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나경택칼럼>대한민국공권력의 현주소

기사입력 2013.04.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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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나경택칼럼>대한민국공권력의 현주소

 서울의 고궁들 가운데서도 덕수궁만큼 시민의 발길이 잦은 곳도 없을 것이다. 벚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같은 가로수들이 계절마다 꽃과 신록과 낙엽을 선사한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중화전 앞뜰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라 믿기지 않을 만큼 고즈넉하다.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졌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문세 ‘광화문 연가’) 사람들은 덕수궁과 그 돌담길을 걸으며 나름의 추억을 떠올리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간다. 덕수궁은 왕족의 개인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때, 피란 갔던 선조가 돌아와 거처로 삼으면서 왕궁이 됐다. 구한말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숨겼던 고종이 1년 만에 돌아온 곳도 덕수궁이었다.

1904년 덕수궁에서 일어난 큰 불은 가뜩이나 실낱같던 왕조의 운명을 재촉했다. 불은 덕수궁 주요건물과 담장을 삼키고 500년 왕실이 대를 이어 쌓아온 고문서와 유물들을 태워버렸다. 그전까지 ‘대안문’으로 불렸던 덕수궁 문은 다시 세운 후 ‘대한문’이 됐다. 지난 몇 달 대한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조마조마했던 것은 이런 덕수궁의 불행했던 역사가 생각나서였을 것이다.

작년 4월 쌍룡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 천막을 친 후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용산 참사 등 시위 단체들이 몰려들면서 이곳은 ‘불법 농성촌’이 됐다. 1999년 서울시가 ‘걷고 싶은 길’ 1호로 지정한 덕수궁 돌담길은 꽹과리와 확성기 소리에 묻혀버렸다. 소음보다 더 큰 걱정은 극도의 무질서 속에서 시민의 사랑을 받는 국가 문화재에 무슨 해나 닥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에 일이 터졌다. 새벽 대한문 앞 농성장에서 불이 나 농성용 천막 세 곳 중 두 곳을 태웠다. 불은 덕수궁 담장 지붕에까지 옮아붙어 서까래를 열 개 넘게 훼손했다. 현장에는 검게 그을린 가스통이 나뒹굴고 타다 만 종이와 라면 봉지, 피트 병들이 흩어져 있었다. 지나던 시민들은 “큰일 날 뻔 했어” “이럴 수가 있나” 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붙잡힌 방화 용의자는 “덕수궁 앞이 너무 어지러워서 정리하려고” 라고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서울 중구가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불법 농성천막을 철거한 뒤 하루 만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페이스 북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글을 올렸다.
 
중구가 천막을 철거한 자리에 화단을 만들고 꽃을 심은 것을 비꼰 것이다. 자신도 책임이 있는 일을 남의 일처럼 논평한 것이 우선 듣기에 거북하다. 농성장 철거가 잘못된 것이라면 서울시장은 이를 시정할 수 있다. 현행 도로법상 도로(인도 포함) 관리 권한은 시장이 국토교통부에서 위임받아 다시 구청장에게 재위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시장은 구청장의 명이나 지시가 법령을 위반했거나 현저히 부당해 공익을 해친다고 판단하면 위임을 철회하거나 시정을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박 시장은 농성천막이 설치된 이래 줄곧 뒤에서 철거 반대만 해왔다.

중구를 지지하자니 농성 자들로부터 욕을 먹을 것이고, 중구에 반대하자니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걱정했을 것이다. 시장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지금 시장이 해야 할 일은 공공재인 인도가 일부 세력에 점거당해 시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는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다. 박 시장이 쌍용차 해고 근로자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고 ‘시위대의 외침에 사회가 귀 기울이도록’ 하고 싶다면 시민 불편을 담보로 하지 말고 직접 자리를 마련해 주기 바란다.
 
행동은 하지 않고, 뒤에서 행정집행을 비난하는 걸로 책임을 모면하려 들거나 말로만 생색을 내는 것은 시장이 할 일이 아니다. 박 시장의 말대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더 아름답다.   
 

[나경택 기자 sunda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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