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843건 ]
하만진 한국기부운동연합회 회장, 2020위대한대한민국국민대상 ‘사회봉사공헌대상’ 수상
하만진 한국기부운동연합회 회장, 2020위대한대한민국국민대상 ‘사회봉사공헌대상’ 수상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하만진 한국기부운동연합회 회장이 지난 21일 ‘2020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대상’에서 ‘사회봉사공헌대상’을 수상했다. (사진=하만진 한국기부운동연합회 회장)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대상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전국기자협회‧글로벌기자연맹’이 주관한 이번 표창은 정치·경제·사회·문화·스포츠·예술·기업·공직 부문에서 평소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확고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기업과 개인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하만진 한국기부운동연합회 회장은 수상 소감에서 “어릴적 가난한 시절을 보내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미래를 이끌어 나갈 우리 학생들만큼은 마음껏 공부하고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했다. 이어 “소외계층을 위해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지속적인 공헌활동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따뜻한 정을 나눠야 겠다는 생각에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하 회장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박사 과정 수료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자격 획득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사)한국장애인 미래경남협회 후원회장. 과거 포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20년 경상남도 도지사 표창 ▲2010, 2017년 환경부장관 표창 ▲2017년 고려대학교 자랑스러운 정책인상 ▲2013년 서울특별시 의회 의장상 ▲제9기 국민추천포상 대통령 표창수상. 이 외에도 하 회장은 유수한 단체에 셀 수 없는 기부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이범희 (주)바이오맥스 회장, 2020위대한대한민국국민대상 ‘바이오산업발전대상’ 영예 얻어
이범희 (주)바이오맥스 회장, 2020위대한대한민국국민대상 ‘바이오산업발전대상’ 영예 얻어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이범희 (주)바이오맥스 회장이 지난 21일 ‘2020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대상’에서 ‘바이오산업발전대상’의 영예를 얻었다. (사진=이범희 (주)바이오맥스 회장[중앙])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대상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전국기자협회‧글로벌기자연맹’이 주관한 이번 표창은 정치·경제·사회·문화·스포츠·예술·기업·공직 부문에서 평소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확고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기업과 개인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이범희 회장이 이끄는 (주)바이오맥스는 건강 기능 식품 전문 기업으로 한방바이오산업을 주 사업으로 하고 있다. 본사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 다양한 약초와 엄선된 원료로 직접 제품을 생산한다. 또한 외국의 우수한 원료들을 수입해 끝없는 개발과 연구로 고객의 욕구를 파악한다. 그렇게 근본 해결점을 찾는 방법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한다. 바이오맥스와 함께 걸어온 이범희 회장은 업적은 다음과 같다. ▲2018 국제이주교류협회 및 국제융복합산업경영연구소 창립총회 ▲제품기획 ▲건강비즈니스모델개발 ▲국제이주민 미팅 진행 및 해외 바이어 유대관계 형성 ▲바이오맥스 테크노파크 공장등록 ▲제품연구개발 및 생산 ▲대한민국 제40-2019-005727호 특허출원 ▲주식회사 바이오맥스 설립 ▲국제융복합산업경영연구소 설립 ▲국제이주교류협회 설립 ▲중소기업 인증(제0010202037422) ▲Grand Open 행사 ▲한방세트 제품출시 ▲ 바이오맥스 인터내셔널 설립 ▲한방세트 라인 기획 및 연구개발 ▲이피미 상표등록(제40-1587051호) ▲기업부설 연구소 인증(제2020111670호). 이 회장은 수상 소감을 통해 “이 자리에서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 현대의학의 문제점은 환자 한 사람의 직업이나 환경은 배제하고 만성질환자라 할지라도 환부에만 치료를 집중하다 보니 병의 근본치료를 놓치기 쉽다”며 “급성병도 있지만 만성질환은 대부분 생활에서 오는 병이기에 급한 불을 끄기 보다는 미리 예방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래는 인간이 다치거나 병든 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에만 그치치 않고 B/S(Before Service), 즉 예방의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 “바이오맥스는 자연속에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필수물질을 연구하고 분석해 제품을 개발함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앞으로도 국민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본 시상식은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방역수칙, 마스크 착용, 방역기계배치 등을 지키며 진행됐음을 알려드립니다.
[인터뷰] 1천만 노인사회… 노인과 공생하는 나라 만들기,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인터뷰
[인터뷰] 1천만 노인사회… 노인과 공생하는 나라 만들기,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인터뷰
(사진=김호일 대한노인회 회장이 '혜인(慧人)' 글씨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상꼰대’ ‘틀딱충’ ‘늙은악마’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다. 노인들은 과거 가난과 전쟁의 아픔를 견디고 오늘날 경제 10위권 대한민국을 이끌어 낸 주역의 세대지만, 이제 세대의 갈등 속 화석으로 남겨진지 오래다. 노인들은 이제 갈곳 없이 길을 배회하는 떠돌이의 신세로 남았다. OECD국가 중 노인빈곤률, 노인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기록한 대한민국.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며 웃어른을 공경했던 우리의 문화는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이를 어느 한 계층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세태를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또한 이제 노인 인구 1천만 이상의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최근 10월 취임한 김호일 대한노인회 회장과 함께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사단법인 대한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호일’입니다. 이전에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노인 인구 1천만 이상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있죠. 노인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의원때 ‘국회 노인복지 정책 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었습니다. 그렇게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게 됐죠. 그렇게 지금은 대한민국 노인 분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3번째 출마만의 일입니다. Q. 대한노인회장에 출마하시게 된 계기는? 의원직을 마치고 난후 제가 거주하는 아파트 경로당에서 노인분들과 어울리기 위해 경로당에 갔었어요. 그런데 당시 입주자 대표가 노인분들의 호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65세 이상 노인분들 명단을 뽑아서 선물도 돌리고, 같이 대화를 나누며 그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지요. 당시 주변에서 “국회의원 때부터 노인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으니, 자리를 하나 맡으셔서 노인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습니다. 해서 대한노인회 중앙회장 선거에 나서게 됐지요. 대의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첫 선거인 16대 선거는 안타깝게 2등에 그쳤어요. 그후에 제 17대 회장 선거가 있었어요. 현재 봉착한 에로사항이나 어려움을 파악해서 공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약 7년을 전국연합지회를 찾으며 대화와 조사를 했지요. 당시 또 일이 있어서 당선이 되진 못했죠. 그런데 전 회장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사임하게 되면서, 18대 선거를 하게 됐고 드디어 회장에 당선됐습니다. 표 차이는 2등과 2배 차이로 압도적이었습니다. Q. 정말 축하드립니다. 대한노인회장으로서 보신 국내 노인 분들의 복지 수준은? 수명이 늘면서 사람들이 장수하게 됐지만, 늘어난 수명만큼 경제적 대책은 수립돼 있지 않아요.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연금을 받는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무방비 상태로 노후를 맞이하고 있어요. “노인에게는 한 달 용돈이 최소 30만원은 필요하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어요.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기에는, 대부분의 자녀가 자기 먹고살기도 급급하거나, 양육과 결혼 생활 때문에 노부모를 지원할 수가 없는 벅찬 현실이죠. 한국은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어요. 장애인·아동 복지 등은 사회 각층에서 목소리를 내 복지가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노인들의 경우, “나라가 힘든데 우리까지 목소리를 내냐” 등 상대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노인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함께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야 해요. 1천만 노인 시대가 오는 가운데 노인 복지는 이제 필수가 됐으니까요. 저는 앞으로 정치권에서 일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노인 복지에 대해 정부와 계속해서 소통해 노인 복지를 늘여나갈 계획이에요. Q. 좀 더 구체적으로 개선돼야 할 국내의 노인 복지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쉽게 말하면, 선진국이라 하는 복지국가들은 노인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후하게 주는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딱히 마땅한 복지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요. 최근 각 지자체 별로 교통비 지원을 하는 등 단계별 복지를 하는 곳이 점차 생기고 있기는 하나, 각 지역별로 천차만별입니다. 동시에 노인들에게 한달에 30만원을 지원하는 정책안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노인 지원은 노인의 생활 지출을 줄여 기초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대한노인회는 앞으로 노인들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첫째,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비를 전국의 모든 노인들에게 제공하자고 제안할 예정입니다. 지하철을 탑승함으로 노인 분들은 자연스레 걷게 되고 운동도 할 수 있죠. 그럼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와 동시에 노인 의료비 지출액(연평균 33조원 상당)도 줄어들죠. 노인들도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기를 원하지, 아픈 상태로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는 싫을 겁니다. 둘째, 종교 단체와의 자매 결연을 통해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대한노인회에서 자금을 마련해 종교 단체 등에 재료값을 제공하고, 노인 분들은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또래 노인들과 어울릴 수도 있게 됩니다. 셋째, 주말에 근무를 원하는 노인들은 주민센터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심심함과 무료함을 덜어주고, 일할 욕구를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생활비도 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그 일자리는 청·장년층의 일자리를 뺐는 개념이 아니라, 노인에게 알맞은 일자리를 만들어 제공하는 겁니다. 요즘 청년 일자리를 정부서 많이 강조하는데 그만큼 또 중요한 게 노인 일자리 입니다. 예로 ‘문화재 발굴 사업’과 관련된 일자리의 경우, 청년층보다 노인층에 더 적합한 일자리라고 봅니다. 노인 분들이 청년들보다 흙과 유산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흙을 걷어 내는데에도 더 조심스러워 효과가 있겠죠. 그렇게 ‘노인 전용 일자리’를 탄생시키는 것이죠. 노인들에게 적합한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정말 일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과 환경이 어렵지 않은 이상은 노인들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열악한 분들은 나라에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해줘야겠죠. Q. 노인 연령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맞아요. 유엔은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기준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령화 시대가 돼서 노인 연령을 70세 이상으로 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노인의 기준 연령이 높아지면 동시에 정년퇴직의 연령기준도 높아져야 하기에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모순이 있어요. 모든 계층이 전부 연관이 돼 있는 거죠. 한쪽만 생각하면 다른 한쪽에 피해를 보게 된다는 한계점이 있어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봉급 상한제, 차등제 등을 적용해서 유기적으로 기업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인들은 많은 급여가 필요하지 않지만 급여를 적게 받더라도 성취감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거죠. 또한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을 공유하는 등 상담자로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계층의 일자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거죠. 청년층과 노인층의 삶의 상황과 패턴은 분명히 다릅니다. 노인은 노인으로서 적합한 일자리를 하는 게 잘실합니다. 그렇게 국가도 지출을 최소화하는 거죠. (사진-대한노인회 건물 1층 로비에 붙어 있는 글귀) Q. 한국 사회에서의 ‘노인’에 대한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을 ‘늙은이’‘꼰대’라 칭해서 “사회에서 물러나라”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영국 속담에서는 노인을 ‘지혜가 담긴 한 권의 책’이라고 존중하는 ‘공경과 공생’의 문화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처럼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인식의 전환도 시급한 상황입니다. 그러려면 노인들도 함께 존중 받을 수 있는 인품과 모습을 갖춰 가야겠죠. 최근 고민을 하다가 제가 ‘노인’이라는 단어를 ‘혜인’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 해서 추진하고 있어요. 노인은 단순히 ‘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식을 바꿔 가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의 경험을 노인들에게 들어서 지혜를 구하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지혜를 전해 줌으로 뿌듯함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게 각 세대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줄수 있게 말이죠. Q. 고령화 사회와 관련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 노인 인구가 늘면서 홀로 된 노인들을 짝지어 주는 문화도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여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더라고요. 서로 외로움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쉽지는 않아 보였어요. 또한 정치 분야에서는 미국의 경우, 원로 의원을 뽑는 제도가 있습니다. 노인만이 노인의 입장에서 무엇이 불편하고 어려운지 알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노인 문제만 다룰 수 있는 원로 의원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인의 경우, 대부분의 보험을 가입할 수 없는데 이런 부분은 정책 개선을 통해 노인들이 가입할 수 있는 보험을 따로 개발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 노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저는 정치에 몸 담았던 입장에서 경륜과 경험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인 문제에 대해 현직에 있는 정치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군 이하의 지역에는 노인 인구가 35%이상이 될 거란 전망이 있어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 경륜과 경험 등이 정치에도 적용돼야 진정한 복지 사회가 설립될 수 있다고 믿어요. 최근에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 나라에 진정한 어른이 없다… 예전에 고 김수환 추기경처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수용해 더 옳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김호일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의 화환) Q. 정말 동감합니다. 회장님께선 혹시 인생의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이웃과 사회를 위해 유익한 사람이 되자. 내 스스로가 살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릴 때 가정의 덕을 크게 보지 못했었어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했지요. 매마른 땅을 스스로 일궈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제 자녀들에게도 이 얘기를 늘 해주고 있지요. Q. 한국의 노인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성숙한 노인 복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한 덩어리가 돼 한목소리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단결해야 목소리에 힘이 있고, 노인을 위한 복지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단결하고 단합하기를 호소드립니다. 대한노인회를 중심으로 함께 뭉쳤으면 합니다. 지역 선거 시에도 노인들의 표가 하나가 됐을 때, 정치권에도 목소리를 내고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치인들도 노인들을 의식하고 노인 복지에 더 신경을 쓸 것입니다. 노인 분들에게는 권력·돈보다도 친밀한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노인들끼리 서로 얽히고 얽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즐기면서 살 수가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마련돼야 합니다. Q. 인생에서 가장 회장님께 큰 영향력을 준 사람? 우리 어머니가 평생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자식 둘을 키우기 위해 희생을 많이 하셨죠. 그 희생정신을 값지게 여기면서 저는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가장 큰 교훈이 되신 분이죠. 다시 뵙고 싶네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오늘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국내의 노인 복지를 위해 전심으로 뛰겠습니다. 대한민국 노인 여러분, 늘 지켜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광복회 김원웅 회장, 보훈처의 상임위 변경은 역사의식 결여된 무지의 결정체”
“광복회 김원웅 회장, 보훈처의 상임위 변경은 역사의식 결여된 무지의 결정체”
[선데이뉴스신문=이종록 기자]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오늘 11월 16일(월) 오후 1시 50분에 국회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4.19 및 5.18 민주단체와 함께 윤주경 의원(국회 국방위원회)이 대표 발의한 ‘국가보훈처 소관 상임위 변경 안’을 규탄하는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는 국회 국방위원회는 지난 9일 국가보훈처를 소관하는 상임위원회를 정무위원회에서 국방위원회로 변경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찬성 의결하고 운영위원회로 넘겼다. 23명의 국회의원과 함께 이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윤주경 의원(국민의힘)은 “정무위원회에서 보훈처 업무가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후순위로 밀리고 있기 때문에, 소관 상임위를 국방업무와 밀접한 국방위로 변경하고자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보훈정책에서 독립, 민주유공자를 소외시키려는 의도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과 민주 보훈정책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국방위원회로 보훈처가 이관되면 관련 유공자들의 예우가 한층 열악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윤주경 의원은 법안 제안이유에서 “국가보훈처는 특수임무유공자, 고엽제후유의증환자, 제대군인에 대한 지원 등 군과 관련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는 식으로 호국단체를 중시하면서 독립, 민주유공자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 호국, 민주는 대한민국 애국의 세 기둥이며 보훈정책의 핵심”이라고 밝혔듯이, 독립유공자와 4.19혁명유공자, 5.18민주유공자는 당당히 이 나라 보훈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명색이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다는 윤주경 의원이 독립, 민주 유공자들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한 채 어떠한 사전협의나 동의도 없이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데 대해 우리는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민홍철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보훈처 소관 상임위를 변경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찬성 의결한 데 대해서도 실로 황당한 심경을 억누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보훈정책은 군인, 경찰, 공무원 위주로 운영되어 왔으며, 보훈대상자 역시 대다수가 군인, 경찰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광복회와 4.19혁명, 5.18민주유공자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홀대받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고 강조했다. 주최측은 이어서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정부는 독립, 민주유공자의 처우를 개선하고 앞으로 늘어날 민주유공자와 국가사회발전 공로자 등을 감안하여 새로운 보훈체계를 도입하고 있으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담당했던 보훈처 업무를 시민사회수석실로 변경하여 보훈정책의 문민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위원회 의원들이 보훈처 소관 상임위를 일방적으로 변경하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모순이며 역사의식이 결여된 무지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했던 친일 세력들이 해방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민주인사들을 탄압해온 참담한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끝으로 돌이켜보면, 국방부에서 시민학살 계엄군을 국가유공자로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한 것은 조국독립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헌신했던 애국 열사들의 명예를 짓밟는 폭거였다. 이러한 과오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개선의 노력 없이 또다시 과거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7개 독립, 민주유공자 단체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회와 보훈처가 잘못된 보훈정책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노력을 적극 기울여 주기를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고 하면서 하나 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국회 운영위원회에 넘어온 국방위원회의 국회법 개정안을 즉각 폐기하라! 둘 반민주적 악법을 발의한 국민의힘 윤주경 의원과 민홍철 국방위원장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즉각 사퇴하라! 셋 편향된 보훈정책을 개선하여 독립, 민주유공자와 유가족이 영예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합당한 배상과 예우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광복회 회장 김원웅, 4.19민주혁명회 회장 박종구, 4.19혁명희생자유족회 회장 정중섭, 4.19혁명공로자회 회장 강영석,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 김영훈,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 김이종, 5.18구속부상자회 회장 문흥식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 보석 허가... '건강악화 우려, 성실함 인정'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 보석 허가... '건강악화 우려, 성실함 인정'
[선데이뉴스신문=박민호 기자] 감염법예방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보석이 허가됐다. (사진=신천지에수교회 이만희 총회장) 수원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김미경)는 12일 감염병예방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 총회장에 대해 전자장치 부착과 주거지 제한, 보석보증금 1억원 납입을 조건으로 보석신청을 인용 결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주요 증인에 대한 증인신문 및 서증조사 등 심리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돼 범죄 증거 인멸의 우려가 크지 않은 점, 고령인 피고인이 구속 상태에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보이는 점, 그간 성실히 재판에 출석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보석 허가 이유를 설명했다. 이로 이 총회장은 치료를 받으며 재판에 임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 8월 그가 구속된 후 3개월 만이다. 신천지 예수교회 측은 법원의 결정을 환영하며 “걱정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천지예수교회는 이 총회장의 보석 이후에도 현재처럼 재판에 성실하게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올 2월 대구지역 코로나19 확산에 대해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할 것이며, 또한 잘못된 혐의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진실을 밝혀 나갈 것”이라며 “더불어 지금도 방역에 힘쓰는 보건당국 관계자 여러분께 거듭 감사를 드리며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오는 16일부터 코로나19 감염 후 완치된 신천지 대구교회 신도 4천명이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위한 혈장 공여에 나설 예정이다.
[인터뷰] 든든한 형과 조금 부족한 동생, 서로를 품은 두 다리··· '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다
[인터뷰] 든든한 형과 조금 부족한 동생, 서로를 품은 두 다리··· '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무엇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요즘따라 기자가 뼈저리게 느끼는 말이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국내에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정말 많다. 누군가는 한걸음에 오르는 ‘계단’도 누군가에겐 오를 수 없는 산이고, 누군가는 매일 볼 수 있는 얼굴도, 누군가에겐 평생 볼 수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2살때 처음 소아마비를 가진 후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해내며 일생을 걸어온 한경열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진=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 Q. 안녕하세요. 회장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과 ‘영등포구 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한경열’이라고 합니다. 영등포구 장애인단체 연합회장도 함께 맡고 있죠. 지체장애3급입니다. 2020년부터 장애등급이 폐지돼 중증장애인(1~3급)과 경증장애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저는 1956년 6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한국전쟁 발발일과 날짜가 같죠. 전쟁 후 온 나라가 파괴됐을 당시 유행했던 소아마비를 2살때 처음 앓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장애를 가지게 됐죠. 다행이 1980년대 후반에 정부에서 장애등급 정책을 마련해 장애인들을 위해 복지카드가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1990~2000년대에 와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점점 늘어났죠. Q. 현재 국내의 장애인에 대한 복지 수준은 어떤가요? 물론 국내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많이 늘었지만, 아직까지 시민들의 인식이 그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워낙 경제가 급성장을 했다보니 생각이 물질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거죠. 최근에는 장애 인식 변화를 위해 관련 단체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Q. 장애를 겪고 힘드셨던 일도 있으셨을텐데,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릴 적 학교에 입학할 때, 부모님께서 삼육재활원(장애인 전문 교육 시설)에 입소를 시키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싫어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죠. 당시 입시제도가 무시험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숭실중학교에 갔습니다. 숭실중학교는 당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녔어요. 학구열이 굉장히 높았죠. 그때까지는 장애에 대안 별다른 편견과 차별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후에 정부에서 한 교육방침이 내려왔는데, 장애인 학우들은 전학을 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때 제가 어머니께 “전학을 해도 되냐”고 여쭈어봤죠. 허락을 맡고 ‘영등포 중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이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체험하게 됐죠. 학교에 소위 노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거의 매일 괴롭힘을 당했어요. 상처도 많이 받았고요. 그때 힘을 키우기 위해서 집에서 돈 되는 것을 몰래 갖다 팔아서 친구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어요. 공부를 안하니 성적은 자꾸 떨어졌죠. 고등학교 때 일명 ‘실내화 사건’이 벌어졌죠. 저는 장애로 일반 신발을 신기 불편해 발목을 잡아주는 신발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영등포 시장에 가서 중고 해병대 군화를 사서 발목을 잘라서 신고 다녔죠. 그런데 어느날 실내화 검사를 한 거예요. 검은색이라서 실내화로는 사용할 수 없어 군화에 하얀 분필을 칠해 통과한 적이 있습니다. 덕택에 교련시간에 교련선생님 기록관 역활도 하게 됐지요. 그후로는 ‘워커’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고교 졸업 때까지 유명했죠. 지금도 이름 말고 별명을 부르는 친구들도 있어요. (사진=한경열 회장의 어린 시절과 사진, [첫번째]맨 오른쪽, [두번째]왼쪽) Q. 사회에 가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죠. 가장 큰 상처는 사회에서 받았어요. 당시 회사에서는 장애인을 잘 안 받아줬으니까… 서초동에 있는 회사에 첫 면접을 보게 됐어요. 들어갈 때는 다리를 잘 숨겨서 어떻게 장애를 걸리지 않았죠. 그런데 나갈 때 한명씩 나가다 보니… 결국 면접관이 알게 됐죠. 면접이 끝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면접관이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친구가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를 했는데, 당시에는 좋게 안 들렸죠. 그렇게 면접실에 다시 들어갔는데, 면접관이 “저희 회사는 아직 몸이 불편할 사람을 채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회사에서 나왔는데, 하늘이 칠흑 같았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면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없더라고요. 화장실에 가서 옷을 벗었어요. ‘나’라는 존재 가치가 없게 느껴졌죠. 근처에 고가도로가 있었어요. 고가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죠. 사회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데 “내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가도로 위에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데 친구 한명이 딱 생각 나더라고요. 서산에서 힘들게 일하는 친구였죠. 그래서 거기로 갔어요. 일숙 좀 하자고 부탁했죠. 10일 정도 지냈죠. “친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래?” 하면서 아니면 자기랑 같이 청과 시장에 나가자고 했어요. 따라 나갔죠. 일하는 모습을 보는데, 녀석이 정말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뭐라도 해야지” 다짐했죠.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뭐 어때?”하고 생각했죠. 집으로 돌아와 “시골에 가야겠다” 다짐했어요. ‘상록수’라는 책이 있어요. 농촌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관련된 책인데, 그 책 내용이 떠올랐죠. “다시, 내 인생을 다시 찾아보자”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어요. 사실, 말씀을 드리면 아버지께 혁띠로 맞을 게 뻔했어요. 알고도 얘기한 거죠. 그런데 왠일인지 아버지께서 때리지 않으시고 “뭐하고 왔냐? 세상 돌아다닐만하데?”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죠. “돼지 키워서 돈을 벌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너 정말 자신있냐?” 하셨어요. 당시 시골에서 돼지를 키워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오류동에 있는 땅을 좀 사셔서 투자를 해주셨어요. 정말 성실히 일했어요. 식당마다 짬밥을 수거하러 다녔어요. 돼지 밥으로. 그때는 면허도 없었는데 운전도 어떻게 배워서 했어요. 그때 뭐가 생겼냐면, 박정희 대통령이 노는 땅에 토지세를 내게 했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돼지를 사러 많이 오게 된 거죠. 그때 수요와 공급의 차이로 돼지고기 파동도 왔어요. 새끼 돼지들이 많이 굶어 죽었어요. Q. 그래서 어떻게 돼셨나요? 사업을 지속하셨나요? 1980년도에 자녀들 대학 보내는 사업으로 귤나무재배와 젖소사육업이 선망이었어요. 때마침 대학에서 우유가공회사를 차려서 일반 낙농가에서 우유 납품을 받고 있었죠. 낙농업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낙농업을 시작해 지역에서 자리매김을 헀어요. 그렇게 결혼도 하게 됐고, 가정도 꾸렸죠. . 그렇게 살다 보니까… 도시생활이 그리워지더라고요. 평생 직장생활을 안하고 살았으니까.. 서울로 올라왔어요. 비슷한 업종을 찾다보니 김치공장을 시작하게 됐어요. 86년 말에 3200만원을 주고 공장을 인수했어요. 다시 도시에 오니까 새로운 문제점이 생겼어요, 바로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죠. 도시에서는 종업원이나 누구나 모든 걸 돈으로 따지니까. 탄산수 장사(약수)도 시작했는데, 적자가 나서 결국은 그만두게 됐어요. 방황을 많이 하게 됐죠. 시장에 가서 구경하다가 집에 들어가고 또 쉬기도 하고… 그러다 어떻게 아는 분의 소개를 받고 ‘오병이어 선교회’라는 곳에 가게 됐어요.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었는데, 학교에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무료로 제공한 거죠. 거기서 차량봉사를 6개월동안 했어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줘야 하잖아요.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다 건물 위에서 아래를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어요. 유동인구가 많았죠. “여기서 뭘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행당초등학교 육교 밑에 핫도그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손님이 꽤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 아주머니에게 부탁했죠. 그렇게 기술을 배웠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핫도그 기술을 가르쳐준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당시 주머니를 다 터니까 24만원이 나왔어요. 리어카하고 이것저것 사니까 딱 떨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사서 골목에 딱 나갔는데 얼굴을 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1+1(원 플러스 원)을 배웠어요. 사실은 잘 못 만들어서, 하나씩 더 주게 된 거였죠. 6개월을 일하고 친구와 오파 무역상을 차렸어요. 그때부터 중국·대만 에 자주 다녀오게 됐죠. 방송에도 한번 나가게 됐는데 악재였죠. 사기를 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시절, 장애인 분들에게 처음으로 기부를 하게 됐어요. 김치 100kg를 지원했어요. 그분들과 친해지면서 ‘사랑 나눔의 집’이었어요. 원장을 3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 한 사건이 터졌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정치적 갈등도 있었고 “이쪽도 문제가 많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원장자리에서 쫓겨났어요. 너무 억울해서 구청에 민원도 넣고, 인권위원회에도 민원을 넣었어요. 자살 충독도 느꼈었죠. 그런데 억울해서 안 죽게 돼더라고요. 그렇게 장애인협회를 찾아갔어요. 가서 협회장이 돼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짐했어요. 처음에는 봉사의 마음보다 복수의 마음이 컸죠. 내 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헀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복수의 마음을 차차 내려놓게 됐어요. (사진=한경열 회장과 가족들의 모습) Q. 그러셨군요. 고생이 정말 많으셨어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는 어떠셨나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 장애인이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구상했어요.. 2015년에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요즘은 장애인 단체 개혁을 위해 1대1 상담도 하고 있어요. 이제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가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노인’과 ‘어르신’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노인은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 맞는 덕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상대가 덕을 느낄 수 있도록 본인도 그만큼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죠.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죠. 의학으로 치료가 어려운 병도 있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보여지는 모습보다 내면의 모습이에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포장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제 두 다리를 이렇게 명명해요. 한쪽의 든든한 형과, 나머지 한쪽의 좀 부족한 동생이 어우러져 나를 이끌어왔다고. 내가 나를 위로해주고 살아가는 거죠. 이렇게 자기자신을 응원하고 나를 내가 높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도와줬던 존재가 있었다면? 6살 때부터 신앙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많이 의지하게 됐지요. 매 순간마다 찾아갔었어요. 항상 가장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요즘은 우리 아들에게 참 고마워요. 아들이 집에 생활비를 꾸준히 보태주고 있어요. Q. 국내 장애인 단체에 가장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힘의 논리로 힘을 가진 사람, 동정의 대상이 앞장섰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장애인 단체장분들도 학력이 높아졌어요. 배움이 인격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이도 젊어졌어요. 과거에는 지도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회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변화가 필수가 됐어요. 단체장들도 같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특별히 제가 사는 영등포구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없어요. 그래서 관련 사업을 하려고 구청에 요청할 예정이에요. 국회의원들과도 만나고 장애인 단체를 모아서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장애인 복지 시설을 만들어 장애인 케어,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하게 만들 거예요. 서로를 돌봐주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생기면, 장애인 단체의 응집력이 생길 것이라 믿어요. 또한 장애인분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목소리를 내고, 장애인들에 대한 지속가능한 복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Q. 지방자치(영등포구)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체현일 영등포 구청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 장애인 분야의 교육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등포 관내에 장애인 학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청장님이 전에 교육계에 있었던 만큼 취약계층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편의시설 기술지원센터를 잘 활용해줬으면 합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위탁을 해준 것인데도 구청에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센터장으로 있지만 구청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기술지원센터와 협의해서 거리와 도로에 무장애 시설을 일상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셋째, 우리 장애인 중에 한 사람이 구의원이 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어떻게 이뤄내는지 보여주고 그 목소리를 피력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편향적인 정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Q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얘기하고 나니까 쑥스럽네요. 앞으로도 지금의 위치에서 장애인분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늘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