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3,371건 ]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울라지보스또크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 : 주체8(1919)년 2월 로씨야의 연해변강인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 3.1인민봉기의 불길은 중국 동북지방과 함께 로씨야의 연해변강에서 급속히 타번져 갔다. 로씨야연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독립만세투쟁은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시위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주체8년 3월 15일 울라지보스또크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렸다. 이틀 후인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뒤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은 여러 대의 자동차에 갈라 타고 시위대렬의 앞장에 서서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부르면서 군중의 사기를 힘 있게 고무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반일시위운동은 18일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였다. 이날 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은 조선인마을로부터 도시중심을 향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물밀듯이 쏱아 져 나갔다. 그들은 시위투쟁과 함께 각지에 반일격문들을 뿌렸으며 <조선독립선언서>룰 외국 령사들에게 배포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언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고무 추동하였다.”(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190쪽) 북한이 ‘울라지보스또크’라고 하는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삼위(海參崴) 또는 해삼시(...)라 불렀는데 실제로 해삼이 많이 나는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1860년에 최초로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사(韓人史)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69년에는 한반도 북녘 땅의 기근(饑饉)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며 인구가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지역 내 콜레라가 발생하자 러시아 정부에서는 조선인의 위생상태를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1910년대 초반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내로 이주, 신한촌이라는 한인 거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신한촌의 1914년 당시의 인구는 무려 63,000명이었습니다. 후일 이 곳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가장 먼저 임시정부격인 단체인 국민의회가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위 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은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한촌’에서의 ‘독립운동집회’는 블라디보스토크 3·1운동에 불을 붙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서 3·1운동사를 다시 써야 되지 않을까요? 구한말부터 고려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아무르 만 연안의 개척리(現 해양공원 일대)에 한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다 1911년 러시아측이 콜레라를 이유로 시내 북쪽 언덕에 한국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면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을 이루었습니다.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하바롭스카야 거리 일대로, 현재는 신한촌 기념비와 서울 거리란 이름의 작은 소로만이 존재합니다. 과거 필자가 고려인 3세인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現 하바로프스크 국립 인문대학교)의 박춘식교수와 함께 찾았던 신한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슬픈 노래’ 였습니다. 이런 노래도 찾아야 합니다. 3·1운동 100주년에 정부가 좀 더 세심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교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을 다시 방문해 들은 ‘슬픈 노래’는 더 슬펐습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 일제와 연해주 총독의 압박 등으로 한인 사회가 붕괴되고, 자유시 참변등을 위시로 한 각종 독립군들의 사고로 인해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는 말살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에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거주 중이던 모든 한인들을 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비사(悲史)도 정확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바로프스크의 독립운동! 또 다른 비극의 땅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중심지입니다. 아무르강(Amur River) 또는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강(江)은 상류의 실카 강과 오논 강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세계 8위), 유역면적은 205만 2000 km²(세계 10위)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 타타르 해협으로 들어갑니다. 러시아어 ‘아무르’는 에로스라는 뜻으로 같은 강을 두고 중국인들이 ‘검은 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데 반해 러시아인은 ‘사랑의 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州)의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부대! 다반촌 일대에는 소코프가 이끌었던 러시아 빨치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다반촌 주민들은 이들을 몰래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다반촌을 점령한 일본군은 주민들이 빨치산과 연락을 한다고 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들은 다반촌의 한인학교를 점거하여 1달 가량 머무르다가 불태워 버리고는 빨치산의 공격을 염려하여 하바로프스크로 떠났는데, 가는 길에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교전 중에 전원 사망했습니다. 필자가 하바로프스크에 체류하면서 방문했던 곳들...아무르 강(江)!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한 흑룡강이 하바롭스크까지 이어져, 아무르강이라는 이름으로 동해와 오호츠크해로 흘러가는 장강(長江)!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하바로프스크의 역 앞에 서있는 하바로프의 동상! 레닌광장과 광장 오른쪽 하바로프스크 주(州)정부 청사! 그곳에서 담소를 나눴던 부지사에 대한 추억, 고려인들이 김치를 팔던 재래시장...최근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관광여행’을 다녀온 연구원은 3·1운동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극동 지역 행정중심지를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포항시는 2019년 광물자원이 풍부한 제조업 중심도시인 하바로프스크시를 방문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류를 추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바로프스크의 묻혀있는 3·1운동사를 밝혀줄 지방자치단체는 없을까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로마노프 총장과 박춘식 교수를 그려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바른미래당 이언주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는 세계 제1의 검열국가를 꿈꾸는가”
바른미래당 이언주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는 세계 제1의 검열국가를 꿈꾸는가”
[선데이뉴스신문=이종록 기자]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2월 11일 SNI 필드차단기술을 도입하여 불법음란물 및 불법도박 등 불법정보를 보안접속(https) 및 우회접속방식으로 유통하는 해외 인터넷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차단하기로 하였다고 바른미래당 이언주 국회의원은 2월 19일(화) 오후 3시에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했다. 이 의원은 브리핑에서 이번 SNI 필드 차단기술 도입이 종래의 URL 차단, DNS 차단 기술을 이용한 접속차단기술과 비교해서 SNI방식만이 이용자의 통신패킷을 읽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DNS (서비스) 차단 능은 DNS 서버만 감시하면 되는 방법이나 새로운 방식은 보안 접속을 위해 존재하는 SNI 필드 영역마저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SNI를 이용한 차단은 모든 인터넷 트래픽을 감시 해야 하는 방법이다. 이는 국가권력이 인터넷상 개인의 보안, 비 보안 모든 영역의 정보를 감시할 권능과 수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빅브라더와 같이 국민의 사생활을 엿보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고 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붕괴를 막기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의 정치적 견해표현이나 의견형성을 차단하기 위해 국민의 통신을 감청하고, SNS, 인터넷을 차단한다. 중국에서는 구글이나 네이버도 사용할 수 없다. 세계최고 수준의 얼굴인식 기술과 위치정보 분석능력을 가진나라가 중국이다. 이 모든게 국가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갖고 다른 생각과 의견, 행동은 분열을 야기하고 체제를 위협한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개인정보, 위치정보, 신용정보, 인터넷 상의 의견, 사진 등 모든 트래픽을 독점적으로 수집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세계 제1의 검열 국가요, 국민의 사생활이 철저히 감시통제 되는 곳으로 통한다. 만약 한국도 국가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인터넷을 통제하고자 한다고 하면, 한국도 중국처럼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범죄 예방이나 국민의 안전 등을 위해 수행하는 적절한 감시와 검열은 사회 보호를 위한 필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이러한 감시 등은 필연적으로 통신의 자유, 프라이버시,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자기결정권 등 국민의 권리침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망사업자를 통한 접속차단 시스템은 저작자의 표현의 자유와 이용자들의 통신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 방통위는 모호한 기준으로 포괄적 심의권한을 가지고 사이트의 임의적 원천차단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규제행정력을 비대화하려고 하고 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 구체적 침해행위 중심으로 수사를 하고 처벌하는 방식의 규제를 하고 있고, 유럽의 경우 저작권 침해를 중심으로 사이트 차단을 하되 법원의 명령을 통해 한다고 한다. 이번 방통위 등의 계획은 국가가 국민의 사생활에 개입하면서 심지어 윤리의 한계와 기준까지 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치게 국가가 주인노릇, 선생님 노릇하려는 것이다.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가가 국민의 주인처럼행사하면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 이성과 감정, 시장의 자율 통제기능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알고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이것이 정의라는 오만과 독선에서 나오는 발상이며 국민주권주의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는 국민의 봉사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국민에게 겸손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라고 했다.
민주당, 도시재생특별위원회 공식 출범..."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인 도시재생뉴딜사업 탄력 전망"
민주당, 도시재생특별위원회 공식 출범..."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인 도시재생뉴딜사업 탄력 전망"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 기자] 더불어민주당 도시재생특별위원회(이하 도시재생특위)가 2월19일(화) 출범식을 갖고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국회 본청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개최된 출범식엔 이해찬 당대표와 박영선 위원장, 김정우·김철민 부위원장, 황희 간사위원을 비롯해 원내 의원들과, 외부 민간·자문위원 등이 참석했다. 출범식은 박영선 위원장의 개회사, 이해찬 대표의 축사 및 임명장 수여 순으로 진행됐다. 박영선 위원장은 개회사를 통해“도시재생을 추진하는데 있어 발생 가능한 문제들을 조정하고 정부와 현장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위원회를 이끌어 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이해찬 대표는“도시 노후화에 따라 철거나 재건축으로 원주민은 떠나고 이주민이 유입되어 동네문화,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며“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공동체가 유지되고 원주민들이 떠나지 않는 방향으로 추진 되도록 특위가 방향을 잘 잡아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도시재생 특위가 공식적으로 출범함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핵심정책 중 하나인 도시재생뉴딜사업이 보다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도시재생뉴딜사업은 국가적 현안인 도시쇠퇴에 대응해 지역 주도로 도시공간을 혁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으로 지난 2017년7월에 도입되었다. 2017년 시범사업 지역으로 68곳을 선정했으며 지난해에도 99곳을 선정해 추진 중에 있다. 다음은 도시재생특위 구성 현황이다 위원장 : 박영선 부위원장 : 김정우, 김철민 간사 : 황희 위원 : 강병원, 고용진, 맹성규, 박재호, 박주민, 원혜영, 윤준호, 송기헌, 김병욱 민간위원 : 곽동진, 박성준, 박헌섭, 이기상, 이주은, 정선주, 조중연, 홍성용, 장수진 자문위원 : 오윤균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오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신한촌(新韓村)’의 태생적인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앞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소개한 경남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정은상교수(현재 언론출판원장)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유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이수한 학자입니다. 러시아 지역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서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를 들어보았습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혁명광장에서 서북쪽으로 ‘오케안스키 대로’를 따라 약 1km를 가다보면 우측에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약 500m를 더 직진하다보면 좌측으로 ‘콤소몰스카야’ 거리가 나오고, 그 끝에는 ‘이만거리’와 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만거리’와 ‘적기대로’가 만나는 지점에 ‘이그나트’라고 하는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백화점은 2002년 8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공식방문 중에 쇼핑을 하고 방명록에 서명을 남긴 상업센터로써 유명해진 곳입니다. 이 백화점 뒤편부터 시작되는 조그마한 언덕으로 구성된 구역에 ‘서울거리’, ‘아무르스카야’, ‘하바롭스카야’, ‘톰스카야’, ‘소유즈나야거리’가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항일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 일명 ‘신한촌’입니다. ‘서울거리’는 과거 ‘신한촌’의 흔적을 증명해 주는 행정명칭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서울거리’에는 유일한 가옥이 한 채 남아있고, 이 가옥에는 현재 두 가족이 각각 입주해 살고 있습니다. ‘신한촌’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은 ‘구한촌(舊韓村)’ 혹은 원한촌(元韓村)이 있었다는 논리의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지만,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러시아 자료 중 마트베예프의 <블라디보스토크시 소사>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조선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노령 땅으로 불법적으로 두만강을 건너서 연해변강으로 흘러들어간 조선인 유민들이 북으로 삶의 터전을 이어나가다가 블라디보스토크시 건설 작업장에서 잡역부나, 부두 노동자로서 정착해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거주하는 곳마다 대부분 조선에서처럼 집안에 돼지우리를 만들어 가축과 함께 살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매우 비위생적으로 보였고, 전염병의 발병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위원회에서는 조선인들을 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시켜서 집단거주 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한촌(元韓村)’이나 ‘구한촌(舊韓村)’의 존재는 굳이 표현하자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던 한인들을 말함입니다. 조선인들을 어디로 격리시킬 것인가를 궁리하던 끝에 러시아인들은 공동묘지보다 더 먼 곳으로 집단이주 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1860년대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 외딴 언덕이 있었던 곳이 공동묘지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바로 과거 공동묘지 터였던 것입니다. 공원으로 조성할 당시에 이곳에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시신과 유물이 함께 발굴된 적이 있었습니다. 발굴된 유물과 유품들은 현재 ‘아르세니예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삶’보다 더 먼 ‘죽음’의 경계 밖에 ‘신한촌’을 두게 된 것이었습니다.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라는 어원은 원래 ‘카레이스카야’, 즉 ‘한국의’ 혹은 ‘한국인의’란 뜻의 형용사와 ‘슬라보다’(러시아에서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국유지에서 사유지화한 곳에 자유농민이 자리 잡고 사는 큰 촌락을 의미)가 결합한 합성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명 “똥돼지” 마을이 ‘신한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후일 한인들 스스로 ‘독립문’이란 것도 건설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37일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 전까지 조선인 학교와 조선인 극장을 설립하여 민족어 교육과 문화 창달에 힘썼던 것입니다. 일제하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메카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어와 노래 및 극장문화의 산물은 곧 이곳 ‘신한촌’이 원천인 셈입니다. 단행본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저자는 “1.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한인들의 집단 거주처 신한촌...신한촌은 1911년 이후 한인들이 집단거주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신한촌은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명인 이상설, 연해주 일대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재형 그리고 이동휘 등 항일민족 애국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3·1운동 시발점이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계획들이 수립되기도 한 역사적인 곳이었지만, 4월 참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은 이어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울라지보스또크 : 로씨야의 원동지방 남부에 있는 도시. 연해변강 소재지이다. 인구 64만 3,000명(1992년). 조선 동해 뾰뜨르웰리끼 만으로 뻗는 무라비요브 아무르스끼 반도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울라지보스또크는 하바롭스크와 함께 로씨야 원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원동지방이 로씨야의 령토로 된 1860년에 로씨야는 여기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였다. 그 후 로씨야에서 태평양 연안에 있는 최대의 항구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879년에 흑해 연안의 오데싸와 정기항로가 개설되고 1903년에 씨비리철도의 종착점으로서 로씨야의 중심부와 련결되면서 울라지보스또크의 경제적 지위가 올라갔다. 19세기 말에 대학(동방학원)이 창립되였으며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18년 4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일본군대의 강점 하에서 이 도시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이 학살 및 추방되였다. 도시에는 기계, 선박 수리, 전자기구, 식료공장들과 여러 개의 대학, 극장, 박물관들, 수많은 과학연구기관들이 있다. 울라지보스또크는 로씨야 태평양함대의 기본기지이다. 항구수역은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얼지만 항구는 쇄빙선의 사용으로 년중 운영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화물 취급량에 있어서 나호드까항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철길과 자동차길로 하바롭스크, 나호드까, 우쑤리스크와 련결되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대백과사전(28)>,190쪽) 1991년 2월 필자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하바롭스크’역(驛)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울라지보스또크’로 항했습니다. 열차의 침대칸에서 동행한 박춘식 교수와 이야기 꽃을 피우며 11시간을 달렸습니다. 위 북한 자료의 ‘울라지보스또크’는 ‘블라디보스토크’이고, ‘하바롭스크’는 ‘하바로프스크(하바롭스크) 입니다. 박 교수는 고려인 3세로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교수였습니다. 위의 ’울라지보스또크‘에 대한 설명에는 ’시베리아‘를 ’씨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사전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설명을 적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어: Владивосто́к) :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 3천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인 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은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 함대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부가 있는 군항(軍港) 도시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폐쇄도시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대한민국<위키백과>) 그때 필자가 탑승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시아의 우랄산맥 동부의 첼랴빈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약 7,400km의 대륙횡단철도인데 정식명칭은 ‘대시베리아철도’입니다. 남한의 <위키백과>는 “일반적으로는 이 노선을 포함해 야로슬라브스키 역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의 9,297km 구간을 지칭하며, 또한 넓은 의미로는 몽골 횡단 철도·만주횡단철도(동청철도)·바이칼-아무르 철도(제2 시베리아 횡단 철도)까지 포함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라고 부른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까지의 구간은 1956년부터 2001년까지는 모스크바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모스크바~야로슬라블~키로프~페름~예카테린부르크를 경유하는 노선을 사용하였다. 2001년부터는 그보다 남쪽의 모스크바~블라디미르~니즈니노브고로드~키로프~페름~예카테린부르크 노선을 이용한다...동양과 서양을 걸치는 노선이기 때문에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몽골과의 직통운전도 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필자는 과거 경남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홍보부장·국제학술교류위원회 총간사를 겸했었는데, 1991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와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現 하바로프스크 국립 인문대학교)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방문 목적은 두 대학교와 맺은 자매결연 및 학술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 직항로(直航路)가 없어 일본 니가타공항에서 소련항공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들어갔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로마노프 총장 · 교수들과 두 차례 협의회를 가졌고, 하바로프스크州 부지사 접견 등등. 그리고 박춘식 교수와 방문한 극동주립대학교에서는 여성 부총장 · 교수들과 두 차례 협의회를 가졌는데, 부총장은 안중근 의사 등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신한촌’ 등을 꼭 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경남대학교는 한ㆍ러 수교 전인 1989년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와 자매관계를 맺었으며, 현재의 극동국립연방대학교와 2014년 9월 새로운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고히 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경남대학교와 극동국립연방대학교는 앞으로 두 대학 간 교류ㆍ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1989년, 경남대학교가 주관한 ‘대한민국 대학생 1기 소련연수단’이 결성되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18개 대학의 24명이 선발되었습니다. 연수단의 총학생회장으로는 경남대학교 경영학과 정은상 학생이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에서 현대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경남대학교로 교수 재직하면서 언론출판원장을 맡고 있고 러시아어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국내 최고의 러시아통”이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최근 그로부터 ‘박춘식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울라지보스또크’에의 추억(追憶)이 되살아났고....명복(冥福)을 빌었습니다.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크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91년에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려면 KGB(국가보안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극동국립대학교 부총장의 권유로 찾아본 신한촌 등과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이야기는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어 갈 예정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석좌교수,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중국 랴오닝성 선양 방문 “한국홍보 활동”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석좌교수,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중국 랴오닝성 선양 방문 “한국홍보 활동”
[선데이뉴스신문]세계평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중국 연변대 한한국 (세계평화사랑연맹 이사장)석좌교수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30일 국외 독립투쟁의 주무대였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를 방문해 한국홍보에 적극 나섰다. 한 교수의 따르면 이번 중국방문은 지난 8일 ‘中단체 관광객 유치활동’ 일환으로 중국 상하이, 절강성 녕파시샹산시 등에 이어 2차 방문길에 세계평화사랑연맹 이동은 위원장(동황토산㈜, 고려호간단 대표)와 ㈜에이치코어 이의준 대표가 2박 3일 일정으로 함께 동행 했다. 한 교수 일행은 중국 랴오닝성 문화여행국 위밍웬 주임, 랴오닝성 교통청 판공실 텐옌 주임, 선양시 훈난구 경제처 류제 처장, 랴오닝성 갤럭시 국제창업원복무유한회사 전형석 회장, 류빈 대표이사 등을 만나 중국인들에게 친숙한 한글로 그린 중국평화지도와 중국평화스토리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여주며 한중 우호활동을 펼쳤다. 한 교수는 "올해는 3.1운동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를 맞아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이 되었고, 탄생배경에 대해 이해해야만이 미래의 평화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독립운동가들과 선조들의 헌신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국외 독립투쟁의 주무대였던 상해에 이어 두 번째로 랴오닝성 선양시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위밍웬 랴오닝성 문화여행국 주임은 “랴오닝성은 한국의 역사로 볼 때 유서 깊은 곳이다. 수년의 걸쳐 무릎 꿇고 완성한 중국평화지도제작 영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한한국 세계평화작가님의 일행 랴오닝성 방문을 계기로 中韓 문화·관광·경제교류가 더욱 활성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어 류제 선양시 훈난구 경제처장은 "中韓 화평을 기원하기 위해 중국평화지도 역작을 완성시킨 한한국 세계평화작가님께서 선양시 훈난구를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올 하반기 랴오닝성국립박물관에서 한한국세계평화지도특별전이 개최되기를 바라고, 관계자들과 협의해 나가겠다”다고 의지를 밝혔다. 한글 중국평화지도 대작은 쓰는데 만 꼬박 4년(2004년 8월 8일~2008년 8월 8일)이 걸렸다. 가로 7m, 세로 4m50cm 하루 12시간씩 슬좌작업으로 수 만 자의 한글 세필붓글씨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 중국의 평화(시인 윤소천) 시 등을 기록했다. 또한, 밑줄 없이 쓰면서 가로, 세로줄이 0.1mm 오차도 없이 초대형 중국지도를 완벽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성과 작품의 가치로 볼 때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이유로 중국 인민일보와 新華社, CCTV 등 중국 40여개 언론방송에서 이 중국 평화지도 작품을 집중 소개한바 있다. 게다가 중국지도 작품 안에는 일필로 쓴 용(龍)과 여러 사람 형상이 '中'자와 '國' 사이에 'PEACE' 라는 영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인주에 손도장을 수천 번 찍어 중국 소수민족의 평화·화합·도약을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김포시 홍보대사인 한 홍보대사는 제4회 경기도를 빛낸 자랑스런운 도민상과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賞, 김포시 문화상 등 70여 차례 상을 수상했고, 25년에 걸쳐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6종의 한글서체를 개발 디자인해 38개 국가 '한글 세계평화지도'를 세계최초로 경기도 김포에서 완성해 나가고 있다. 현재 그는 UN 22개국 대표부와 프랑스, 북한, 대한민국국회, 문화체육관광부 국내 5개도청 등에 수억 원의 사비를 들여 제작한 희망·화합·통일·환경·평화지도 작품들을 기증해, 지구촌 곳곳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계평화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민주평화당 대변인 홍성문 “문재인 정부가 꿈꾼 나라다운 나라가 탈조선인가”
민주평화당 대변인 홍성문 “문재인 정부가 꿈꾼 나라다운 나라가 탈조선인가”
[선데이뉴스신문=이종록 기자]오늘 청와대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한 간담회에서 청년들이 한국에서 취직이 안 된다고 헬조선이라고 불평하는데 그런 학생들 왕창 뽑아서 인도네시아에 한글 선생님으로 보내고 싶다며 아세아 신남방은 희망과 미래, 발전이 있는 국가 라고 주장했다고 민주평화당 대변인 홍성문은 1월 28일(월) 오후 4시 30분에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했다. 홍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문재인 정부가 꿈꾼 나라다운 나라는 청년들이 탈조선하는 나라 였는가? 문재인 정부의 주장은 대한민국에 청년들이 텅텅 빌정도로 중동 진출을 하라는 박근혜 정부의 주장과 다를 게 없다고 했다. 국민들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정권을 바꿨더니 문재인 정부는 나라 살면 살기 좋다고 주장한다. 이게 무슨 해괴한 주장인가?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희망과 미래, 발전이 있는 국가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여당이 정치개혁 경제개혁 검찰개혁 등 국가대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개혁은 하기 싫고, 경제를 살리는 것도 여의치 않으니 청년들과 중장년층에게 탈조선을 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라고 말했다. 민주평화당은 문재인 정부의 참담한 현실 인식 수준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인식에 대하여 문재인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민중당 신창현 대변인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이석기 전 의원 및 양심수 석방 촉구”
민중당 신창현 대변인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이석기 전 의원 및 양심수 석방 촉구”
[선데이뉴스신문=이종록 기자]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즈음해 삼일절 특별사면에 양심수가 포함될지 모두가 지켜보는 중이다. 진보‧시민사회 진영은 물론, 종교계와 양심적 지식인 등 촛불 정부가 촛불정부답길 바라는 모든 이들 이석기 전 의원과 모든 양심수의 특별사면을 기원하고 있다고 민중당 신창현 대변인은 1월 25일(금) 오후 2시에 국회 정론관에서 발표했다. 신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지난 10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지금, 양심수 석방은 시대의 요구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의 정신은 양심수 석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첫째 양심수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만들어낸 구시대의 유물이다. 국가보안법은 일제 강점기의 치안유지법에서 비롯되었다. 일제 강점기 국민의 사상과 말, 행동을 옥죄었던 국가보안법이 지금도 양심수를 만들어 내고 옭아매고 있다. 구시대 유물이 새 시대의 출발을 가로막게 두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3.1운동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 민주와 인권의 가치를 외친 행동이었다.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싸웠던 선조들은 46,948명이나 투옥됐다. 근대 최초의 양심수였던 셈이다. 적폐정권의 폭압에 맞서 평화와 통일, 평등세상을 말했던 이들이 아직 감옥에 있다. 오늘날의 양심수다. 그들의 양심적 행동은 100년 전 거리에 나선 민중과 다를 게 없다고 강조했다. 셋째, 100년 전 임시정부 수립의 정신도 양심수 석방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정강3조에 일체의 정치범을 특별히 석방함을 명기했다. 새 나라, 새 정부는 그간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을 제 자리로 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적폐정권이 가둔 양심수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을 계속해 가둬두는 것은 새로운 100년의 출발을 가로막는 일이다 고 했다. 양심수 석방, 시대의 요구이며 명분도 충분하다. 정부는 누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판문점 선언이 열어낸 새로운 시대에 문재인 정부가 더 이상 양심수 석방에 눈감은 정부 라는 오명을 떠안지 않길 바란다. 100년 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석기 전 의원을 비롯한 양심수를 석방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②하얼빈과 뤼순의 안중근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②하얼빈과 뤼순의 안중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조선대백과사전26>]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중근! “안중근(1879.9.21.-1910.3.36).. 1907년 겨울 고향을 떠나 로씨야 원동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반일의병 투쟁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는 반일의병대의 참모총장으로서 부대와 함께 1909년 6월 은덕에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의병대는 그 후 회령에서의 일제침략군과의 격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타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는 조선침략에 앞장 선 일본의 고위급 반동정치가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첫 번째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 테로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이 무렵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대중공보사>에서 독립운동자 리강, 우덕순 등과 손을 잡았으며 그 후 류동하, 조도선과도 알게 되어 뜻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해 10월 이또가 로씨야 재무대신 꼬꼬브쪼브와 만주침략문제를 둘러싸고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이또를 처단할 결심 밑에 면밀한 계획을 짰다. 조도선, 우덕순이 책임진 조가 채가구역에서 이또를 처단할 계획을 실패하자 혼자서 할빈을 담당한 안중근”(518쪽)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 일제와 로씨아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 군중 속에 끼여 홈으로 들어갔다.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그리고 쓰러진 원쑤들 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위 사전, 518쪽)/ 안중근의 활동무대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북한:울라지보스또크)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것입니다. 과거 필자가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국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에 학술교류 협의차 방문했을 때,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들었는데, 전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하얼빈은 한순간의 역사 현장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그 증거입니다. 2014년 대한민국 외교부는 하얼빈역에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 철도국이 건립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고 밝혔었습니다. 기념관은 의거 현장 바로 앞에 있던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200㎡ 규모로 건립됐으며, 중국 정부 관리 하에 무료로 개방되었습니다. 참관자들은 유리창 너머로 의거 현장인 플랫폼을 살펴보는 한편, 안중근 의사의 생애 및 의거사진과 설명자료 등을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안중근 의사 의거 현장 천장에 '안 의사, 이등박문 격살 사건 발생지'라는 문구도 붙였는데, 기념관 입구 외부 벽면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간에 맞춰 오전 9시 30분에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려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을 비밀리에 진행해온 끝에 2014년 1월 19일 첫 공개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에는 쑨야오 흑룡강성 부성장과 송시빈 하얼빈시 시장 등 중국 측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신화통신은 사설을 통해 '안중근 기념관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후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뮤지컬 영웅 보면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본이 역사를 반성하는 날은 언제일까".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국 가면 꼭 가봐야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최근 하얼빈을 방문했던 한 중국통은 하얼빈 신역 신축 현장을 소개하면서, “지금 현재 하얼빈역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신역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 측에선 서둘러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재개관을 위한 협의를 중국정부와 하여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앞서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에서 소개한 감옥 이야기에 ‘사형장’을 덧붙입니다. 사형장 한복판에 안 의사 영정이 놓인 의자가 있습니다. 처형 직전 어머니 조마리아(?~1927) 여사가 보낸 흰 한복 차림입니다. 교수대에는 올가미가 매달려 있습니다. 처형장은 예전에 박물관 창고·직원식당으로 사용됐습니다. 1997년 다롄 상수도 공사도면이 발견되면서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됐고, 2006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습니다. 교수대 맞은편에 안 의사가 어머니·아내 등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걸려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 없기로 하자.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처형실 곁에는 큼직한 전시관이 있습니다. 안 의사 흉상을 중심으로 양쪽 벽면 가득히 안 의사의 유묵(복사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에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哈爾濱)에서 한국 침략을 획책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탄환 세 발로 쓰러뜨린 안 의사는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이감됐습니다. 이듬해 3월 26일까지 144일간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자서전 <안응칠(安應七) 역사>(가슴과 배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어릴 적 이름이 응칠이었다)를 완성했고,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동양평화론>(미완성) 앞부분을 썼습니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힘을 합쳐 근대문명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의군-푸른 영웅의 시대'가 2019년 하반기 KBS에서 방송된다고 합니다. 하얼빈시를 비롯 상해, 북경의 메이저급 미디어회사들과 한중 공동투자 및 중국 내 촬영에 참여...북미지역의 글로벌플랫폼회사까지! 이를 계기로 안 의사의 공적이 널리 알려지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은 유해 발굴입니다. 안 의사가 "내가 죽은 뒤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고 했는데...하얼빈과 뤼순 곳곳을 샅샅이! 2019년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2018년 7월 3일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이낙연 국무총리, 한완상 전 통일교육부총리)가 문화역 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출범식을 갖고,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 주년 기념사업의 추진방향과 종합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2018년 1월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에 대해 언급하며 “기념관에는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의 삶과 정신을 하나하나 충실히 담아낼 것”이라며 “중국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내년 4월을 목표로 중국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는 2019년! “지금 3·1운동과 임시정부(임정) 100년을 기념하려는 건, 지난 100년간 우리가 겪은 강대국 ‘갑질’의 고통, 일제 강점 36년에 대한 분노, 분단 73년을 통탄하는 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 분단 극복, 평화 통일의 문을 여는 일과 직결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국내 언론매체들은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필자는 많은 주제 중에서 떠오르는 사건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이 난 사건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義擧)입니다. 우선 뤼순(여순) 감옥이 있는 중국의 다렌을 찾아봅니다. 위진 시대에는 삼산이라 불렀고, 후일 고구려에 속하였습니다. 당나라 때는 삼산포, 명청 시대에는 삼산해구, 청니와구라고 칭했습니다. 1880년대에 청조가 다롄만 북쪽 해안에 포대를 쌓아 올려,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삼국 간섭의 대상으로서 청으로부터 관동주(다롄, 뤼순 등)를 조차한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따르니」(Дальний; 「멀다」)라고 명명했습니다. 뤼순에 있는 함대와 요새의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또 무역의 거점 항구로 정비하여 파리를 모델로 한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습니다. 일본은 고지도의 중국어의 지명 「다롄만」에서 나온 「다롄」을 도시명으로 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명의 다리니와 발음이 비슷하게 연관됩니다. 다렌의 뤼순(여순) 감옥에 도착! 입구는 러일전쟁과 안중근, 신채호 선생님 등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선조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으러 온 사람들로 있었습니다. 뤼순(여순) 감옥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 야전병원을 증·개축하여 조선 청나라 러시아의 독립투사와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입니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먼저 저장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다 보니 감옥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감옥의 축소모형, 머리말과 죄수복이 있었고, 더 안쪽에는 죄수들의 수용소와 안중근 의사의 감방이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을 했던 독방은 감옥을 경비하는 간수부장 사무실 옆에 있으며 감방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붓과 벼루 먹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있었습니다. 감옥의 내부를 보고 나서, 강제노역 공장 15곳을 보았습니다. 더 들어가자 교형장이 나왔고, 그 옆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죽은 시체들만 드나든다고 해서 ‘시구문’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 추모관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났습니다. 추모관에는 안 의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어머니가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매년 추모제가 열립니다. 필자가 갔을 때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제’! [북한 <조선대백과사전 26>] “안중근(1879.9.21.-1910.3.36) : 일제의 조선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렬사.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하는 한편 말타기와 총쏘기를 련습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였다. 일제의 조선침략책동이 날로 더욱 로골화되고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타락이 극도에 이르러 망국의 위협이 짙어 가고 있던 정세에서 안중근은 나라의 독립을 지켜 싸울 방책을 모색하고 해외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1903년에 중국 상해와 치프 등지를 돌아보았다. 일제침략자들이 1904년 로일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고 1905년에는 침략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해 내자 애국적 의분을 참지 못한 안중근은 반일구국투쟁에 용감히 나섰다...1909년 10월 26일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 일제와 로씨아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 군중 속에 끼여 홈으로 들어갔다.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 그자를 구원하려고 모여 온 일제의 가와시마 령사, 모리 서기관, 다나까 만철리 사장을 차례로 쏘았다. 그리고 쓰러진 원쑤들 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518쪽)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남한의 기록! 그는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습니다. 필자는 본(本) “①다렌 뤼순 감옥과 안중근”에 이어 ②하얼빈 역과 안중근”을 추후 집필할 예정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殉國)를 비롯한 그의 삶을 재조명할 것입니다. ※사족(蛇足) : 지금 한 여당 국회의원 부친이 독립유공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정가(政街)를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총 6차례에 걸쳐 보훈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2018년 광복절에 훈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공자가 틀림없으니까 수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데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문득 ‘한출첨배(汗出沾背)’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등에 진땀이 흐른다’ 함이니 지극히 부끄럽다는 뜻입니다. “수치심(羞恥心)은 모든 도덕(道德)의 원천(源泉)”이라고 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