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서양화가인 박수근 화백의 작품 <소와 유동>과 마주하다.

불자의 마음이 동요했어요, 이 그림을 이제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기사입력 2016.06.15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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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법정스님
 [선데이뉴스=정성남 기자]제 기억으로는 88올림픽 이전으로 기억 합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의 청계천 8가는 헌 책방은 물론 온갖 물건을 파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며 그나마 그 뿌리가 남아있는 것이 지금은 황학동 벼룩 시장인 것 같아요.

 88 올림픽 전에 청계천 8가를 걷다 우연치 않게 눈에 들어 온 그림을 보고 저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제 고향은 상주인데 어릴 때 그 곳 농촌 모습을 보는 듯한 그림이 제 눈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예전 농촌은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곤 했는데, 저 역시 속세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 풀 먹이를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그림은 아마 제 어릴 때 추억이 담겨 있는 모습과 똑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연민의 정감을 느끼며 발길을 멈추었고 그림을 구매하였습니다. 속세 시절부터 본인도 서예와 미술을 공부하였던 터라 작가들의 작품 안에 심혈 어린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어 더 더욱 애착이 가는 그림 이었습니다.

 이 후 출가하여 사찰에서 불심을 공부하고 정진하던 중 부처님과 같이 스스로 고행과 수행을 병행하고자 산 속 움막이나 동굴 등에서 오랫동안 벽면 수행을 하였기에, 본 그림은 제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아마 3~4년 전쯤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법당에서 동자들이 나와 그 동자들 전부가 황금 부처님으로 변하는 것 이였어요. 더 이상했던 것은 초파일 전날 양수리에 사시는 보살 분이 절에 와 하는 말이 스님 어제 꿈을 꾸었는데 “동자들이 법당 밑에서 나와서 순금으로 다 변했어요”라고 꿈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나와 똑 같은 꿈을 꾼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법당 밑에 무슨 이상 일이 있는지 궁금해져 그 날 불자와 함께 법당 밑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법당 밑에는 옛날 오래된 박스가 있었는데 그 박스를 꺼내 열어보니 예전 청계천에서 구입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구입 당시의 기억도 있었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 떠 오르기 시작했어요.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며 이상한 마음에 그림을 사진 찍어 지인에게 보내줬더니 박수근 화백의 그림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그 지인에게 박수근이 누구냐는 질문을 했으며 온라인을 통한 검색을 하니 그 검색결과 내가 소장한 그림과 동일한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게 바로 <소와 유동>이었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 박수근의 소와 유동을 소장하고 있다는 법정스님을 양주시에서 만나 보았다

♦ 본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언제 불문에 입문했는지요

 법명은 법정이며 지금은 00에(본인의 요청에 의하여 지명을 밝히지 않음)시골집을 구해 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불문에 들어갔다 나오고 다시 입문하는 등 아마 2~3번 정도 입문하고 나오고 하는 과정을 겪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인생에 대한 회의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 같아요. 즉, 물질이 아닌 그 모르는 어떤 존재에 대한 갈구심이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3년에 무작정 집을 가출 했습니다. 그 이 후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삭발하고 불문에 입문을 하게 된 것은 20대입니다. 그러다 혼자 문경의 산 꼭대기에 토굴을 찾아 그곳에서 기숙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제가 불문에 발을 디딘 최초의 역사입니다.

♦ 입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아주 다양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예전에 지금의 개인택시와 비슷한 한시택시가 있었는데 그 차를 운전했습니다.
당시 돈이 떨어지면 몇 푼 벌어서 다시 공부하고 하는 형태의 생계형과 학업용 운전이라는 직업이었지요. 그 외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잠시 잠깐 한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지만 지금 제 기억으로는 조금 전 말씀 드린 한시택시 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20대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게 되었어요. 이런 모든 것들은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를 하기 위해 일을 한 것 입니다. 공부를 했지만 흔히들 이야기 하는 전공 등과는 거리가 먼 애기 입니다, 그때 어린 나이에 가출한 저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러니 학비나 생활비를 충당할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었습니다.

♦ 어린 시절에 가출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나 동기가 있나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때는 무조건 집이 싫었으니까요. 집이 싫고 학교에 가면 배울게 없었어요. 그리고 그때 집에 계신 아버지에게 배우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당시 한문으로 저는 편지를 쓰는 아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학교에 가서 뭘 배우겠어요. 건방진 얘기이지만 배울게 없었어요.
그리고 어른들에게 실망 한 것이 큰 이유일 수도 있었어요. 당시 동네 어른들에게 한문으로 이름을 쓰라고 하면 어른들은 쓰지 못하는 거에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이 아! "내가 여기 있다가는 바보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뭘 알고 나온 게 아니고 무조건 가출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냥 동경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딘가에 더 넓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곳이 있다는 막연한 동경심 때문에 미지의 세계를 그리며 실망감과 함께 이루어진 가출로 그때부터가 고행 아닌 고행이 된 것 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어려서부터 저는 한문을 좋아했어요. 국민학교 3학년 때 가출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때 가출에 대해서 지금도 후회를 하거나 하는 이런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후회할 짓을 애초 하지 않았습니다,
설상 했다 해도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고 살아가는 편 입니다.

♦ 취미나 특기는?

 글쎄요 미대 다니는 학생이나 교수 등등을 제가 강의를 해 준 적이 있었어요. 동양화를 주로 가르치고 했어요. 그리고 글은 내 멋대로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때 본인의 글과 그림에 대한 작품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내 글과 그림들 입니다. 지금도 작품 아닌 활동이라고 할까요. 명상이나 면벽 수행 중 느낀 화두나 착상이 생각나면 수시로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중입니다.
법정스님의 작품 들
♦ 그렇다면 글, 그림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공부를 하면서 하기 시작했어요. 옛날에 창의 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직접 행을 해서 느낀 것, 즉, 가상적인 문법과 기승전결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글이나 그림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 하면 그건 이미 죽은 글과 그림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나 화가가 와서 이게 무슨 체냐고 물어볼 때도 있는데 저는 바로 대답을 해주곤 하는데 “법정 체”라고 말입니다, 내가 쓰면 법정체고 추사가 쓰면 추사체라고 말입니다. 결론은 정법과 사법은 없다고 봅니다. 결국 자신의 가슴과 영혼이 담겨있는 본인만의 독특한 것을 외부로 나타내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 합니다.

 마음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 돌아본다면 정법과 사법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어떤 것에 기준해서 그 관에 묶인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모든 종교는 다 똑같아요. 법화경 속에 나오는 ‘一佛成(일불성)’ 법은 하나이지 두 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나일 뿐이고 너는 너일 뿐이지 그런 것이 불교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나 기독교의 예수가 말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이나 같은 것 입니다. 기독교가 좋으면 교회로 가고 불교가 좋으면 절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앉은 자리가 불편하면 그것은 사법이라고 결론지을 수가 있는 것으로 모든 종교는 차이가 아닌 말 그대로 종교로서 자신의 믿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 합니다.

♦ 그 동안 종교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다면

 내 마음으로 좋아했던 분은 경봉 스님(작고)과 그 다음은 일흥(작고)스님인데 내 마음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람 들이며, 현재 살아 계신 분 중에는 법인스님을 좋아합니다

♦ 근래에 들어오면서 가끔은 종단 등 불교계의 유명 스님들이나 단체가 정치적 개입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이점에 대한 생각은


 그것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공부를 하는 분들이 정치적 개입을 한다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면 정치적 개입을 한 적이 있지만 그런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으로 개입한 것으로, 스님은 스님다운 그 어떤 행(行)을 했을 때 스님이지 그럴지 않은 행(行)을 할 때는 스님이 아니지요. 가령 삭발 했다고 스님이라면 옷만 걸치면 다 사람이라는 말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기독교나 불교나 어느 종교던 수행자는 수행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런 것을 두고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논어 안언편을 보면 공자가 자신의 나라인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망명을 하고 1년이 지나면서 제나라의 왕 경공을 두 번째 만났을 때,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께서 대답한 말로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자식은 자식 다워야 한다는 말과 같이 종교인은 수행자로서 자기 본분에 맞는 종교인 다워야 맞는 것입니다.

오늘 만남에 대한 본질인 법정스님이 주장한 그림으로 이야기를 옮겨보기로 한다.

♦ 이 그림과 관련하여 스님의 생각을 말씀 하신다면

 나 자신도 묵화를 하지만 박수근화가의 “소와 유동”은 어린 시절에 흔히 있었던 소를 몰고 풀을 먹이는 어린 유동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자기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박수근 화가에 대한 평을 본다면 단조롭지만 독창적 화법으로 소박한 우리네 서민을 그려낸 작품에선 평면적인 질감, 어두운 색채를 통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화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들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그림의 연대 추정은 육이오 전쟁 이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6.25 전쟁 후 60년대의 소와 유동 그림은 그림에 힘이 없습니다, 
법정스님이 소지한 <소와유동>. 그림의 물감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소장한 이 그림은 그림 전체가 소 등에 힘이 있고 살아있는 느낌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당시 물감은 국내 것이 없었으며 있다면 일본 아니면 미국산 물감들을 사용 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감정을 받아보았으나 감정불가라 합니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지금 남아있거나 알려진 것은 거의 50년대 이 후 그림인데 박수근 화백이 그 이전에 그린 그림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감정 불가라는 것은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할 수가 없는데 아쉬운 것은 박수근화백 사인이나 직인이 없다는 겁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위작이라면 왜 사인이나 직인이 없겠는가 입니다, 위작일수록 진품을 모방하고자 직인이나 사인을 만들어 넣었을 것이니까요

 지금 이 그림을 보면 표구화된 된 이 나무는 소나무 입니다, 아주 오래 된 소나무로서 천을 감고 그림을 싸기 위해 박은 못 역시 오랜 된 못입니다, 6호 사이즈인데 오래 시간이 지나며 그림의 일부가 들고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물감이 들고 일어나는 정도만 보아도 그림의 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일반 감정 전문가들이 감정을 해 주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마 이런 물건을 소지한 분들이거나 미술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 문화와 유산 보존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 합니다.

♦ 그렇다면 스님은 왜 이 그림에 대해 이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는지요?

 저는 이 그림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많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유명 화가는 아니지만 글과 그림을 두루 섭렵한 사람 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제가 소지하고 있다고 제가 이 그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림이 점점 원형을 유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세월 법당 밑 박스에 오랜 시간을 방치해 놓았으며 그 이 후에도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림은 작가로서는 그리는 행복이 있으며 일반인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관 입니다. 아무리 좋은 그림도 유산적 가치가 있다는 보물도 보관의 실수로 인하여 훼손 된다면 그 보물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진품이라는 확신과 함께 누군가에 의해 전문적인 보관과 전시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법정스님
 결론은 저는 불제자로써 이 그림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정당한 대중의 평가를 받고 박수근 화백을 그리워하는 애호가들에게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공유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문화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 그림을 보존 및 전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새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이 급 선무라고 생각하여 이 그림을 이제 세상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박수근 화백은 단조롭지만 독창적 화법으로 소박한 우리네 서민을 그려낸 작품에선 평면적인 질감, 어두운 색채를 통해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더불어 화가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 중 ‘빨래터’는 김환기 ‘무제’가 경매에 나오기 전까지 국내 미술품 사상 최고액 (2007년, 45억 2,000만 원)을 기록했다.
강원도의 유복한 집안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를 여의며 회화에 대한 재능을 스스로 닦아나간 그는 오랜만에 찾은 고향 빨래터에서 한 여인을 운명적으로 마주하고 나선 편지에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 결혼을 하였으며, 이 후 그의 많은 작품들은 한결 같이 한국의 가장 서민적인 삶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던 바, 행상을 나온 장사꾼들, 빨래하는 아낙네, 동네의 소녀와 소년들, 집으로 돌아가는 서민들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던 것으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은 오롯이 캔버스에 담아냈다. 그림으로 그리기에 서민들은 놀라운 주제는 아니었지만 훗날 박수근의 그림들은 “가장 한국인의 서민 정서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그림을 잘 모르는 기자는 법정스님이 보여준 박수근 화백의 <소와유동>과 그 외의 또 다른 그림, 그리고  법정스님의 자작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지금 미술업계의 혼란스러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거론되고 있다. 이 시점에 스님이 소지하고 있는 박수근 화백의 <소와유동>은 그 진위를 가름하고 알리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된 것이다.  과연 어떤 방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만남이었다.

 

[정성남 기자 balbari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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