 해야지” 다짐했죠.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뭐 어때?”하고 생각했죠. 집으로 돌아와 “시골에 가야겠다” 다짐했어요. ‘상록수’라는 책이 있어요. 농촌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관련된 책인데, 그 책 내용이 떠올랐죠. “다시, 내 인생을 다시 찾아보자”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어요. 사실, 말씀을 드리면 아버지께 혁띠로 맞을 게 뻔했어요. 알고도 얘기한 거죠. 그런데 왠일인지 아버지께서 때리지 않으시고 “뭐하고 왔냐? 세상 돌아다닐만하데?”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죠. “돼지 키워서 돈을 벌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너 정말 자신있냐?” 하셨어요. 당시 시골에서 돼지를 키워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오류동에 있는 땅을 좀 사셔서 투자를 해주셨어요. 정말 성실히 일했어요. 식당마다 짬밥을 수거하러 다녔어요. 돼지 밥으로. 그때는 면허도 없었는데 운전도 어떻게 배워서 했어요. 그때 뭐가 생겼냐면, 박정희 대통령이 노는 땅에 토지세를 내게 했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돼지를 사러 많이 오게 된 거죠. 그때 수요와 공급의 차이로 돼지고기 파동도 왔어요. 새끼 돼지들이 많이 굶어 죽었어요. Q. 그래서 어떻게 돼셨나요? 사업을 지속하셨나요? 1980년도에 자녀들 대학 보내는 사업으로 귤나무재배와 젖소사육업이 선망이었어요. 때마침 대학에서 우유가공회사를 차려서 일반 낙농가에서 우유 납품을 받고 있었죠. 낙농업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낙농업을 시작해 지역에서 자리매김을 헀어요. 그렇게 결혼도 하게 됐고, 가정도 꾸렸죠. . 그렇게 살다 보니까… 도시생활이 그리워지더라고요. 평생 직장생활을 안하고 살았으니까.. 서울로 올라왔어요. 비슷한 업종을 찾다보니 김치공장을 시작하게 됐어요. 86년 말에 3200만원을 주고 공장을 인수했어요. 다시 도시에 오니까 새로운 문제점이 생겼어요, 바로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죠. 도시에서는 종업원이나 누구나 모든 걸 돈으로 따지니까. 탄산수 장사(약수)도 시작했는데, 적자가 나서 결국은 그만두게 됐어요. 방황을 많이 하게 됐죠. 시장에 가서 구경하다가 집에 들어가고 또 쉬기도 하고… 그러다 어떻게 아는 분의 소개를 받고 ‘오병이어 선교회’라는 곳에 가게 됐어요.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었는데, 학교에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무료로 제공한 거죠. 거기서 차량봉사를 6개월동안 했어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줘야 하잖아요.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다 건물 위에서 아래를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어요. 유동인구가 많았죠. “여기서 뭘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행당초등학교 육교 밑에 핫도그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손님이 꽤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 아주머니에게 부탁했죠. 그렇게 기술을 배웠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핫도그 기술을 가르쳐준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당시 주머니를 다 터니까 24만원이 나왔어요. 리어카하고 이것저것 사니까 딱 떨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사서 골목에 딱 나갔는데 얼굴을 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1+1(원 플러스 원)을 배웠어요. 사실은 잘 못 만들어서, 하나씩 더 주게 된 거였죠. 6개월을 일하고 친구와 오파 무역상을 차렸어요. 그때부터 중국·대만 에 자주 다녀오게 됐죠. 방송에도 한번 나가게 됐는데 악재였죠. 사기를 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시절, 장애인 분들에게 처음으로 기부를 하게 됐어요. 김치 100kg를 지원했어요. 그분들과 친해지면서 ‘사랑 나눔의 집’이었어요. 원장을 3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 한 사건이 터졌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정치적 갈등도 있었고 “이쪽도 문제가 많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원장자리에서 쫓겨났어요. 너무 억울해서 구청에 민원도 넣고, 인권위원회에도 민원을 넣었어요. 자살 충독도 느꼈었죠. 그런데 억울해서 안 죽게 돼더라고요. 그렇게 장애인협회를 찾아갔어요. 가서 협회장이 돼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짐했어요. 처음에는 봉사의 마음보다 복수의 마음이 컸죠. 내 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헀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복수의 마음을 차차 내려놓게 됐어요. (사진=한경열 회장과 가족들의 모습) Q. 그러셨군요. 고생이 정말 많으셨어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는 어떠셨나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 장애인이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구상했어요.. 2015년에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요즘은 장애인 단체 개혁을 위해 1대1 상담도 하고 있어요. 이제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가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노인’과 ‘어르신’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노인은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 맞는 덕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상대가 덕을 느낄 수 있도록 본인도 그만큼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죠.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죠. 의학으로 치료가 어려운 병도 있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보여지는 모습보다 내면의 모습이에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포장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제 두 다리를 이렇게 명명해요. 한쪽의 든든한 형과, 나머지 한쪽의 좀 부족한 동생이 어우러져 나를 이끌어왔다고. 내가 나를 위로해주고 살아가는 거죠. 이렇게 자기자신을 응원하고 나를 내가 높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도와줬던 존재가 있었다면? 6살 때부터 신앙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많이 의지하게 됐지요. 매 순간마다 찾아갔었어요. 항상 가장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요즘은 우리 아들에게 참 고마워요. 아들이 집에 생활비를 꾸준히 보태주고 있어요. Q. 국내 장애인 단체에 가장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힘의 논리로 힘을 가진 사람, 동정의 대상이 앞장섰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장애인 단체장분들도 학력이 높아졌어요. 배움이 인격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이도 젊어졌어요. 과거에는 지도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회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변화가 필수가 됐어요. 단체장들도 같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특별히 제가 사는 영등포구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없어요. 그래서 관련 사업을 하려고 구청에 요청할 예정이에요. 국회의원들과도 만나고 장애인 단체를 모아서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장애인 복지 시설을 만들어 장애인 케어,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하게 만들 거예요. 서로를 돌봐주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생기면, 장애인 단체의 응집력이 생길 것이라 믿어요. 또한 장애인분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목소리를 내고, 장애인들에 대한 지속가능한 복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Q. 지방자치(영등포구)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체현일 영등포 구청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 장애인 분야의 교육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등포 관내에 장애인 학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청장님이 전에 교육계에 있었던 만큼 취약계층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편의시설 기술지원센터를 잘 활용해줬으면 합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위탁을 해준 것인데도 구청에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센터장으로 있지만 구청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기술지원센터와 협의해서 거리와 도로에 무장애 시설을 일상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셋째, 우리 장애인 중에 한 사람이 구의원이 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어떻게 이뤄내는지 보여주고 그 목소리를 피력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편향적인 정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Q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얘기하고 나니까 쑥스럽네요. 앞으로도 지금의 위치에서 장애인분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늘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현대공영㈜ 진종신 회장,"멸사봉공(滅私奉公)정신으로 협회원들의 권익 옹호"
[인터뷰]현대공영㈜ 진종신 회장,"멸사봉공(滅私奉公)정신으로 협회원들의 권익 옹호"
[선데이뉴스신문=이계춘 기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와 안전에 직결되는 소방시설감리와 소방안전분야에서 40여 년 온몸을 던져 온 진짜 소방 찐이 나타났다. 소방시설업계의 확실한 미래보장! 찐 찐 찐 리더 현대공영㈜ 진 종신 회장을 만나본다. 일찍이 서른 나이에 소방직 공무원으로 공직에서 소방행정을 배웠고, 그 후로 건설회사와 소방감리회사를 설립 한평생을 소방 관련 분야에 일해 오고 있으며 지금 회사는 경남 창원시에 본사를 두고 전국 각지의 건설 현장에서 소방,전기,통신,감리를 맡아 불철주야 150여명의 직원들과 땀을 흘리며 철저하게 점검하고, 완벽한 감리를 해야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며, 우리 소방 인은 그 거룩한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첨병이 되자고 격려하며 앞서가는 리더 십으로 섬기는 리더의 포근한 사랑으로, 마치 다정한 고향 형님 같은 모습으로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는 진 종신회장은 그러나 소방감리 현장에서는 성난 호랑이처럼 매서운 독수리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십으로 철저하게 안전제일을 외치며 오늘 전국적인 규모로 회사를 키워 왔고, 비록 본사는 창원에 있지만 서울과 인천에 지사를 두고 동에 번쩍 서에 뻔쩍 홍길동처럼 번개맨 처럼 부지런히 뛰고 또 뛰며 전국의 현장을 발로 누비는 진회장은 그래도 지친 기색없이 늘 스마일리더로 웃음의 리더로 노래도 부르며 싱글벙글 손수 운전하는 솔선수범하는리더로 살아가는 진 종신회장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교회 장로로, 직전 전국 교회 남전도회 회장으로, 또 하나의 큰 리더십을 보이며, 또한 지금까지 전 세계 각국을 돌며 구제와 봉사에 앞장서 왔고, 특히나 가난한 아프리카에 수없는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의 우물 파주기 운동을 하며 생명의 물을 제공해오며, 의약품과 의류를 기부해 온 기부 천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온 진 종신에게 얼마 전 10월 5일 미국의 명문 에반겔리아 대학교에서 그 공로와 업적을 인정받아 자랑스러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는데 진짜 멋진 사나이 진 종신 박사님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인생 착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맞아! 맞아! 리더는 저래야 돼! 하며 박수가 절로 나온다. 가정에서도 언제나 자상하게 대화하고 고 늘 웃는 일등 아빠요, 최고의 남편으로 가족들의 사랑과 응원을 받고 있으며, 또 같이 일하는 동종업체 소방 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재촉으로 생각도 안해 온 한국소방시설협회장 제4대 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됐는데 다른 후보들은 몇 년 준비해 온 반 면 정작 진 종신 본인은 이제 한 달도 채 안되어, 상대적으로 많이 어려운 가운데 출발했는데 전국의 69명의 대의원들을 찾아 지금 전국을 몇 바퀴 째 돌며 외로운 선거 운동을 하고 있는데 기적적으로 전국의 대의원들 마다 바람이 불고 있어, 아이고 반갑습니다. 진짜 일꾼이 나타났네요! 정말 믿고 맡길만한 회장감이 나타나 행복합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어 엄청 힘이 난다는 기호 1번 진 종신 후보는 보이소! 됩니다. 내 진 종신 반드시 4대 한국소방시설협회장 됩니다. 이번에 반드시 당선되어서 우리 한국소방시설협회를 이 진 종신이가 어떻게 발전 변화시켜 놓는가? 똑똑히 보여드리겠습니다. 협회장은 절대로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도 아니 되며 철저하게 멸사봉공(滅私奉公)정신으로 협회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하며, 대 정부 대 국회와 관계기관하고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고 설득시키고 이해와 협력을 구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투쟁해야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 나의 인생 지론이기에 나는 나를 믿습니다. 꼭 그렇게 할 겁니다. 하며 강한 자신감으로 두 주먹 불끈 쥐는 진 후보가 진짜 믿음직 해 보인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한국소방시설협회 회관 세종시 확정 건립과 소방연구소 건립을 위해 저는 정부 지원이 안되면 제 주변 지인들과 독지가들의 수백억 원의 후원 기금 약속을 확실하게 받아놓고 감히 이번 회장 출마에 나섰노라며 당찬 공약을 내건 진 종신 후보는 바쁩니다! 바빠요. 전라도로 간다며 달려가는 그 뒷 모습을 보며 한국소방시설협회와 전국 9천여 업체에 11만여 회원과 가족들의 행복한 미래가 훤하게 보이는 듯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하고 물어보니 진 후보는 부디 이번 선거가 학연, 지연, 금품 등 작은 생각, 얕은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한 협회 조직과 협회원들의 발전과 복리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진짜 일꾼 선택하는 큰 생각 깊은 생각의 선거가 되기를 바란다며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번개처럼 바람처럼 동분서주 바삐 달려가는 한국 소방시설 업계의 떠오르는 대변인! 찐 사나이! 찐찐찐 진 종신회장이 으라랏차! 우리 소방시설인들의 명품 심부름꾼으로 지금 달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