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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테글라 로루페 평화재단 이사장,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유치 지지
연천군, 테글라 로루페 평화재단 이사장,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유치 지지
[선데이뉴스신문] 케냐의 육상 영웅이자 평화·여성 인권 운동가인 테글라 로루페 평화재단(TLPF) 이사장이 20일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유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날 테글라 로루페 이사장은 서울에서 열린 제26차 국가올림픽위원회 연합회총회(ANOC) 방한 일정 중 연천군을 방문, 공직자 대상 평화의식 증진 특별 강연자로 나서 스포츠를 통한 평화와 인권을 설명하며 평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테글라 로루페 이사장은 “평화는 시대적 가치이자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분단된 한반도에도 평화의 봄바람이 오길 희망하며, 연천이 그 중심에 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테글라 로루페 이사장은 강연을 마친 뒤 연천군에서 추진 중인 UN군 참전 및 정전70주년 기념행사 유치에 지지를 표했다. 이후 중면 태풍전망대와 한반도통일미래센터 등 지역 내 안보 관광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김덕현 연천군수는 “연천군은 국제유소년축구대회를 열고 남북 청소년이 스포츠를 통해 교류했던 역사기 있기에 이번 테글라 로루페 평화재단 이사장의 방문이 더욱 뜻깊다”며 “한반도의 중심이자 최전방 접경지역인 만큼 평화와 통일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한편, 2023년 UN군 참전 및 정전70주년 기념식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테글라 로루페는 1998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세계신기록을 경신한 케냐의 육상 영웅으로, 2003년 자신의 이름을 딴 평화재단을 설립해 교육, 여성인권, 평화 확산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과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난민 대표팀 단장을 맡는 등 스포츠를 통한 평화 전파에 힘쓰고 있다.
연천군, 미국 뉴포트비치 시장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군 유치 지지
연천군, 미국 뉴포트비치 시장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군 유치 지지
[선데이뉴스신문] 연천군은 케빈 멀둔 미국 캘리포니아주 뉴포트비치 시장이 17일 연천군을 방문, 2023년 예정된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군 유치를 지지한다고 전했다. 이번 방문은 미국 해군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선봉에 섰던 케빈 멀둔 시장의 조부인 에드워드 멀둔이 한국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마련됐다. 앞서 케빈 멀둔 시장은 방한 시 DMZ방문과 향후 연천군과 뉴포트비치시의 학생 교류 등 우호 증진을 희망한다는 서한을 연천군에 발송했다. 김덕현 연천군수는 케빈 멀둔 시장을 만나 “연천군은 16개 UN 병력지원국이 모두 전투를 수행한 유일한 지역으로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개최의 당위성을 가진 곳”이라고 강조했다. 케빈 멀둔 시장은 UN 참전국과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는 연천군의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유치에 지지를 표했다. 케빈 멀둔 시장은 태풍전망대를 방문해 분단과 평화의 현장을 살펴보고, 6·25 전쟁 당시 군마로 활약한 레클리스 동상이 있는 고랑포구 역사공원에서 레클리스의 활약상과 그를 기리는 연천군의 활동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김덕현 연천군수는 “뉴포트비치 시장의 서한문과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유치 지지에 감사를 표한다”며 “이번 방문을 계기로 양 도시 간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재향군인회 창설 70주년 기념식 참석
윤석열 대통령, 재향군인회 창설 70주년 기념식 참석
[선데이뉴스신문] 윤석열 대통령은 재향군인의 날(10월 8일)을 이틀 앞둔 10월 6일 오전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개최된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설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국회의원, 참전친목단체장, 주한 국방무관 등 600여 명이 참석했다. 재향군인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창설됐으며, 제대군인을 회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안보단체로 지난 70년 간 국가 안보의 보루로서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해 왔다. 또한, 각종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적극적인 지원 활동도 전개해 왔다. 이날 기념식은 국민의례, 기념사(신상태 재향군인회장), 정부포상 수여(국민훈장 1명, 국민포장 3명, 대통령 표창 2명), 대통령 축사, 향군 비전 2030 선포 순으로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기념식에서 고종훈 충북도회장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하는 등 모범회원 5명과 모범회 1개 단체에 정부포상을 수여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재향군인회가 자유를 수호하고 국가안보의 한 축으로서 역할을 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어서 “창설 70주년을 맞아 ‘2030 4대비전’을 선포하고 변화와 혁신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면서 “재향군인회 모든 회원이 하나로 단합하여 국민들로부터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단체로 도약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고 했다. 또한, 윤 대통령은 “군 복무에 대해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강한 국방력과 튼튼한 국가안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면서 “정부는 국가 안보의 최일선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친 제대군인의 복지와 권익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분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재향군인회 회원들께서도 정부의 제대군인 지원 정책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끝으로 윤 대통령은 재향군인회가 “앞으로도 자유를 수호하고 국가안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한다”라고 당부 했다.
김덕현 연천군수,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개최 희망”
김덕현 연천군수,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개최 희망”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 기자] 김덕현 연천군수가 지난 27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23년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UN군 참전 및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연천 개최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날 김덕현 군수는 “UN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와 추모, 보훈의 의미를 담아 진행될 정전 70주년 기념행사의 최적지는 연천군”이라며 “연천은 6·25전쟁 당시 UN병력지원 16개국 모두가 참전해 지켜낸 평화의 상징이자 희망의 땅으로 참전용사와 전우 모두의 기억이 함께하는 의미 있는 장소”라고 강조했다. 이어 “연천군은 6·25 전쟁 중 UN군의 코만도 작전으로 사수한 경계를 정전협정까지 지켜낸 상징적인 지역”이라며 “UN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의미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곳이기에 정전 70주년 기념행사가 연천군에서 열릴 당위성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연천군이 6·25전쟁과 관련한 역사자료 발굴 및 조사에서도 총력을 기울이며 의미 있는 성과를 올렸다고 설명했다. 연천군은 육군사관학교 산학협력단과 ‘연천군 6·25전쟁 UN참전국 역사자료 조사연구 용역’을 추진해 전쟁 당시 16개 UN병력지원국 모든 군대가 전투를 수행한 유일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와 함께 2025년에는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산120번지 일원에 제3국립연천현충원이 봉안시설 5만기 규모로 준공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보훈 정신 함양의 공간을 조성해 호국보훈의 중심도시로 거듭날 예정인 만큼 정전 70주년 기념행사의 의미를 더욱 강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행사 개최지로 계획하고 있는 한반도통일미래센터(경기 연천군 전곡읍 남계로 408)는 평화 통일 공감대 확산과 남북 청소년의 교류와 화합을 비전으로 설립된 통일부 소속기관이다. 임진강과 한탕강이 합류하는 합수머리의 유려한 자연경관과 국가통일원점인 중부원점(북위 38도, 동경127도)을 포함하고 있는 남북 화합의 메시지 전달의 최적지이다. 김덕현 군수는 “참전용사들의 땀과 피로 지켜낸 연천에서 정전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려야 한다는 역사적 대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며 “정전 70주년 기념행사 개최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미래 세대에 평화통일의 가치를 계승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성원 국회의원(동두천·연천)을 비롯해 윤종영 경기도의원, 연천군의회 심상금 의장, 김미경 부의장, 윤재구 의원, 박양희 의원, 박영철 의원, 박운서 의원, 배두영 의원이 참석했다.
국립극장, 12월 8일 70주년 기념 학술행사 개최
국립극장, 12월 8일 70주년 기념 학술행사 개최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국립극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공동주관하는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 학술행사'를 12월 8일 드래곤시티 용산에서 연다. 이번 학술행사는 '국립극장 70년 그리고 100년을 향한 새로운 시각과 전망'을 주제로 국내외 예술가, 공연예술전문가 등이 모여 국립극장 현재를 확인하고 앞으로 방향성을 모색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당초 지난 4월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순연했다. 김철호 국립극장장 기조 발제로 시작하는 이번 학술행사는 총 2부로 이뤄진다. 1부에서는 1950년 아시아 최초로 설립된 한국 국립극장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보고 공연예술계 창의적 협업 중심으로서 국립극장 미래 역할을 고찰한다. 최준호 한예종 연극원 교수가 사회를 맡는다. 선재규 국립극장 공연기획부장, 전지영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가 발제자로 나선다. 원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오성호 메타기획컨설팅 본부장이 토론에 참여한다. 2부에서는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공연예술 창작 방식 가능성을 모색하고 공공극장 역할을 고민해본다. 이성곤 한예종 연극원 교수가 사회를 맡고 허윤정 서울대 국악과 교수, 아만다 무엘릭 주한 프랑스문화원 문정관,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을 연출한 옹켕센 티웍스 예술감독 등이 토론에 참여한다. 김철호 극장장은 "2020년은 공연예술계뿐 아니라 전 세계가 힘든 시간이었지만 때로는 위기가 변화를 추동한다. 이번 학술행사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나가는 혜안을 함께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지난 25일부터 국립극장 누리집에서 참가신청을 받고 있다. 방역 당국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별 실행 방안에 따라 참석인원을 제한하고 좌석 간 띄어앉기를 실시한다. 학술행사 주요 내용은 영상으로 제작해 추후 국립극장 공식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거제시 「 전쟁 70주년 평화콘서트‘평화의 꽃이 피었습니다’」
거제시 「 전쟁 70주년 평화콘서트‘평화의 꽃이 피었습니다’」
[선데이뉴스신문=허왕국 기자] 지난 15일 오후 4시, 「전쟁 70주년 평화콘서트 ‘평화의 꽃이 피었습니다’」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UN분수광장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거제지회(회장 정애순)가 주최하고 거제시와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전쟁의 참화를 딛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낸 자긍심과 자부심,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기획됐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변광용 거제시장, 서일준 국회의원, 시의원, 단체장, 시민, 관광객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1부 공연에는 아라한태권퍼포먼스, 아코디언앙상블, 창작무‘거제아리랑’, 거제쳄버소사이어티 협주, 유오디오어린이중창단·라온중창단의 공연, 거제리틀발레단의 ‘스윙키즈’, 다움아트컴퍼니의 ‘오방놀이’, 성악가 김성경, 김영기의 무대가 펼쳐졌고, 2부 공연에서는 경남브라스콰이어의 관악공연, 하미연의 해금연주 , 해금과 무용의 콜라보, 다움아트컴퍼니의 ‘버꾸춤’등 다채로운 무대로 진행됐다. 또한 ‘거제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한 사진·시화 전시 행사와 한반도 지도 만들기, 평화소망 리본 달기, 평화기원 포토존 등 시민과 함께하는 체험행사도 준비됐다. 정애순 한국예총 거제지회장은 환영사에서 “우리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가진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이 행사는 민족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과 의미를 모아 문화와 예술로써 공감하고 위로하는 자리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변광용 거제시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이념 대립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이 곳 포로수용소에서 평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 남북이 함께하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이 곳 거제에서부터 열어가야 하며, 이번 행사가 그 시작이 되어 시민의 변함없는 평화 의지와 염원을 다지고 대내외에 알리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축사를 한 서일준 국회의원은 “흥남철수작전의 피난민을 따뜻한 환대로 맞이 한 거제시민들의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화합과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자”고 말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거제시에서 추진하는‘2020년 거제시 평화·통일교육 공모사업’에 선정된 4개 사업 중 문화행사 분야 사업으로 개최되었으며,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참석자 전원에 대한 체온측정, 손 소독, 마스크 착용 등 코로나 예방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주최 측의 노력도 볼 수 있었다.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여름 장맛비가 거세다. 한반도는 짙은 안개와 함께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최근 북한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현 남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는 오랜 한반도 분단역사 속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국전쟁 70주년, 하루가 지난 어제 25일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47위가 머나먼 길을 돌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화를 기렸던 남북관계는, 작두 위에 선 무당의 붉은 발처럼 여전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전쟁은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픔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않는 기자로선, 97세(1924년 출생) 백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6.25 참전용사인 최 어르신은 무려 67년이 된 빛바랜 전역수첩을 꺼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Q.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얘기를 해볼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이남 사람이 아니라, 이북 황해도 신천군 남부면에서 났어요. 안중근 의사 알지요? 그분이 우리 집에서 20리(8km) 떨어진 곳(황해도 해주)에서 살았어요. 그 텔레비전(TV)에 나오는 ‘송해’도 우리 동네서 가까운 (황해도) 대령군이 고향이에요. 대령(군)에 가면 동산이 있는데 거기는 미군(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어요. 거는 미국 영토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어머님의 고향이 대령이었어요. (사진=최 어르신의 본적관련 문서) 저는 5살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어요. 그때 형님과 누님이 아파서 병에 걸렸는데, 어머니께서 고향에 있는 최 집사를 찾아가 우리 자녀가 병에 걸렸으니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어요.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그렇게 예수(기독교)를 믿게 됐지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국민(초등)학교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왔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때는 여비가 비쌌기 때문에 수학여행도 많은 사람이 올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엄청 잘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서울로 2번이나 여행을 올 수 있었어요. 서울 종로1가에 ‘화신상회’라고 있었어요. 그게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광화문에요. 그게 일본사람들이 6층짜리 건물을 쓰고 있었어요. 거기서 하모니카를 샀어요. 그때 처음 하모니카를 배웠지요. 지금도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는데, 가끔 불고 그래요. Q. 뭔가 하모니카가 멋지게 느껴지네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되셨나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일제 강점기(1910.8~1945.8) 때 국민(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에 입학하려 했는데 입학시험에 불합격이 된 거에요. 운동만 해가지고 공부할 줄을 몰랐지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1년 동안 집에서 놀기만 했어요. 맨날 운동하고 놀기만 했지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아주 잘했어요. 축구, 육상, 마라톤,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어요. 특히 달리기를 잘했어요. 학교 운동회에서 마지막 계주에서 전교생이 응원전을 하는데 ‘차이호껭(최 어르신의 일본 이름)’이라고 제 이름을 크게 외쳤었지요. 학교 이름은 ‘경신학교’였지요, 아마? 어느 날은 황해도에서 전국 도대항 육상 대회가 열렸어요. 우리 학교가 신천군의 대표였는데 내가 학교 대표로 나갔어요. 400m 계주였어요. 나는 꾀가 많아서 1번 주자로 뛰었는데 1등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2번 선수가 넘어져 가지고 결국 1등을 못했지요. 아이고 참... 지금 생각해도 아까워요. 대회를 한다고 80리(32km)를 기차를 타고 갔지요. 그때의 기억이 많이 나요. Q. 많이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차이호껭‘이라는 외침소리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려요. 그때 중학교에 못가서 집에 있는 중에, 누가 하는 얘기를 주워들었어요. 중국에 가면 돈 벌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때 부모님 돈을 몰래 훔쳐서 중국에 갔어요. (허허허...) 중국에 어디 거처가 있을까 살폈지요. 당시 외사촌 형님의 매부가 중국에 있었어요. 참, 신기하지요? 부모님께 얘기도 하지 않고 어린놈이 혼자 갔으니까, 간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까. (사진 = 일제강점기 당시 철로의 모습)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의주까지 가는 열차에는 항상 일본형사들이 있었어요. 뭐 때문이냐면 아편장사, 금 장사를 잡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나이가 어려서 여행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죠. 신의주에서 내려서 (국민)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 들렀던 여관에 가서 잠을 잤지요. 그리고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당시에 신의주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신의주 사람 행세를 해서 몰래 건너갔지요. “나 신의주 사람이다”고 꾀를 냈어요. (허허허...) 그렇게 만주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외사촌 형님을 찾아갔어요. 형님이 중국의 길림(성)에 있었어요. 길림에 가면 한강같이 큰 강이 흘러요. 그 강이 ‘송하강’이에요. 송하강을 따라 80리(32km)를 올라가면 일본사람들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친)형님이 그 발전 사무소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허허허... 참 기가 막히죠. 그래서 내가 찾아가니까 형님과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이 어린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하면서 언능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랬죠. 갈 수 없다. 돈 벌러 왔다고. 밥 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진= 옛날 공장 모습, imgur 출처) 그때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등급이 나눠져 있었어요. 1등 국민, 2등 국민, 3등 국민이었지요. 사무소에서 일하는 일본사람들은 1등, 기술을 배워 일하는 한국 사람은 2등, 중국사람과 단순 노동자는 3등 국민으로 취급했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중국 사람은 짐승취급을 당했다니까요. 그런데 일을 하다가 도망을 가게 됐어요. 형님이 내 월급을 주지 않고 본인이 다 써버린거에요. 그때 생각이 나는데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100만원이 있으면 큰 성공으로 취급했었지요. 나는 고향에 어머님께 돈을 붙여드려야 하는데 (월급을 주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어 계속 있을 수 없었지요. Q. 아이고... 또 그런 일이 왜... 그렇게 나와서 매부(외사촌 누님)집에 찾아갔어요. 매부는 당시 공의(중국당국이 인정한 의사)였어요. 다짜고짜 매부의 병원을 찾아갔어요. 내가 들어가니까 병원에서 어떤 병 때문에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나는 병 때문이 아니고 내 매부를 만나려고 왔다고. 사실 나는 매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어요. 얼굴도 모르고 찾으러 간 거지요. 허허허!... 매부는 나를 보더니 마차에 태워 누님을 만나게 해줬어요. 누님도 엄청 놀랬지요. 빨리 다시 돌아가라고 했어요. 여길 어떻게 왔냐고. 못 간다고 했죠.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명동거리 모습) 매부네 병원 밑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어요. 거기에 부탁해서 잡일을 맡아 했어요. 처음에는 물건도 정리하고 시키는 일을 전부 다 했지요. 나는 지금도 이빨(인공치아)을 만들 수 있는데, 당시에 눈치껏 옆에서 보고 배웠어요. 그리고 조선(이북 고향)에 나올 때는 그 치과주인이 같이 우리 집에도 왔었어요. 한번은 치과 재료를 사서 중국에 가다가 세관에 잡혔어요. 일본형사들이 내가 가지고 간 재료가 아편인줄 알고 붙잡았어요. 그때가 아마 17~20세쯤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참 웃겨요. 우리 아버지께서(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Q. 당시에 마음에 둔 여성분은 없으셨나요? (므흣한 웃음)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여성의 사진, 'Blue ruin1'의 flickr 출처) 고향에서 18~20살 때 결혼을 했어요. 그 당시에 고향에 일본여자가 와 있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탔지요. 그래서 나도 같이 타는데, 너무 세련돼 보이고 예뻐서 마음에 들었지요. 그 사람이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온 거에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지요. 이름은 ‘보끄 기미꼬’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그때 동네에서 그 여자가 시집갈 사람은 “최00(최 어르신)” 밖에 없다며 사람들이 놀리고는 했어요. 같이 살면서 딸을 하나 낳았어요. 이름은 ‘최0희’에요. 물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Q. 아 그러셨군요... 그럼 남한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오시고 나서 6.25 전쟁이 터진 거죠? 아, 내가 얘기할게요. 그때도 교회 다녔는데 분단이 되고 나서 이북에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세울 작정으로 신학교에 보냈어요. 평양에 있는 감리신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토요일이면 고향 교회에 가야만 했어요. 집까지는 200리(80km)였지요. 집에 갈 때도 올 때도 경찰서에 보고를 했어요. 보고를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 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평양과 고향(신천)을 왔다 갔다 했지요.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다가 경찰서에서 통지서 하나를 받았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내무소로 들어오라는 하는 거예요. 갔는데 큰 종이가 있었어요. “인민군을 뽑으려고 불렀나?” 싶어서 잘 보니까 군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 다닌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 거였어요. 신체검사를 하는데 신체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만 확인을 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신학생 이력이 다 있었지요. 그때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살고 싶어서 장로신학교에 있는 매부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매부가 “너는 왜 여기 남아서 쓸데없는 짓이냐 하고 있냐”고 하면서 “그따위 짓 하지 말고 다른 젊은 사람들처럼 이남으로 언능 내려가라“고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Q. 정말 파란만장하셨네요.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셨어요... 그렇게 아는 분을 통해서 어떻게 탈북을 할 계획을 세웠어요. (최 어르신은 이전 일제징용 당시 아내였던 ‘기미꼬'와 ‘2살배기 딸’에게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에 탈북하면서 지금까지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남으로 오게 됐어요. 7명이 모여서 산을 넘었지요.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인민군에게 들켜서 다시 높은 뒷산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중에 1명은 붙잡혔고, 다른 1명은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겨우 5명만 넘어왔지요. (사진=영화 '윤희' 출처) 넘어오는 중에 아기와 함께 온 여자들도 있었는데, 거기 황해도 사지원(탈북의 최전선)에서 아기가 울거나 하면 자기 아이를 죽이기도 했어요. 아 우는소리(애기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잡히면 안 되니까... Q. 어떻게 그런 일이... 그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렇게 남한에 넘어와서 청단이라는 도시에 있는 경찰서까지 걸어갔어요. 대한청년단의 감시를 받았어요. 조사를 받는데, 공민증(북한의 주민등록증)에 신학교 학생이란 기록이 있다보니 대우를 잘 받았어요. 조사 후에 ‘특무부대’로 넘겨졌어요. 특무부대(당시 공산당을 잡아내는 기관)는 당시 가장 무서운 곳이었지요. 거기
6·25전쟁 제70주년, "국민과 함께 호국의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
6·25전쟁 제70주년, "국민과 함께 호국의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저녁 서울공항 격납고에서 열린 6·25전쟁 제7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무더위로 인한 고령층 참석자 건강을 배려해 6·25전쟁 기념행사 최초로 해가 진 후 행사를 시작했다. 70년 만에 귀환하는 국군전사자 유해봉환과 함께 열린 이번 행사는 6·25전쟁 당시 국가를 지키려 헌신한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영웅에게”를 주제로 선정했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서 온 국군전사자 유해 147구를 직접 맞이한 뒤 유해봉환 가족들과 동반 입장했다. 봉환 유해들은 미국 ‘전쟁포로 및 유해발굴 감식국(DPAA)’에서 한·미 공동 감식작업으로 확인된 국군전사자들로, 이 가운데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7인의 신원은 사전에 확인됐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 140구는 행사장 내에 설치된 영현단에 안치되어 행사를 함께 지켜봤다. 이어 예비역 이등중사 류영봉 님이 "조국으로 복귀 명을 받았다"며 70년 만에 돌아온 전우들을 대신해 복귀신고를 했다. 또 6·25 행사 최초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순서에 조포 21발도 발사했다. 이는 국가원수급에 해당하는 예우로서 고향에 돌아온 영웅들을 위한 최고의 예우를 의미한다. 이와 함께 이번 행사에서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최초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 UN 참전 22개국 정상이 보내온 영상 메시지가 상영됐다. 또 참전국 정상을 대신해 22개국 대사가 모두 참석했으며, 이를 통해 6·25전쟁 참전국들과의 국제적 연대를 재확인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70년 만에 6·25전쟁 당시 공적이 확인된 생존 참전용사 1명의 가족과 유족 2명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어진 기념사를 통해 대통령은 "우리는 오늘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백마흔일곱 분 용사의 유해를 모셨다"며 "용사들은 이제야 대한민국 국군의 계급장을 되찾고, 70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슬프고도 자랑스런 일"이라며 "지체되었지만, 조국은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국민과 함께 호국의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며 "아직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12만3천 전사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어 대통령은 "오늘 영현단에는 우리가 찾아내어 미국으로 보내드릴 미군 전사자 여섯 분의 유해도 함께하고 있다"며 "미국을 비롯한 22개국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보훈에는 국경이 없다"고 강조하며 뜻깊은 영상 메시지를 보내준 것에 감사 인사도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이후 달라진 개인의 삶, 가족의 역사를 언급하며 전쟁이 갖는 의미도 되새겼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우리 군은 어떤 위협도 막아낼 힘이 있다"며 "우리는 두 번 다시 단 한 뼘의 영토, 영해, 영공도 침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대통령은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며 "끊임없이 평화를 통해 남북 상생의 길을 찾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에 북한도 담대하게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가 전 세계에 희망으로 전해질 때,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진정으로 보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기념사를 마무리했다. 한편, 이번 행사에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12만2천여 명의 전사자를 끝까지 찾겠다는 국가의 약속을 담은 ‘122609 태극기’ 배지를 참석자 모두 달아 경의를 표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지막 일련번호인 122609번 배지를 패용했으며 이를 통해 마지막 한 명을 찾는 그날까지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