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든든한 형과 조금 부족한 동생, 서로를 품은 두 다리··· '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

'장애 인식 변화 · 복합 복지시설 구축 · 장애를 이해할 정치' 필요성 강조
기사입력 2020.11.0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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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무엇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요즘따라 기자가 뼈저리게 느끼는 말이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국내에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정말 많다. 누군가는 한걸음에 오르는 ‘계단’도 누군가에겐 오를 수 없는 산이고, 누군가는 매일 볼 수 있는 얼굴도, 누군가에겐 평생 볼 수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2살때 처음 소아마비를 가진 후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해내며 일생을 걸어온 한경열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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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경열 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 

 

Q. 안녕하세요. 회장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서울시 지체장애인협회 영등포구지회 회장’과 ‘영등포구 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한경열’이라고 합니다. 영등포구 장애인단체 연합회장도 함께 맡고 있죠. 지체장애3급입니다. 2020년부터 장애등급이 폐지돼 중증장애인(1~3급)과 경증장애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저는 1956년 6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한국전쟁 발발일과 날짜가 같죠. 전쟁 후 온 나라가 파괴됐을 당시 유행했던 소아마비를 2살때 처음 앓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장애를 가지게 됐죠. 다행이 1980년대 후반에 정부에서 장애등급 정책을 마련해 장애인들을 위해 복지카드가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1990~2000년대에 와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점점 늘어났죠. 


Q. 현재 국내의 장애인에 대한 복지 수준은 어떤가요?  

물론 국내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많이 늘었지만, 아직까지 시민들의 인식이 그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워낙 경제가 급성장을 했다보니 생각이 물질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거죠. 최근에는 장애 인식 변화를 위해 관련 단체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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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애를 겪고 힘드셨던 일도 있으셨을텐데,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릴 적 학교에 입학할 때, 부모님께서 삼육재활원(장애인 전문 교육 시설)에 입소를 시키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싫어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했죠. 당시 입시제도가 무시험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숭실중학교에 갔습니다. 숭실중학교는 당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다녔어요. 학구열이 굉장히 높았죠. 그때까지는 장애에 대안 별다른 편견과 차별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후에 정부에서 한 교육방침이 내려왔는데, 장애인 학우들은 전학을 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때 제가 어머니께 “전학을 해도 되냐”고 여쭈어봤죠. 허락을 맡고 ‘영등포 중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이때부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체험하게 됐죠. 학교에 소위 노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거의 매일 괴롭힘을 당했어요. 상처도 많이 받았고요. 그때 힘을 키우기 위해서 집에서 돈 되는 것을 몰래 갖다 팔아서 친구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어요. 공부를 안하니 성적은 자꾸 떨어졌죠. 

 

고등학교 때 일명 ‘실내화 사건’이 벌어졌죠. 저는 장애로 일반 신발을 신기 불편해 발목을 잡아주는 신발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영등포 시장에 가서 중고 해병대 군화를 사서 발목을 잘라서 신고 다녔죠. 그런데 어느날 실내화 검사를 한 거예요. 검은색이라서 실내화로는 사용할 수 없어 군화에 하얀 분필을 칠해 통과한 적이 있습니다. 덕택에 교련시간에 교련선생님 기록관 역활도 하게 됐지요. 그후로는 ‘워커’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고교 졸업 때까지 유명했죠. 지금도 이름 말고 별명을 부르는 친구들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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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경열 회장의 어린 시절과 사진, [첫번째]맨 오른쪽, [두번째]왼쪽) 

 

Q. 사회에 가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죠. 가장 큰 상처는 사회에서 받았어요. 당시 회사에서는 장애인을 잘 안 받아줬으니까…


서초동에 있는 회사에 첫 면접을 보게 됐어요. 들어갈 때는 다리를 잘 숨겨서 어떻게 장애를 걸리지 않았죠. 그런데 나갈 때 한명씩 나가다 보니… 결국 면접관이 알게 됐죠. 


면접이 끝나고 누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면접관이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친구가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를 했는데, 당시에는 좋게 안 들렸죠. 그렇게 면접실에 다시 들어갔는데, 면접관이 “저희 회사는 아직 몸이 불편할 사람을 채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회사에서 나왔는데, 하늘이 칠흑 같았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면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없더라고요. 화장실에 가서 옷을 벗었어요. ‘나’라는 존재 가치가 없게 느껴졌죠. 


근처에 고가도로가 있었어요. 고가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죠. 사회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데 “내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가도로 위에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데 친구 한명이 딱 생각 나더라고요. 서산에서 힘들게 일하는 친구였죠. 그래서 거기로 갔어요. 일숙 좀 하자고 부탁했죠. 10일 정도 지냈죠. “친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래?” 하면서 아니면 자기랑 같이 청과 시장에 나가자고 했어요. 따라 나갔죠.  


일하는 모습을 보는데, 녀석이 정말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뭐라도 해야지” 다짐했죠.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뭐 어때?”하고 생각했죠. 


집으로 돌아와 “시골에 가야겠다” 다짐했어요. ‘상록수’라는 책이 있어요. 농촌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관련된 책인데, 그 책 내용이 떠올랐죠. 


“다시, 내 인생을 다시 찾아보자”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어요. 사실, 말씀을 드리면 아버지께 혁띠로 맞을 게 뻔했어요. 알고도 얘기한 거죠. 그런데 왠일인지 아버지께서 때리지 않으시고 “뭐하고 왔냐? 세상 돌아다닐만하데?”하고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죠. “돼지 키워서 돈을 벌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너 정말 자신있냐?” 하셨어요. 


당시 시골에서 돼지를 키워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버지께서 오류동에 있는 땅을 좀 사셔서 투자를 해주셨어요. 정말 성실히 일했어요. 식당마다 짬밥을 수거하러 다녔어요. 돼지 밥으로. 그때는 면허도 없었는데 운전도 어떻게 배워서 했어요. 


그때 뭐가 생겼냐면, 박정희 대통령이 노는 땅에 토지세를 내게 했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돼지를 사러 많이 오게 된 거죠. 그때 수요와 공급의 차이로 돼지고기 파동도 왔어요. 새끼 돼지들이 많이 굶어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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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래서 어떻게 돼셨나요? 사업을 지속하셨나요? 

1980년도에 자녀들 대학 보내는 사업으로 귤나무재배와 젖소사육업이 선망이었어요. 때마침 대학에서 우유가공회사를 차려서 일반 낙농가에서 우유 납품을 받고 있었죠. 낙농업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낙농업을 시작해 지역에서 자리매김을 헀어요. 그렇게 결혼도 하게 됐고, 가정도 꾸렸죠. .


그렇게 살다 보니까… 도시생활이 그리워지더라고요. 평생 직장생활을 안하고 살았으니까.. 서울로 올라왔어요. 비슷한 업종을 찾다보니 김치공장을 시작하게 됐어요. 86년 말에 3200만원을 주고 공장을 인수했어요. 다시 도시에 오니까 새로운 문제점이 생겼어요, 바로 사람들과의 싸움이었죠. 도시에서는 종업원이나 누구나 모든 걸 돈으로 따지니까. 탄산수 장사(약수)도 시작했는데, 적자가 나서 결국은 그만두게 됐어요. 


방황을 많이 하게 됐죠. 시장에 가서 구경하다가 집에 들어가고 또 쉬기도 하고… 그러다 어떻게 아는 분의 소개를 받고 ‘오병이어 선교회’라는 곳에 가게 됐어요. 무료 급식을 하는 곳이었는데, 학교에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무료로 제공한 거죠. 거기서 차량봉사를 6개월동안 했어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줘야 하잖아요.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다 건물 위에서 아래를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빽빽하게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어요. 유동인구가 많았죠. “여기서 뭘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행당초등학교 육교 밑에 핫도그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손님이 꽤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 아주머니에게 부탁했죠. 그렇게 기술을 배웠어요.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핫도그 기술을 가르쳐준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당시 주머니를 다 터니까 24만원이 나왔어요. 리어카하고 이것저것 사니까 딱 떨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사서 골목에 딱 나갔는데 얼굴을 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1+1(원 플러스 원)을 배웠어요. 사실은 잘 못 만들어서, 하나씩 더 주게 된 거였죠. 6개월을 일하고 친구와 오파 무역상을 차렸어요. 그때부터 중국·대만 에 자주 다녀오게 됐죠. 방송에도 한번 나가게 됐는데 악재였죠. 사기를 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시절, 장애인 분들에게 처음으로 기부를 하게 됐어요. 김치 100kg를 지원했어요. 그분들과 친해지면서 ‘사랑 나눔의 집’이었어요. 원장을 3년 정도 했어요. 


그러다… 한 사건이 터졌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정치적 갈등도 있었고 “이쪽도 문제가 많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원장자리에서 쫓겨났어요. 너무 억울해서 구청에 민원도 넣고, 인권위원회에도 민원을 넣었어요. 자살 충독도 느꼈었죠. 그런데 억울해서 안 죽게 돼더라고요. 그렇게 장애인협회를 찾아갔어요. 가서 협회장이 돼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짐했어요. 


처음에는 봉사의 마음보다 복수의 마음이 컸죠. 내 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헀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복수의 마음을 차차 내려놓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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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경열 회장과 가족들의 모습)  

 

Q. 그러셨군요. 고생이 정말 많으셨어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는 어떠셨나요?  

협회장으로 일하면서 장애인이 설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구상했어요.. 2015년에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요즘은 장애인 단체 개혁을 위해 1대1 상담도 하고 있어요.  


이제는 사람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가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노인’과 ‘어르신’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노인은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사람이고, 어르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에 맞는 덕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상대가 덕을 느낄 수 있도록 본인도 그만큼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죠.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죠. 의학으로 치료가 어려운 병도 있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보여지는 모습보다 내면의 모습이에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포장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제 두 다리를 이렇게 명명해요. 한쪽의 든든한 형과, 나머지 한쪽의 좀 부족한 동생이 어우러져 나를 이끌어왔다고. 내가 나를 위로해주고 살아가는 거죠. 이렇게 자기자신을 응원하고 나를 내가 높여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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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도와줬던 존재가 있었다면?

6살 때부터 신앙을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많이 의지하게 됐지요. 매 순간마다 찾아갔었어요. 항상 가장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요즘은 우리 아들에게 참 고마워요. 아들이 집에 생활비를 꾸준히 보태주고 있어요. 


Q. 국내 장애인 단체에 가장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과거에는 힘의 논리로 힘을 가진 사람, 동정의 대상이 앞장섰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장애인 단체장분들도 학력이 높아졌어요. 배움이 인격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이도 젊어졌어요. 과거에는 지도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회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변화가 필수가 됐어요. 단체장들도 같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특별히 제가 사는 영등포구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없어요. 그래서 관련 사업을 하려고 구청에 요청할 예정이에요. 국회의원들과도 만나고 장애인 단체를 모아서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장애인 복지 시설을 만들어 장애인 케어,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하게 만들 거예요. 서로를 돌봐주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구립 장애인 복지관이 생기면, 장애인 단체의 응집력이 생길 것이라 믿어요. 또한 장애인분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목소리를 내고, 장애인들에 대한 지속가능한 복지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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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방자치(영등포구)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체현일 영등포 구청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 장애인 분야의 교육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등포 관내에 장애인 학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청장님이 전에 교육계에 있었던 만큼 취약계층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둘째, 편의시설 기술지원센터를 잘 활용해줬으면 합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위탁을 해준 것인데도 구청에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센터장으로 있지만 구청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기술지원센터와 협의해서 거리와 도로에 무장애 시설을 일상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셋째, 우리 장애인 중에 한 사람이 구의원이 돼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존을 어떻게 이뤄내는지 보여주고 그 목소리를 피력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편향적인 정치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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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얘기하고 나니까 쑥스럽네요. 앞으로도 지금의 위치에서 장애인분들의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늘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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