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택칼럼> 노동자의 비명 귀 기울여라

기사입력 2013.03.1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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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택칼럼>노동자의 비명 귀 기울여라

 멀쩡하던 사람이 버럭 화를 낸다.

느닷없어서 가족은 조심스럽다.

한숨을 내쉬며 뒷목을 만지다 말수마저 적어진다. 좀 전 일을 자꾸 잊는 단기 기억 장애도 잦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코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몸 안에 뿜어져 나온다.

기분을 돋우는 세로로닌이나 도파민 같은 물질은 급격히 준다. 끊었던 담배에 손을 대고 폭음을 하고 심하면 향정신성 약물을 찾는다. 미국심리학회(ADA)와 의학 저널이 꼽는 전형적 만성피로증후군이다. 만성피로는 으레 과로에서 온다. 과로가 며 달 넘게 쌓이면 웬만한 병치례로 끝나지 않고, ‘큰일’을 치를 수도 있다. 급작스러운 심장 정지나 뇌졸중 사망에 이른다.

1980년대 일본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깨닫고 ‘가로시’라고 불렀다. 신문사 야근직원이 돌연사한 뒤 다른 회사 인원들도 자꾸 쓰러지자 1987년 노동성이 집계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심할 때 한 해 몇 백명이 과로사로 쓰러졌다.

과로사를 소재로 한 소설도 나왔다. 야마다 도모히코가 쓴 ‘은행전쟁’에서 부실 채권을 거둬들이느라 스트레스에 짓눌린 엘리트 지점장이 과로로 죽는다. 가로시 현상에 자극받은 유럽 언론도 ‘과로는 병이다’는 특집을 내보내곤 했다.
 
90년대 들어 소설가 김제철이 쓴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은 일에 중독된 직장 상사가 과로로 죽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남자를 그렸다. 정부가 ‘업무로 생긴 만성 과로’의 기준을 확실히 정하기로 했다. 고용노동부는 “3개월 동안 주당 평균 60시간 넘게 근무했으면 만성, 과로로 보고 산재로 승인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관련법 시행령을 그렇게 고려 입법 예고할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몇 시간을 일해야 ‘과로’인지 기준이 모호해 산재 판정이 오락가락했다. 야근에 시달리던 파출소장이 쓰러져도, 주당 100시간 근무를 버티던 대학병원 전공의의 심장이 멎어도 판정 싸움을 지루하게 끌어야 했다. 한국인 노동시간은 OECD 1등이지만 노동생산성은 평균에도 못 미친다.

만성피로증후군에 걸리면 능률이 오를 리 없다. 불황에 내쫓길까 봐 수당도 받지 않고 자발적 초과 근무를 하는 근로자가 많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피로는 가장 좋은 베개”라고 했다.

적당한 노동은 달콤한 감을 부른다. 반면 “너무 피곤한 말에겐 갈기도짐”이라는 말도 있다. 오죽하면 목덜미에 난 털이 무거울까! 고용노동부가 현행 9종의 직업성 암에 12종을 추가하고 직업성 암 유발물질도 14종에서 23종으로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산재보험법·근로기준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해 올해 상반기 중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982년 노동부 예규로 업무상 질병 기준을 규정한 지 30년 만에 크게 손질하는 셈이다. 그동안 산업재해 노동자의 피맺힌 호소와 노동계의 끈질긴 요구를 감안하면 반시지탄이지만 뒤늦게나마 정부가 산재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인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번 개선안에서 업무상 질병 기준을 계통별로 분류하고 직업성 암과 유해물질 범위를 확대한 점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다.

업무상 질병에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추가하고 호홉기계 질병 유발물질을 14종에서 33종으로 확대한 것 등도 진일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턱없는 기준에 의해 산재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이 외면당해온 현실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노동건강권은 개인의 권리이자 추가의 책임이다. 질병은 개인과 주변을 고통에 빠뜨릴 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암을 비롯한 질병을 유전이나 흡연, 식습관 등 개인적 원인으로만 치부하는 자세는 국가의 도리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질병은 화학물질과 작업환경, 스트레스 등 독립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의 건강은 사회, 국가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나경택회장
칭찬합시다운동본부

[나경택 기자 sunday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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